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을 숙성시키는 큰 오크통들. 사진 김상미
유럽의 와인 역사는 3000년이 넘는다. 이렇게 긴 세월을 인간과 함께한 와인 중에는 흥미진진한 시대적 배경을 담은 것들이 꽤 있다. 프랑스 남부에서 생산되는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도 그런 와인이다. 샤토네프 뒤 파프는 마을 이름이자 와인 이름이다. 이 와인은 중세가 끝나가고 근세가 태동하던 시점에 탄생했다.
14세기 초 ‘교황의 아비뇽 유수’라는 사건이 벌어졌다.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주의 세력이 점점 커졌다. 특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힘이 막강했는데, 그는 전쟁 준비와 왕권 강화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했다. 그가 주목한 곳은 교회였다. 영주나 백성으로부터는 더 나올 돈이 없었지만, 교회는 헌금이 쌓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세금 한 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리프 4세가 교회 과세를 시도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격노해 그를 파문하려 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오히려 선수를 쳐 교황을 납치 감금했다. 노쇠한 교황이 충격으로 얼마 못 가 사망하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추대했고 1309년에는 교황청까지 아비뇽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것이 이후 70년간 이어진 아비뇽 유수의 시작이었다.
1378년에야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교황이 사망하자 로마는 기다렸다는 듯 새 교황을 이탈리아인 중에서 뽑았고, 이에 반발한 프랑스는 프랑스 출신 교황을 다시 뽑아 아비뇽에 앉혔다. 교황이 두 명이 된 것이다. 백년전쟁, 흑사병, 오스만 제국의 침략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정신적으로 기댈 교회마저 갈라지니 민생은 참혹 그 자체였다.
1449년 콘클라베에서 교황을 선출하기로 하면서 분열은 봉합됐지만, 대중의 신앙심은 예전 같지 않았다. 교황은 돈을 쏟아부어 거대한 성당과 멋진 예술품으로 권위를 과시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다. 1453년 결국 오스만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은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로 접어들었다.
아비뇽의 옛 교황청. 사진 김상미
돌과 바람과 그르나슈가 만든 예술
아비뇽 유수 동안 교황은 일곱 번 바뀌었다.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와인 애호가였다. 그중에서도 요한 22세는 포도 재배에까지 관여할 정도로 와인을 좋아했다. 그는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약 20㎞ 떨어진 작은 마을에 여름 궁전을 짓고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이곳이 바로 샤토네프 뒤 파프(불어로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다.
샤토네프 뒤 파프의 땅은 돌투성이다. 흙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작은 돌이 가득하다. 이런 땅에서 곡물을 생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포도만은 예외다. 돌은 포도 재배에 큰 도움을 준다. 한낮의 태양열을 머금었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온기를 내뿜어 완숙을 돕는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돌이 과연 어디서 온 걸까. 현지 와인 생산자에게 물으니 빙하기 때 알프스에서 빙하가 내려오며 실어 왔다고 한다.
샤토네프 뒤 파프에는 바람도 많이 분다. 사흘에 한 번꼴로 미스트랄(mistral)이라는 바람이 부는데 평균 시속 100㎞에 이르는 강풍이다. 이 바람이 습기를 말려주니 곰팡이성 질병에 대한 걱정이 적어 유기농으로 포도를 기르기에 무척 유리하다.
샤토네프 뒤 파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은 그르나슈(Grenache)다. 그르나슈는 향이 풍부하고 질감이 부드러운 레드 와인을 생산하지만 익는 데 많은 열기가 필요하다. 햇볕이 강렬하고 돌이 많은 샤토네프 뒤 파프는 그르나슈를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래서 이곳의 그르나슈는 장수를 누린다. 어떤 것은 수령이 100년이 넘는다. 고목은 나무당 포도 생산량이 극히 적지만 향미의 응축도는 탁월하다. 어린나무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그르나슈는 고목의 자태도 예술이다. 유난히 뒤틀린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이는 강풍에 꺾이지 않도록 키를 최대한 낮춰 땅에 가깝게 기르기 때문이다. 잎이 다 떨어진 한겨울에 포도밭을 보면 그르나슈가 마치 군무를 추는 것처럼 보인다. 명화 속 풍경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돌과 바람과 그르나슈가 만든 명품 와인이 샤토네프 뒤 파프다.
13개 품종 섞인 다양한 맛
샤토네프 뒤 파프는 주 품종인 그르나슈를 포함해 최대 13가지 품종을 섞어 만든다. 그르나슈가 풍부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질감을 책임진다면, 시라(Syrah)와 무르베드르(Mourvedre)는 강한 타닌으로 구조감을 부여한다. 다른 품종들도 와인에 향신료와 꽃 등 복합미를 더한다. 품종별 비율이 정해진 바 없어 와인 메이커마다 자유롭게 블렌딩해 만드니 샤토네프 뒤 파프야말로 다양한 스타일의 극치를 보여주는 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호가들이 새로운 샤토네프 뒤 파프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꼭 마셔봐야 할 샤토네프 뒤 파프는 어떤 것이 있을까? 블렌딩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샤토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과 샤토 라 네르트(Chateau La Nerthe)가 있다. 샤토 드 보카스텔은 13가지 품종을 모두 섞어 와인을 만든다. 그르나슈 못지않게 무르베드르가 많이 섞이는데, 무르베드르는 타닌이 많아 보카스텔의 참맛을 맛보려면 10년 이상 병 숙성이 필요하다. 만약 일찍 열어야 한다면 마시기 2~3시간 전에 디캔터(와인의 맛을 살리기 위해 따라 옮기는 아래로 퍼진 호리병 모양의 용기)로 옮겨 향이 충분히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 좋다. 샤토 라 네르트는 샤토네프 뒤 파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중 하나로 역사가 무려 15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와인에는 그르나슈가 약 55%, 시라와 무르베드르가 30%, 기타 품종이 15% 섞여 있다. 그르나슈의 비율이 높아 보카스텔보다는 어릴 때 즐길 수 있지만 1~2시간 정도 디캔팅해서 마시면 더욱 풍성한 향미를 즐길 수 있다. 그르나슈 비율이 80~90%로 높은 샤토네프 뒤 파프는 복합미는 덜할 수 있지만 병 숙성 없이 어릴 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돌투성이 땅, 강렬한 햇볕, 거센 바람을 이겨낸 샤토네프 뒤 파프는 근세로 들어서며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련을 닮았다. 특별한 날 소중한 사람과 함께할 때 샤토네프 뒤 파프를 나눠 보면 어떨까. 와인의 역사적 의미와 풍부한 아로마가 자리를 더욱더 향기롭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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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s://i.pinimg.com/originals/7d/c2/f0/7dc2f098a9d1a621241c9bb08d70d6d8.jpg)
1. 개요
샤토네프 뒤 빠프(Chateauneuf du Pape) AOC는 프랑스 남동부의 남부 론(Southern Rhone) 지역에 있는 샤토네프 뒤 빠프 마을과 주변의 와인 생산지입니다. 남부 론의 와인 생산지 중에선 가장 명성이 높은 곳으로 샤토네프 뒤 빠프 뿐만 아니라 아비뇽(Avignon)과 오랑쥬(Orange) 사이의 베다리드(Bédarrides), 꼬르테죵(Courthézon), 소귀(Sorgues) 마을의 포도로도 만듭니다. 포도밭 면적은 3,200헥타르 이상이며 매년 11만 헥토리터의 와인을 생산하죠. 이는 북부 론 전체의 와인 생산량을 능가하는 엄청난 수치입니다.
2. 역사
“교황의 새로운 성” 정도로 번역되는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의 역사는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라는 역사적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세워서 제3계급인 평민에 대한 과세를 늘리려는 한편 교회에 대한 과세를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로마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려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충돌하게 되었죠.
교황이 필리프 4세에 대한 파문을 준비하는 사이 필리프 4세는 군대를 보내 로마 남동쪽의 작은 시골 마을인 아나니에서 교황을 납치해서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탈리아 귀족들이 급히 교황을 구출했지만, 80세를 넘긴 고령인 보니파시오 8세는 충격으로 선종하고 맙니다. 이후 교황권은 급격히 쇠퇴해서 보니파시오 8세의 뒤를 이은 베네딕토 11세도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하게 되었죠.
이어진 1305년의 콘클라베(Conclave)에서 필리프 4세의 강한 압력 아래 보르도 대주교(Archbishop)였던 클레멘스 5세(Clement V)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교황권에 대한 필리프 4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새 교황의 즉위식이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용(Lyon)에서 열렸고, 추기경도 대부분 프랑스인이 뽑혔습니다.
1309년 필리프 4세가 위험한 로마 교황청보다 안전한 남부 론의 아비뇽((Avignon)) 주교관에 거주하라며 교황을 압박하자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깁니다. 당시 아비뇽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지만, 강 하나를 건너서 프랑스 땅과 맞닿아 있었던 만큼 프랑스의 입김이 매우 강하게 미치는 곳이었죠. 이후 1377년까지 일곱 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고 지냈던 시기를 고대 바빌론 유수에 비유하여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라고 합니다. 이는 중세 교황권의 몰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죠.
(아비뇽 교황청.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b/Avignon%2C_Palais_des_Papes_by_JM_Rosier.jpg/1024px-Avignon%2C_Palais_des_Papes_by_JM_Rosier.jpg)
샤토네프 뒤 빠프는 “아비뇽 교황들(Avignon Popes)”의 지시로 탄생했습니다.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대규모 사제단도 함께 이주하게 되었고, 론강 일대가 새로운 대규모 와인 소비지로 떠오릅니다. 영성체(領聖體) 행사에 와인을 쓰기도 했지만, 사제단이 모두 와인을 즐겼기 때문이죠.
원래 교황들과 사제단이 푹 빠졌던 와인은 당시에는 본(Beaune) 와인으로 부르던 부르고뉴 와인이었습니다. 열렬한 부르고뉴 와인 애호가였던 교황들은 뜻하지 않게 부르고뉴 와인의 마케터 역할도 했습니다. 높으신 분들이 즐기는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아랫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사제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본 와인을 마시지 못할까 봐 걱정한 나머지 로마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아비뇽 마을 주변에서도 와인을 생산했지만, 걸출한 와인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고급 와인을 원하는 사제단의 욕구를 진정시키고, 부르고뉴 와인 못지않지만 좀 더 값싼 와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비뇽 주변에서 부르고뉴 와인처럼 뛰어난 와인을 만들려고 했죠. 교황청 옆에 포도를 심도록 명령을 내린 교황이 클레멘스 5세인지, 아니면 이후의 교황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론강 일대에서 포도밭은 빠르게 늘어났고, 와인 품질도 날로 좋아졌습니다.
와인 생산지 중에서 아비뇽 북쪽으로 5~10km 떨어진 론강 유역의 포도밭들이 특히 시선을 끌었습니다. 이곳은 아비뇽 교황청이 생기기 전에 아비뇽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관리되던 곳이었죠. 생산된 와인은 주로 지역 사회에서 소비되었습니다.
(요하네스 22세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0/Jean_XXII_1316.JPG/1200px-Jean_XXII_1316.JPG)
클레멘스 5세를 이은 요하네스 22세(Ioannes XXII) 역시 부르고뉴 와인을 사랑했지만, 아비뇽 북부의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고 그곳의 와인 품질을 끌어올리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요하네스 22세 당시부터 샤토네프 뒤 빠프 지역의 와인은 “뱅 드 빠프(Vin de Pape)” 즉, 교황의 와인으로 불렸고, 훗날 “샤토네프 뒤 빠프”로 명칭이 바뀝니다.
아비뇽에서 교황이 떠난 후에도 샤토네프 뒤 빠프와 부르고뉴 와인의 관계는 근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는 벌크 상태의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이 부르고뉴로 많이 판매되었습니다. 이 와인들은 뱅 드 메시느(vin de médecine), 즉 의학용 와인으로 팔린 것이라는데, 정작 의학용보다는 부르고뉴 와인의 알코올 도수와 강도를 증강하려고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AOC 법이 제정되어 지역 단위로 와인 품질을 통제하면서 사라집니다.
18세기에 이곳의 와인은 “뱅 다비뇽(Vin d’Avignon)”이라는 브랜드로 주변에 판매됩니다. 19세기 초반의 기록을 살펴보면 “샤토네프 뒤 빠프 카세르니에르(Châteauneuf-du-Pape-Calcernier)”라는 와인이 보이는데, 오늘날의 샤토페느 뒤 빠프보다 가벼운 형태의 와인으로 보입니다. 이 와인은 1870년대에 해충인 필록세라가 프랑스 전역의 포도밭을 강타할 때까지 점점 평판이 높아가고 있었죠.
20세기 초반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은 와인 생산지를 속여서 파는 와인 사기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에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의 생산과 보호를 위한 다양한 법률이 강구되었고, 1923년 관련 법률이 공표되면서 샤토네프 뒤 빠프는 프랑스 최초로 지역 명칭으로 관리받는 와인 생산지가 됩니다. 이때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을 위해 만든 규정들이 나중에 지역 명칭 통제법, 즉 AOC 법의 원형이 되죠.
샤토네프 뒤 빠프를 위한 최초의 AOC 규정을 만들 때 참여했던 주요 인물로 샤토 포르티아(Château Fortia)의 삐에르 르 로아 남작(Baron Pierre le Roy)이 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입안된 AOC 규정에는 샤토네프 뒤 빠프 지역에서 재배할 수 있는 포도 종류뿐만 아니라 포도밭의 수확량과 와인의 최소 알코올 도수까지 세세히 정해져 있었습니다. 처음엔 샤토네프 뒤 빠프 레드 와인을 만들 때 열 가지 포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 숫자는 1936년에 13종으로 개정되었고, 2009년에는 18종으로 늘어납니다.
샤토페프 뒤 빠프의 와인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포도밭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거로 유명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1954년에 마을 안에서 비행접시(비행기가 아니라)의 비행과 착륙, 이륙을 금지하는 지방 조례를 통과시킬 정도죠. 2007년 현재 이 규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3. 지리적 특징
샤토네프 뒤 빠프 AOC의 영역은 북서쪽으로 오랑주(Orange) 인근의 론(Rhone) 강 유역부터 남동쪽으로 아비뇽(Avignon) 근처의 소귀(Sorgues)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고도는 해발 약 120m 정도입니다.
(샤토네프 뒤 빠프 AOC와 각 생산지의 재배 면적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chateauneuf.dk/pic/5kommuner.jpg)
면적은 약 3,200헥타르 정도이며, 토양과 떼루아는 최소 3개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북쪽과 북동쪽 지역은 크고 둥글둥글한 자갈인 갈레(Galets)가 진흙으로 이뤄진 토양 위를 뒤덮고 있습니다. 규암으로 구성된 갈레는 알프스의 빙하가 흘러내린 후 남은 잔해물로 론강에 의해 수천 년 동안 둥글게 다듬어진 것이죠. 이 돌들은 연간 2,800시간에 달하는 풍부한 일조량을 지닌 샤토네프 뒤 빠프 지역의 뜨거운 태양열을 낮 동안 머금었다가 밤이 되면 대기 중으로 뿜어냅니다. 그래서 대부분 모래 토양인 동쪽 지역과 모래와 자갈이 섞인 남쪽 지역보다 포도를 더 빨리 익게 해주죠. 또한 뜨거운 여름철에 토양이 마르는 것을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도 합니다.
(포도밭의 갈레 모습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0/Rhône_Valley_-_Châteauneuf-du-Pape_galet_stones.jpg/1024px-Rhône_Valley_-_Châteauneuf-du-Pape_galet_stones.jpg)
샤토네프 뒤 빠프의 유명한 포도원 중 일부, 예를 들어 샤토 라이야(Chateau Rayas) 같은 곳은 갈레가 없는 일반적인 포도밭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포도밭은 대부분 남쪽을 향한 경사지에 있는데, 밤이면 아래쪽의 돌에서 방사되는 열기가 경사를 타고 올라와 포도나무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때때로 포도가 너무 익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 부는 강풍인 미스트랄(mistral)은 습기를 날려버려 가물고 뜨거운 기후를 더욱 건조하게 만듭니다.
4. 품종
다른 남부 론 와인처럼 샤토네프 뒤 빠프도 여러 가지 포도를 섞어서 만듭니다. 예전엔 레드 와인은 13종 포도를, 화이트 와인은 6종 포도를 써서 만들었지만, 2009년에 규정이 바뀌었습니다. 현재는 레드와 화이트 와인 둘 다 흑포도 9종과 청포도 9종을 자유롭게 혼합해서 만들 수 있죠. 사용할 수 있는 포도 품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적포도
쌩쏘(Cinsaut), 쿠누와즈(Counoise),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 무흐베드르(Mourvèdre), 뮈스까르댕(Muscardin), 픽뿔 누아(Piquepoul noir), 시라(Syrah), 떼레 누아(Terret noir), 바까레즈(Vaccarèse), 브륀 아르장떼(Brun Argenté)
2) 청포도와 분홍 포도
부르불랑(Bourboulenc), 끌래레뜨 블랑슈(Clairette blanche), 끌래레뜨 로제(Clairette rose),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 그르나슈 그리(Grenache gris), 삐카르댕(Picardan), 픽뿔 블랑(Piquepoul blanc), 픽뿔 그리(Piquepoul gris), 루산느(Roussanne)
이중 끌레레뜨 로제와 그르나슈 그리, 픽뿔 그리는 2008년까지만 해도 사용할 수 있는 포도가 아니었습니다.
2004년 기준으로 전체 포도밭 중 72%가 그르나슈 누아 포도밭입니다. 뒤를 이어 시라가 10.5%, 무흐베드르가 7%를 차지하며 두 포도의 재배 면적은 최근 10년간 늘어났습니다. 생쏘와 끌래레뜨, 그르나슈 블랑, 루산느, 부르블랑의 재배 면적은 각각 1~2.5% 정도이며, 나머지 포도의 재배지는 0.5% 미만입니다.
(고블렛 형식의 가지 모습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0/Cep_taillé_en_gobelet_Séguret_AOC.jpg/1024px-Cep_taillé_en_gobelet_Séguret_AOC.jpg)
포도나무의 가지 형태는 뜨거운 햇빛에 포도가 시드는 걸 피하려고 보통 고블렛(gobelets) 방식을 쓰며, 에이커당 수확량은 최대 2t으로 제한합니다.
5. 와인
샤토네프 뒤 빠프는 화이트 와인도 생산하지만, 역시 레드 와인이 대부분입니다. 로제 와인은 샤토네프 뒤 빠프의 지역 명칭을 붙일 수 없으므로 샤토네프 뒤 빠프 로제 와인은 없습니다.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은 전통적으로 교황의 기장과 휘장을 돋을새김한 어두운 색상의 묵직한 병에 담아 판매하지만, 최근엔 많은 생산자가 좀 더 일반적인 아이콘을 선호합니다. 물론 무거운 병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하죠.
레드와 화이트 샤토네프 뒤 빠프를 만들 때 적포도와 청포도를 모두 쓸 수 있습니다. 양조할 때 포도 비율은 제한하지 않으며, 다른 많은 생산지와 다르게 주요 품종과 보조 품종의 구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허락된 18종의 포도마다 각각 품종별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르나슈 샤토네프 뒤 빠프, 픽뿔 누아 샤토네프 뒤 빠프, 시라 샤토네프 뒤 빠프… 이런 식으로 말이죠. 실제로는 생산자 대부분이 그르나슈를 주로 사용해서 샤토네프 뒤 빠프 와인을 만듭니다.
화이트 샤토네프 뒤 빠프는 16병 중 1병꼴 정도입니다.
<참고 자료>
1.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2. 크리스토퍼 필덴, 와인과 스피리츠 세계의 탐구(Exploring the World of Wines and Spirits), 서울 : WSET 코리아, 2005
3. 실뱅 피티오, 장 샤를 세르방 공저, 박재화, 이정욱 공역, 부르고뉴 와인, 서울 : (주)BaromWorks, 2009
4. 방문송 외 6인 공저, 와인미학, 서울 : 와인비전, 2013
5. 로드 필립스 저, 이은선 번역, 도도한 알코올, 와인의 역사, 서울 : (주)시공사, 2003
6. 영문 위키피디아 샤토네프 뒤 빠프 AOC 항목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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