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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교구 성서40주간 – 요한복음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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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L NOCR – 카톨릭성경 요한복음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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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성경 입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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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가장 ‘신학’적이고 가장 ‘시’적인 요한 복음 – 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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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가장 '신학'적이고 가장 '시'적인 요한 복음 - 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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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약성경 요한 복음서 요약 내용입니다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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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약성경 요한 복음서 요약 내용입니다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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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 의한 복음서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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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요한에 의한 복음서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요한 복음서는 이러한 공동체 성장과정에 맞게 기록되었다. (1) 선교의 단계 최초의 요한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종교집단 ... 1. 개 요 저 자 오랜 전승에 의하면 네번째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중 하나였던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한다. 이를 첫번째로 언급한 이는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였는데 그는 180년경에 유명한 주교였었다. 이레네오의 이 언급은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이 언급이 사실인지에 대한 확인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 언급을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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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 의한 복음서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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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성경 요한복음 01장

1: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 또한 하느님이셨다.

1: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1: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1: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1: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1: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1: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

1: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1: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1: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1: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1: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다.”

1: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1: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1: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1: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1: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1: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1: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1: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다.’

1: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1: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 곳에 다시 서 있다가,

1: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1: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1: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1: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1: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1: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게파라고 불릴 것이다.” ‘게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1:43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 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1: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베싸이다 출신이었다.

1: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하고 말하였다.

1: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1: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1: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1: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1: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1: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석 성경 > 요한 복음서

주석 성경 > 요한 복음서

입문

1. 넷째 복음서

제4복음서 역시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큰 전통에 따라, 세례자 요한이 등장한 때부터 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날까지(사도 1,21-22) 일어난 일들을 전한다. 특히 이 작품은 하나의 ‘증언’으로 제시된다. 이 복음서의 저자 요한이 진정한 의미의 복음서를 저술하려고 하였음은 확실하다.1) 매우 장엄한 어조로 펼쳐지는 신학적 머리글에(1,1-18) 이어, 저자는 첫째 부분에서 서로 연관된 여러 사건과 가르침을 전하려고 애쓴다(1,19─12,50).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님 수난 때의 일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길게 이야기한다(13,1─21,25). 요한은 짤막한 맺음말에서 분명히 밝히듯(20,30-31), 특정 기적 또는 표징들을 가려내어 전하면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독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 이루어지는 자기들의 삶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이끌려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당시 그리스도교를 위협하는 여러 가지 탈선에 관해서도 입장을 표명해야만 하였다.

2. 구조

저자의 구상(構想)을 이보다 더 자세히 규명하고 세부 사항을 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이 복음서에 나오는 일화들은 대부분 그 앞뒤 경계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으로 그러한 일화들이 짜였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문제는 편집될 때에 어떤 단락들의 위치가 바뀌었으리라는 가설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까다로운 면을 지닌다. 예컨대 5장을 7,13과 7,14 사이에 넣는 것이 낫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 자료들의 지리적 배치가 일관성을 지니게 된다. 곧 예수님의 갈릴래아 체류에 이어 예루살렘에서 하신 긴 활동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것이다(4,43-54와 6,1─7,13). 어떤 학자들은 이 가설을 더욱 밀고 나아가, 수많은 본문의 위치가 편집 과정에서 변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 복음서의 이른바 원구상(原構想)을 과감히 재구성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을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서 본문의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 이 학설들에는 우리 현대인들의 논리적 요구에 항상 부합하지는 않는 옛날 사람들의 구전(口傳) 전승, 그리고 히브리 말의 저술에 적용되는 매우 유연한 법칙들이 고려되고 있지 않다. 현재 복음서에 제시된 본문의 맥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요한 복음서가 머리글에 이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더 나아가서, 지리적 또는 시간적 표지, 그리고 (이야기나 담화와 같은) 일정한 문학적 도식의 순환에 따라 여러 단락을 구분해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단락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문제이다. 어떤 학자들은 논리적으로 기획되어 있다고 여기고서는, (빛, 생명, 영광 같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이 질서 있게 전개되어 가는 단계들을 그려 내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대결의 단계들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여, 요한 복음서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큰 심판으로 마무리되는 일종의 드라마 또는 소송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주제에 따른 구상도 제시된다.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엄밀한 의미의 합리적 종합은 포기한다. 그 대신에 주제에 맞추어 리듬·선율·화음 등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형시켜 전체를 하나의 악곡으로 만드는 변주곡(變奏曲) 같은 형태의 구상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셈족 말로 쓰인 문학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곧 내용이 같거나 비슷한 말로 문단의 앞과 뒤를 묶는 문학 방식이 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또 이 복음서에서 쓰이는 수(數)의 비유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3과 7이라는 수에 바탕을 둔 구상을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끝으로, 어떤 학자들은 탈출기의 줄거리를 이루는 사건들의 전개를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복음서가 옛 유다교 회당 전례의 성경 봉독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모든 학설이나 가설은 시사하는 바가 많고 때로는 매우 정교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복음서 전체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우는 거의 없다. 요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구상 원칙을 따랐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또 그가 자기 작품의 저술을 완결 지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곧 넷째 복음서는 엄격한 원칙 없이 구성된 일련의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화들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따른다. 하나는, 일정한 양상에 따라 전개되는 예수님과 “세상”의 대결이다. 다른 하나는, 처음에는 갈릴래아, 그다음에는 특히 예루살렘에서, 믿는 이들의 깨달음이 어렵사리 진척되어 가는 과정이다.

3. 공관 복음서들과의 관계

요한은 전체적으로 복음서라는 문학 양식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책들, 곧 공관 복음서들과는 여러 관점에서 구분된다. 먼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장소와 시간상의 순서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오랫동안 갈릴래아에 머무르신다. 그다음, 공관 복음서마다 여행 기간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유다 지방으로 가시고, 끝으로 예루살렘에 잠깐 머무르신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와 달리, 이 지방 저 지방으로 자주 옮겨 다니시고,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 오래 체류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1,19-51; 2,13─3,36; 5,1-47; 7,14─20,31). 그리고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파스카 축일을 한 번만 지내시는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 축일을 여러 차례 곧 여러 해 지내신 것으로 언급된다(2,13; 5,1; 6,4; 11,55).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공생활이 공관 복음서와 달리 2년 이상 지속되었음을 시사하게 된다. 다른 점은 문체와 구성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짧은 말씀을 한데 모아 놓거나 간략한 말씀이 곁들여진 기적 이야기로 된 작은 단락들이 주를 이룬다. 반면에 요한은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들이나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표징 곧 기적들을 선별해서 다룬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사건이나 표징을 대담이나 설교로 길게 설명한다. 이렇게 해 나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는 매우 극적인 정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요한은 모든 복음서에 공통된 자료를 독자적으로 선택할 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자료를 이용한다는 사실로써도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구분된다. 물론 공관 복음서 전통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요한도 많이 이야기한다. 곧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요르단강에서 거행된 예수님의 세례와 첫 제자들의 소명(1,19-51),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일화(2,13-21), 고관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신 기적(4,43-54), 중풍 병자와(5,1-15) 눈먼 이를 고쳐 주신 기적(9,1-41), 호숫가에서 빵을 많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신 기적(6,1-21),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논쟁(7─8장과 10장), 베타니아에서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린 일화, 그리고 수난과 부활을 둘러싼 사건들의 전개(12─21장) 등이다. 그러나 공관 복음서 전통의 또 다른 요소들은 요한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곧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시는 유혹, 거룩한 변모, 성찬례 제정 이야기,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겪으신 고통, 그리고 여러 가지 기적 이야기, 또 (산상 설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비유와 종말론적 설교에 이르기까지) 그 밖의 많은 가르침을 이 넷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2) 요한이 사용하는 언어도 공관 복음서와 매우 다르다. 그는 공관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단 두 번만 사용한다(3,3.5). 그 대신에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야기하기를 즐겨 한다. 그리고 세상,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광 같은 주제를 좋아한다. 요한 복음서에는 공관 복음서 전통의 많은 요소가 나오지 않는 대신에 새로운 자료들이 적잖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카나의 혼인 잔치(2,1-11), 니코데모와의 대담(3,1-11), 사마리아의 어떤 부인과의 대화(4,5-42), 라자로의 부활과 그 뒷이야기(11,1-57),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13,1-19), 수난과 부활 이야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항 등이다. 그리고 사건을 길게 설명하는 설교나 대담도 주목을 끈다. 예컨대 최후의 만찬 뒤에 이어지는 마지막 대담은(13,31─17,26) 그 만찬을 넘어 교회의 시대를 준비하는 구실을 한다. 그렇다면 요한이 공관 복음서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이 다른 복음서들을 직접 알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요한은 주님과 관련된 여러 전통들만 알고 있었는데, 공관 복음서 저자들도 그 전통들을 바탕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 사이에 아주 명료한 문학적 접촉점들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이 마르코 복음서, 특히 루카 복음서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을 크게 높여 준다. 마태오 복음서와 관련해서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3) 아무튼 요한은 독자들이 공관 복음서의 큰 전통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은 바로 이 전통들을 나름대로 손질하는데, 자기보다 앞서 복음서를 저술한 저자들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더 자유롭게 그 일을 한다. 요한에게 충실성이란,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지는 구원 사건들을 일어난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깊이 있게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충실성은 이를테면 창조적인 것을 말한다.

4. 저술의 문제

이제 공관 복음서 전통들에 대한 이러한 독자성을 요한이 전혀 다른 사료들을 이용하였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지, 또는 요한 복음서라는 작품이 실제로 문학적 단일체를 이루는지, 단순히 여러 가지 문헌을 느슨하게 엮어 놓은 작품은 아닌지 등의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 복음서의 첫 편집이 무슨 말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람 말식 표현을 바탕으로 이 책이 본디 아람 말로 저술되었다가 그리스 말로 번역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은 그리스 말로 저술하는 저자가 이미 아람 말로 편집된 일부 단편들을 이용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음서 본문을 더욱 자세히 분석해 본 결과, 이제는 이러한 가설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 복음서는 한 번에 저술되었다. 곧 요한 복음서는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큰 호소력을 지닌 온전한 그리스 말로 직접 쓰였다. 이러한 그리스 말이 또한 이 복음서의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특히 이 복음서에서는 아람 말에 없는 용어와 언어유희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음서의 문체와 문학적 특색은 그것이 단일성을 지닌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리스 말로 저술하는 이 저자가 본디는 셈족 말을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구약 성경의 그리스 말 번역본 곧 칠십인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이 복음서의 많은 사항이 설명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한 특수 사료, 특히 기적 이야기 모음을 이용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도 공관 복음서 자료들처럼 매우 자유롭게 다룬다. 더 나아가서, 이 저자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쓰이는 전례문이나 설교의 단편까지 더러 이용한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머리글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적 층(層)은 바오로의 옥중 서간이나 사목 서간에 나오는 찬미가들을 상기시키는 어떤 노래에서 빌려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은 유다교 라삐들의 설교 원칙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5. 사상적 배경

모든 사상은 언어로 표현되고 그 문화적 배경과 결부된다. 사상은 또 이 문화적 배경의 관념과 생각을 반영하는 어휘와 범주를 이용한다. 독창적인 사상일 경우에는, 이러한 어휘와 범주를 새로이 조합하고 다른 데에서 빌려 온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말한다.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뿌리를, 이 복음서가 저술된 로마 제국 내의 근동 지방에 병존하던 여러 문화에서 찾아보는 일이 중요하다. 학자들이 제시하는 요한 복음서와 여러 문화의 접촉은 매우 다양하다. 먼저 헬레니즘의 영향이 주장되었다. 이어서 구약 성경과 유다인들의 여러 집단과의 관계가 점점 더 강조되고, 또 영지주의적(靈智主義的) 경향과의 관련도 제기되었다.

1) 헬레니즘

요한이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친숙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식이나 진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깊은 관심, “말씀” 곧 그리스 말로 로고스라는 칭호의 사용, 특히 우의(寓意)의 이용 등이 이 방향으로 연구해 가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기원후 1세기 초엽에 유다인들의 종교적 유산을 헬레니즘화하려는 시도를 크게 벌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필론의 작품에서 (매우 막연하기는 하지만) 로고스의 개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요한 복음서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신빙성 있게 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필론의 사상이 팔레스티나 밖에 곧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다인들의 다양한 집단에 널리 유포되어 학문과 생활의 한 양식(樣式)을 탄생시켰을 개연성이 있다. 요한도 이러한 양식을 따르는 한두 개의 단체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론과 요한의 전체적 시각은 명백히 다르다. 요한에게서는 어떠한 인식의 단계도 철학적 학문과 숙고를 ‘존재’ 그 자체 곧 하느님을 관조하는 데에까지 끌어올리지 않는다. 그에게 본질적인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신앙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필론과 요한이 똑같은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그 의미가 각각 다르다. 그래서 요한의 로고스는 필론에게서처럼 하느님과 우주 사이에 자리 잡은 중간 피조물이 아니시다. 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곧 선재(先在)하시는 “아드님”, “아버지”의 행위와 완전히 결합되신 분이시다.

2) 유다교의 영향

제4복음서의 구약 성경·유다교적 뿌리는 일찍부터 밝혀졌다. 우선 요한의 글에 셈족 말 곧 히브리 말 또는 아람 말식 표현이 많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복음서가 본디 아람 말로 저술되었다는 가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 밖에, 요한이 구약 성경을 기억에 따라 이용한다는 사실이 이 복음서가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요한이 구약 성경을 분명한 방식으로 인용하는 일은 드물지만, 구약과 신약을 명확히 구분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구약 성경의 여러 표현 방식과 특히 지혜 문학의 여러 주제를 이용한다. 곧 물, 천상 양식과 만나, 목자, 포도나무, 성전 등이다. 이는 요한이 이러한 주제들과 그 변형들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개성 있게 또 독창적으로 이용할 줄도 알았음을 뜻한다. 학자들은 또 이 복음서 저자와 당시의 유다교 사이의 접촉점(이론의 전개 유형, 저술 방식, 라삐들의 세계에서 이용되던 어휘 등)을 확인해 내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유다교 전례를 시사하거나 또는 그것에서 빌려 온 요소들을 밝혀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확실한 사실은, 요한이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 유다교 사고방식의 관례와 관습에 정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둘 사이의 분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9,22; 12,42 참조). 유다인들의 율법 지상주의나 전례 지상주의와는 거리가 먼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새 세상의 새로움과 초월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20세기 중엽 사해 부근에서 발견된 쿰란 문헌들도 제4복음서와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유다인들의 특정 세계를 알게 해 주었다. 이 복음서와 쿰란 두 군데에서 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의 대립으로 표현되는 이원론(二元論), 곧 그동안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아 왔던 이원론이 지적되었다. 또 양쪽에서 다, 그 추종자들이 자기들의 공동체와 함께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여 구약 성경의 특정 구절에 담긴 의미를 밝혀내려고 애를 썼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그리고 두 군데에서 다, “스승”에게 큰 중요성이 부여되고, “진리의 영” 또는 “보호자”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와 요한 복음서의 공동체 사이에는 이러한 공통점보다 오히려 다른 점이 더 많다. 우선 서로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요한은 쿰란의 일부 문헌들에서 볼 수 있는 묵시 문학적 사고방식이라든가, 쿰란 공동체에서 보게 되는 병적인 율법 지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의 역할도 이 분파(分派)의 ‘정의의 스승’이나 두 메시아와 상당히 다르다. 물론 표현 방식이라든가 관념의 공통점은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향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3) 영지주의

200여 년 전부터 요한 복음서를 여러 영지주의적 경향과의 관계 속에 자리매김을 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리스 말로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지(靈智)는 일반적으로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제시된다. 이 가르침에 입문한 자들은 일정한 정화(淨化) 과정을 거친 뒤, 종교적으로 중대한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또는 황홀경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지주의 세계에서는 이 교리 때문에 물질적 또는 육적 실체들을 ‘악’(惡) 그 자체로 여기고 그러한 것들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러한 영지주의적 경향들을 기원후 1세기 이후의 문헌들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문헌들은 다소간 근동의 영향을 받은 헬레니즘의 배경, 또는 그리스도교의 배경 안에서 저술되었다. 어떤 영지주의 전통들은 기원후 1세기 이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요한 복음서와 이 사상의 접촉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사료가 별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있는 것들도 상대적으로 후대의 작품들이어서,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학문적인 근거 없이 추측으로만 해답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또 상당히 후대의 저술들을 바탕으로, 기원후 1세기에 대부분의 종교 세계가 거대한 영지주의적 체계에 둘러싸였다고 가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고려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주로 기원후 2-3세기, 일부는 그 이전에 이집트에서 그리스 말로 저술된 특정 경향의 철학적-종교적 문헌집인 ‘헤르메스 전집’(Corpus hermeticum)의 특징적인 책 몇 권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제1권과 제13권이 상당히 단일한 이론 체계를 제시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신적’ 또는 ‘원초적’ 인간이 타락하여 물질 속에 빠진다. 그에 따라 행성들을 지배하면서, 파멸을 불러오는 대기권들을 가로질러 그 인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여러 조건과 단계가 서술된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신비스러운 존재, ‘빛’과 ‘생명’의 근원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인간의 참생명은 직접적이고 또 참행복을 가져다주는 인식을 통하여 이러한 하느님께 다다르는 데에 있다고 한다. 이 책들과 요한 복음서 사이의 문학적 종속성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종속성이 성립된다고 할 경우, 어느 쪽이 출전인가, 곧 어느 쪽이 어느 쪽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가도 난제이다.4) 아무튼 이 둘의 일부 관념과 표현 방식이 공통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사상의 흐름이 마주치고 대립하는 복합적인 세계에서 교육을 받은 요한은 사람들이 받아 누릴 수 있는 신적 생명과 인식 사이의 관계를 더욱 돋보이게 하도록 자극과 격려를 받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대처한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그의 믿음이 형이상학적 비관주의를 배제하고, 영원하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사실이 육체와 인간적 조건에 영지주의적 사변(思辨)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4) 요한의 독창성

이렇게 요한 복음서를 여러 가지 사조(思潮)에 상세하고 면밀히 접근시켜 보았지만, 요한이 그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를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채택하였다고 집어내지는 못하였다. 요한이 당시의 큰 철학적-종교적 흐름들이 합류하는 지역에 산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지역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스적 사상과 근동의 신비주의가 만나고, 유다교 자체도 바뀌어서 외부의 여러 영향에 개방적이었던 대도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보여 주는 사상의 뿌리 깊은 독창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독창성은 우선적으로 요한이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이나 그 말씀과 관련된다. 요한은 또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창건된 일련의 사건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처음으로 신학 작업을 할 때에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요한은 그 혜택도 입었다고 본다. 학자들은 바오로, 특히 그의 옥중 서간들, 또 교회 전통에서 에페소와 관련되는 문헌들과 많은 접촉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요한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여러 전례문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은 이렇게 당시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랜 묵상 끝에 자기가 터득하고 또 높이 평가하게 된 여러 사조에 대하여 완벽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매우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취합하여,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20,31) 예수님의 실체와 역할이라는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한 관점에 따라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다.

6. 제4복음서와 역사

제4복음서가 지니는 역사성의 문제는 19세기 초엽부터 대두된다. 요한의 작품을 공관 복음서들과 구분 짓게 하는 많은 특수 사항에 여러 주석가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복음서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곧 요한 복음서에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신학적 성격이 역사와는 다른 관념에 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상징들을 많이 이용한다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언행, 곧 첫눈에 파악되는 현상 너머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은 제4복음서가 사실 기록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단호한 판단을 내린다. 그들은 이 복음서를 하나의 묵상 또는 ‘신학적 명제’로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공관 복음서의 저술 방식과 의도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해 새로이 반성하고, 또 요한의 자료들을 더욱 차분히 연구한 결과,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예전의 양자택일을 버리게 되었다. 요한 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해답이 전에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라는 뜻이다. 우선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을 요한도 전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 여러 기적, 그 가운데에서도 빵의 기적이 특히 이러한 부분에 속한다(1,19-51; 2,13-21; 6,1-21).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도 전체적으로 마찬가지다(12─21장). 요한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의 해당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요한 역시 교회 전통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러 사항과 관련해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독창적 요소들이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곧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유다 지방이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관계되는 사항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은 기원후 66-72년에 벌어진 유다 독립 전쟁 이후에는 없어져, 요한 복음서와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것들이다. 이로써 요한이 자기의 작품을 예수님 역사의 실제적 상황과 관련지으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서는 단순히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신학적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복음서는 특정한 때에(2,20 참조) 사셨고 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요한은 이분에 대한 전통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저자는 자신을 사실의 목격자 곧 증인으로 여긴다.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증인으로 인정을 받는다(19,35; 21,24). 여기에는 이 증인이 직접 보아서 알고 있고 또 자기도 직접 관여한 사실 내지 진실을 증언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내용을 주제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저자는 말한다(1,14). 이러한 강생(降生)과 강생하신 분의 “영광”은 단순한 역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복음서가 전하는 사실들의 역사적 실체가 지니는 비길 데 없는 중요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한은 예수님과 더불어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밝힌다. 그의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 가운데에서 선택된 일련의 표징들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제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20,30-31; 21,25). 복음서 저자는 또한 자기의 이러한 작업을 성경의 큰 전통 속에서 수행한다. 곧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역사 안에서 하시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한 단계 한 단계 서술해 나아가는 전통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항상 사건이 로고스 곧 ‘말씀’보다 우선한다고 여겼던 것이다.5) 복음서 저자는 사건을 일어난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건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9,1-41 참조). 곧 믿는 이들이 더 잘 깨달아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그 의미의 넓이와 깊이를 파악해야 한다. 표징들을 이야기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그리고 요한은 이러한 점진적 의미를 파스카의 신비에 따라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물론 그분의 아주 하찮은 행동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충만한 영광 속으로 건너가셔야 비로소 그 깊은 뜻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파스카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7,39; 16,7; 20,22) 진리의 성령께서도 내려오셔야 한다. 이 성령께서 믿는 이들이 모든 진리를 깨닫도록,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실체와 행적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신다(16,5-15). 이를 심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요한의 ‘기억 개선’(記憶改善)이라고 할 수 있다.6) 곧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던 예수님의 역사를 이제 충분한 이해와 함께 복원하는 것이다(2,21-22; 12,16; 14,26; 15,26-27). 이러한 이해는 또 그리스도교의 큰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들을(이 일들 안에서 그 참된 의미가 발견되는) 구약 성경의 예언적 사건이나 말씀과 관련지음으로써 얻어진다(2,17; 5,37-47; 7,17; 12,16.37-41; 19,24.28.36-37).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실체들이 완전히 새롭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는 이러한 실체들을 전형적인 그리스도교의 도식에 따라 표현해 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요한 복음서에서 매우 역사적인 진행 방식을 보게 된다. 물론 이는 사실을 정확히 서술할 뿐 그것을 구원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 배치하여 그 의미를 밝혀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실증주의적 역사가들의 진행 방식이나 요구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의 ‘역사’를 현대식으로 ‘복음 선포적 역사’ 또는 ‘질적(質的) 역사’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이미 옛날부터 이 복음서를 ‘영적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이렇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행적을 깊이 이해하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분의 역사를 상징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씀이 여러 차원의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그 언행이 늘 그 자체 너머의 다른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하여 “표징”이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이 개념에는 어떠한 일이나 말씀이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는 뜻도 들어 있다(3,14-15; 8,28; 12,32). 저자는 또한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하는 말이 본디 의도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즐겨 지적한다(7,52; 9,24-27; 11,49-50; 12,19; 16,30; 19,18-22). 이리하여 성령의 도움으로만 본문이 의도한 바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7. 저자

이렇게 살펴본 결과, 요한 복음서는 단순한 목격자의 증언도 아니고, 또 일이 일어난 직후 단숨에 기록된 책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그 반대로 긴 성숙 기간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미완성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연결 부분들은 매끄럽지 못하고, 어떤 단편들은 문맥과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1,15; 3,13-21.31-36). 이 모든 것은 마치 저자가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전개된다. 여러 단락이 순서가 없어 보이는 것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요한 복음서는 저자 자신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마무리를 하여 책으로 냈을 가능성이 있다. 바로 이들이 21장만이 아니라 몇몇 설명까지도 분명 덧붙였을 것이다(4,2가 그러하고, 4,1; 4,44; 7,39ㄴ; 11,2; 19,35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간음한 여자 이야기에(7,53─8,11) 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가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곧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모르는 이 이야기가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다가, 나중에 요한 복음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이 단락도 경전에 속한 것으로 인정된다). 저자와 저작 시기에 관하여 이 복음서에서 직접 언급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부러 그러하였을 수도 있다. 이 복음서를 읽는 이들의 주의가 증인이 아니라, 이 증인이 선포하고 또 묵상하는 분께만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8; 3,29; 4,41). 그럼에도 첨가분인 21,24에서는 저자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서슴없이 밝힌다. 그리고 이 제자는 파스카 사건들이 벌어지는 과정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다(13,23; 19,26; 20,2). 그는 다른 여러 본문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다른 제자”라고만 하는 사람일 것이다(1,35-39; 18,15). 기원후 2세기부터 교회의 여러 전통에서는 이 저자를 요한이라 하고,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14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가 남긴 작품의 단편을 고려하면 약간 주저하게 된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요한만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와 ‘원로’라는 칭호로 불리는 또 다른 요한도 저자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피아스가 여러 사람을 거명하는 의도가 그들이 저술한 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에 있기 때문에, 그가 이 ‘원로 요한’을 복음서의 저자로 말하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2세기 말엽에 이레네오는 이렇게 밝힌다. “그다음, 주님의 제자인 요한, 주님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던 바로 그 사람도 에페소에 머무르는 동안 복음서를 출간하였다.” “요한과 주님의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곤 했던”(에우세비우스, 교회사, V, 20,6-8) 폴리카르포의 제자로 자처하는 이레네오에게, 이 요한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인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는 더러 주저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경전으로 여기는 저술들을 사도들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특히 제4복음서와 관련해서는 의견이 거의 일치됨을 확인할 수 있는데, (‘무라토리 경전’이라고 불리는 아주 오래된 문헌의 단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 등) 모든 저술가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요한의 역할을 확실한 사실로 이야기한다. 다만 카이우스라는 사제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한 작은 집단만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이들이 교회의 전통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초, 공관 복음서들과의 상이성과 신학적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제4복음서의 저자를 요한 사도로 여기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를 문제 삼는다. 그들은 저자가 목격 증인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그의 작품도 아무런 역사적 가치를 지닐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저자를 2세기 중엽, 베드로와 바오로에게서 유래하는 여러 전통을 이를테면 종합해 낸 신학자로 보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처음에 날카로웠다. 요한이 직접 복음서를 저술하였다는 친저성(親著性) 문제와 이 복음서가 전하는 증언의 권위 문제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복음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여기는 것을 거의 신앙과 직결된 문제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더 잘 구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 고찰의 발달, 그 방법론의 발전 덕분에 이제는 예전의 양자택일이 의미가 없음도 알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이집트에서 발견된 제4복음서 단편의(18,31.33.37-38) 출판을 들 수 있다.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들은 이 단편이 110년에서 13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한다. 이로써 성서학자들은 전통적 견해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곧 요한 복음서는 1세기 말경에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저술 또는 출간 장소는 그리스화 한 아시아의 어떤 교회, 특히 에페소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요한 사도가 이 복음서를 편집하였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일부는 아예 저자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 대신에 1세기 말엽, 유다 세계와 그리스화한 근동의 다양한 사조들이 마주치던 소아시아 어떤 교회의, 그리스 말을 쓰던 그리스도인 저술가라고 길게 서술한다. 어떤 학자들은 파피아스가 말한 ‘원로 요한’을 생각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자신을 요한 사도와 연결 짓는 전통을 따른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게 부여된 우월한 위치가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자는 다시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동일시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이상하게도 주요 사도들 가운데에서 한 번도 직접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 사도가 실제 저자와 직접적으로, 또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되고 독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 이름을 직접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리라는 것이다.

8. 신학

여기에서 요한의 신학적 사상을 구체적으로 종합하여 살펴볼 수는 없다. 요한은 성경의 큰 전통에 따라, 어떤 신학 체계가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자료를 체계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근본 원칙을 내놓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께만 집중된다. 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통교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신자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 모시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조건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방향만 지적하기로 한다. 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선재-강생’(先在-降生)의 도식은 물론 이 제4복음서에만 나오는 고유한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도, 특히 필리 2,6-11의 찬미가와 콜로 1,15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대비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도식이 쓰인다. 이와 달리 요한은 더욱 폭넓은, 결국 더욱 전통적인 시각을 지닌다. 그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곧 그분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과 그분께서 하신 많은 말씀을) 고찰하면서, 그것이 시간 속에 펼쳐지는 사실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그래서 이 복음서에서는 ‘시간’이라는 주제가 중요성을 띤다). 수난과 부활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예수님 생애의 제반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이 이루어진다(그래서 ‘영광’이라는 주제도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는 세상에 그대로 주어지지 못한다. 세상이 그것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세상은 자기 안에 계시는 더없이 위대하신 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끝나는 대립을 상기시킨다. 세상은 자기가 철저히 왜곡한 분을 눌러 승리하였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시간’에, 곧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그 ‘때’에, 자기가 거꾸로 심판을 받고 단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창조 이전부터 선재(先在)하신 상태를 서술하지도 않는다. 또 예컨대 성자께서 당신의 사명을 부여받으신 천상 대화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요한 복음서는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믿음과 성령의 은총으로 깨달음을 더해 가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로 예수님이라는 존재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성경공부] 가장 ‘신학’적이고 가장 ‘시’적인 요한 복음

마르코와 요한의 복음서-6

사진출처=metmuseum.org

마르코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마르코는 제일 먼저, 요한은 제일 나중(A.D. 90~100경)에 기록되었으므로 예수의 삶과 메시지에 대한 묵상이 한 세대 정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요한의 목적은 그가 요한 복음서 말미에 분명히 기술했듯이 마르코의 의도와 비슷하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1)

요한의 도전: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르코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친다. 그는 독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키워나가고 그 믿음을 통해 아버지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있다. 복음사가는 미래역사를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일어난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기가 주님과 맺은 관계, 그분으로부터 자기 삶을 이끌어낸 관계를 전달하려고 한다.

요한은 종종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서 아주 정교한 문학적 대화형식으로 쓰여진 시리즈를 통해 이 관계를 설명한다. 이 대화들은 요한이 예수께서 당신의 생전에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서 쓴 것이 아니라 기도 중에 일어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종종 아주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목수라기 보다는 헬레니즘 문화에서 자란 교육받은 유대인 같은 인상이다. 이런점으로 미루어 이 복음서가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인 요한이 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는 헬레니즘 철학자가 아니라 갈릴래아 어부 였다.(이 요한이 요한 묵시록을 쓴 것 같다. 이 묵시록은 아주 다르고 매우 유대식이다.)

그러나 고대 전통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그리스 근처의 에페소에서 자기 주위에 공동체를 모았다. 아마도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마지막 저자가 요한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 해도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의 정당성을 인정했을 가능성은 높다. 복음서의 최종 저자가 그 전체적인 틀을 형성한 것은 사랑 받는 제자 요한사도 학파의 영향이었다.

징표의 책: 주권의 징표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 복음서는 독특하게 아름다운 서론으로 시작한다: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한 1,1-5)

18절까지 계속되는 이 서언은 요한 공동체에서 전례예식 때 부르던 찬송가일 것이다. 이 노래는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그들의 생각을 요약한 신학적 시(詩)이다: 그분은 세상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 말씀이시다; 그분은 살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 그분은 육화 하신 거룩한 빛이시며 사랑이시다.

요한은 서문에서 천지창조 때에 계신 말씀이신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우리에게 7일 동안의 새로운 창조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한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이제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며, 공생활을 시작하는 첫째 주간에 예수님은 그와 아버지(하느님)를 믿도록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분의 주위에 공동체를 형성한다.

요한 복음서는 묘사하고 있는 사건을 자신이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표현하며, 독자들이 기도와 봉사를 통해 그와 같이 깊은 이해를 할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 상징주의 표현으로 가득 찼다. 이런 이유로 요한이 4복음서 중에서는 많은 점에서 가장 신학적이며 가장 역사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창조 첫째 날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 소개된다; 둘째 날에 세례자 요한은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아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 29)라고 말한다. 다른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런 말들을 쓰지 않는데 (요한)복음사가는 두 가지 생각을 소개하려고 이들을 사용한다: 즉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보잘 것 없는 고통받는 종이며(이사야 53,6-7), 예수님은 인간을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희생된 빠스카의 어린양(출애굽 12,1-14)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서의 거의 모든 문장은 묵상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인 것을 담고 있다.

셋째, 넷째 날에, 예수께서는 최초의 제자를 만나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신다. 표현 방법은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며,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는 똑같은 주제이다.

요한은 나머지 12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만들게 하여, 주말에는 제자들이 모두 그분과 함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곱째 날에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사명의 징표이고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그분이 갖고 오시는 구원의 상징이므로 항상 “징표”라고 일컬어진다. 성서학자들은 요한 복음서 전반부 12장에 모든 기적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징표의 책이라고 한다. 이런 징표들은 어떤 사람들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고, 다른이들은 여전히 믿지 못한 채로 있는다. 복음서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징표를 보이지 않으시고 이미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 방식에 대해 가르치신다.

이 복음서의 또 다른 특징은 믿지 않는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예수님과 유대인사이의 대립이 심해서 복음서가 마치 반유대주의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나 그를 믿는 모든이들도 모두 유대인임을 안다. 그러면 과연 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유대인은 누구인가?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과 유대인사이에 반목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은 항상 믿지 않는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유대인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고집 센 불신을 상징한다. 그들은 주님을 거부함을 상징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다른 유대인들 손에 고통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그들 모두 유대인!)을 박해한 독선을 상징한다.

믿지 않는 유대인과 그 지도자들, 바리사이인들도 의식주의적인 종교를 상징한다. 요한과 그의 공동체에게 종교기관의 공허한 형식주의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오는 충만한 생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복음서에 흐르는 대 주제 중의 하나는 종교와 관계, 생명력 없는 종교적인 행위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서로 다른 점이다. 요한에게 죽은 종교의 상징은 유다이즘과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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