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8 신 존재 증명 The 153 Latest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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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 논리적 신존재 증명
괴델 : 논리적 신존재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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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신 존재증명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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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신 존재증명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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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존재 증명 여러가지 논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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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신 존재증명의 의의

본 논문은 데카르트의 『성찰』(Meditations)을 중심으로 신 존재증명을 논증 한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증명 방식은 공식적으로 전통적인 신앙이 아니라 넌크리스천을 위해 기하학적 방식으로 이성에 호소하였다는 점을 분석적 방식(대부분 Georges Dicker의 방식)을 사용해서 밝힐 것이다. 그의 신 존재 논증은 『성찰 III』에 나타난 첫 번째, 두 번째 증명과 『성찰 V』의 세 번째 증명이다. 데카르트는 『성찰 III』에서 신의 관념은 내 안에 있지만 그 관념의 원인자는 신이며(첫 번째 논증), 이에 근거하여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유하는 자아의 존재를 신만이 원인자(두 번째 논증)라는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성(formal reality)과는 다른 표상적 실재성(representative reality)의 차등에 따라 위계가 정해진다는 것을 진술하고, 이 실재성의 차등이 결과와 원인으로 동일하게 적용되어 최초의 관념인 신에게로 나아가며 나의 존재의 원인(나는 누구로부터 나왔는가?)도 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세 번째 논증인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에서 필자는 최고의 완전한 존재자인 신이 모양이나 수를 증명하는 것과 수학의 확실성 못지않게 신의 존재(완전성)가 그의 본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명석 판명하다는 데카르트의 논증을 살핀다. 이를 통해 필자는 그의 신 존재증명의 의도와 의의가 신은 회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보증하는 것 즉, 이성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이 요구되었으며, 인간 이성의 명석 판명한 지각이 참된 인식일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궁극적 근거의 확보였다는 것을 고찰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증명이 전통적인 노선(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존재증명은 전통과는 다른 의미의 증명이며 전적으로 다른 의미의 신 존재였다(Jean-Luc Marion)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This paper’s purpose is to seek to grasp how Descartes demonstrates proofs of God’s existence on the basis of his works especially Meditations. To consider these points, I shall explore first, second, third proofs that are present in his works, and contents related to God. Descartes argues that there is idea of God within me, but it is God, which is first proof. On the basis of this fact, Descartes shows only God is the cause of thinking self who has idea of God(second proof), both of them are called Cosmological argument. To investigate this, at first he states that representative reality that is different from formal reality sets a kind of hierarchy, the degree of this reality is equally applied to cause and effect, consequently to the cause of my idea or existence(God). From Meditation V, third proof which is called Ontological argument, Descartes examined a supremely perfect God can’t be separated from God’s existence(perfection) just as surly as the certainty of any shape or number, for example triangle, namely it is quite evident that God’s existence includes his essence. Through these processes I shall examine following points: the way of having Descartes’ proofs of God’s existence itself is not only exposed, God’s existence who guarantees cogito ergo sum which is never doubted, despite doubting all things that is outside, is but also postulated;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are an ultimate source of ensuring the clear and distinct perception of human reason, Descartes uses reason suitable for non-christians instead of faith suitable for Christians for these methods, which are similarities with the traditional views on the one hand, but nevertheless there are some of discontinuities establishing authority or power of the first philosophical principle to which God is subjected, on the other.

신 존재 증명 여러가지 논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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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 ‘신은 존재하는가?’. 대표적인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신이 과연 존재할 것인지 존재한다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할지 궁금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왔습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표적 논증으로는 존재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이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다루어볼 내용은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증들입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논증들

신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은 정의상 가장 완전한 존재,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불완전한 상태의 존재라면 굳이 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신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신은 정의상 가장 완전한 것이고, ‘완전하다’는 말속에는 ‘존재하다’라는 의미가 포함되므로, 신은 정의상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논증은 본체론적 논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목적론적 논증은 세상에 정교한 어떤 것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창조한 신이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어떠한 정교한 도구(가로등과 같은 오브젝트)를 발견하면 우리는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정교한 인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교한 인간과 우주를 신이 아니라면 누가 창조한 것인가?’라는 느낌입니다.

우주론적 논증까지 알아보겠습니다.

“비는 왜 내리는 것일까요?”

“대기권의 수증기가 응축되어 물방울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증기는 왜 대기권에서 응축되는 것일까요?”

“대기권의 온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대기권은 왜 온도가 낮은 것일까요?”

위에서 제시된 대화 내용과 같이 현재에 벌어지는 어떤 결과가 되는 사건의 원인을 찾아내고, 또 그 원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어떤 것의 결과는 아니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되는 최초의 사건이 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라고 보는 주장이 바로 우주론적 논증입니다.

신 존재에 대한 대표적인 3가지 논증

존재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신의 존재를 오로지 선험적인 직관과 이성을 통해 증명하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신의 존재를 좀더 일반적으로, 자연세계속에서 지적 설계로 인식되는 증거로 지정인 창조주를 논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최초의 원동자를 발견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우주론적 논증을 제시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중세 대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75)입니다. 그는 대표작인 ‘신학대전’에서 우주론적 논증을 제시했습니다.

최초의 원동자를 신으로 보다.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의 논증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운동을 합니다. 하나, 스스로 운동하지 않고 무언가가 그것을 운동하게 만듭니다. 그 무언가는 스스로 운동하는지 또 의문입니다. 그것을 운동하게 만든 또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있으니까 말이죠.

예시를 도미노로 들겠습니다. 마지막 도미노가 쓰러졌다면 왜 쓰러진 것일까요? 당연히 앞의 도미노가 쓰러졌으니 쓰러졌겠죠. 그럼 그 앞의 도미노는 왜 쓰러졌을까요? 마찬가지로 그 앞의 도미노가 쓰러지니까 쓰러졌을 것입니다.(반복)

도미노가 시작된 곳으로 가보면, 맨 앞에 있는 도미노는 왜 쓰러진 것일까요? 그 도미노를 쓰러뜨린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바로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라고 합니다. 자신은 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원동자, 즉 제1원동자입니다.

그런 존재는 신밖에 없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은 운동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와 과학이 공존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과학은 빅뱅(우주 폭발)을 세상의 기원으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빅뱅에 의해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빅뱅의 원인은 바로 부동의 원동자, 즉 신이라는 표현했던 것입니다.

최초의 원인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의 또 다른 논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이 되는 사건을 벌어지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이 무한히 이어지다 보면 어디선가는 끝이 납니다. 다른 어떤 사건의 결과가 아니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의 원인이 되는 맨 앞의 사건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즉, 최초의 원인이 되는 사건 말입니다. 제1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신만이 다른 것의 결과는 아니면서, 다른 무언가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유추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우주론적 논증은 이렇듯 최초의 원동자, 최초의 원인으로부터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래의 글부터는 지금까지 확인한 주장들에 대한 반론 요약입니다.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반론 – 러셀

토마스 아퀴나스는 원인의 원인을 쫓아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원인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꼭 “제1의 원인이 나타날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원인의 원인들이 무한하게 계속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반론 2 – 칸트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원인의 원인을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뭐가 있을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월권행위(자기 권한 밖의 일에 관여하여 남의 직권을 침범하는 일)이고, 인간이 이성으로 이런 문제를 판단하려 할 때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반론 3 – 흄

사람들은 모든 사건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얀색 당구공이 부딪혀 파란색 당구공이 움직이면, 하얀색 당구공이 원인이 되어 파란색 당구공이 움직이는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실제로 우리가 관찰한 것이 원인과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관찰한 것은 그냥 하얀색 당구공이 부딪히고 그 이후에 파란색 당구공이 움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건들끼리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이비드 흄(1711~76)은 어떤 사건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주관적인 상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밖의 다양한 신 존재 논증들

1. 자연신학적 증명 –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이 세계를 창조했던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2. 도덕적 증명 –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미학적 증명 – 미술의 진리가 될 수 있으며 미를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4. 믿음의 유추 – 오직 성경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주님의 존재하심을 믿게 되는 방식입니다.

5. 우주론적 증명 – 자연계의 인과관계를 거쳐 계속하여 원인을 규명해 나간다면 최초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 존재론적 증명 – 인간은 불완전하고 상호 간에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하다고 생각되는 것, 즉 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7. 목적론적 증명 –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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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연구

-신 존재 증명을 둘러 싼 형이상학적 의미의 분석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1. 연구 목적

철학이 시작된 이래로 신 존재 증명은 표면적으로든 이면적으로든 철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행되어 온 주제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이 논제는 그것이 구성되는 철학적 배경이나 사상사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함의를 내포하고 있어 단순 증명 논의를 넘어선 복합적 담론이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신 존재 증명 논의는 중요한 형이상학적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 최초의 사변적인 증명을 이룩한 안셀무스의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이 있은 후에 당대의 가우닐로(Gaunilo)를 비롯해서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근대 서양 철학의 데카르트(Rene Descartes)와 라이프니츠(Leibniz), 그리고 칸트(Immanuel Kant)와 현대 언어철학의 선구라 할 수 있는 버트란드 러셀(Brtrand Russell)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반론을 제기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철학사적 상황에서 본고는 신 존재 증명의 선구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aberiensis)의 증명을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이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을 점검함으로써 본 증명이 지니는 철학사적인 의미를 되짚어보고 나아가 이러한 신 증명의 담론이 지닌 문제점과 현재적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특히 안셀무스의 증명에 대한 기존의 여러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폭넓게 재검토함으로써 본 논의의 유의미성을 역사적으로 확인코자 하며 언어철학적인 입장에서의 새로운 반론과 재해석을 준비함으로써 자칫 문헌사적으로 흐를 수 있는 논의를 보다 입체적이고 분석적으로 이끌고자 한다. 오늘날 신 존재 증명의 문제는 형이상학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논의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프로슬로기온』의 성과에 대한 논쟁, 즉 그것이 신학적인 논의인가 아니면 철학적인 논의인가에 대한 논쟁1)이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이러한 안셀무스의 시도가 과연 성공했느냐에 대한 찬반의 논의2)가 있다. 국내에서도 『프로슬로기온』과 『모놀로기온』 등이 번역되어 나옴으로써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준비되어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는 이러한 철학사적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먼저 안셀무스의 논증을 정리, 검토한 후 가우닐로 수도사의 반론을 시작으로 하여 아퀴나스의 반론과 우주론적 증명, 그리고 칸트의 반론과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현대의 논리학적 도구들을 이용하여 단순하나마 다소 새로운 입장에서 안셀무스의 논증을 사적(私的)으로 비판, 검토하고자 시도했다. 본 논문의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지니는 형이상학적인 의의와 한계가 어느 정도 드러날 것으로 기대하며 앞으로 있게 될 보다 심도 있는 연구와 명확한 철학적 평가를 준비하는 데 소박한 기여가 되길 바라는 바램이 있다.

Ⅱ. 안셀무스의 증명

1. 논증 정리와 규정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셀무스는 신이 존재함을 체계적으로 증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일견(一見)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 안셀무스 이전의 중세시기에 제시된 접근 방식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소위 이론적이고 이성적인 증명의 방식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그 철학사적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알기 위해 믿는다”의 언표로 유명한 안셀무스에 의해 제시된 이러한 신 존재 증명 방식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방식 중, 특히 ‘존재론적 증명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앞서 머리말에서 언급한 대로 안셀무스에 의해 최초로 제시된 이러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방식’은 이후 그것에 대한 찬반 논쟁이 철학사적으로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고에서는 안셀무스의 증명의 논증을 먼저 살펴보고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프로슬로기온』2장에서 안셀무스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이 이해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또한 3장에서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사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진실하게 실제로 존재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2장에서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하였다면, 3장에서는 그것의 비존재 자체가 생각되어질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4장에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할 수가 없으며, 만약 어리석은 자가 하느님의 비존재를 사유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사물을 의미하는 음성이 사유의 대상이 될 때 사유되는 것이 다르고, ‘의미되는’ 사물 자체가 사유될 때 사유되는 것이 다르다”고 하여, ‘의미’에 대한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후 이러한 ‘의미’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언어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는 먼저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셀무스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논증의 형식으로 구성해 보도록 한다.

1. 하느님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다.

2. 하느님은 이해(지성) 속에 존재한다.

3. 하느님은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다.

4. 만약 어떤 것이 이해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면, 이것이 더 위대하다.

5. 만약 하느님이 이해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6. 3번에서 하느님은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 경우 하느님은 더 위대해질 수 있다.

7. 그런데, 1번과 6번에 의하면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이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8. 그러므로 하느님이 이해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9. 따라서 하느님은 이해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결국 이러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방식3)은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의 형식을 빌어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2.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된다(왜냐하면, 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완전성의 결여를 뜻하므로 이는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안셀무스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의 실제적 존재가 증명되었으며 따라서 지성 속뿐만 아니라 바로 이 지성을 통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존재성은 한 가지 문제를 남겨두고 있는데, 바로 필연적 존재성의 확보라는 문제이다. 모든 실재하는 대상은 존재의 우연성, 즉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음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위에서 증명된 신의 존재 역시 그러한 우연적 존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명명하는 신의 개념과는 분명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이어지는 제3장에서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는 이른바 ‘신 존재의 필연성’을 증명하기에 이른다. 이 논증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 있다.

1.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생각 가능하다.

2. 왜냐하면 만일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면(우연적 비존재),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은 이제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게 되고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데 그것도 존재하지 않음이 생각될 수 없는 바로 그 상태로 존재한다. 즉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이제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존재성의 필연성까지도 증명한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논증이 단지 신의 속성으로 정의된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에 의해 연역적으로 추론되었다는 것이 놀랍지만 사실 이러한 연역이야말로 안셀무스의 증명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의 단초가 되는 것임도 부정할 수가 없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안셀무스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과 그 비판들이 지닌 오류를 동시에 검토함으로써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가지는 인식론적인 의미들에 좀더 가가이 갈 수 있을 것이다.

Ⅲ. 기존 비판들에 대한 검토

1. 가우닐로의 비판 검토

11세기 당시로는 이성에 대한 최고의 신뢰를 부여한 안셀무스는 자신의 논증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시편 14편 1절4))도 설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당시 안셀무스와 동시대 수도사였던 가우닐로는 『어리석은 자들을 대신하여』라는 책을 통해 안셀무스의 그러한 논증을 비판했는데, 그는 이해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오성 내에 어떤 것이 현존한다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a maximally great island’의 경우처럼 생각되어 질 수는 있으나 결코 사유 속에 현존할 수는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예를 지적함으로써 안셀무스의 논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 가능성의 사유 내 존재 확보’를 부정하는 단초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텍스트의 저자인 Plantinga는 ‘섬’과 같은 사물에게 있어서의 위대함은 내재적(본질적) 최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존재(being)에 있어서의 위대함과는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입장으로 안셀무스를 옹호한다. 다시 말해서 지식, 힘, 善 등과 같이 존재에 있어서의 위대함을 강화하는 성질들은 全知, 全能, 絶對善 등과 같은 내재적인 최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섬이나 나무 등의 사물에 있어서 나타나는 ‘위대함’ 개념의 무한 확장(가장 큰 섬보다 더 큰 섬의 무한 반복적 사유 가능성)이 정지될 수 있고 따라서 ‘a maximally great island’와는 다른 존재성으로 사유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全知나 全能과 같은 개념들이 과연 ‘위대함’과 얼마나 일대일 적으로 대응되느냐의 여부가 되겠다. 게다가 안셀무스 자신도 신 존재 증명에 있어서 사용한 표현 역시 全能이나 全知 혹은 絶對善이 아니라 단순히 ‘위대함’이라는 애매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때, 全知나 全能 등이 내재적 최대치를 가진 것과 그들의 합으로서의 ‘위대함’이 내재적 최대치를 가진 것은 결코 동일한 내용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이러한 논의들의 배후에 위치한 존재성에 대한 가치론의 문제들에 대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직접 가우닐로가 전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 <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앞으로 성질 f(x) 로 대신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CRITIQUE #1> 어떤 것에 대한 진술과 그 이해를 통해 지성 속의 존재가 보증되는 것이라면 거짓과 존재하지 않는 것 등 또한 지성 속에 존재할 수 있게된다. 또한 그러한 내용을 전제할 경우 ‘이해’는 ‘무엇을 실재에 따라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식에 의해서 파악함’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성질 f(x) 는 지성 속의 거짓 등과 가지는 차별점이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안셀무스 자신이 제시했던 시간적으로 다른 두 관점 즉 ‘어떤 대상을 지성 속에 가지고 있음’과 ‘그리고 나서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함을 이해함’ 사이의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안셀무스의 증명은 명제의 ‘이해’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

CRITIQUE #2> 신의 비존재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진술되고 듣게 된 대상 성질 f(x) 의 비존재 역시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비존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안셀무스는 자신의 논증을 펼 필요도 또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CRITIQUE #3> 안셀무스의 지성과 그 안의 존재 개념대로라면 객관적으로 불확실하고 거짓된 것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나 속거나 착각한 경우의 대상 또한 지성 속에 존재 가능하게 된다.

CRITIQUE #4> 성질 f(x) 는 지성 작용의 수행과 동일하지 않은 대상이다. 즉 화가가 자기 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실제로 자기 영혼의 지성 작용의 수행과 동일하지만 성질 f(x) 와 같이 지성 작용의 수행과 동일하지 않은 어떤 대상이 청취되거나 사고됨으로써 지성에 따라 포착되는 대상의 경우에는 그것이 비록 지성 속에 있다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지성과 동일하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결국 성질 f(x) 는 청취되거나 이해되더라도 화가 의식 속에 있는 예술 작품의 이데아와는 다른 존재성을 가지게 된다.

CRITIQUE #5>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들으면 실재 대상에 비추어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성질 f(x) 는 단순히 소리에 따라서만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실재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소리로부터는 그 <의미> 즉 소리가 지칭하는 대상의 실존이나 실재를 추론할 수 없다.

CRITIQUE #6>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과 실존 그 자체와의 연결은 지성적 추론으로는 가하지 않다. 즉 성질 f(x) 는 ‘이름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대상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 대상이 어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CRITIQUE #7> 모든 나라를 풍요함에서 능가하는 ‘사라진 섬’의 경우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확실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추론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농담에 불과하다. 그 섬의 우월함은 그것의 실제적인 존재가 증명되었을 때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나 불확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살펴볼 때, 청취되거나 지성 속에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역으로,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지성 속에도 존재할 수 있다.

CRITIQUE #8> 성질 f(x) 의 필연성 역시도 확보되지 않는다. 지금 성질 f(x) 의 실존조차도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의 필연성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하다.

CRITIQUE #9> (언어적 수정의 제시) 성질 f(x), 즉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cogitari조차 될 수 없다>는 이제 오히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intelligi조차 될 수 없다>로 말하는 편이 나은데, 그것은 <하느님이 존재한다>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사실은 사람들이 <이해>하지만 그 비존재는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우닐로의 비판에 대해서 안셀무스는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가? 먼저 안셀무스는 자신의 논증을 <필연적인 실존>의 관점에서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 논증 도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질 f(x)의 존재

non f(x)의 존재들

시작이 없는 대상

시작을 통해 규정된 대상

필연적 실존을 소유

우연적 대상

끝이 없는 대상

유한한 대상

형이상학적 우위의 위계

형이상학적 하위의 위계

또한 안셀무스는 ‘전체성’의 측면에서도 성질 f(x)의 존재와 non 성질 f(x)의 존재를 구분한다. 즉 non 성질 f(x)의 종류를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한 번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대상>, <모든 곳, 모든 시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전체로서 존재하지는 않는 대상>, 그리고 <부분의 합으로서의 전체로 존재하는 대상> 의 세 가지로 구분한 안셀무스는 그것과 구분되는 성질 f(x), 즉 언제나 전체로서, 그리고 어디서나 전체로서 존재하는 대상을 내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바로 이 부분에서 성질 f(x)가 non 성질 f(x)보다 가치적으로 <더 좋은>, 그리고 위계적으로 〈상위의〉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셀무스는 기존의 주장, 즉 지성 속에 존재하는 성질 f(x)로부터 그것의 필연성을 유도해 낸 주장을 역으로, ‘실제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성 속에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순에 의한 주장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필연 존재 대상’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당연히 논증이 성립되기 어렵고 여전히 지성 속에 존재함과 이해와의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안셀무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존재하지 않는 대상은 단지 우연적인 존재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처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처음과 끝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은 가우닐로의 비판을 다소 우회적으로 피한 결과이다. 가우닐로는 <지성 속에 존재함>과 <실존> 간의 관계를 규명키 원했던 것이었지만 안셀무스는 <우연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에 대한 논의로 관심을 유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안셀무스는 자신이 비판받은 ‘생각’ 개념의 사용에 대해 정당화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최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편 가우닐로는 성질 f(x)를 <모든 것보다 큰 것>으로 자꾸 번역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안셀무스의 주장은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즉 그가 말하는 것은 성질 f(x)이기 때문이다. 가우닐로가 이해한 바로의 <모든 것보다 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양자간의 구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셀무스의 주장이다.

또한 안셀무스는 가우닐로의 지성(이해) 개념을 비판한다. 만일 이해가 한편으로 ‘거짓된 것도 지성 속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함을 파악함’을 의미한다면 ‘이해’의 개념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의 개념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논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하지 않음이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성질 f(x)의 비존재도 생각될 수 있다는 가우닐로의 비판에 대해서는 우선 어떤 사람이 어떻게든 이해하고 있는 논증을 그가 결코 의미 있는 내용을 떠올릴 수 없는 하느님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부정한다는 사실은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안셀무스는 비판한다. 또한 안셀무스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이해하는 것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성질 f(x)가 어떤 알려진 것으로부터도 추론 불가하다는 가우닐로에 대한 반론으로 안셀무스는 그것이 추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응하는데,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과의 모순으로서의 성질 f(x)를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생각될 수 없는 것이 ‘생각될 수 없는’이라는 내용이 지칭하는 것의 생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의 생각(혹은 이해)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즉 어떤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행하는 부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질 f(x)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의 불가능성을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성질 f(x)에 대하여는 우연적인 존재보다 필연적인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두 사람간의 논쟁에 숨겨진 배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안셀무스와 가우닐로의 논쟁에 있어서 양자 모두에 의해 전제되고 있는(물론 가우닐로의 경우가 조금 약하지만)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존재성에 대한 존재성의 우월로서의 가치 판단이다. 존재성의 비존재성에 대한 이 우월이야말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논증 구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음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논의와 반론에서 그러한 문제를 안셀무스에 대한 반대의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고 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이러한 가치 표명이 함축하는 바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듯 하다. 비록 인간의 마음 속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바램과 희망, 즉 지금은 그 존재성을 가지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 판단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감정 역시 앞으로의 존재성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측면에서 형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 존재성의 상대적 우월은 생각처럼 쉽게 논박 불가능한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존재성의 가치 판단이 논박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있어왔던 존재에 대한 많은 철학적 논의들 또한 수정되거나 되짚어봐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존재는 그 성격에 있어서 가장 중립적이고 비지향적인 것으로서 이해되고 전제되어 논의된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존재의 가치성이 그리 단순한 문제인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악한 것, 옳지 못한 것 등을 이야기할 때,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의 속내 역시 존재하는 것이 일단 옳고 나은데 그 만큼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성격이 강한 것이므로 이 또한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긍정을 전제하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존재에 대한 긍정적 가치 판단이 논박 불가능하다면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의 가장 강력할 수 있는 반론 하나가 제거되는 것이라 할 때 이 논의는 분명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중요한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양자의 논의에서 나타나는 ‘이해’와 ‘생각’에 대한 관점의 차이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가우닐로는 그의 마지막 비판에서 안셀무스의 성질 f(x)에 대해서 사용되는 ‘생각’을 ‘이해’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신이 비록 이해될 수는 없어도 생각될 수는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 안셀무스는 가우닐로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즉 만일 이해가 한편으로 ‘거짓된 것도 지성 속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함을 파악함’을 의미한다면 ‘이해’의 개념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안셀무스의 논증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만약 가우닐로의 제안처럼 ‘생각’을 ‘이해’로 바꾸고 둘을 구분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일상적인 인식 활동에 대해 과연 어느 경우에 생각이라 부르고 어느 경우에 이해라 불러야 할지 그 기준이 모호해지고 마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대해 가우닐로는 다른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데, 아마도 그는 언어적 논리 구조를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지향적 행위를 이해로, 소리에 의한 일차적 내용의 파악을 생각으로 규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분명 명확한 기준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설명이 뒤따른다면 신의 부재는 이해될 수도 있고 생각될 수도 있는(가우닐로의 용법을 따르더라도) 대상이다. 오히려 여기서 문제로 남는 것은 과연 인간의 의식이 얼마나 많은 수의, 질적으로 다른 인식 위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 (감각) 수용과 논리적 추론의 큰 구분을 넘어 언어 논리적으로 어느 정도 다양한 인식들이 구분 가능한지 대단히 궁금하다. 만약 그러한 구분이 실제로 가능해진다면 인간 의식과 자율성 그리고 논리적 추론 등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두뇌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연구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감성과 지성의 이분법 그리고 단순 사고와 추론적 사고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인식 구분이 가능한 지는 앞으로 좀 더 생각해볼 문제인 듯 싶다.

그렇다면 과연 안셀무스가 말하는 지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성 속에 혹은 지성과 함께 사유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지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지성이 어떤 대상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의 논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인데 일단 여기서는 그 문제의 심각성과 방향만을 짚어보기로 하자. 어떤 명제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지성 속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발현되고 나타났다는 의미에서의 존재, 그리고 우리의 인식 활동에 의해 가능하게 된 존재라는 측면에서 그 명제가 사고 속에 존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관점을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으로까지 확장시켰을 때 나타난다. 신의 실존을 증명한다는 것은 ‘존재’라는 술어를 단순히 전술한 바와 같은 식으로, 다시 말해 어떤 명제가 우리 인식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의미가 파악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 이상의 단계임이 분명하다. 존재는 공간 혹은 어떤 매질을 필요로 하고 신 역시 그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물론 전능한 신이 전제될 경우 공간이 먼저이냐 아니면 신이 먼저이냐는 식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신이 공간과 더불어 있다는 등의, 비록 구차하지만 그 해결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신의 존재 또한 어떤 구체적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나아가 실존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시간적으로 규정된 제한 역시도 여전히 유효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성 속에서 이해되고 사고되는 것이 과연 ‘신의 존재 증명’에서 말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지, 그것은 아마도 다분히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생각 속에 있는 것에 이미 존재라는 이름을 붙여버리면 그 존재가 불가능한 모순적인 것들의 존재 역시 부정될 방법이 없게 된다. 문제가 이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성 속에서 이해되는 대상들에 대해 어떤 존재론적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단순히 그냥 “있다”라는 표현으로 존재와의 차별된 성격을 나타낼 것인가? 사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사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한 번 더 문제삼고 싶다. 인간 사유가 그러한 존재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면 그것은 사유가 존재와 대등한 혹은 같은 위계의 정체성을 갖는 가치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양립과 유관하게 다시 사유의 위치가 정립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정신의 본성으로서의 사유, 그리고 사물의 본성으로서의 연장(延長)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존재와 사유는 분명 하나의 범주 안에서 논의되어져야 할 대상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사유. 그것은 어쩌면 한 존재의 능력 혹은 성질로서의 정체성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아퀴나스의 비판 검토

아퀴나스는 안셀무스가 이야기한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이 사변적이며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공허한 개념에 대한 논증이라고 반박하면서, 경험에 의하여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견해를 가지고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였다. 아퀴나스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평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신을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고 비난했다5). 만일 우리가 신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다면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의 본질과 실존 사이에는 아무런 실제적인 구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아퀴나스는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 자명적일 수 있으나 우리는 이런 직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결국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간 정신에’ 자명적인 것도 분석적인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퀴나스 철학의 경험주의적 측면(우리의 모든 인식은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며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 또는 모든 존재에 관해서 가지는 어떤 자연적인 인식도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에 관한 성찰에 의해서 도달된다)이 두드러져 보이는 대목이기도 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아퀴나스가 신 존재 증명 역시 이러한 성찰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도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를 성찰하는 과정 가운데서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안셀무스보다도 대략 200년이나 후대의 철학자이므로 안셀무스의 직접적인 재반론을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의 칸트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 안셀무스 비판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가능한 비판의 윤곽은 그려볼 수 있겠다.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안셀무스가 아퀴나스의 비판처럼,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무신론자들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가능적으로나마) 절대적인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을 설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적인 하느님을 염두 해 두고서 이를 하느님의 개념적 전제로 사용하고 있는 안셀무스가 이에 대한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한 비판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역시 그것이 정말로 철학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즉 하느님의 정체성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둘러 싼 문제이기도 한 그와 같은 논의들은 사실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학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라는 표현에 대해 굳이 기독교의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절대자적인 차원에서의 존재자라는 표현으로도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논의는 그 유의미성을 상실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신의 속성에 있어서의 ‘현존’이 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초월성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만약 현존이 한 사물의 본질에 속하는 실제적인 속성의 하나라고 전제할 수 있다면 안셀무스의 증명 방식은 아퀴나스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측면, 즉 아퀴나스의 비판이 이러한 존재의 술어성 여부까지 포괄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바라볼진대, 아퀴나스의 안셀무스 비판은 그 자체로 시대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험론적’ 비판으로 아퀴나스의 그것을 평가하기에는 그의 논의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우리는 여기서 신 존재 증명의 두 번째 형태를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이른바 ‘우주론적인 증명’이라고 불리는 논증 방식이다. 우주론적 증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을 간단하게나마 언급하기로 하자.

1. 온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운동은 궁극적 운동의 원인으로서 부동의 원동(原動)자를 가져야 한다. 운동의 궁극적 원인이 신이다.

2.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하도록 원인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작용원인이 되거나 외부에서 작용원인을 갖게 되는데 그 무엇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작용원인이 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는 최초의 원인 즉, 제 1원인이 신이다.

3. 현실세계의 모든 개체들은 우연적인 산물인데 우연적 산물의 배후에는 필연적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우연적 존재의 원인인 필연적 존재가 신이다.

4. 모든 만물들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데 이 만물들은 목적에 따라서 움직이게 하는 목적인(目的因)으로서의 존재가 신이다.

5. 인과적인 계층의 맨 위에는 모든 작용의 궁극적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원인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원인이 바로 신이다.

이 가운데 특히 1.~3. 항목의 논증을 우주론적 논증이라 하는데, 이 세 논증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유형을 정리하면,

1)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변하고 있다

2)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 움직임에는 움직이게끔 하는 원인이 있으며, 존재하도록 만드는 원인에도 또 다른 원인이 있으며, 우연적인 것에도 우연적이지 않은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

3) 움직이게 하는 자, 원인 또는 필연적인 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무한히 반복 될 수 없다.

4) 무한소급이 불가하기 때문에 모든 원인에 앞서 제 1존재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신이라 부른다.

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서 보다시피 아퀴나스는 현실이라는 구체적 세계를 강조하고 이전까지는 거의 가치를 갖지 못했던 존재라는 영역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안셀무스에게 있어서 존재(existence)는 본질의 한 속성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졌지만,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존재는 “하나의 특수 본질의 존재 행위”(the act of being of particular essence)라는 개념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아퀴나스의 증명에 대해서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을 검토해볼 차례다. 우선 그가 증명에서 사용하고 있는 〈무한소급의 불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퀴나스는 운동의 원인, 존재의 원인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궁극의 원인이 존재하며 그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러나 과연 원인을 퇴행적으로 추적할 때 무한소급이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 시점 이후의 무한한 이어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무한히 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지금 이 시점이 무한한 과거가 된다. 이처럼 퇴행 추적 역시 -∞로서 무한 소급이 가능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선험적 가정의 문제〉이다. 아퀴나스는 안셀무스의 논의가 사변적이며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공허한 개념에 대한 논증이라고 반박했지만, 그 자신 역시 제1원동자, 제1원인, 제1목적인을 찾아가는 설명체계에서 그러한 개념들이 갖는 사변적 관념체계 자체를 사용하여 논증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강하다. 특히 세 번째 논증에 있어 아퀴나스가 생성과 소멸에 의해 지배되는 우연적인 세계를 넘어선 필연적인 존재를 설정한 것은 중세 스콜라시즘이라는 그의 시대적 사상적 인식론에서 자연스럽게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퀴나스 자신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논증전개에 있어서 개념의 정의와 의의를 통한 선험적인 가정이 깊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지적할 것은 〈자신이 설정한 궁극적인 존재인 신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빈약한 점〉에 대해서이다. 아퀴나스는 신 자체가 지니는 속성이나 본질을 신 존재증명과 함께 다루지 않았다. 그는 대신에 ‘이러저러하게 추론된 것을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로 정리하고 마는데 이러한 논의의 틀을 가지고 아퀴나스의 논증을 하나의 내적 일관성과 정합성을 고루 갖춘 설명체계로 만들어 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듯이 보이며, 이렇게 추론된 신 존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완전히 일치하는가라는(안셀무스가 아퀴나스에 의해 받은 정반대의 비판이 되겠지만) 기존의 비판 역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네 번째 증명에서 나타나는 순환 논증의 오류이다. “모든 만물들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라는 식의 목적론적 존재론은 중세적 사고방식이다. ‘목적‘이 무엇인가? 책의 목적은? 읽히는 것이다. 음악의 목적은? 듣는 것이다. 즉 목적이란 개념은, 개별사물들 밖의 어떤 주체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니까 목적이란 사물들에 대한 인간적 (혹은 타(他) 주체적)해석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들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전제는 이 말 자체에서 모든 만물밖에 있는 어떤 주체를 은근히 함축하고 있다. 결국 전제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은근히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생각해볼 때 만약 신에 대한 증명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신에 대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면 이는 아퀴나스보다는 안셀무스의 입장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섣부른 판단을 해보게 되는데 이는 경험으로부터 그 논증의 근거를 얻고자 했던 아퀴나스의 시도가 생각처럼 인식에 있어서의 사변적 충분한 확장을 이룩하지 못한 채 반박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과 재론(再論)이 가능하겠으나 본고에서는 그와 같은 언급으로 논의를 제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3. 칸트의 비판 검토

이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한 칸트 의 비판을 살펴볼 차례이다. 여기서는 우선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나고 있는 칸트의 입장을 요약, 정리해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자. 우선 칸트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라는 개념은 순수한 이성 개념, 즉 하나의 단순한 이념이고, 이 이념의 객관적인 실재는, 이성이 그 이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100타알러의 예6)를 통해서,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언급할 경우, 이미 그것의 실존은 항상 주어진 것, 혹은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이미 전제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존재론적인 증명은 실재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한 것이 없게 되며 단순히 개념의 영역 안에 갇혀 있으며 이를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칸트의 입장인 것이다.

한편 칸트는 안셀무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비판에서 결여된 바였던, 존재 술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존재 술어가 실재 술어와는 다른 성격의 술어임을 밝히고 있다. 즉 실재술어라 함은 한 사물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보태어질 수 있는 어떤 개념을 가진 술어를 뜻하는데, 존재라는 술어는 단지 사물의 정립, 혹은 사물의 어떤 규정 자체의 정립이 될 뿐 종합적인 그 어떤 개념도 추가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존재 술어가 단지 형식 논리적 술어, 즉 판단의 연어(連語)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만약 가능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무언가를 추가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내가 개념 중에서 생각했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것이 실재한다는 것이 되고, 결국 나는 오로지 ‘나의 개념’의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칸트는 ‘있다’는 술어는 하나님의 개념에 어떤 것도 보탠 것이 없고 단지 주어 자체 즉 대상을 나의 개념에 관계시켰을 따름이고 따라서 개념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의 외부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결국 신과 같은 순수 사고의 객체는 인식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플란팅가는 칸트의 이러한 입장을 현실주의(actualism)의 하나로서 비판한다. 즉 존재 술어를 칸트 식으로 이해할 경우,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다’(→ 대우 명제 : 실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현실주의적 함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처음에 ‘사유에 실재하는,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미 그런 존재가 실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되고 만다. 다른 측면에서도 칸트의 논점은 비판이 가능한데, 과연 칸트가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느냐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즉 칸트가 자기 시대의 입장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대하고 있을 뿐 이 증명이 지닌 진정한 의미의 사상사적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가능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경험론과 강단철학이 신의 ‘개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던 것처럼 이 증명이 신의 개념에서 신의 실존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안셀무스의 입장은 신의 개념이나 표상에서 신의 실존을 이끌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존재자의 근거로서의 그것이었고 불완전한 것들, 그리고 불완전이라는 개념이 사고되기 위해서 전제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안셀무스는 하느님의 개념을 단순한 개념의 차원이 아닌 본질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미 본질에 관한 사유가 개념으로 대체된 시대, 그리고 본질에 대한 논의가 결코 현실적일 수 없는 그런 인식론의 시대에 의해 그의 사고가 구성되고 있는 터였기에 본래적 의미에서의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을 이해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한편 하트숀(C. Hartshorne)은 실재주의와 모순적이지 않으면서도 안셀무스의 논증을 옹호하고 칸트의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안셀무스 신 존재 증명의 새로운 버전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의 핵심은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존재’라는 명제는 ‘어떤 존재가 주어진 가능한 세계 W에서 전지, 전능, 그리고 절대적으로 선할 때, 그리고 바로 그럴 때에만, 그 존재는 최대의 뛰어남을 가지고 있고 그 존재가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그러한 최대의 뛰어남을 가질 때 그 존재는 가장 위대하다’라는 例化가 가능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이것은 ‘최고의 위대함’의 애매함에 대한 규정을 통해 안셀무스의 논증을 보다 견고히 만들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최대의 위대함은 전지 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한(즉 최대의 뛰어남을 가진) 존재가 필연적일 때 진정으로 예화(例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최대의 위대함이 가능적으로 예화된다면 결국 그것은 그러한 존재의 필연적 예화를 담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플란팅가는, 이러한 주장이 가지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최대의 위대함이 가능적으로 예화될 수 있다’는 전제의 타당성 여부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논리적 정합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로 그 예화가 가능하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이 사적(私的) 비판에서 보다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자세하게 검토하기로 한다.

Ⅳ. 사적(私的) 비판과 분석

이제 앞에서 이루어진 철학사적인 논의들을 바탕으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지닌 문제점과 한계,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다소 새로운 측면에서 접근해보기로 한다. 언어철학적 입장의 비판이 주가 될 본 장에서는 앞서 가우닐로, 아퀴나스, 그리고 칸트 등이 제기한 비판이 보여 온 논리적 결함들을 보완함과 아울러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반론과 여러 논의들과 연결되어 본 논의가 안셀무스의 논증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1. 언어 철학적 비판과 분석

(1) 신 존재 증명에 나타난 전제 오류의 문제

안셀무스의 논증이 보이는 오류 중에는, 논증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전제로부터 기인하는 언어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크게 보아서 제2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 존재 증명에 관한 것과 제4장의 내용, 즉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분에 대한 어리석은 자의 이해에 관한 것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겠다. 또한 그 두 가지의 오류가 함께 연결되어 그의 신 존재 증명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오류로서 이끌고 있는데, 이는 분명 안셀무스의 논증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제 지시 대상과 의미라는 오래된 언어 철학적 입장에서의 안셀무스 비판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을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에서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제일 먼저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신의 개념에 대한 안셀무스의 전제이기도한데 그는 이러한 전제를 아무런 논리적, 철학적 근거 없이 ‘믿음’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져오고 있다. 물론 여기서는 그러한 ‘믿음’의 도입과 같은 문제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사변적 결과’로 대치하더라도 남아 있는 논리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논증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음의,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존재이다 = F(n)”(*)

라는 규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1) ≪신 ⇒ F(n)≫과 (2) ≪F(n) ⇒ 신≫은 논리적으로 다소의 차이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안셀무스의 논증을 살펴보건대, 그는 아마도 (*)을 (1)의 관점에서, 즉 주어의 위치에 신이라는 명사를 위치시키고 F(n)을 술어의 위치에 놓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이러한 입장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것은 아니므로 안셀무스와 같이 ≪신 ⇒ F(n)≫의 입장을 견지하여 신을 정의하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주어의 위치에 놓여 있는 ‘신’은, Russell의 ≪기술 이론≫(Description Theory)에 따르면, 어떤 특정하고 확정된 대상으로서의 한 존재를 가리키고 더 나아가 그 지시 대상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다음의 전통적인 예를 보자.

(3) “페가서스는 자웅동체이다”

(4) “페가서스는 자웅동체가 아니다”

(3)과 (4)의 예에서 만약 주어인 ‘페가서스’가 실제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로 사용된 것이라면 (3)과 (4)는 서로가 ‘모순’의 관계이므로 둘 중 하나의 진리치는 참이어야 하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 그러나 (3)의 명제가 거짓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명제 (4)가 필연적으로 참의 진리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3)을 논리적 술어로 번역한다고 할 때, 페가서스를 Px로 자웅동체의 성질을 Ix로 놓는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3) ∃x(Px &∀y (Py → y=x) &Ix)

이러한 표현은 사실 ≪a. 어떤 것이 페가서스이고, b. 다른 어떤 것도 페가서스일 수 없으며(오직 하나의 種만이 페가서스일 수 있으며), c. 바로 그 존재가 자웅동체이다≫라는 논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 경우가 명제 (3)의 논리적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거짓이라고 가정한 명제 (3)을 부정한 명제 (4)의 경우는 (3)의 진리치와 반대의 것(여기서는 참)만을 가진다고 볼 수가 없게 된다. 아래를 보자.

(5) ~∃x(Px &∀y (Py → y=x) &Ix) …… (T)

(6) ∃x(Px &∀y (Py → y=x) &~Ix) …… (F)

이러한 결과에서 보듯이 (3)의 부정인 (4)의 명제가 이와 같이 두 가지의 경우로 나타날 수 있게 되는데, 논리적으로 배중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5)를 (4)의 논리적 번역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렇다면 (5)를 (3)의 부정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페가서스라는 것을 진정으로 고유한 이름으로 보고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지시체라고 간주하는 것, 즉 (6)과 같이 (4)를 도식화하는 것이 지닌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위장된 고유명사는 그 지시대상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명제 함수(술어)를 만족시키는 어떤 대상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이른바 진리 주장의 역할을 할 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존재이다 = f(n)”(*)라는 명제는 특정하게 결정된 지시 대상으로서의 신이라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술어를 즉 F(n)을 만족하는 어떤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뜻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의 핵심은 신이라는 존재의 현존성에서 F(n)이라는 술어로 이동한다.

그런데 과연 술어 F(n)은 어떤 특정한 존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즉 주어 위치의 신이라는, 존재론적으로 애매한 위계에 놓인 존재를 구체적 대상으로 ‘확정’시켜 줄 수 있는 성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느냐가 새로운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 될 수 없는 존재”라는 대상은 고정된 하나의 지시체라기 보다는 수학에서의 무한대(∞) 개념과 마찬가지로 어떤 진행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비록 부정의 방식으로 “더 이상 위대한 존재가 생각될 수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한데, 이는 결국 그보다 조금 더 위대한 존재의 부정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한대 개념처럼 특정한 대상으로 규정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존재이다 = F(n)”(*)이라는 명제는 불특정적이고 진행적 의미의 술어를 만족시키는 특정 대상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모순적인 입장이 되고 만다. 한편 F(n) 자체를 상태적인 함수로 간주하고 그것이 단지 그러한 ‘상태를 반영하는 일정한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그런 식으로 술어를 대상화한다고 하더라도 앞의 논증에서 본 바와 같이 여전히 주어 ‘신’의 존재론적 위상이 결코 의식(이해)이나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단지 술어를 만족시키는 특정 대상이 존재함을 주장하는(진리 주장) 대상으로서 그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이해 속에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둥근 사각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해 속에 존재하느냐의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사유 내에 “있음”이 우리가 사용하는 “존재”와 얼마나 유사하고 또 유의미한 것인지는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닐 수밖에 없다. 결국 안젤무스가 그의 논증에서 전제하고 있는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존재이다 = f(n)”(*)라는 명제는 F(n)이라는 명제함수를 만족시키는 존재로서의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리주장에 불과하고 이는 앞에 제시된 모순적 상황만큼이나 심각한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내적 의미와 외적의미 구분의 문제점

다음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 역시 앞서 제기한 명제 관련 문제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4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사물을 의미하는 음성이 사유의 대상이 될 때 사유되는 것이 다르고 ‘의미되는’ 사물 자체가 사유될 때 사유되는 것이 또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

우선 논의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전반부의 ‘사물을 의미하는 음성이’에서의 ‘의미’와 ‘의미되는 사물 자체’에서 나타난 ‘의미’ 사이의 구분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전자의 ‘의미’는, 음성을 통해 사물이 단지 가리켜진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때, 일종의 ‘지시’로 대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에서 말하는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표현 대상의 함의’의 차원일 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히는 일찍이 프레게가 주장한 바 있는 ‘의미’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1) “서울은 서울이다”라는 명제와 (2) “서울은 한양이다”와 같은 명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프레게가 도입한 지시 대상을 가리키는 양태로서의 의미의 개념이 바로 후자의 ‘의미’를 보다 유의미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앞장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와 같은 구분을 해석한다면, 전자는 아무런 술어적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동어 반복적인 입장에서의 ‘의미’인 반면에 후자는 ‘이해’라고 하는 사유 과정에 드러난 어떤 내용들을 포함한 ‘의미’라고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 논의에 있어서의 차이에 대해서는 전자의 의미를 ‘지시적 의미’로, 후자를 ‘개념화된 의미’로 임시적으로 명명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분명한 것은, 안셀무스의 지적처럼, ‘지시적 의미’와 ‘개념화된 의미’를 분명하게 구분시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안셀무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의 차이, 더 구체적으로는 외적의미의 상대적인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적 의미라고 하는 것은 본래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로부터 도출된 필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적인 내용에 의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우연적인 것들이고 따라서 안셀무스가 말하는 것처럼 신의 개념(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어떤 외적 의미의 추가 및 삭감 등과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사실들은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사유될 수 없는 존재이다 = f(n)”(*)라는 규정이 결코 자명하거나 필연적인 논증이 될 수 없다는 또 다른 예로서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지시로서의 의미가 지시 대상의 존재를 담보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개념으로서의 의미 역시도 존재를, 그것이 의식 내의 것이든 현실에서의 것이든, 보증하지 못한다는 앞의 결론에서 볼 때, 결국 (*)의 주장이 안셀무스 개인의 신관(神觀)을 나타내는 표현 이상의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추가적인 논증이 불가피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논증을 통해서 살펴보건대, 적어도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은, 그것이 굳이 안셀무스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언어 논리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신의 존재에 대한 정의와 개념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필연성을 매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존재론적 증명의 성격상 신을 규정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존재성의 상실(정확히는 존재성의 확보 실패)은 그 증명 과정상에서 치명적인 문제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논의를 둘러싼 함의(含意) 분석

이제 여태까지의 논의를 통해 밝혀진 여러 논점들을 바탕으로 하여 안셀무스의 증명을 비롯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과 이에 대한 반론의 역사적 전개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함의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신 존재의 증명에 있어서의 ‘신 개념’의 불분명성 혹은 다의성의 문제이다. 전술한 바와 같은 많은 철학자들이 신에 대한 증명을 함에 있어 동일한 대상에 대한 존재 증명이라고는 여기기 힘들만큼 다양한 신의 개념을 가지고 증명에 임하는 것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안셀무스는 ‘위대함’이라는 개념이 매개가 된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아퀴나스는 궁극적 원인 혹은 우연적 존재에 대한 대비체로서의 필연적 존재, 그리고 목적인으로서의 존재로서, 또한 라이프니츠의 경우는 완전한 존재7)로서 신을 정의 내리고 그러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 존재 증명을 구분하는 방법이 단지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적인 논증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제상의 차이까지도 고려한 구분임은 모르는바 아니다. 그러나 동일한 신에 대한 논증과 이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논의들이 실상은 상당히 다른 성격의 신을 전제한 결과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치밀하게 분석한 것은 아마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에서 신이라는 이념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칭했는데 다음의 세 가지, 즉 〈a.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b. 근원적 존재자 혹은 최고 존재자 (모든 존재자들 중의 존재자)〉, 〈c. 필연적 존재자〉 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각각의 경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이른바 “감각주의적 존재론”이라 불리는 그의 존재론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칸트에 의해 정리된 이러한 신의 존재성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8).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금 신은 정의 내려졌고 그 폭과 양상 역시 보다 다양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존재 정의의 불일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러한 증명들이 단지 철학자들이 자신의 편리한 입장에서 신을 정의 내리고 이를 증명 혹은 반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철학자들의 증명에 있어서의 방법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신 존재 증명이 지닌 복합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아 보인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신 존재 증명의 방법과 반론의 과정은 이를 대하는 철학의 특성과 종류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한 철학자가 일련의 증명을 구성했을 때 그 증명 속에 함축된 내용들이 해당 학자의 전체적인 사상의 성격과 논리들을 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셀무스 혹은 아퀴나스와 같이 신 존재 증명을 그들의 형이상학보다 중요하게 혹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본 논증을 수행한 철학자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칸트, 라이프니츠 등과 같이 주변적인 논의 가운데 하나로서 증명을 수행하고 비판한 철학자들에게도 역시 그들의 신 존재 증명은 그들의 사상 전반이 함축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칸트의 반론에 대해서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정확한 비판으로 인정하기보다 이러한 비근대적인 존재론을 제쳐두고 근대적 사고의 발전과 정착에 필요한 새로운 존재론을 기획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측면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각각의 존재론을 충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존재 증명만의 논의는 전혀 다른 언어로 서로 의사 소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 될 수도 있음이다. 물론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완화되고 극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신 존재 증명을 통해 한 철학자의 사상적 배경과 방향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해당 철학의 시대적 흐름과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신 존재 증명이 지니는 또 다른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신 존재 증명의 발전은 앞으로 있을 과학적 진보와 불가분의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이 자연과학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미 쇠락한 형이상학적 논의로 치부될 수 있는 본 증명 논의 역시 앞으로의 과학적 발전의 양상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 보완, 발전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음으론 이러한 신 존재 증명이 지속되는 이유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힐까 한다. 이처럼 까다롭고 다층적인 주제에 대해 인간이 탐구와 분석을 이어가는 이유가 단지 종교적인 이유에서일까 하는 의구심을 바탕으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아마도 신 존재의 증명이 인간 사유의 절대적인 근거를 찾는 과정이자 보다 완전한 사유에의 지향의 태도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거칠게 말하면 철학은 분명 보다 완전한 사유 체계를 이루고자 하는 일련의 사고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완전성과 절대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모델링(Modeling)을 통해 한편으로는 그러한 과정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유 형식을 가장 고도화 할 수 있는 동기를 궁구하게 된 것이다. 11세기 이성에 대한 신뢰가 극도로 일어나던 시기에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일어난 것은, 단지 그가 이성적인 신앙을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생겨난 소위 종교적 동인(動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관심이 가져오는 철학적 동기(動機)로서의 당연한 귀결로 평가하고 싶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대한 반론과 검증을 반복한 것도 단순히 종교적인 사상의 부흥을 꾀한다거나 형이상학에 대한 경험적 사유의 우월성을 정초(定礎)하고자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분출하는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극도의 경지까지 밀고 나가고자 했던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이성적 추진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눈에 보이지 않고 또 보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언어적 증명이란 보다 순수한 동기의 차원에서 분석해볼 때 이성의 초월적 지향력에 다름 아니다. 결국 우리는 앞으로 인간의 이성이 그 탐구와 분석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한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등장할 것이며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를 아우르는 중요한 사상적 고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Ⅴ. 맺음말

1. 신 존재 증명 논의를 접으며

최초 본고의 목적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찾아보고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의 범위가 조금 확장되고 깊어져 필자 나름의 언어철학적 입장의 비판도 추가되었고 아울러 신 존재 증명 논의가 지닌 의미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전개가 오히려 본래의 취지를 약화시키고 본고의 일관성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진 인상도 있어 일견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으나 단순한 사적(史的) 검토만으로 논문을 채우기엔 안셀무스의 논증이 지니는 철학적 내포가 너무나 중요하게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열심히 논의들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분석하고 가능한 한 비판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철학사 전반에 대한 필자의 좁은 지식과 조야한 논지 전개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의 논증에 대한 논문 구상 단계에 있었던 본래의 인식과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었다. 그의 논의가 있은 지 거의 1,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현대 철학자들은 그 논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분석을 준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런 그들의 논의를 추적하고 또 개인적 해석들을 준비하면서 이 문제가 단순한 종교적 중요성만을 갖는 일회적인 주제가 아님도 자각할 수 있는 계기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러셀의 도움을 어느 정도는 받은 것이지만, 필자 개인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안셀무스의 논증을 비판할 수 있는 도구와 방법을 발견하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많은 논리적 약점과 구성의 허점이 눈에 보이지만 이러한 논지의 구성은 지금까지 학부 과정을 통해 배워온 많은 내용들에 대한 일정양의 정리와 종합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여러 모로 유익한 작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의 모든 가능성들은 지금껏 가르쳐주시고 지도해주신 철학과 선생님들의 심은(深恩)의 결과일 것이다. 더구나 안셀무스에 대한 반론과 논의의 궤적에 포함된 여러 논의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의 핵심적 주제들9)을 확인하고 문제제기 하게 된 것도 본고의 성과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제 앞으로의 과제이자 목표라고 한다면, 본론의 후반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논증의 배경이 되는 전체적인 철학사적 조감을 우선적으로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금 안셀무스와 이후 철학자들의 논의를 재검토하는 것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분석의 노력들이 형이상학을 비롯한 철학의 현대적 정체성 확인의 작업에 작으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여전하다. 앞으로 있을 철학적 사유에 대한 도전에 있어서, 신 존재 증명의 이성적 함의라고 필자가 이야기한 ‘이성의 초월적 지향’의 노력을 보다 치열한 모습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하며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논의를 맺고자 한다.

위르겐 몰트만의 하나님의 존재 증명

전영욱(Th. M)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처럼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토론된 문제는 다시 없었다. 하나님 논증 가능성은 한 쪽 분류의 사람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주장되었고, 다른 쪽 분류의 사람들에게는 논증 불가능하다고 주장되었다.1)

그러나 이러한 신(神) 존재 증명에 관한 논의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 의하여 철저히 비판되면서부터,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는 비판과 부정이 제기 되었다.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하나님 존재증명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신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비춰진 인간의 실존적 역사 지평에서 하나님은 인식될 수 있고, 종말에 가서야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2)

이스라엘의 종교는 ‘약속의 종교’이다. 좀더 엄밀히 말해서 이 ‘약속’은 하나님(인도)의 약속, 즉 계시의 말씀을 뜻하는 말이다. 약속은 인간을 미래적이게 하고, 역사적이게 한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향한 기대를 가지게 하며, 그 미래의 성취를 기대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 약속은 세계사적 역사나 인간 실존 자체의 역사성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역사에 귀결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이것을 ‘역사의 희망’이라고 표현한다. 약속되어진 역사는 아직 결정되지 않는 성취를 향해 일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일정한 경향은 성취를 향한 발전, 전진, 진보에 의해서 어제와 내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약속의 말씀이 실존의 사건 속에 들어가서 현실을 나누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부여한다.3)

이 약속의 말씀은 현재적 사건에서 신앙을 형성하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성취를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발견하게 한다. 만일 약속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고, 도식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약속되어졌으니 성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취의 주체가 “하나님께”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약속은 역사적으로 많은 희망을 나타내며, 역사적으로 경험되며, 하나님의 역사적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지평 안에서 현실을 경험한다. 또한 거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들을 역사(약속)의 지평 안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약속의 지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된 현실의 경험과 하나님에 의한 미래의 성취로부터 시작된 오시는 하나님의 주체적인 역사의 지평을 말하는 것이다.4)

1. 몰트만의 하나님 체험

몰트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에서 성서를 통한 실존적인 역사체험을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포로였던 그는 나찌의 대학살로 인한 죽음의 문제와 전쟁의 참혹함을 통하여 인간 실존의 무의미를 자각했고, 곧이어 죽음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실존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몰트만은 고백하기를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날 이후로 무엇 때문에 나는 죽지 않았겠는가?”5)

또한 몰트만은 스코틀랜드(Scottland)의 수용소에서 약속의 말씀을 경험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두 가지를 통해서 굴욕에서부터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성서를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서 입니다. …… 시편 39편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 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이 말은 곧 내 영혼의 말이었고, 내 영혼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였습니다.6)

몰트만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인도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며, 고난 중에 자신을 부활의 길로 인도하고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경험한다.

“이윽고 나는 수난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활의 위대한 희망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7)

몰트만의 하나님 체험은 역사 안에서, 성서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 실존적인 역사체험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존적으로 체험한 것과 흡사하다. 전쟁 중에 성서를 통한 하나님 경험은 희망과 고통의 힘으로서의 하나님 체험이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낸 곳은 전쟁의 치열함이 느껴지던 수용소의 성서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한다.

2.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체험

자연 신학(일반 계시)은 하나님을 지시하고 예감하게는 하지만 하나님을 증명하진 못한다. 반면에 계시 신학(특별 계시)은 성서의 증언에 따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신앙심을 일깨워 주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지평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체험케 한다.

옛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논증을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서 인식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적 현실 가운데 실현될 때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인식되었다. 그것은 자연 신학적인 하나님 증명이 아니고, 증명할 수 없는 분의 계시적인 체험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Jahweh)’로 나타난다. 이 단어는 ‘존재자’의 뜻을 갖고 있지만, 어원사적으론 오히려 ‘활동’을 뜻한다. 그래서 야웨의 뜻은 “나는 행동하는 자, 즉 역사 속에서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자로서 행동한다.”의 뜻을 가진다.8)

이것은 ‘자기 계시’, ‘자기 표현’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전개’를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이름에서 자기를 알 수 있게 하고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부터 자신을 노출하고 계시한다. 그러므로 ‘나는 야웨다’라는 의미는 예언자들이 표현하는 방식 속에서 -“야웨가 그의 백성에게…”- 미래적인 약속의 인식을 나타내며, 자신의 인격과 비밀을 드러내고, 미래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은, 약속의 이름임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야웨다’라는 표현은 종말의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능력 있는 자로 인식된다.9)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방법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선 개념으로 일정한 출현 형태와 출현 장소를 고정시키지 않으며, 자유로이 활동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본질로서, 미래를 가진 약속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며, 미래로부터 항상 오고 있는 하나님으로 이해된다.10)

신약 성서에서도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건 가운데 인식된다. 자유로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행위는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인간을 동정하며,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역사를 창조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역사(Historie) 안에 들어와 역사(Geschichte)가 된 것이며,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앞을 향해서는 미래를 바라보게 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고 실현되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1)

몰트만은 자연 신학적인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며,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만이 실존적 역사체험을 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며, 오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지, 존재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존재 증명은 인간의 실존에서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참되게 살려고(Menschwerdung) 노력하는 도중에 있는 것이며, 장차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하나님 인식은 모두 역사적이며, 단편적이다. 그리고 종말의 완성으로 몰아가는 잠정성(Vorläufigkeit)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개념은 미래를 향한 충분한 기대를, 희망을 제시 할 뿐이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하나님 존재 증명은 영속적인 과제이며, 하나님이 모든 일에서 입증되는 때에 비로소 가능하고 완성되어진다.12)

3. 자연신학의 부정성과 타당성

칸트의 실천 이성으로 자연 신학적인 신 증명이 부정되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격적 신앙이고, 아무 증명도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졌다. 만일 신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신앙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앙의 근거로부터는 하나님의 논증 불가능성을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논증 가능성과 그 뜻을 질문했던 것이다.13)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은 각각 지식(인식)과 신앙(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고, 예수의 역사와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서 밝히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앙은 곧 그가 믿는 대상의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때에는 언제나 ‘확실한 인식’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안셀름은 기독교 신앙을 앎과 이해의 차원으로 말한다. 신앙은 이성의 의문점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며, 이성에게 도리어 질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신앙은 질문과 희망을 가지고 사람의 이해 가운데, 불안과 자극과 미래를 향한 추진력과 계속적 ‘질문’이 된다. 믿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한 것처럼 믿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신학적인 하나님 논증은 인식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점과 신앙의 이해(신앙의 지성) 가운데에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직접 또 자발적으로 소유하는 인식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자연 신학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다.14)

자연 신학적인 하나님 논증은 ‘신앙의 이해'(신앙의 지성) 가운데 그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역사상에는 매우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가능하지만, 저 미래에는 완전히 나타남이며 “모두가 하나님을 면대해서 보는 때”,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때”에는 그 논증이 완전하다는 것이다. 자연 신학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계시되고 논증된다고 하는 것으로서 신앙의 전제가 될 수 없고, 오직 미래의 목표가 될 뿐이다. 자연 신학의 부정성이란, 인간의 인식 가운데서는 하나님 논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그 타당성이란, 미래의 목표로서 신앙의 이해를 구하는 인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무를 말할 수 없고, 오직 오시는 하나님으로부터(aus)만 그를 인식할 수 있다.15)

4. 전통적인 신(神) 존재 증명과 비판

1) 실존으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실존적 신증명)

성 아우구스티누스(S. Augustinus)가 그의 고백론에서 “하나님, 나는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었나이다.”라고 말한 것이 실존적 신 증명의 고전적인 형태이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과 연관되어지는 문제성으로부터 질문된 대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론이나 객관적인 진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 자체의 표현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이 자기의 실존을 파악할 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이며, 인간 존재의 가능성은 자신 스스로 그 가능성을 선택할 때에만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다.16)

실존적 증명은 특별 계시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성서의 역사와 역사적 증언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원칙 하에 나타난다. 실존주의는 텍스트에서 그 실존 이해를 묻고 성서 본문을 통하여 제기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질문과 자신의 현실에 대한 진리성의 주도적 질문 아래서 현재의 실존 가능성을 해석해 나간다. 또한 각 사람이 자신에게서 경험되는 현실의 의문과 요청으로부터 필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 이성의 요청에서만 가능하며, 내면적이고 주체적인 체험에서 가능한 것이다. 오직 개인적 신앙과 결단을 통해서만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신 존재 증명이다.17)

그러나 몰트만은 실존적 신 증명의 부당성을 실존의 상호관련성(Korrelation)으로 비판한다. 인간 현실의 삶은 세계사적 정황과 이해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개인의 실존은 세계사적 역사와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적 신 증명의 부당성은 성서의 해석과 의미를 세계사적 역사와 관련하여 이해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논증 없이 현실에서의 경험과 윤리적 결단으로 귀결되는 인간 실존에서만이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기에, 또한 무신론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18)

하나님 이해란 오직 자기 이해와 세계이해, 역사 이해와 역사성 이해가 서로 연관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신성이란 보편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자연 신학의 신 존재 증명은 모든 사물에게 또 모든 인간에게 보편 타당하게 인식되기를 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실존적 증명은 부당하다. 다만 인간 실존의 독특성과 진리성은 오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밝혀지며, 이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믿음이 있는 기독교적 사명에서만이 실현된다.

2)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우주론적, 목적론적 신증명)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의 ‘다섯 가지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1) 우주 최초의 ‘처음 원인'(Primum movens)이고, 그분이 안 계시다면 도대체 아무 것도 작용하지 못할 것이요,

(2) 제 1원인이므로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세계 과정에 단 하나의 원인도 작용하지 못할 것이며,

(3) ‘필연적인 존재자’이시니, 곧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존재자요, 그분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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