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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여름성경학교 예배곡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동부, 어린이 찬양 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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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1-8) – 주일예배 설교 | 동탄영락교회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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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1-8) - 주일예배 설교 | 동탄영락교회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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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13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Novato Korean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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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13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Novato Korean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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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7) – 목회자료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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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Á¤¿¹¹è 365] (ìí) ³»°¡ ¿©±â ÀÖ³ªÀÌ´Ù – ±¹¹ÎÀ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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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선교단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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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1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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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1-8) – 주일예배 설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특별한 체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이사야의 생애에 있어서 일대전환을 이루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하여 참 신앙인, 선지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사야는 이 체험을 하기 이전에도 선지자였고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살아 움직이며 역사하시는 실제적인 분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림책 등을 통하여 호랑이가 있다고 배운 아이들은 직접 그것들을 보지 않고도 호랑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호랑이를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왜입니까? 아이들이 아는 호랑이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일 뿐 실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이 꼭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기에 믿기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기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크게 두려움도 없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기는 믿는데 믿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밋밋할 수밖에 없고, 또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 성격대로, 생각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실제로 산이나 들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워 온 몸이 마비되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전의 밋밋하였던 신앙자세에서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하여 강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몸서리치며 처절하리만큼 눈물콧물을 흘리며 간곡한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의 재산이나 명예가 전부인 줄 알고 뛰어다녔으나 하나님을 체험한 후로는 이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재산이나 명예, 심지어는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는 달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적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성경에 이사야 외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울로 변화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에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르게 믿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로는 그 삶이 변했습니다. 교회 핍박자에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놀라운 복음의 일꾼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의 그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다져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신앙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실제적인 분으로 느껴지며 그 분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강력한 인식이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의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분의 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직 이러한 체험이 없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체험을 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처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기도에 힘쓰는 사람, 불의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소망임을 삶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바로 이러한 변화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로 시작합니다. 16세에 왕이 된 웃시야는 남유다의 몇 안 되는 훌륭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신앙적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려고 힘썼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가니까 처음의 그 겸손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서히 교만해지기 시작해졌고, 심지어 자기가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맙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고유한 직무인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80명이나 되는 제사장들이 그를 말렸지만 끝까지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인데 뭐 어떠냐고 하며 분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식을 무시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형식과 마음이 조화를 이룬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웃시야 왕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건’을 잃은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치셨습니다. 그 대단한 왕이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나병을 앓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그 해를 가리킵니다.

웃시야 왕은 믿음이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러한 웃시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주셔서 무려 52년간 안정적이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1장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웃시야가 범죄한 이후에 유다는 신앙을 버리고 급격하게 향락과 사치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깊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시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던 손을 놓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손을 놓으시니까 어떻게 됩니까? 여지없이 이방나라들의 악행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압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이 죽을 무렵 태평성대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국제사회에서는 심각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이 되면서 주변나라들을 침탈하여 분위기가 아주 심각해졌고,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애굽도 세력을 키워가는 앗수르를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깊은 우울함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어찌될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또한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쪽에 가서 붙어야 할까? 남쪽 애굽에 붙어야 하나? 아니면 북쪽 앗수르에 붙어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영적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서 이사야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러한 영적인 불신의 시대 속에서도 한 가지를 놓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타락한 조국의 상황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여러분, 이사야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절대 권력인 왕은 죽고, 나라가 혼란하고,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던 그 때에 성전에서 눈을 들어 위를 보니 하나님이 여전히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깊은 절망과 좌절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그런 깊은 혼란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통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죽겠다 죽겠다’ 합니다.

절대적으로 의지할 곳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식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배경입니까? 아니면 건강입니까?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뵈었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 이 모든 우주와 만물을 친히 만드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2-3절 말씀에 이사야는 스랍들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서서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찬양 할 때에 4절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순간 이사야는 그 놀라운 모습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계셨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런데 그는 갑자기 겁이 났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는 하나님을 뵈었을 때 놀라운 감동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악한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게 되면 그 영광 앞에 압도되어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너무 깨끗한 곳 앞에 가면 내가 더러워서 조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탄식하며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사야는 자기 혼자 잘 믿는 사람처럼 살았고, 또 지금도 타락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탄식하며 그들의 죄악을 고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끊었는데, 하나님을 뵙고 보니 죄인중의 괴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자, 스랍중의 하나가 그를 향하여 뜨거운 숯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면서 말했습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그리고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긍휼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사야에게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그 음성 듣고 있던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무엇 때문에 살고, 내가 왜 살아야 되고, 내가 무엇을 해야 사람 노릇 제대로 하다가 살 수 있는지 고민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 앞에 겸손하게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지금껏 알지 못하던 새로운 카이로스의 시간, 은혜의 시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가 놀랍게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헛살았구나! 진짜, 부끄럽구나! 나는 뭐하고 살았나!” 자기의 재발견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지도 못할 때부터 이미 나를 사랑하고 계셨구나… 나는 부끄러운 죄인이로구나!”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 사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시작됩니다. 내가 뭐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과 가치관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은 똑똑하고 잘나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이제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고 싶습니다. 나 혼자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나는 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의 손에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면, 이제부터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나를 붙들어 이 자리에 앉혀 놓으신 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내 생명의 주인이신,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셨구나!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게 이사야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시옵소서.”

<기도> 하나님아버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친히 뵙지 못했을 때에는 백성들의 죄가 눈에 보이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며 기도했었는데, 하나님을 친히 뵙고 보니 진정한 회개의 대상이 바로 자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회개하는 이사야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도 다 이사야처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저희들도 친히 만나주셔서, 저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며, 그 가운데 생명을 살려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1월 18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제목;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본문: 이사야 6:1-13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의 ‘벼랑 끝으로 오라’라는 시입니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밀어내쳤을 때 도리어 그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나 봅니다. 날수 있는 놀라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훨훨 날면서 벼랑 끝에 서길 잘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벼랑 끝으로 오라고 할 때 갈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2015년 세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린지 18일째 되는 날입니다. 송구 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집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교우님들이 송구 영신 예배를 무척 중요시 여기나봐. 요즘 보면 항상 성탄 이브 예배 보다 많이들 오시거든.”

성탄 이브 예배는 7:30분에 시작하고 송구 영신 예배는 11:30분에 시작해서 자정을 넘기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런데 최근 경향을 보면 송구 영신 예배에는 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십니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아마 새 해에는 날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물론 좋은 바램입니다. 하나님은 송구 영신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의 마음의 소원을 다 기억하시고 또 이루어주실줄 압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날기 위해서는 벼랑 끝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벼랑 끝에 가 선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닐줄 압니다. 삶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송구 영신 예배는 참석할수는 있어도 벼랑 끝에 가 설수 있는 분들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요? 그러면 벼랑 끝에 가지 않고도 날을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늘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죽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곧 이어 하나님 보좌를 섬기는 스랍 천사가 나타납니다. 제단에서 집은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말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가 죄사함을 받았으니 목숨은 건졌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곧 이어 이사야는 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에 죽음을 간신히 면한 이사야가 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벼랑으로 이사야를 보내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어떻게 생각하면 벼랑입니다. 그러나 저는 벼랑 보다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계속 살펴 볼까요? 10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성경 말씀 중에 종종 이해하기가 어려운 귀절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귀절 중 하나가 바로 9, 1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도 후에 인용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더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기 위함으로 해석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먼저 사실이 아닌 점을 설명해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멀어진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문맥을 보면 분명히 멀어지게 하기 위한 뜻이 담겨져 있음을 간과할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느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전도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 많이 경험하셨을줄 압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을 닫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예 복음을 안 들었으면 그렇게 마음을 안 닫을텐데 복음을 들었기에 더 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많이 접한 사람이 도리어 복음 전도에 크게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 곳에서 유학생 목회에 관심이 많은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요즘 유학생들중 많은 학생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복음을 들었기에 더 문을 닫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멀어져 갈 것을 미리 경고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경고를 받은 이사야는 가만히 있을리가 없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의 질문은 당연하죠.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하는 이 고통의 시간을 언제까지 지속하시겠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황당한 답변을 받습니다. 복음을 거절해서 더욱 황폐해지고 더 황폐해질수가 없을 때까지라고 답변을 하십니다. 이사야는 아마 너무 황당하여 무어라 말할지를 잊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이유는 말씀을 전해서 더 이스라엘이 빨리 망하도록 하기 위함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더욱 망가지는 이스라엘을 보는 안타까운 운명의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요나처럼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자기 입으로 고백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혼자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 왜 내가 그런 고백을 하였나…?”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도 어쩔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산 사람이 없는데 스랍 천사가 숯을 입술에 대어주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무슨 말은 못합니까? 그래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얼떨결에 자기가 대답을 하였다고 해도 이사야는 자기가 보냄을 받아서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 올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하나님은 반대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슬픈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르셨고 자기는 서원을 했으니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아마 이사야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을줄 압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서원을 무를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선지자로서 소명을 다하자니 자기로 인해 더욱 하나님께 멀어져 갈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 때 이사야는 어떤 결심을 하였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 추측할수 있는 자료는 이사야의 고백에서 밖에 찾을수 없습니다. 저는 이사야의 고백 안에서 실마리를 잡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참담한 가운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지?” 그러면 그럴수록 이사야의 뇌리에는 자신의 고백이 자꾸 울려 퍼집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는 무릎을 치면서 일어납니다. “‘여기’를 사랑하는 선지자가 되어야지.”

사실 선지자는 바로 ‘여기’를 사랑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어디론가 보냅니다. 보내어진 곳에 가면 그 곳은 ‘저기’가 아닙니다. 그곳은 ‘여기’가 됩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고백 안에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는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보내어 진 곳이 더욱 황폐해 갈지라도 바로 자기가 서 있는 황폐한 ‘여기’를 사랑하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새로이 들립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 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물론 처음에는 남은 십분의 일도 마저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비보를 듣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희망의 멧세지가 들려 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나무들마다 특징이 있지만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의 특징은 제 아무리 짤려도 그루터기만 있다면 새로이 가지가 솟아나옵니다.

이사야가 보내진 ‘여기’라는 현장의 마지막은 새 싹이 돋아나오는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이사야는 자기가 보내진 현장 곧 ‘여기’를 사랑하며 충성된 선지자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시던 자기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인생을 사는데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례자의 삶입니다. 또 하나는 피난민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2015년도를 우리는 순례자로 살던지 피난민으로 살던지 할 것입니다. 순례자는 하늘나라를 목표로 향하여 살아 갑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로 가는 동력은 바로 여기를 사랑함으로 얻습니다. ‘여기’의 삶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늘나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이 아름답게 가꾸어집니다.

피난민은 여기가 싫어서 여기를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피난민은 ‘여기’가 아닌 곳을 찾아 항상 떠납니다.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여기’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목표 없이 어디론가 떠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피난민입니다.

피난민이 순례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물론 목표를 하늘나라로 삼아야 겠죠. 그런데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있는 여기를 사랑할 때 도리어 하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목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피어 오릅니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는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언젠가 소개해드렸던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님이죠.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라서 세상에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원하는 학교에 가기도 너무 어렵습니다. 이 때 어떤 결심을 합니까?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를 세상을 짝사랑하리라.”

그 후로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짝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가 되어서 서강대 교수가 됩니다.

장 교수님은 바로 ‘여기’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뿐입니까?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였던 박지성 선수가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자서전 제목은 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스스로 준비를 마쳤다고 해서 세상이 기회의 문을 선뜻 열어 주지 않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일들 속에서 날 지키기 위한 확실한 한 가지는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었다.”

박지성 선수가 기독교인임을 잘 아실줄 압니다. 박지성 선수가 그처럼 훌륭한 선수가 될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안에서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여기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 있었던 것임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 더 소개해 드릴까요? 최근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총각네 야채 가게의 대표 이영석 씨가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만서 가난에 쪼달립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조금씩 비뚤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인이나 경찰관이 되겠다는 현실적인 꿈을 가집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고3때 자신이 선천성 척추 기형임을 알게 됩니다. 경찰이나 군인이 될수도 없었습니다. 절망한 이 때 담임 선생님이 찾아 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너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영석아, 세상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세상을 받아들여라.”

그 후 세상에 마음을 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끝내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총각네 야채가가를 열어 큰 기업의 대표가 됩니다.

자기를 받아드리지 않는 ‘여기’를 사랑한 결과가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벼랑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벼랑을 싫어합니다. 저도 저희집 지붕이 낮지만 겁이 나서 올라가지 못합니다. 저도 벼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벼랑에 겁 없이 설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기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여기가 황폐한 곳일지라도 우리가 있기에 더 황폐해질수밖에 없는 곳일지라도 바로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기를 사랑하는 자를 저기로 보내십니다. 그들은 저기를 다시 여기로 생각하여 그곳을 사랑합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그가 거하는 곳이 어떻게 보면 더 황폐해 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더 악해져 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가 계신 곳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를 사랑하시기에 끝내 십자가에서 외치신 것이 아닐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한편 예수님의 이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주님처럼 ‘여기’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이사야처럼 죄 씻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죄 씻김을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자꾸 사회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알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때문에 더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언젠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고백하십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말씀을 거둡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시인이 말했다.

‘길은 없다. 당신이 걸어가며 만드는 것이 길이다.”

언제 길이 만들어질까요? 자기가 처한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여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저기’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2015년도 각자를 위한 아름다운 길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멀리 보고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곳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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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7)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7)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1)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2)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3)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4)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5)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6)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7)

<사무엘상 3장 1~7절>

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예수님은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쁠 때 / 슬플 때 … 가난할 때 / 부요할 때 …

늘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 (계 3:20)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도 열어야 하고, 귀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저를 좋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굴이 보기 싫어지고, 목소리가 듣기 싫어지고,

그러다보면 설교 듣기 싫어지고, 결국 예배에 안나오게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가 있는 교회에 오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저를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엘리와 사무엘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 정치 ․ 군사적 지도자는 ‘사사’였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실로의 대제사장이자 (삼상 1:9)

사사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엘리’와(삼상 4:18)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움으로

마지막 사사가 된 ‘사무엘’이 그 주인공입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제사장 엘리와 함께 살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던 중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았던 사무엘은

엘리를 찾아갔으나

엘리는 사무엘을 부른 적이 없다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잠자리에 다시 누운 사무엘은

또 한 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이번에도 엘리를 찾아갔으나 엘리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으나 (삼상 3:4)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 …”(삼상 3:7) 였던 까닭에

자신을 부른 분이 하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 듣지 못하는 엘리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엘리를 찾아갔던 것은

이해할 만 한 일입니다.

그러나 궁금증을 갖게 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엘리를 두고 왜 어린 사무엘을 찾으셨을까?’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하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비전 성경 사전」 p. 1143 참조.>

그러나 <사무엘상>을 보면

엘리는 제사장임에도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녀를 구하며 기도할 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끊으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삼상 1:12~14)

함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제물을 탐내어 가로채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삼상 2:12~17)

심지어는 두 아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것도 알았습니다.(삼상 2:22)

그러나 엘리는 아들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말로는 아들들의 죄가 크다고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삼상 2:23~25)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의 일꾼인 사람 …

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죄를 미워했지만

회개하고 죄를 바로잡으려 하거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행동은 할 줄 몰랐던 사람이 엘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엘리의 시대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려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도 있고 … 하나님께 제사도 드렸지만 …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하나님 뜻에 합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곳곳에 스케이트장이 많았습니다.

겨울에 논바닥이 얼면 그냥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곳이 없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를 했을 당시에는

어린이들과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전도하기 위해

겨울이면 동네 스케이트장에 많이 갔었습니다.

어느 날 지금의 원미구청 쪽에 있던 스케이트장에 학생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만나서 전도한 사람이 이덕수목사 동생 이명수집사님입니다.

그때부터 이명수집사가 우리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에는 학생들 집을 심방했습니다.

그때 이덕수목사님 어머니 지종순권사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이셨는데

아들이 다니는 교회 선생님이 왔다고 하니 심방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연합속회를 드리는 날

지권사님이 교회에 처음 나오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젊었을 때 스케이트를 타며

어린이들을 전도하려고 스케이트를 배우려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신학교 동기가 그 소식을 듣고

자기가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쳐주며 같이 전도할 테니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데리고만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대로 교회 주변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정해진 날에 스케이트장으로 갔습니다.

목사님의 친구는 얇은 신발만 신은 채 얼음판에 서서

“스케이트 날은 수직으로 세워라.”

“넘어지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라.”하며 열심히 가르쳤고

아이들은 금방 스케이트를 배웠습니다.

아이들을 다 돌려보낸 후에 목사님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던 친구와 둘이서 스케이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치던 친구가

스케이트를 신더니 얼음 위에서 계속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영문을 물었더니

자기도 오늘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탄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케이트를 배워보려고 유명한 강사한테

1주일 동안 비싼 돈을 주고 이론을 배웠는데

지금까지 그 강사를 흉내 내면서 이론만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 친구가 가진 이론은 완벽했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홍정길, 『301가지 감동스토리』 (서울: 프리셉트. 2003). p.75 참조.>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말씀 들으며 성경공부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사는 데에는 무기력한

이론적인 신앙은 아닌지,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의 담임자였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도왔던 인권 운동가

윌리엄 코핀(William Sloane Coffin, 1924-2006) 목사님은

「나는 믿나이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틀렸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이란

자신을 살피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에 투신하지 않는 인생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도 역시 틀렸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다.

<윌리엄 코핀, 『나는 믿나이다』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p. 27. 참조)>

우리의 삶과 신앙이 가치 있는 것은

‘신앙이 머리에 남아있을 때’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 감사하고 … 사랑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행동하는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머리만 커지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

아는 것을 토대로 목소리만 커지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

– 순종하는 사무엘

제사장인 엘리조차 영적으로 어두웠을만큼

“하나님의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던 때”였지만 …

(그리고 사람들이 환상을 보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_ 쉬운성경)

하나님께서는 일꾼으로 사용하실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그 음성을 들었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삼상 3:4, 5, 8)

최근 미국에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라는 분이

번역한 라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 성경은 현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 준비하면서 이 성경책을 많이 참조합니다.

우리가 쓰는 성경책이 새롭게 번역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너무 어려운 말로 번역되어 있고,

일상적인 단어가 아닌 것도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려면 자다가 일어난 어린 사무엘이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겠습니까.

“저 여기있는데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엘리가 부르는 소리로만 알았던 사무엘은

잠을 자던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에게로 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 그냥 가지 않았고

‘달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다 말고 빨리 달려갔던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 한 밤중일 때조차도

자신이 섬겨야 할 제사장에게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사무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무엘의 성실함은 자신을 찾은 음성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삼상 3:10)

사무엘은 사람에게도 … 하나님에게도 …

순종해야 할 자리에서 순종하며 쓰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환상 중에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신다면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뭘 해야 하죠?”라고 대답할 수 있으십니까?

순종의 사람인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건축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퇴직을 앞두고 사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멋진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퇴직하고 나면 자기와 상관없게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집을 지으며 공사를 대충대충 했습니다.

재료도 좋은 것을 쓰지 않았고 감독과 시공도 철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겨우 준공검사를 넘길 정도로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성되자 사장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나의 선물입니다.”

그는 자기 상을 자기가 만들어 자기가 받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에

“모든 일에 …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고 했습니다.

제사장 엘리 앞에서 …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했던 사무엘은

언제든지 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실함과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듣겠다는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끔 순종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 때로 순종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순종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머리입니다.

‘그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 왜 그래야 하는지 … 알 수 없어도

믿고 따르는 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사무엘의 말 속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 이유를 몰라도 …

듣고 행하겠다는 사무엘의 결단이

하나님께서 그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아버지 다윗을 생각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 (왕상 3:6)

성경에는 위대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더라도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겨루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회사를 이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4: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남들과 경쟁하지 않더라도

경쟁할 때 보다 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경쟁력’보다

‘순종력(順從力)’에 의해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벌써 20여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말이 되면 심방전도사님들이 한 주간동안 심방을 하고 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집에 갔었는지,

읽고 불렀던 성경, 찬송 … 등등 기록을 하여 제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심방보고서를 보다가

한 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기도 해주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집사님, 심방 갔다 오신 전도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이런 저런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하고 염려되어

전화했습니다.”라고 했더니 …

집사님이

“목사님, 전도사님 심방 안오셨는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 그럼 제가 잘못 전화했나보네요. 미안해요.”

라고 하며 얼른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고서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착한 제가 그때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은 그날 이후로 우리교회를 떠났습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하여, 보고서를 채우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 기둥교회는

새롭게 변화하려는 준비를 하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 교구를 늘렸습니다.

– 속회를 개편했습니다.

– 선교회를 새롭게 조직해 가고 있습니다.

– 교육부서에도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 교회 내 각 부서와 팀, 선교회마다

새로운 리더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헌신하는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동안 교회 일에 나서지 않으시던 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실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연말이 되어서 속회 … 선교회 … 교육부 … 찬양대 …

여러 부서에 필요한 헌신자를 세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이 권면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 보겠습니다. 제게 일 맡겨 주신다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핑계를 댑니다.

정말 그 일을 놓고 진심으로 기도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하지 말아라’고 하십니까?

이미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기도하고 / 고민하고 / 회의하여

믿고 신뢰할 만 한 분이라고 판단되어 부탁하고 권하면

‘아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정보 사회’, ‘지식 사회’라고 합니다.

그만큼 ‘아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직접 일일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내 것으로 갖습니까?

학교에서는 해당 분야에 교사 자격을 갖춘 선생님을 통해

필요한 지식을 … 필요한 수준에 맞추어 제공받습니다.

대학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에게 지식을 전달받습니다.

매일 같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소식들은 어떻습니까?

그 모든 뉴스거리를 개인이 다 취합하기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정치면 정치 / 경제면 경제 …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노력하여 …

간추린 소식을 뉴스만 시청하면 다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를 통해 들으면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에 전문가입니까?

여러분의 생활을 잘 이해하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하나님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시기도 하겠지만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중에,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제 작은 아들이 미국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기에

“아들아, 너는 영어가 자유롭고, 한국말도 스페인어도 잘하고 …

내가 보기에 네가 성품도 좋은 것 같은데 신학을 공부해서

선교사를 해보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안부르시는데 …”라고 하면서

형 하나면 됐지 자기까지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듣다보니 우리 교인들이 하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준비하여 목사가 부르면

하나님 뜻이 담겨져 있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갈림길에 서서야 듣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 쉬지 않고 기도하고 (살전 5:17)

–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시 1:3)

–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잠자는 중에라도 …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하며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무엘의 자세였습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정에서 … 일터에서 …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그렇게 외치며 일어나는 사람, 달려가는 사람

“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한 변화와 도전에 여러분을 부르실 때,

가정의 평안을 위하여 평안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교회에, 부서에 내가 낮아지고, 녹아져 소금이 되고

타서 빛이 되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순종하는

사무엘과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 모두 귀하게 쓰임 받는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계서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모여 예배드리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 했습니다.

하나님 생활 속에 실천하는 하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머리만 커진 성도, 목소리만 큰 성도가 아니라

생활 속에 빛 되고 소금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살며 얻은 소득을 하나님께 구별합니다.

하나님, 성도들의 정성된 예물을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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