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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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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 칼럼 게시판(역대/목사,신학자) > 나는 양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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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 세 번째 – 양의 문이신 예수 < 오세용 목사의 각주없이 성경읽기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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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 세 번째 - 양의 문이신 예수 < 오세용 목사의 각주없이 성경읽기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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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장7절-8절 “나는 양의 문이라” 2021년 3월25일 – 이스트베이한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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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장7절-8절 “나는 양의 문이라” 2021년 3월25일 – 이스트베이한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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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 (렘 37:2~5, 요 10:7~10) – 목회자료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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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 : 기독교 : 미주 종교신문1위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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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 : 기독교 : 미주 종교신문1위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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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요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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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요 101-10)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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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일월에는 문을 주제로 하여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묵상한 첫 번째 문은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걱정 근심 등 그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벗어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여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래야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같이 거하시며 먹고 마시는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묵상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두 가지 문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는데, 오늘은 그래서 세 번째 문입니다.

문이 많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문을 자주 사용하니까, 그런 문쯤은 이제 들고 나고 하는데 이골이 났으니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벌써 1절에 문이 등장하지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문이 등장하는데, 어떤 문이냐? 양의 우리, 그러니까 양을 가두어 두고 보호하는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1절부터 5절에 걸쳐 예수님이 말씀을 끝냈는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5절까지 기록한 다음에, 이어서 재미있는 말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절).”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이 우리 지금 듣기로는 어려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이해가 잘되는데,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듣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친절한 우리 예수님,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실 수밖에요….

그렇게 7절 이하에서는 1절에서 5절까지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그 내용이 약간 달라집니다. 뭐가 달라졌을까요? 앞에서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 하셔서 은근히 예수님이 목자인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또한, 이것은 11절, 14절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나는 선한 목자라…(14절).”

그런데 유독 7절 이하에서는 다른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앞에서는 예수님은 양 우리를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는 목자인 데 비하여, 뒤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바로 오늘 본문, 즉 10장의 키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자, 이제 그 키포인트를 말씀드릴 터인데, 그전에 이것 하나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드나드는 문이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다른 데로,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다.

그 말은 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낮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그 우리는, 그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는 양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사람이 넘어가는 데까지는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양의 우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지 않는 목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울타리를 넘어다닐 수 없고, 오직 문으로만 다닐 수 있다. 자, 이런 기초 지식을 가지고 그다음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1절에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하시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 직접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니요? 양의 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개념이 바로 떠오르십니까? 문이란, 우리가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어느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거쳐 가는 장치, 시설을 말하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인 양으로 들어가는 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우리 흔히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문, 차의 문….병원의 문….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것을 말할 때엔, 집 문, 차 문, 병원 문, 이런 식으로 줄여 말하는데 양의 문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의 문을 병원의 문을 병원 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양 문이라 줄여 말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지을 때에 양문 교회,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아마 전주에도 양문교회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양의 문이라 할까요? 양이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데, 또 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하셨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래서 우리 성경으로는 양의 문이라,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놓은 문, 양을 위하여 만들어 놓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곧 1절에 나오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요 절도이지만, 우리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목자라 했는데, 바로 그 문, 목자가 드나드는 문, 그 문을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문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은 목자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양도 드나드는데, 내가 바로 그렇게 양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다, 그것을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따라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양이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 그렇다면 양이 드나드는 문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문을 통하여 양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양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당연히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곳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제 양이 양 문을 통하여 들어간 곳,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바로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실제적인 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 우리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생명을 얻게 되며, 두 번째로 풍성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온 사건… 그때 돌아온 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밖을 나가서 맨 처음에는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자와 늑대의 호시탐탐 노리는 죽음의 위협에 어찌 한순간인들 편할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가 겨우 살아나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양의 목숨은 이제 부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목숨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양이 다시 우리에 돌아온 사건, 그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하다는 말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이지만, 풍성하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지난번 묵상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였는데, 계시록 3장 17절에 의미 있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들, 곤고하다 가련하다, 벌거벗었다, 가난하다, 그런 말들이 바로 풍성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다음에 지난주 본문 말씀인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면서 하시는 말씀, 계시록 3장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들어가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저는 해석하기를 기쁨에 겨워, 그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잔치를 벌일 만큼 기쁨이 충만했으며 또한 그래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니만큼 음식이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그 풍성함이 바로 오늘 본문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 내가 온 것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니까 단순히 ‘풍성히’가 아니라 ‘더 풍성히’가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지금까지 얻었던 것보다 더, 양들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어서 먹고 있던 꼴 그것보다 더, 더 많이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되며, 꼴 또한 더 많이 더 많이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우리를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에 돌아온 양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처럼 그리고 그 양을 애지중지 거두며 보살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떠한 것이 유익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양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해야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양의 문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1절을 해석하면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오직 양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 푸른 초장을 만끽하며 더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여닫는 데 소용되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이 아니라, 벽에 불과한 것이다. 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앞에 보이는 문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마련해 놓으신 푸른 초장, 풍성한 꼴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두 주간,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을 보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또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 곳곳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여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렘 37:2~5, 요 10:7~10)

– 설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한국인은 귀소본능이 가장 발달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어디엘 갔다가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본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 민족은 유난히 고향을 찾고, 죽어서는 조상의 묘에 묻혀야 하고, 명절 때는 고향에 가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말들입니다.

영어로는 올라가는 기계라는 뜻의 ‘엘리베이터’(elevator)를 우리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기계라는 뜻으로 ‘승강기’라고 합니다. 서랍을 빼낸다는 뜻으로 ‘드로어’(drawer)라고 하지만 우리는 빼냈다가 다시 닫는 의미로 ‘빼닫이’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분명하여 들어가는 쪽에서는 입구(entrance), 나오는 쪽에서는 출구(exit)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의미로 양쪽을 ‘출입구’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갈 때는 입구, 나올 때는 출구의 기능이지만 우리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출입구의 통합적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도 전에 탑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문의 역할도 복잡합니다. 인터넷에 찾은 우리나라 문을 기능 별로 찾아 봤습니다. 문은 기능에 따라 성문(城門), 궐문(闕門), 아문(衙門), 객사문(客舍門), 정려문(旌閭門), 홍살문(紅箭門), 대문(大門), 중문(中門), 정문(正門), 후문(後門), 샛문(夾門;側門),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또는 仁王門), 암문(暗門), 수구문(水口門) 등으로 나뉩니다. 이 문들이 뭔지 알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문이 복잡합디다.

문의 역할은 들어가고 나오게 하는 통로입니다.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것이 문의 역할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들어가며 나오며”라고 하는데 이런 성경적 의미로 볼 때에 출입구라고 하는 우리의 말이 더 정확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또 다른 자기 증거는 “나는 양의 문이다”…(I am the gate)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문이신 예수님께로 들어가면(enter) 구원을 받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come in and go out) 꼴을 얻습니다.

목장의 하루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침에 목자가 양을 불러내고, 양이 목자를 신뢰하여 그 음성을 듣고 따라 나섭니다. 목자와 양과의 삶을 묘사한 목장의 삶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웨스트콧이라는 주경가는 “목장 생활의 요소는 첫째 안전, 둘째 자유, 셋째 보급 즉 먹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전과 자유와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목장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얻습니다.

문이란 헬라어의 ‘투라’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의 문이란 정상적인 통로를 의미합니다. 넘어다니는 곳이 아니라 정상적이며, 안전하고, 평안한 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문입니다. 양이 들어가고 사람이 정상적으로 양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투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내가 양의 문이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예수님은 양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원문의 뜻은 양들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문이 되십니다. 문이 되는 것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문이 되는 것은 복잡하지만 꼭 있어야 하고 평안케 하는 도구입니다.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양들만의 문입니다. 양이 아니면 환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이 아니면 아예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양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리는 아무대로나 들어갑니다.

성경의 양은 선한 동물입니다. 거룩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반면에 이리는 악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양과 이리를 대비하여 말씀하신 적이 많이 있습니다.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예수님을 “고난의 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9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세례 요한이 증언합니다. 그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해 성경은 우리를 황송하게도 예수님처럼 양이라 부르십니다. 놀라운 은혜이고 크나 큰 영광이지요.

이 문이 양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이리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양에게 그 문은 들어오게 하고, 보호하고, 소유합니다. 그 문은 좁으나 들어가면 엄청나게 넓은 목장이 있습니다. 그 목장에서 양은 쉼을 얻고, 꼴을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1800년대 미국의 대초원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어느 잡화점 주인에게 목장 주인이 들어와 양해를 구합니다. 울타리를 쳐야 하겠는데 외상으로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은 말합니다. “제이크씨, 이번 여름에 울타리를 칠겁니까?” “물론입니다.” “넓힐 겁니까, 아니면 줄일 겁니까?” “넓힐 겁니다. 강 건너까지 백만 평방미터 정도 확충할 계획입니다.” “좋은 계획이군요. 외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외상 거래를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때 주인은 말합니다. “울타리를 줄이는 사람은 소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지요. 넓히는 사람은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요. 저는 항상 울타리를 넓히는 사람에게만 외상을 줍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믿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울타리를 넓혀야 합니다. 좁은 문이지만 이 문을 넓혀야 합니다. 이 문에 믿고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시온의 대로가 있고, 넓은 세상의 복이 있습니다.

양의 문이란 양이면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입니다. 양이 두드리면 양에게 열리는 문입니다. 그런데 양이기를 거절하고, 두드리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열리지 않고, 들어가지 못하고, 닫힌 채로 두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양이 되세요. 양에게 예수님은 열립니다. 이리가 되지 마세요. 두드리세요. 양이 두드리면 기쁘게 열어주시고 받아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문이신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문입니다. “말미암아”라는 말은 “통하여”( through)라는 말입니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통하여 들어가야 구원을 받지, 비껴가거나, 넘어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비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비껴가는 것입니다.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예수다 라고 하는 사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껴가는 사람과 넘어가는 사람에게 구원과는 멉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except through me)라는 뜻입니다. 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문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이미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 이름도 구원자이십니다. 그 외에 구원자가 없습니다.

그 구원자가 왜 문입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통로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싫어하고, 힘들어 하는 문입니다. 넓은 문은 세상으로 향한 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좋아하고 쉬운 문입니다.

어떤 분은 재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께서 본향에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앞문을 계속 열어놓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지금도 열려 있고, 앞으로도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모든 세상의 끝이 올 때는 닫힙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미국 동부의 밀레니엄 극장에서 본 ‘노아’ 뮤지컬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방주를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동물들이 각각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들이 다 들어가자 방주의 문이 닫힙니다. 문은 하나님이 직접 닫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 7:16). 그 뮤지컬에서도 문은 사람이 닫지 않고 서서히 저절로 닫혔습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 있을 동안에만 기회가 있습니다. 닫힌 후에는 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그 방주 안에는 온갖 꼴이 있습니다. 밖에는 홍수가 있지만 안에는 극도의 평안이 있습니다. 갇힌 것 같지만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간 것만 하더라도 무한한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열처녀의 비유를 보세요. 기름을 예배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갔다가 돌아와서 문이 닫힌 다음에 열어달라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10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모든 상황이 끝난 것입니다. 그 때 다섯 쳐녀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애원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였습니다. 무서운 상황이 아닙니까?

찬송가 257장 2절입니다. “오는 사람들은 지체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우리 행할 길은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 예수님은 문입니다. 지금도 열고 기다리십니다. 문이 열렸을 때에 들어와야 합니다. 문이 열렸을 대에 아무쪼록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문 밖에서 있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문 안에 들어오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꼴을 얻게 하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무엇이다”고 하신 많은 말씀 가운데 첫째가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하신 것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떡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물며 양에게도 말할 필요 없이 꼴이 제일 중요합니다.

문 안에는 끝없는 초장이 펼쳐집니다. 양들이 좋아하는 온갖 푸른 풀이 있습니다. 양들이 마실 수 있는 맑은 시냇물이 있습니다. 그 문안에는 이리가 없는 안전 지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꼴이 풍성하여 양들은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꼴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세요.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문이 되신 이유입니다.

꼴은 생명의 풍성을 줍니다. 문 안의 꼴은 풍성한 생명을 주는 꼴입니다. 빈약한 꼴이 아닙니다. 병원에서 주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식사입니다. 병상에서 겨우 호흡하며, 손가락을 힘들게 까딱거리게 하며, 말도 억지로 한 마디하는 빈약한 상태가 아니라 에너지가 넘치는 발랄한 젊은 생명이 풍성한 이런 은총을 문 안에서는 얻습니다.

풍성한 꼴을 주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 꼴은 부족함이 없는 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계셔서 꼴을 만드시고, 공급하시고, 먹이십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제2부 후반에 보면 절망거인(Giant Despair)으로부터 구출되는 낙심씨(Mr. Despondency)와 그의 딸 질겁(Much-afraid),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들의 순례길을 힘들게 만든 심약씨(Mr. Feeble mind)와 그의 삼촌 두려움씨(Mr. Fearing), 지팡이 없이는 조금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주저씨(Mr. Ready-to-halt)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유약한 인간의 모습, 인생의 여정이 아닙니다. 풍성한 꼴을 공급받고, 힘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양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꼴입니다. 힘입니다. 낙심을 없이 합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프랑스의 노틀담 성당은 유명한 이유가 있답니다.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곱추’ 소설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이곳에서 드골대통령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잔 다르크의 복권식을 이곳에서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복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도 이곳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면 성당에 예수님의 가시관과 십자가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 자랑합니다.

노틀담 성당의 전면 조각에는 천당문이 있고, 28 유대왕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후대에 조각하였다는 노틀담의 곱추와 노동자의 임금을 주지 않고 잘난 척 하는 신부는 기둥을 바치고 힘겹게 서 있습니다.

한 때에 교회는 천당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이나 십자가의 일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되심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유일한 문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양으로 이 문으로 들어가 구원을 맛보며,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매일매일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꼴을 얻고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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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문을 양의 문이라고 합니다. 양문이란 양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성막에 들어갈 때 혼자들어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으려면, 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될 속죄양이 있어야 합니다. 성막문은 희생양과 함께 들어가는 곳이라고 해서 양문이라고 합니다.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올 때 양을 끌고 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들어올 때 나 혼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를 위해서 친히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피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값은 피로 갚아야 하는데, 내 죄를 내 피로 갚으면, 나는 죽고맙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인간 죄를 희생제물 피로 대신 갚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희생제사입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임금이 47년간 공사를 통해 크게 증축하였습니다. 이방인 뜰을 포함한 성전 전체 규모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1.5배, 런던 성 바오로 성당 2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이방인 뜰로 들어오는 북쪽 문 중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었습니다.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온 백성들이 이곳에서 제사장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 갖고 온 양을 검사받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차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양들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길에서 넘어지거나 가시에 찔려 상처가 나기도 했을 것입니다.양의 주인은 제사장에게 검사받기 전에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연못에서 먼저 양을 깨끗하게 씻고, 상처난 곳이 있으면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 연못이 연못입니다. 연못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양을 씻는 곳이라고 해서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베데스다 연못이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제물을 씻는 물이니까 치료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못에는 다섯 개의 행각(정자)가 있고, 그곳에는 온갖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연못 이름을 , 즉 이라고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을 때 시골에서 올라온 제자는 성전의 화려함을 구경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홀로 양문으로 나가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만났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는데, 이 병자는 물이 동할 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38년 동안이나 고침받지 못하고 그곳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예수님이 계신 곳이 참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로 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온갖 병자들이 모인 연못에 계셨습니다. 주의 교회가 말씀의 물이 동하는 곳,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모인 연못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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