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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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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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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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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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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무주 상보 시 영어 | [즉문즉설]무주상과 상, 대체 뭔가요 59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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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ìë³´ì – 2theDays | ì기ê³ë°, ê°ì°, ìì´ê³µë¶, ë¸ë¡ê·¸, ìê°ì주ëì´ì¼ê¸° | Vingle, Interest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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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상보 시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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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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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 – 조미정 – Google Sá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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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 – 조미정 – Google Sách Updating 거리를 두고 나를 보다!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는 한국에서 월급 98만 원 비정규직으로 시작해 여러 직장을 부유하다 지금은 호주에 살고 있는 저자가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깨달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생계보다 고상하다고 믿었던 꿈을 버렸지만 불안하지 않고, 무엇이든 돼야 한다는 다짐과 야망이 없어도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저자는 부유할수록 마음은 가벼워진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 두기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작은 스노볼로 여기기로 한 저자는 손바닥만큼 작은 스노볼 세계에서는 자신이 눈송이만큼 작아져서 ‘호주에 온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하는 불안과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의심과 불안에도 가볍게 흔들릴 수 었고, 그렇게 의구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작고 사소한 존재가 되려고 할수록 오히려 내면은 점점 더 확장되었고, 그렇게 가벼운 흔들림만으로도 타인과 비교 없이 자신의 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쓸모를 증명하지 않고 빈틈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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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것으로서,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었다.
이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요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보았다.
무주 상보 시 영어 | [즉문즉설]무주상과 상, 대체 뭔가요 59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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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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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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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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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는 ‘무주상(無住相)’을 강조한다. 무주상(無住相)을 직역하면 상(相)에 머무름(住) 바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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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푼다는 생각이나 대가 (代價) 없이 베푸는 공덕 (功德). Non-abing charity, charity with no set mind, or offering of blessing wi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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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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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 없이 행할 때 더욱 다워지는 의미의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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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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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 – 신信 – 부처님을 믿고, 해解 –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행行 – 믿고 이해한 바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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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주(心無所住)’로 번역되는 apratiṣṭha-mānasa1), ‘무주처열반(無住處 … 진심직설(眞心直說) 에서는 금강경 의 구절을 인용하여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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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無主相布施)라는 말이 있다.’ 보시란 ‘남에게 내 것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며, “상(모양)에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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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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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mond Sutra
金剛般若波羅密經
금강반야바라밀경
Translated by Mr. Alex Johnson and posted at www.diamond-sutra.com
-*-*-*-
부처님의 말씀은 푸른색으로
수보리 존자님의 말씀은 초록색으로
객관적인 설명 부분은 검은 색으로 구분하여
읽는 분들이 혼동없이 읽으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Chapter 1.
This is what I heard.
At one time the Buddha was staying in the Jeta Grove, near the city of Sravasti.
With him there was a community of 1,250 venerable monks and devoted disciples.
One day before dawn, the Buddha clothed himself, and along with his disciples took up his alms bowl and entered the city to beg for food door to door, as was his custom.
After he had returned and eaten, he put away his bowl and cloak, bathed his feet, and then sat with his legs crossed and body upright upon the seat arranged for him.
He began mindfully fixing his attention in front of himself, while many monks approached the Buddha, and showing great reverence, seated themselves around him.
Chapter 2.
After a time a most venerable monk named Subhuti, who was sitting in the congregation, rose from his seat.
He uncovered his right shoulder, placed his right knee on the ground, and as he joined his palms together he respectfully bowed and then addressed the Buddha:
“Most Honored One, It is truly majestic how much knowledge and wisdom your monks and disciples have been given through your most inspired teachings! It is remarkable that you look after our welfare so selflessly and so completely.”
“Most Honored One, I have a question to ask you. If sons and daughters of good families want to develop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if they wish to attain the Highest Perfect Wisdom, what should they do to help quiet their drifting minds and help subdue their craving thoughts?”
The Buddha then replied:
“So it is as you say, Subhuti. Monks and disciples have been favored with the highest favor by the Buddha, the monks and disciples have been instructed with the highest instruction by the Buddha. The Buddha is constantly mindful of the welfare of his followers. Listen carefully with your full attention, and I will speak to your question.”
“If sons and daughters of good families want to develop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if they wish to attain the Highest Perfect Wisdom and quiet their drifting minds while subduing their craving thoughts, then they should follow what I am about to say to you. Those who follow what I am about to say here will be able to subdue their discriminative thoughts and craving desires. It is possible to attain perfect tranquility and clarity of mind by absorbing and dwelling on the teachings I am about to give.”
Then the Buddha addressed the assembly.
Chapter 3.
“All living beings, whether born from eggs, from the womb, from moisture, or spontaneously; whether they have form or do not have form; whether they are aware or unaware, whether they are not aware or not unaware, all living beings will eventually be led by me to the final Nirvana, the final ending of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And when this unfathomable, infinite number of living beings have all been liberated, in truth not even a single being has actually been liberated.”
“Why Subhuti? Because if a disciple still clings to the arbitrary illusions of form or phenomena such as an ego, a personality, a self, a separate person, or a universal self existing eternally, then that person is not an authentic disciple.”
Chapter 4.
“Furthermore, Subhuti, in the practice of compassion and charity a disciple should be detached. That is to say, he should practice compassion and charity without regard to appearances, without regard to form, without regard to sound, smell, taste, touch, or any quality of any kind. Subhuti, this is how the disciple should practice compassion and charity. Why? Because practicing compassion and charity without attachment is the way to reaching the Highest Perfect Wisdom, it is the way to becoming a living Buddha.”
“Subhuti, do you think that you can measure all of the space in the Eastern Heavens?”
“No, Most Honored One. One cannot possibly measure all of the space in the Eastern Heavens.”
“Subhuti, can space in all the Western, Southern, and Northern Heavens, both above and below, be measured?”
“No, Most Honored One. One cannot possibly measure all the space in the Western, Southern, and Northern Heavens.”
“Well, Subhuti, the same is true of the merit of the disciple who practices compassion and charity without any attachment to appearances, without cherishing any idea of form. It is impossible to measure the merit they will accrue. Subhuti, my disciples should let their minds absorb and dwell in the teachings I have just given.”
Chapter 5.
“Subhuti, what do you think? Can the Buddha be recognized by means of his bodily form?”
“No, Most Honored One, the Buddha cannot be recognized by means of his bodily form. Why? Because when the Buddha speaks of bodily form, it is not a real form, but only an illusion.”
The Buddha then spoke to Subhuti:
“All that has a form is illusive and unreal. When you see that all forms are illusive and unreal, then you will begin to perceive your true Buddha nature.”
Chapter 6.
Subhuti respectfully asked the lord Buddha, “Most Honored One! In the future, if a person hears this teaching, even if it is a only a phrase or sentence, is it possible for that person to have a true faith and knowledge of Enlightenment awaken in their mind?”
“Without a doubt, Subhuti. Even 500 years after the Enlightenment of this Buddha there will be some who are virtuous and wise, and while practicing compassion and charity, will believe in the words and phrases of this Sutra and will awaken their minds purely. After they come to hear these teachings, they will be inspired with belief. This is because when some people hear these words, they will have understood intuitively that these words are the truth.”
“But you must also remember, Subhuti, that such persons have long ago planted the seeds of goodness and merit that lead to this realization. They have planted the seeds of good deeds and charity not simply before one Buddhist temple, or two temples, or five, but before hundreds of thousands of Buddhas and temples. So when a person who hears the words and phrases of this Sutra is ready for it to happen, a pure faith and clarity can awaken within their minds.”
“Subhuti, any person who awakens faith upon hearing the words or phrases of this Sutra will accumulate countless blessings and merit.”
“How do I know this? Because this person must have discarded all arbitrary notions of the existence of a personal self, of other people, or of a universal self. Otherwise their minds would still grasp after such relative conceptions. Furthermore, these people must have already discarded all arbitrary notions of the non-existence of a personal self, other people, or a universal self. Otherwise, their minds would still be grasping at such notions. Therefore anyone who seeks total Enlightenment should discard not only all conceptions of their own selfhood, of other selves, or of a universal self, but they should also discard all notions of the non-existence of such concepts.”
“When the Buddha explains these things using such concepts and ideas, people should remember the unreality of all such concepts and ideas. They should recall that in teaching spiritual truths the Buddha always uses these concepts and ideas in the way that a raft is used to cross a river. Once the river has been crossed over, the raft is of no more use, and should be discarded. These arbitrary concepts and ideas about spiritual things need to be explained to us as we seek to attain Enlightenment. However, ultimately these arbitrary conceptions can be discarded. Think Subhuti, isn’t it even more obvious that we should also give up our conceptions of non-existent things?”
Chapter 7.
Then Buddha asked Subhuti, “What do you think, Subhuti, has the Buddha arrived at the highest, most fulfilled, most awakened and enlightened mind? Does the Buddha teach any teaching?”
Subhuti replied, “As far as I have understood the lord Buddha’s teachings, there is no independently existing object of mind called the highest, most fulfilled, awakened or enlightened mind. Nor is there any independently existing teaching that the Buddha teaches. Why? Because the teachings that the Buddha has realized and spoken of cannot be conceived of as separate, independent things and therefore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 in them is uncontainable and inexpressible. It neither is, nor is it not. What does this mean? What this means is that Buddhas and disciples are not enlightened by a set method of teachings, but by an internally intuitive process which is spontaneous and is part of their own inner nature.”
Chapter 8.
“Let me ask you Subhuti? If a person filled over ten thousand galaxies with the seven treasures for the purpose of compassion, charity, and giving alms, would this person not gain great merit and spread much happiness?”
“Yes, Most Honored One. This person would gain great merit and spread much happiness, even though, in truth, this person does not have a separate existence to which merit could accrue. Why? Because this persons merit is characterized with the quality of not being merit.”
The Buddha continued, “Then suppose another person understood only four lines of this Sutra, but nevertheless took it upon themselves to explain these lines to someone else. This person’s merit would be even greater than the other person’s. Why? Because all Buddhas and all the teachings and values of the highest, most fulfilled, most awakened minds arise from the teachings in this Sutra. And yet, even as I speak, Subhuti, I must take back my words as soon as they are uttered, for there are no Buddhas and there are no teachings.”
Chapter 9.
Buddha then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one who has entered the stream which flows to Enlightenment, say ‘I have entered the stream’?”
“No, Buddha”, Subhuti replied. “A true disciple entering the stream would not think of themselves as a separate person that could be entering anything. Only that disciple who does not differentiate themselves from others, who has no regard for name, shape, sound, odor, taste, touch or for any quality can truly be called a disciple who has entered the stream.”
Buddha continued, “Does a disciple who is subject to only one more rebirth say to himself, ‘I am entitled to the honors and rewards of a Once-to-be-reborn.’?”
“No, Lord. ‘Once-to-be-reborn’ is only a name. There is no passing away, or coming into, existence. Only one who realizes this can really be called a disciple.”
“Subhuti, does a venerable One who will never more be reborn as a mortal say to himself, ‘I am entitled to the honor and rewards of a Non-returner.’?”
“No, Perfectly Enlightened One. A ‘Non-returner’ is merely a name. There is actually no one returning and no one not-returning.”
“Tell me, Subhuti. Does a Buddha say to himself, ‘I have obtained Perfect Enlightenment.’?”
“No, lord. There is no such thing as Perfect Enlightenment to obtain. If a Perfectly Enlightened Buddha were to say to himself, ‘I am enlightened’ he would be admitting there is an individual person, a separate self and personality, and would therefore not be a Perfectly Enlightened Buddha.”
Subhuti then said, “Most Honored One! You have said that I, Subhuti, excel amongst thy disciples in knowing the bliss of Enlightenment, in being perfectly content in seclusion, and in being free from all passions. Yet I do not say to myself that I am so, for if I ever thought of myself as such then it would not be true that I escaped ego delusion. I know that in truth there is no Subhuti and therefore Subhuti abides nowhere, that he neither knows nor does he not know bliss, and that he is neither free from nor enslaved by his passions.”
Chapter 10.
The Buddha then continued, “What do you think, Subhuti? When I was in a previous life, with Dipankara Buddha, did I receive any definite teaching or attain any degree of self-control, whereby I later became a Buddha?”
“No, honorable one. When you were a disciple of Dipankara Buddha, in truth, you received no definite teaching, nor did you attain any definite degree of self-control.”
“Subhuti, know also that if any Buddha would say, ‘I will create a paradise,’ he would speak falsely. Why? Because a paradise cannot be created nor can it not be uncreated.”
“A disciple should develop a mind which is in no way dependent upon sights, sounds, smells, tastes, sensory sensations or any mental conceptions. A disciple should develop a mind which does not rely on anything.”
“Therefore, Subhuti, the minds of all disciples should be purified of all thoughts that relate to seeing, hearing, tasting, smelling, touching, and discriminating. They should use their minds spontaneously and naturally, without being constrained by preconceived notions arising from the senses.”
“Suppose, Subhuti, a man had an enormous body. Would the sense of personal existence he had also be enormous?”
“Yes, indeed, Buddha,” Subhuti answered. “His sense of personal existence would be enormous. But the Buddha has taught that personal existence is just a name, for it is in fact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So it only has the name ‘personal existence’.”
Chapter 11.
“Subhuti, if there were as many Ganges rivers as the number of grains of sand in the Ganges, would you say that the number of grains of sand in all those Ganges rivers would be very many?”
Subhuti answered, “Very many indeed, Most Honored One. If the number of Ganges rivers were that large, how much more so would be the number of grains of sand in all those Ganges rivers.”
“Subhuti, I will declare a truth to you. If a good man or a good woman filled over ten thousand galaxies of worlds with the seven treasures for each grain of sand in all those Ganges rivers, and gave it all away for the purpose of compassion, charity and giving alms, would this man or woman not gain great merit and spread much happiness?”
Subhuti replied, “Very much so, Most Honored One.”
“Subhuti, if after studying and observing even a single stanza of this Sutra, another person were to explain it to others, the happiness and merit that would result from this virtuous act would be far greater.”
Chapter 12.
“Furthermore, Subhuti, if any person in any place were to teach even four lines of this Sutra, the place where they taught it would become sacred ground and would be revered by all kinds of beings. How much more sacred would the place become if that person then studied and observed the whole Sutra! Subhuti, you should know that any person who does that would surely attain something rare and profound. Wherever this Sutra is honored and revered there is a sacred site enshrining the presence of the Buddha or one of the Buddha’s most venerable disciples.”
Chapter 13.
Subhuti said to the Buddha, “By what name shall we know this Sutra, so that it can be honored and studied?”
The lord Buddha replied, “This Sutra shall be known as
‘The Diamond that Cuts through Illusion’.
By this name it shall be revered and studied and observed. What does this name mean? It means that when the Buddha named it, he did not have in mind any definite or arbitrary conception, and so named it. This Sutra is hard and sharp, like a diamond that will cut away all arbitrary conceptions and bring one to the other shore of Enlightenment.”
“What do you think, Subhuti? Has the Buddha taught any definite teaching in this Sutra?”
“No lord, the Buddha has not taught any definite teaching in this Sutra.”
“What do you think, Subhuti? Are there many particles of dust in this vast universe?”
Subhuti replied: “Yes, many, Most Honored One!”
“Subhuti, when the Buddha speaks of particles of dust, it does not mean I am thinking of any definite or arbitrary thought, I am merely using these words as a figure of speech. They are not real, only illusion. It is just the same with the word universe; these words do not assert any definite or arbitrary idea, I am only using the words as words.”
“Subhuti, what do you think? Can the Buddha be perceived by means of his thirty-two physical characteristics?”
“No, Most Honored One. The Buddha cannot be perceived by his thirty-two physical characteristics. Why? Because the Buddha teaches that they are not real but are merely called the thirty-two physical characteristics.”
“Subhuti, if a good and faithful person, whether male or female, has, for the sake of compassion and charity, been sacrificing their life for generation upon generation, for as many generations as the grains of sands in 3,000 universes; and another follower has been studying and observing even a single section of this Sutra and explains it to others, that person’s blessings and merit would be far greater.”
Chapter 14.
At that time, after listening to this Sutra, Subhuti had understood its profound meaning and was moved to tears.
He said, “What a rare and precious thing it is that you should deliver such a deeply profound teaching. Since the day I attained the eyes of understanding, thanks to the guidance of the Buddha, I have never before heard teachings so deep and wonderful as these. Most Honored One, if someone hears this Sutra, and has pure and clear confidence in it they will have a profound insight into the truth. Having perceived that profound insight, that person will realize the rarest kind of virtue. Most Honored One, that insight into the truth is essentially not insight into the truth, but is what the Buddha calls insight into the truth.”
“Most Honored One, having listened to this Sutra, I am able to receive and retain it with faith and understanding. This is not difficult for me, but in ages to come – in the last five hundred years, if there is a person who hears this Sutra, who receives and retains it with faith and understanding, then that person will be a rare one, a person of most remarkable achievement. Such a person will be able to awaken pure faith because they have ceased to cherish any arbitrary notions of their own selfhood, other selves, living beings, or a universal self. Why? Because if they continue to hold onto arbitrary conceptions as to their own selfhood, they will be holding onto something that is non-existent. It is the same with all arbitrary conceptions of other selves, living beings, or a universal self. These are all expressions of non-existent things. Buddhas are Buddhas because they have been able to discard all arbitrary conceptions of form and phenomena, they have transcended all perceptions, and have penetrated the illusion of all forms.”
The Buddha replied:
“So it is, Subhuti. Most wonderfully blest will be those beings who, on hearing this Sutra, will not tremble, nor be frightened, or terrified in any way. And why? The Buddha has taught this Sutra as the highest perfection. And what the Buddha teaches as the highest perfection, that also the innumerable Blessed Buddhas do teach. Therefore is it called the ‘highest perfection’.”
“Subhuti, when I talk about the practice of transcendent patience, I do not hold onto any arbitrary conceptions about the phenomena of patience, I merely refer to it as the practice of transcendent patience. And why is that? Because when, thousands of lifetimes ago, the Prince of Kalinga severed the flesh from my limbs and my body I had no perception of a self, a being, a soul, or a universal self. If I had cherished any of these arbitrary notions at the time my limbs were being torn away, I would have fallen into anger and hatred.”
“I also remember Subhuti that during my five hundred previous lives I had used life after life to practice patience and to look upon my life humbly, as though I were a saint called upon to suffer humility. Even then my mind was free of arbitrary conceptions of the phenomena of my self, a being, a soul, or a universal self.”
“Therefore, Subhuti, disciples should leave behind all distinctions of phenomena and awaken the thought of the attainment of Supreme Enlightenment. A disciple should do this by not allowing their mind to depend upon ideas evoked by the world of the senses – by not allowing their mind to depend upon ideas stirred by sounds, odors, flavors, sensory touch, or any other qualities. The disciple’s mind should be kept independent of any thoughts that might arise within it. If the disciple’s mind depends upon anything in the sensory realm it will have no solid foundation in any reality. This is why Buddha teaches that the mind of a disciple should not accept the appearances of things as a basis when exercising charity. Subhuti, as disciples practice compassion and charity for the welfare of all living beings they should do it without relying on appearances, and without attachment. Just as the Buddha declares that form is not form, so he also declares that all living beings are, in fact, not living beings.”
Chapter 15.
“Subhuti, if on the one hand, a son or daughter of a good family gives up his or her life in the morning as many time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Ganges river as an act of generosity, and gives as many again in the afternoon and as many again in the evening, and continues doing so for countless ages; and if, on the other hand, another person listens to this Sutra with complete confidence and without contention, that person’s happiness will be far greater. But the happiness of one who writes this Sutra down, receives, recites, and explains it to others cannot even be compared it is so great.”
“Subhuti, we can summarize by saying that the merit and virtue of this Sutra is inconceivable, incalculable and boundless. The Buddha has declared this teaching for the benefit of initiates on the path to Enlightenment; he has declared it for the benefit of initiates on the path to Nirvana. If there is someone capable of receiving, practicing, reciting, and sharing this Sutra with others, the Buddha will see and know that person, and he or she will receive immeasurable, incalculable, and boundless merit and virtue. Such a person is known to be carrying the Supreme Enlightenment attained by the Buddha. Why? Subhuti, if a person is satisfied with lesser teachings than those I present here, if he or she is still caught up in the idea of a self, a person, a living being, or a universal self, then that person would not be able to listen to, receive, recite, or explain this Sutra to others.”
“Subhuti, wherever this Sutra shall be observed, studied and explained, that place will become sacred ground to which countless spiritually advanced beings will bring offerings. Such places, however humble they may be, will be revered as though they were famous temples, and countless pilgrims will come there to worship. Such a place is a shrine and should be venerated with formal ceremonies, and offerings of flowers and incense. That is the power of this Sutra.”
Chapter 16.
“Furthermore, Subhuti, if a good man or good woman who accepts, upholds, reads or recites this Sutra is disdained or slandered, if they are despised or insulted, it means that in prior lives they committed evil acts and as a result are now suffering the fruits of their actions. When their prior life’s evil acts have finally been dissolved and extinguished, he or she will attain the supreme clarity of the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Subhuti, in ancient times before I met Dipankara Buddha, I had made offerings to and had been attendant of all 84,000 million Buddhas. If someone is able to receive, recite, study, and practice this Sutra in a later, more distant age, then the happiness and merit brought about by this virtuous act would be hundreds of thousands of times greater than that which I brought about by my service to the Buddhas in ancient times. In fact, such happiness and merit cannot be conceived or compared with anything, even mathematically. If I were to explain all this in detail now some people might become suspicious and disbelieving, and their minds may even become disoriented or confused. Subhuti, you should know that the meaning of this Sutra is beyond conception and discussion. Likewise, the fruit resulting from receiving and practicing this Sutra is beyond conception and discussion.”
Chapter 17.
At that time, the venerable Subhuti then asked the Buddha, “World-Honored One, may I ask you a question again? If sons or daughters of a good family want to develop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if they wish to attain the Highest Perfect Wisdom, what should they do to help quiet their drifting minds and master their thinking?”
The Buddha replied:
“Subhuti, a good son or daughter who wants to give rise to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must create this resolved attitude of mind: ‘I must help to lead all beings to the shore of awakening, but, after these beings have become liberated, in truth I know that not even a single being has been liberated.’ Why is this so? If a disciple cherishes the idea of a self, a person, a living being or a universal self, then that person is not an authentic disciple. Why? Because in fact there is no independently existing object of mind called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What do you think, Subhuti? In ancient times, when the Buddha was living with Dipankara Buddha, did he attain anything called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No, Most Honored One. According to what I understand from the teachings of the Buddha, there is no attaining of anything called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The Buddha said:
“You are correct, Subhuti. In fact, there does not exist any so-called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that the Buddha attains. Because if there had been any such thing, Dipankara Buddha would not have predicted of me, ‘In the future, you will come to be a Buddha known as The Most Honored One’. This prediction was made because there is, in fact, nothing to be attained. Someone would be mistaken to say that the Buddha has attained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because there is no such thing as a highest, most fulfilled, or awakened mind to be attained.”
“Subhuti, a comparison can be made with the idea of a large human body. What would you understand me to mean if I spoke of a ‘large human body’?”
“I would understand that the lord Buddha was speaking of a ‘large human body’ not as an arbitrary conception of its being, but as a series of words only. I would understand that the words carried merely an imaginary meaning. When the Buddha speaks of a large human body, he uses the words only as words.”
“Subhuti, it is just the same when a disciple speaks of liberating numberless sentient beings. If they have in mind any arbitrary conception of sentient beings or of definite numbers, then they are unworthy of being called a disciple. Subhuti, my teachings reveal that even such a thing as is called a ‘disciple’ is non-existent. Furthermore, there is really nothing for a disciple to liberate.”
“A true disciple knows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a self, a person, a living being, or a universal self. A true disciple knows that all things are devoid of selfhood, devoid of any separate individuality.”
To make this teaching even more emphatic, the lord Buddha continued,
“If a disciple were to speak as follows, ‘I have to create a serene and beautiful Buddha field’, that person is not yet truly a disciple. Why? What the Buddha calls a ‘serene and beautiful Buddha field’ is not in fact a serene and beautiful Buddha field. And that is why it is called a serene and beautiful Buddha field. Subhuti, only a disciple who is wholly devoid of any conception of separate selfhood is worthy of being called a disciple.”
Chapter 18.
The Buddha then asked Subhuti, “What do you think? Does the Buddha have human eyes?”
Subhuti replied, “Yes, he has human eyes.”
“Does he have the eyes of Enlightenment?”
“Of course, the Buddha has the eyes of Enlightenment, otherwise he would not be the Buddha.”
“Does the Buddha have the eyes of transcendent intelligence?”
“Yes, the Buddha has the eyes of transcendent intelligence.”
“Does the Buddha have the eyes of spiritual intuition?”
“Yes, lord, the Buddha has the eyes of spiritual intuition.”
“Does the Buddha have the eyes of love and compassion for all sentient beings?”
Subhuti agreed and said, “Lord, you love all sentient life.”
“What do you think, Subhuti? When I referred to the grains of sand in the river Ganges, did I assert that they were truly grains of sand?”
“No blessed lord, you only spoke of them as grains of sand.”
“Subhuti, if there were as many Ganges river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river Ganges, and if there were as many buddhaland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all those innumerable rivers, would these buddhalands be considered numerous?”
“Very numerous indeed, lord Buddha.”
“Subhuti, I know the mind of every sentient being in all the host of universes, regardless of any modes of thought, conceptions or tendencies. For all modes, conceptions and tendencies of thought are not mind. And yet they are called ‘mind’. Why? It is impossible to retain a past thought, to a seize future thought and even to hold onto a present thought.”
Chapter 19.
The Buddha continu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f a follower were to give away enough treasures to fill 3,000 universes, would a great blessing and merit incur to him or her?”
Subhuti replied, “Honored one, such a follower would acquire considerable blessings and merit.”
The lord Buddha said:
“Subhuti, if such a blessing had any substantiality, if it were anything other than a figure of speech, the Most Honored One would not have used the words ‘blessings and merit’.”
Chapter 20.
“Subhuti, what do you think, should one look for Buddha in his perfect physical body?”
“No, Perfectly Enlightened One, one should not look for Buddha in his perfect physical body. Why? The Buddha has said that the perfect physical body is not the perfect physical body. Therefore it is called the perfect physical body.”
“Subhuti, what do you think, should one look for Buddha in all his perfect appearances?”
“No Most Honored One, one should not look for Buddha in all his perfect appearances. Why? The Buddha has said perfect appearances are not perfect appearances. Therefore they are called perfect appearances.”
Chapter 21.
“Subhuti, do not maintain that the Buddha has this thought: ‘I have spoken spiritual truths.’ Do not think that way. Why? If someone says the Buddha has spoken spiritual truths, he slanders the Buddha due to his inability to understand what the Buddha teaches. Subhuti, as to speaking truth, no truth can be spoken. Therefore it is called ‘speaking truth’.”
At that time Subhuti, the wise elder, addressed the Buddha, “Most Honored One, will there be living beings in the future who believe in this Sutra when they hear it?”
The Buddha said:
“The living beings to whom you refer are neither living beings nor not living beings. Why? Subhuti, all the different kinds of living beings the Buddha speaks of are not living beings. But they are referred to as living beings.”
Chapter 22.
Subhuti again asked, “Blessed lord, when you attained complete Enlightenment, did you feel in your mind that nothing had been acquired?”
The Buddha replied:
“That is it exactly, Subhuti. When I attained total Enlightenment, I did not feel, as the mind feels, any arbitrary conception of spiritual truth, not even the slightest. Even the words ‘total Enlightenment’ are merely words, they are used merely as a figure of speech.”
Chapter 23.
“Furthermore Subhuti, what I have attained in total Enlightenment is the same as what all others have attained. It is undifferentiated, regarded neither as a high state, nor a low state. It is wholly independent of any definite or arbitrary conceptions of an individual self, other selves, living beings, or a universal self.”
“Subhuti, when someone is selflessly charitable, they should also practice being ethical by remembering that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one’s self and the selfhood of others. Thus one practices charity by giving not only gifts, but through kindness and sympathy. Practice kindness and charity without attachment and you can become fully enlightened.”
“Subhuti, what I just said about kindness does not mean that when someone is being charitable they should hold onto arbitrary conceptions about kindness, for kindness is, after all, only a word and charity needs to be spontaneous and selfless, done without regard for appearances.”
Chapter 24.
The Buddha continued:
“Subhuti, if a person collected treasures as high as 3,000 of the highest mountains, and gave them all to others, their merit would be less than what would accrue to another person who simply observed and studied this Sutra and, out of kindness, explained it to others. The latter person would accumulate hundreds of times the merit, hundreds of thousands of millions of times the merit. There is no conceivable comparison.”
Chapter 25.
“Subhuti, do not say that the Buddha has the idea, ‘I will lead all sentient beings to Nirvana.’ Do not think that way, Subhuti. Why? In truth there is not one single being for the Buddha to lead to Enlightenment. If the Buddha were to think there was, he would be caught in the idea of a self, a person, a living being, or a universal self. Subhuti, what the Buddha calls a self essentially has no self in the way that ordinary persons think there is a self. Subhuti, the Buddha does not regard anyone as an ordinary person. That is why he can speak of them as ordinary persons.”
Chapter 26.
Then the Buddha inquired of Subhuti: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it possible to recognize the Buddha by the 32 physical marks?”
Subhuti replied, “Yes, Most Honored One, the Buddha may thus be recognized.”
“Subhuti, if that were true then Chakravartin, the mythological king who also had the 32 marks, would be called a Buddha.”
Then Subhuti, realizing his error, said, “Most Honored One, now I realize that the Buddha cannot be recognized merely by his 32 physical marks of excellence.”
The Buddha then said:
“Should anyone, looking at an image or likeness of the Buddha, claim to know the Buddha and worship him, that person would be mistaken, not knowing the true Buddha.”
Chapter 27.
“However, Subhuti, if you think that the Buddha realizes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and does not need to have all the marks, you are mistaken. Subhuti, do not think in that way. Do not think that when one gives rise to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one needs to see all objects of mind as nonexistent, cut off from life. Please do not think in that way. One who gives rise to the highest, most fulfilled, and awakened mind does not contend that all objects of mind are nonexistent and cut off from life. That is not what I say.”
Chapter 28.
The lord Buddha continued:
“Subhuti, if someone gives treasures equal to the number of sands on the shores of the Ganges river, and if another, having realized the egolessness of all things, thereby understands selflessness, the latter would be more blessed than the one who practiced external charity. Why? Because great disciples do not see blessings and merit as a private possession, as something to be gained.”
Subhuti inquired of the lord Buddha, “What do you mean ‘great disciples do not see blessings and merit as a private possession’?”
The Buddha replied:
“Because those blessings and merit have never been sought after by those great disciples, they do not see them as private possessions, but they see them as the common possession of all beings.”
Chapter 29.
The Buddha said:
“Subhuti, if any person were to say that the Buddha is now coming or going, or sitting up or lying down, they would not have understood the principle I have been teaching. Why? Because while the expression ‘Buddha’ means ‘he who has thus come, thus gone,’ the true Buddha is never coming from anywhere or going anywhere. The name ‘Buddha’ is merely an expression, a figure of speech.”
Chapter 30.
The lord Buddha resumed:
“Subhuti, if any good person, either man or woman, were to take 3,000 galaxies and grind them into microscopic powder and blow it into space, what do you think, would this powder have any individual existence?”
“Subhuti replied, “Yes, lord, as a microscopic powder blown into space, it might be said to have a relative existence, but as you use words, it has no existence. The words are used only as a figure of speech. Otherwise the words would imply a belief in the existence of matter as an independent and self-existent thing, which it is not.”
“Furthermore, when the Most Honored One refers to the ‘3,000 galaxies,’ he could only do so as a figure of speech. Why? Because if the 3,000 galaxies really existed, their only reality would consist in their cosmic unity. Whether as microscopic powder or as galaxies, what does it matter? Only in the sense of the cosmic unity of ultimate being can the Buddha rightfully refer to it.”
The lord Buddha was very pleased with this reply and said:
“Subhuti, although ordinary people have always grasped after an arbitrary conception of matter and galaxies, the concept has no true basis; it is an illusion of the mortal mind. Even when it is referred to as ‘cosmic unity’ it is unthinkable and unknowable.”
Chapter 31.
The lord Buddha continued:
“If any person were to say that the Buddha, in his teachings, has constantly referred to himself, to other selves, to living beings, or to a universal self, what do you think, would that person have understood my meaning?”
Subhuti replied, “No, blessed lord. That person would not have understood the meaning of your teachings. For when you refer to those things, you are not referring to their actual existence, you only use the words as figures of speech, as symbols. Only in that sense can words be used, for conceptions, ideas, limited truths, and spiritual truths have no more reality than have matter or phenomena.”
Then the lord Buddha made his meaning even more emphatic by saying:
“Subhuti, when people begin their practice of seeking to attaining total Enlightenment, they ought to see, to perceive, to know, to understand, and to realize that all things and all spiritual truths are no-things, and, therefore, they ought not to conceive within their minds any arbitrary conceptions whatsoever.”
Chapter 32.
Buddha continued:
“Subhuti, if anyone gave to the Buddha an immeasurable quantity of the seven treasures sufficient to fill the whole universe; and if another person, whether a man or woman, in seeking to attain complete Enlightenment were to earnestly and faithfully observe and study even a single section of this Sutra and explain it to others, the accumulated blessing and merit of that latter person would be far greater.”
“Subhuti, how can one explain this Sutra to others without holding in mind any arbitrary conception of forms or phenomena or spiritual truths? It can only be done, Subhuti, by keeping the mind in perfect tranquility and free from any attachment to appearances.”
“So I say to you –
This is how to contemplate our conditioned existence in this fleeting world:”
“Like a tiny drop of dew, or a bubble floating in a stream;
Like a flash of lightning in a summer cloud,
Or a flickering lamp, an illusion, a phantom, or a dream.”
“So is all conditioned existence to be seen.”
Thus spoke Buddha.
의 힘
은 부처님께서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들로 하여금 각자가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밝히도록 말씀하신 내용이다. 즉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들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 온갖 걱정과 잘못된 생각을 끊고 참마음을 깨달아 지혜를 얻어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가르치신 설법說法을 기록한 經典이다.
의 본래 이름은 이다.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지혜로써 어리석음을 잘라 없애고 열반涅槃에 이르는 방법을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은 중국 선종禪宗의 발전과 더불어 오조五祖 홍인弘仁과 육조六祖 혜능慧能 대사 이래로 대승경전大乘經典 가운데 으뜸으로 여겨져 범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혀져 왔다. 또한 과 함께 우리나라 선종禪宗 종단宗團인 의 근본 사상을 담고 있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기도 하다.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의 핵심이며 은 반야사상의 요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은 원래 암송暗誦 – 기억되어 소리 내어 낭송되어 오다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졌다. 훗날 중국에 전하여진 다음 무려 여덟 번에 걸쳐 한역漢譯 –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 중에서 중국,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읽혀온 판본板本은 서기 402년 구마라습鳩摩羅什(348~413)에 의해 최초로 번역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도 구마라습 본을 근거로 하였다.
은 한자 약 5천 4백 여자로 이뤄진 짧고 간결한 경전이다. 은 본래 통으로 쓰였고 하나의 일관된 문장으로 읽혔다. 이를 양梁 나라 무제武帝의 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내용에 따라 32개의 분절分節로 나누었다. 무제는 불심이 깊어 절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고 스님들을 공양하는 등 많은 불사를 이뤘다. 그는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 첫 번째 조사祖師였던 달마대사達磨大師에게 자신의 공덕에 관하여 물었다. 달마대사는 아무런 공덕도 없다는 “무無”라는 한마디로 대답 하였다. 비록 무제가 많은 법보시法布施와 재보시財布施를 하였다 하나 에서 반복하여 강조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지는 않은 까닭에서 이런 답변을 들었을 것이다.
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해공제일解空第一 – 공空의 도리道理에 가장 밝은 제자인 수보리 사이에 오고간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내고서는 “응운하주應云何住며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하고 여쭈었다. 부처님은 이에 답하여 설법하셨다. 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보라고 하였을 때의 바로 그 마음을 어떻게 내고, 머무르며, 다스릴 것인가를 말씀하셨다.
마음이란 무엇이며 마음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마음은 섬세하고 예민하며 미묘하기 때문에 파악하기 어렵다. 마음은 자신이 경험하였던 마음 밖 세상의 사물과 일들을 낱낱이 느끼고 인식하고 기억한다. 또한 제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도 자각하고 객관화 하며 더 나아가 이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과 행위를 펼쳐가는 힘이 있다. 자연 속의 모든 사물事物은 본능本能에 따른 인과를 벋어나지 못하고 자연의 법칙을 따라 순환하고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오직 마음을 지닌 인간만이 이러한 자신의 윤회하는 삶까지도 자각한다. 그리고 이런 자각을 바탕으로 자신이 앞으로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창조적 의지를 일으키고 실천하여 성취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즉 마음은 우리들 인식과 감정과 동작의 능동적能動的 주체이면서 동시에 수동적受動的 대상이 되는가 하면 스스로 發展하고 변화하여 가는 주인공主人公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여러 갈래의 복잡한 기능을 하다 보니, 온갖 잡다한 번뇌를 일으키고 괴로움에 빠지고 헤매기도 한다. 그래서 이를 반성하여 번뇌를 끊고 적정寂靜한 마음의 안식安息과 열반涅槃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여쭈어 본 것도 올바르게 마음을 내고 올바르게 마음을 다스려 쓰는 방법이다.
부처님이 깨달아 가르치신 근본 가르침에 따르면 우주 안의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은 서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어 있음으로써 연기緣起, 즉 인연생기因緣生起 – 연을 따라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연기하는 까닭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현상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으며, 제행무상諸行無常 –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은 모든 의식작용은 변화하며, 따라서 열반적정涅槃寂靜 – 탐진치貪瞋癡 –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마음만이 적정寂靜 – 산란하지 않고 평온하다. 따라서 이런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되고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갈등葛藤이 풀어지고 마음속의 그릇된 집착에서 벗어나 평온을 회복하여 자유로워지는 것이 해탈解脫인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현상을 밝혀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잘 씀은 바로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목표이다. 그래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 이 세 가지를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삼법인三法印으로 삼았다.
부처님은 마음속에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과 과정을 십이연기十二緣起로써 깨닫고 설명하셨다. 연기는 무명無明 – 어두움에서 시작된다. 무명은 우리들 마음이 밝지 않음이며, 실상實相-참된 모습을 알지 못 하고 착각 속에 사는 미망迷妄-어리석음의 첫 단계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망에 빠져있는 것도 마음이며, 또한 이것을 깨뜨리고 무명을 밝히는 작용을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을 깨뜨려 무명을 밝히는 것은 반야般若의 지혜智慧이다. 즉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어 있는 존재의 실상인 연기의 도리道理 즉 법法을 깨달아 얻은 지혜이다. 이러한 맑고 깨친 마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과거에 자신이 지은 업장業障 – 그릇된 행위를 저지른 과보로 받는 장애를 참회懺悔를 통하여 소멸시키고, 미래에 얻고자 하는 과 깨달음을 위하여 살아가면서 발원發願하고 수행修行을 하여야 한다. 부처님은 이런 해탈의 과정을 실제로 성취하여 보여주신 위대한 스승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다.
마음은 정태적靜態的으로 가만히 있지 않고 늘 움직인다. 마음은 연이어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조건들에 상호 의존하고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한다. 조금도 쉼이 없이 연기한다. 따라서 이렇게 어지럽게 변하고 발전하는 마음을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마음의 괴로움으로부터 벋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음 속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에서는 모든 번뇌와 고통의 원인을 아상我相 –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아에 집착하고 자만하는 아상을 비롯하여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네 가지 상相에 집착하는 데에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네 가지 상을 깨뜨리고 이들이 무상無相임을 깨쳐 ‘무주無住의 행行’을 실천할 것을 권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我’를 중심에 두고 일체를 바라본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나’라는 존재가 실체적 존재로서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무명無明에 있다고 파악하셨다. ‘나’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신념은 모든 헛된 욕망의 뿌리이자 고통의 씨앗임으로 ‘나’라는 실체적 존재가 있다는 착각 – 아상我相을 깨어 부수면 아상에서 비롯된 모든 고통 – 이기심과 질투심, 탐욕과 욕망, 불안과 공포, 슬픔과 비탄 등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나라는 생각이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 환상이며 거짓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쳐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과 집착, 자만심 등 고통을 낳는 모든 해로운 생각을 떨쳐내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현상에는 실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은 모든 집착과 번뇌와 고통이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무아無我를 통찰하고 깨달아 바른 수행을 하면 자유자재하며 걸림이 없는 진정한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무아의 깨달음을 통하여 회복되고 고양되고 확장되고 자유로워진 “참나 – 진아眞我”는 세상을 정견正見 – 바르게 보고,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며, 정어正語 – 바른 말을 하며, 정업正業 – 바르게 행위를 한다. 즉 팔정도八正道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간다. 또한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아 화합하게 된다. 이때 나 자신과 나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과의 사이에 고통이 없는 평등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즉 자신 내부의 마음의 평화와 함께 인연생기하며 더불어 사는 모든 사물에 대한 따듯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의 실천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무상無相과 무아無我를 강조하는 에서는 “없을 무無” 자字“가 24번이나 나온다. 또 다른 부정의 한자漢字인 ”아닐 비非” 자字는 46번, “아닐 부不” 자字는 무려 114번이나 나온다. 또한 벗어남을 뜻하는 “떠날 이離” 자字가 4번, 금지를 뜻하는 “말 막莫” 자字가 5번이나 나온다. 에서 이런 한자들의 뒤에 나오는 것은 모두 철저히 부정되거나 금지 내지 극복되어야 할 것들이다. 의 경문經文은 이런 문자들로써 부정否定에 부정을 거듭하고 있다.
부처님은 에서 이중부정二重否定 – 한 번 부정한 것을 다시 한 번 부정하여 긍정을 이끌어 내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긍정까지도 상대적인 명색名色 – 헛이름과 헛된 모양으로 보는 까닭에 이중부정에 의하여 도출된 긍정마저도 다시 부정한다. 그렇다고 긍정이 다시 부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질문을 던진 수보리가 스스로 절대적 진리의 모습을 바로 보고 터득하고 체험하여 드러낼 때까지 계속 부정을 연이어 가면서 묻고 답하게 하신다. 즉 부정의 무한반복無限反復의 과정을 통하여 명색에의 집착을 완전히 떨치어버리게 하고 무상無相의 진리를 체득體得시키고 증득證得시키는 것이다. 이런 반복적인 부정을 통한 정화淨化의 과정의 끝에서 수보리는 비로소 청정심淸淨心-아무런 것에도 집착하지 않은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상에 머물지 않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보시布施 – 남에게 재물이나 진리의 가르침을 나누고 베푸는 자비행慈悲行을 통하여 깨달음을 실천하고 완성한다.
이와 같은 의 부정의 논리를 학자들은 “卽非즉비 -> 是名시명의 논리”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부정과 긍정에 이어 또다시 부정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굳어버린 뒤바뀐 생각을 철저하게 깨어 부수어,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기 위함이다. 즉 “즉비卽非 -> 시명是名”의 사유思惟는 번뇌를 깨고 반야의 지혜로 이끄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무엇이 무엇이 아니고 이름이 무엇일 뿐이다”는 논리는 모든 실상이 아닌 것에 대한 분별, 집착, 망상을 끊게 하여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이 본래의 마음 – 본성本性으로 돌아가 착한 마음과 행위를 내도록 하는 논리적 수단이며 장치이다. 즉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을 이어가는 가운데 양변兩邊 – 긍정과 부정의 양쪽을 다 버리고 나면 걸림이 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중도中道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에 해당되는 문구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卽非菩薩이니라”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如來所說身相이 卽非身相이니다”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세”
시복덕 즉비복덕성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세 是名莊嚴이니다”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佛說般若波羅蜜이 卽非般若波羅蜜일세 是名般若波羅蜜이니라”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諸微塵을 如來說非微塵일세 是名微塵이며”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如來說世界도 非世界일세 是名世界이니라”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일세 是故로 如來說名實相이니다”
시명세계 즉비실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세 是名三十二相이니라”
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實無有法을 名阿羅漢이니이다”
실무유법 명아라한
의 부정의 논리는 우리들로 하여금 일상생활 속에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여러 가지 착각과 언어적 표현의 한계와 함정으로부터 벋어나게 한다. 즉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인생사人生事의 본질을 바로 볼뿐 아무런 선입관이나 개념에 취取하고 주住하고 집착執着하지 않도록 하는 논리이다. 즉 상相에도 착着 – 집착하지 하지 말며, 주住 – 머물지 말 것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 방법이다. 따라서 은 비록 5천 4백여 자의 짧은 경전이나 600권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다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에는 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空”이란 말도 초기 경전에 나오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을 담은 개념화된 용어들도 일체 나오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일반 대중 누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담백하고 쉬운 일상의 언어만을 가지고 상相에 착着하지 말며 주住하지 말 것만을 반복하여 쉽게 설법하는 가운데 불교사상의 핵심을 모두 드러내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소박하고 담백한 가르침 속에 의 위대한 힘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 위대한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혹시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에 집착하거나, 가르침이 교리敎理로 굳어 버리고 우상화偶像化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汝等比丘는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니 法尙應捨커든 何況非法이랴”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과 같이 알라. 법도 버리거늘 어찌 법이 아닌 것을 버리지 않겠느냐”
뗏목은 강을 건너가기 위한 탈것으로 궁극적 목적目的이 아니라 방편方便일 뿐이다. 뗏목을 타는 목적은 강의 이쪽 – 차안此岸을 떠나 저쪽 – 피안彼岸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강을 건너가고 난 다음에는 뗏목을 버리고 그 다음의 목적지로 다시 떠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은 다음 그 깨달음에만 머물고 집착한 다면 독각獨覺 – 홀로 깨닫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즐거움에만 머무는 수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다음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 나아가 중생을 위하여 깨달은 진리의 실천에 힘써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다음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의 자리를 떠나 여거如去 – 이같이 떠난 모습을 보이시고, 다시 우리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들에게로 여래如來 – 이와 같이 다가오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행하신 출가出家 – 법을 구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첫 번째 결단에 못지않은 위대한 두 번째 결단인 것이다.
훗날 선종의 선사禪師들은 이런 부처님의 회향廻向 – 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이 되게 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결단의 행동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 30미터쯤 되는 높은 대나무 끝에 올라서 허공으로 한 발 더 딛고 나아가라”는 비유比喩로써 가르쳤다. 즉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다음 그 경지와 자리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이를 다시 버리고 중생衆生을 제도하기 위하여 맨발로 설법의 길로 나아가셨듯이 한 걸음 더 중생을 위한 실천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백 척 대나무 끝에서 허공으로 한 발 더 내딛고 나아갈 때 비로소 지혜의 깨달음이 지혜의 실천으로 한 번 더 비약되는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였을 때 추락墜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상飛翔하는 것에 선가禪家의 묘의妙意가 숨이 있다 하겠다.
은 이와 같이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들로 하여금 부처님 말씀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는 가운데 하루하루 일상의 삶 속에서 각자가 이러한 실상의 이해를 통하여 참마음을 회복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권할 뿐이다. 즉 일차적으로는 믿고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되겠으나, 그 다음에는 믿고 이해한 바를 실천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일상의 평범한 마음 – 평상심平常心에서 저절로 울어나야 한다. 이것이 무상無相과 무주無住의 참뜻이다. 여기에 의 부정과 역설의 논리의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이다.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처음 발심發心하였을 때의 순수한 종교적 동기와 영감을 지켜가면서 진리의 가르침과 깨달음에도 집착하고 머물지 않는 것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던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을 우상화하여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넘어 진리의 실천으로 나아가 무애無碍의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삶의 모습을 45년간 실증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고 열반涅槃의 자리에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불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붓다의 가르침은 언제나 스스로 깨치고 실천함이지 부처에만 기대어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훗날 거칠면서도 호방한 선풍禪風으로 유명한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 임제臨濟 의현義玄 선사는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이들아! 참다운 법을 터득하려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봉불살불蓬佛殺佛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봉조살조蓬祖殺祖 –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이며, 봉나한살나한蓬羅漢殺羅漢 –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 하였다. 이 말을 실제로 불상佛像을 파괴하고, 조사와 나한의 목숨을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뒤에 오는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나 조사나 나한의 가르침에만 머물지 말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정진하여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라는 가르침이다. 조사를 넘어, 부처를 넘어 더 높고 깊으며, 넓고, 자유로운 경지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답으로 이어진 은 우리가 수지독송受持讀誦 – 받아 지니고 소리 내어 읽어 가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저절로 “무주상無住相”의 경지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실천으로 이끌어지도록 쓰여 있다. 즉 부처님은 비록 같거나 비슷한 말씀으로 수보리가 완전히 알아 깨치고 체득할 때까지 반복하여 묻고 또한 답하고 있다. 마치 위대한 교향악곡에서 각 악장의 주제가 되는 멜로디를 반복反復과 변조變調를 통하여 계속하여 들려주는 가운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알아듣고 감동하며 공명共鳴하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따라서 을 받아 지녀 소리 내어 읽으면 이런 반복된 경문을 수도 없이 읽는 가운데 저절로 몸에 배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마치 교향악을 수없이 듣는 가운데 저절로 악상의 흐름을 기억하고 읊조리게 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순화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수지독송受持讀誦에 따른 복덕福德의 수승殊勝함 – 빼어남은 우리로 하여금 을 더욱 소중히 하고 가깝게 하도록 이끈다.
에서 상황의 설명이나 겹치어 되풀이되는 부분을 빼고 나면 다음과 같은 주요한 구절句節로 요약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늘 중요한 설법의 내용을 말씀하시고 난 다음 네 줄로 된 게송偈頌 – 운문체韻文體의 시구詩句의 형태를 빌어 설법을 마무리 하셨는데, 이를 사구게四句偈라고 한다. 에 나오는 사구게는 다음과 같다.
첫 사구게는 여래실견분如來實見分 제5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이다.
凡所有相 무릇 있는 바 상相은
범소유상
皆是虛妄 다 이것이 허망하니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만약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면
약견제상비상
卽見如來 곧 여래를 보리라
즉견여래
두 번째 사구게는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0에 나온다.
不應住色生心 응당히 어떤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고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또 소리 향기 맛 촉감 법 이런데 머물지 말고 마음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을 낼 것이고
應無所住 응당히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응무소주
而生其心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생기심
세 번째 사구게는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6에 나오는 게송이다.
若以色見我 만약 몸의 모습으로서 나를 보거나
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거나 하면
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시인행사도
不能見如來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불능견여래
마지막 사구게는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제32에 부처님이 설법을 끝내는 자리에서 읊으신 마지막 게송이다.
一切有爲法 일체 조작이 있는 일은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또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
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 꼭 이와 같이 보라
응작여시관
위의 네 개의 게송이 뜻하는 바는 한 말로하면 결국 상相을 깨라는 가르침이다. “이일체제상離一切諸相 즉명제불則名諸佛 – 모든 相을 떠난 것을 곧 부처라고 이름 한다” 하여 상相을 떠나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즉 우리들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인식하는 것과 인연의 화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은 실상實相이 아니니 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상離相 – 상을 떠남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상을 떠남으로써 모든 아집我執 –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실상實相을 보라는 것이다.
옛 선사들이 “하심下心 – 마음을 내려라”거나 “허심虛心 – 마음을 비우라”거나, “방하착放下着 – 내려놓아라” 라고 말씀하심도 모두 우리들 마음속의 아상我相과 이로 말미암은 온갖 번뇌와 망상을 비우고 내려놓아 마음을 쉬게 하라는 것이다. 마음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낮추는 것은 어떠한 집착도 가지지 않고, 스스로 나라고 하는 상도 내지 않고, 일체의 교만, 자만도 털어버리는 일이다. 모든 분별과 대립과 차별상을 여위고 어지러웠던 마음의 짐을 풀어 내려놓고,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에 물들어 망상과 번뇌로 싸인 마음을 내려놓으란 것이다. 마음을 해방解放 – 풀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얽혀있는 온갖 번뇌,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허상임을 깨달았으니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고정관념, 선입견 등을 버리고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하는 것들은 모두 인연에 따라 생기고 멸함으로 영원치 않고 허망함을 알라는 것이다. 이 모두가 다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과 번개와 같음을 바로 보고 집착하지 말며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일을 하라는 것이다. 즉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과 일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바로 보고 생멸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바른 마음으로 걸림이 없이 마음을 내고 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부정과 버림과 비움을 통한 위대한 긍정肯定의 삶이다.
첫 사구게로써 부처님은 삼제三諦 – 모든 현상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즉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 무릇 있는 바 상相은 다 허망하다”라는 것은 공제空諦 –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말씀하심이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면”이라고 말씀하심은 가제假諦 –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즉견여래卽見如來 – 곧 바로 여래를 보리라”하심은 중제中諦 – 공空이나 가假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진리 즉 공空과 가假는 둘이 아니라는 중도中道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첫 번째 사구게로써 모든 것이 성주괴공成住壞空 – 생겨나서 머물다 허물어져 없어지며, 우리의 인생이 생로병사生老病死 –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무상無常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삼라만상이 연기緣起할 뿐 상주불변常住不變함이 없음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함을 설하신 것이다.
이를 다시 시적詩的 비유로써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 일체 조작이 있는 일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또 이슬과 같고 , 번갯불과 같다. 꼭 이와 같이 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부처님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 응당히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씀으로 깨달음의 인식을 윤리적 행위로 옮겨 실천할 때의 바른 마음가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무소주無所住 – 머무는 바 없다“란 집착함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런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행함을 말한다. 따라서 아무런 차별도 없고, 바라는 바도 없이 행한다. 과거나 미래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깨어 몰두하여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즉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의 바탕이 되는 무주無住의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네 개의 사구게 안에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 또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다 들어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마음 –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고자 하는 초발심初發心 –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이를 지키는 것이 바로 戒이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흐트러뜨리지 않음이 정定이며, 이렇게 얻은 반야의 지혜가 바로 혜慧이니, 이 셋이 우리가 힘써 수행하여야 할 戒定慧 三學 – 계율을 지켜 실천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산란하게 하지 않으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살펴보며 사는 세 가지 공부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에서 이같이 어떤 개념화된 언어도 쓰시지 않으시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담백한 일상의 말로써 진리를 다 들어내셨다. 이점이 바로 이 교敎의 가르침이면서 또한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禪의 가르침이 되는 까닭이다. 은 이렇게 교敎 – 문자를 통한 가르침과 선禪 – 문자를 떠난 가르침의 사이에 걸쳐 있다. 왜냐하면 교敎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다음 45년 동안 맨발로 걸어 다니시면서 중생衆生을 만나 말씀하신 가르침이며, 선禪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없는 가운데 드러내 보이신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따로 있음이 아니고 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방법이 제자들의 근기根機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의 다름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쌍수禪敎雙修 – 부처님이 베푸신 두 가지 방법의 가르침, 즉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을 고루 따르고 닦아 온전한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아난존자阿難尊者를 통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으로 기록되어 남게 되었다. 다른 한편 부처님의 마음은 가섭존자迦葉尊者를 통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져 내려오다, 달마대사達磨大師를 통하여 중국에 이르렀다. 달마대사를 초조初祖 – 첫번째 조사로 하는 중국의 선불교는 조계曹溪에서 을 중심으로 선법禪法을 펼친 육조六祖에 이르러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그리고 마침내 급아해동及我海東 – 동쪽 바닷가 우리나라에까지 미치고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그 법맥法脈이 연연히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달마의 안심법문安心法門-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가르침은 바로 부처님께서 에 서 말씀하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내는 마음”이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이 없이 행하는 마음이다. 수행을 쌓고 마음을 비워 무심결에 하는 순수한 마음과 행동 이것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육조六祖 혜능慧能 (638~713) 큰 스님께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땔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공양하였다. 어느 날 장터에서 누군가 의 이 구절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의 경지가 열려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별다른 배움이 없었던 육조 혜능 대사는 수행을 거듭한 끝에 에 바탕을 둔 을 설법하셨다. 또한 이라는 에 관한 가장 뜻 깊으면서 알기 쉬운 주석서를 남겼다. 육조 큰 스님이 일반인들을 위하여 다시금 설법하고 해석한 의 사상과 힘은 그 후 동북아의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사상과 일상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의 핵심은 이와 같은 철저한 공사상에 입각한 윤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의 공의 개념은 윤리적 실천에 도달하기 위해 나와 너, 또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상我相 – 나라는 생각을 깨고 자아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한다. 이러한 空觀의 실천사상은 禪宗과 결부되어 선사상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에 대한 주석은 혜능뿐만 아니라, 新羅 元曉의 를 비롯해서 오늘날 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이어져 나오게 된다. 은 무진장無盡藏 – 끝없고 한량없는 진리가 담겨져 있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에서 부처님은 이 사구게四句偈 만이라도 지녀 알고 남을 위하여 설법하면 그 복덕이 한량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공덕은 항하사수恒河砂數 – 갠지스 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칠보七寶로 가득히 채워 보시하는 복덕福德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말씀하신다. 사구게 안에 부처님께서 깨달아 설하신 의 모든 진리가 담겨있는 까닭이다. 즉 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바로 깨친 사람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 사람의 마음을 깨치게 함이 어떠한 물질적 보시布施보다도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에서 사구게에 이어 중요한 또 하나의 구절은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며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며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니라”는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의 말씀이다.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바로 그 마음을 찾고 얻으려고 해도 얻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있을 것 같으면서 없고, 또한 없을 것 같으면서도 있는 마음에 관하여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과거의 마음은 벌써 지나가 버렸으니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얻을 수 없고, 또한 현재의 마음도 생각하는 그 순간 과거로 돌아가 버리니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곰곰 살펴보면 곧 흘러가 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잠깐 동안이나마 직접 볼 수 있고 보이는 것은 현재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어차피 얻을 수 없다고 우리의 마음을 헛되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거나, 미래로 흘려보낼 것이 아니다. 그나마 지금 이 자리에 마음의 중심을 두고 바로 보고 바로 쓰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즉 지금 이곳에서 깨달고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즉 과거로 되돌아가 살거나 미래를 앞당기어 살아갈 수는 없다. 오직 현재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과거로부터 연기하여 현재에 이르고, 현재의 삶이 미래의 삶으로 연기하여 간다면, 과거의 업장을 참회懺悔를 통하여 없애고 깨달음을 얻어 미래의 삶을 편하고 영원케 할 수 있는 계기도 현재밖에 없게 된다. 아직까지 못 이룬 깨달음을 지금 이 순간에서라도 발원發願과 서원誓願을 통하여 실천하여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때 무소주생기심無所住生其心하며 정진精進하며 사는 것이 바로 영원으로 통하는 현재의 마음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삶이 과거의 업장에만 머물러 연기하여 가면서 끊임없이 밀려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현재의 마음을 움직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때만이 미래는 행복한 현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는 통시적通時的으로 볼 때 끊임없이 연기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를 우리들 인간이 편의를 위하여 셋으로 나누어 본 것뿐이다. 과거의 일들도 현재의 기억을 통하여만 자각할 수 있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현재의 계획과 기대를 통하여만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시간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현재 속의 과거, 현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재, 현재 속의 미래와 같은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과거도 현재를 통하여 나타나고 미래도 현재를 통하여 다가온다. 모든 시간은 현재를 통하여 흘러가는 것이다. 현재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존재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 현재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분들로 독립적으로 쪼개어 질 수 없으며, 서로서로 맞물리어 기대어 있다. 연기의 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된 현재이고, 현재는 체험하며 진행되고 있는 현재이며, 미래는 되고자 발원發願되는 지향적인 현재로서 모두 현재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업장業障을 현재 속에서 참회를 통하여 정화 순화하여 없애고, 현재의 시점에서 발원과 수행을 통하여 선업善業을 새로 지어감으로 보람찬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일을 조금도 뒤로 미룰 수가 없다. 현재의 순간 순간에 참회하고 깨어있을 때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하게 되는 것이며, 현재의 순간 순간에 올바른 수행을 바로 실천할 때 미래의 안락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야하고, 바로 이곳 여기에서 지금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오로지 지금 이순간만이 마음을 컨트롤하면서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수행도 지금 이곳에서 지금 이 시간에 하여야 하는 것이다.
연기가 시간의 흐름이라면 깨달음은 그 흐름을 일단 막고 흐름의 기계적 인과를 정지시킨 다음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즉 번뇌와 망상에 쌓였던 이제까지의 삶의 괴로움을 끊고 지금 한 마음을 돌려 적정寂靜한 마음속의 열반을 찾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실적인 힘을 얻는 대목이다. 의 가르침이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까닭이다.
과거가 현재의 기억이라면, 미래는 현재의 바람과 기대라고 하겠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 속에 기억과 기대로 응축凝縮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과 차별, 집착에서 벋어나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여 깨달은 다음에 살아가는 현재는 영원한 현재일 것이다. 그래서 착한 남자 착한 여인은 현재의 시점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살고 있는 매 순간순간 내 말과 행동 마음의 움직임을 잘 살펴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 순간 깨어있지 못하면 당연히 내 말과, 행동과, 마음을 놓치게 될 것이며 늘 깨어있음으로써만이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에 대한 의식意識 조차도 놓아버리고 주住하지 말며, 시간에 밀려 사역使役을 당하는 수동의 삶이 아니라 시간을 열심히 부려가며 능동의 삶을 산다면 이것이 바로 삼매三昧에 들어 사는 삶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는 찰나刹那이며, 가장 긴 시간은 겁劫이다. 찰나는 0.013초 정도의 매운 짧은 순간으로 우리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순간에 65찰나가 지나간다고 한다. 반면에 겁은 무한히 긴 시간으로 가로 세로 높이가 1 유순由旬 – 약 8 Km의 큰 반석盤石 – 넓고 편편한 큰 너럭바위를 솜털로 짠 베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 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긴 겁의 시간도 찰나의 적분積分 – 쌓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찰나 찰나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들이 느끼는 가장 일상적인 시간은 낮과 밤이 바뀌는 하루라는 단위이다. 그래서 하루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은 바로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운문雲門 (864-949) 스님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이다”이라고 하셨을 때의 좋은 하루는 바로 오늘 현재의 하루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부처님의 선호념善護念 – 늘 마음에 두고 잘 보호하여주심을 받아 편안하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에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무상無相과 無住의 평범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자연스럽고 청정하게 사는 마음이 평상심平常心이다. 이런 까닭에 옛 선사들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평범한 한결같은 마음이 바로 도”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평상심을 얻고 유지하기 위하여 방하착放下着 – 모든 집착된 마음과 주住함을 내려놓으라 하였다. “비운다“는 것,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두 하루 하루 일상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거룩한 곳이 현실을 떠나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깨끗한 마음을 회복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일상日常의 삶을 바르게 살 때 그 하루 하루의 삶의 현장이 바로 거룩한 곳이며 거룩한 날인 것이다.
은 우리에게 현재심現在心의 중요함을 일깨워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법열로 충만한 삶으로 이끈다. 하루 하루 부처님이 우리에게 부촉付囑 – 불법의 보호와 전파를 맡겨 부탁하신 바를 우리는 의 수지독송受持讀誦과 법보시法布施를 통하여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럼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 큰 복덕을 받고 열반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 – 신信 – 부처님을 믿고, 해解 –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행行 – 믿고 이해한 바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통하여 실천하고, 증證 – 몸소 가르침대로 깨달음의 삶을 살아갈 때 뜻이 있는 것이다. 의 수지독송受持讀誦함은 이런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나아가는 가장 쉬우면서 빠른 길이라고 생각된다.
은 부처님께서 매우 쉬운 일상의 언어로 말씀하신대로 암송되고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와 한역을 거치고 많은 선사禪師들과 도사道士들과 학자들의 손을 거쳐 주석註釋되는 과정 속에서 점점 어려운 말들이 보태어 지고, 잡다雜多한 이론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많이 주저하였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제 나까지 나서서 에 다른 말을 하나 더 붙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고.
부처님은 에 앞서 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諸惡莫作 모든 나쁜 짓을 짓지 말고
제악막작
衆善奉行 많은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중선봉행
自淨其意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하면
자정기의
是諸佛敎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시제불교
이는 32분에서 말씀하신 바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 일체의 선법을 닦으라”는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이다.
나는 때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모든 이론과 설명과 생각을 떠나 그저 유공권이나 소지도인 또는 송천이 아름다운 서체로 쓴 을 독경만 하면서라도 부처님 말씀의 첫 번째 구절과 같이 “모든 나쁜 짓을 짓지 말고”만 살아도, 비록 깨치지는 못할 지라도 부처님의 선호념善護念 속에 괴롭지 않은 삶을 살 수는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의 힘은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착한 남자와 착한 여인이 수지독송受持讀誦하면서 올바른 생업生業에 몰두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일상의 삶 가운데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몰두하며 사는 일상의 삶 속에서 무심코 천연덕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의 씀씀이가 바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내가 학창시절 이래로 열심히 외어 읽어온 의 에서 과 와 을 옮겨 싣는다.
삼보예경三寶禮敬
우리들 있는 이 도량에
보배구슬이었으니,
자비와 만능을 지니시고,
지혜와 광명으로 세상을 비추시며,
우주에 항상 계신
삼보님께서
이 가운데 나투심이라.
우리들의 몸과 마음 오직 님 앞에 나와,
지극한 마음으로 예경하옵니다.
∴ 지성으로 예경하옵나니,
구원의 본주이시며 사생의 어버이신
석가모니 세존님께
귀명하나이다.
∴ 지성으로 예경하옵나니,
시방에 항상 계시고,
삼세에 두루 하옵신,
붓다에게 귀명하나이다.
∴ 지성으로 예경하옵나니,
만 생령의 길이 되고,
온 세상의 빛이 되는,
팔만대장경에게
예경하옵니다.
∴ 지성으로 예경하옵나니,
시방에 항상 계시고,
삼세에 두루하옵신
달마에게 귀명하나이다
∴ 지성으로 예경하옵나니,
정법의 안목이시고,
만 중생의 스승이신,
한량없는 보살님께
귀명하나이다.
∴ 지성으로 예경하옵나니,
시방에 항상 계시고,
삼세에 두루 하옵신,
상가에게 귀명하나이다.
원하옵나니 삼보님께서는 한량없는 대자대비의 가피력을 내리사,
이 나라 이 세계가 다툼이 없이 오직 자비의 원리로만이
항상 번창하게 하시고
일체중생이 다 함께 영원한 부처님의 밝고 바른 길을
하루속히 이루게 하여지이다.
찬불게讚佛偈
천상천하 높으신 우리 부처님
시방세계 어디나 비할 데 없네
우주 안에 모든 님 두루 보아도,
가장 크고 높으신 부처님일세.
시방세계 모든 중생 부처님께 귀의하고,
우 없는 불타말씀 널리 펴기 원이로라.
나의 지은 모든 공덕 일체 중생 공덕되어,
모두 같이 성불하고 한 몸처럼 살어이다.
나무 영산회상 불 보살
나무 영산회상 불 보살
나무 영산회상 불 보살
발원문發願文
시방에 항상 계신 삼보님께 발원합니다.
원컨대 나는 세세생생 어데서라도,
항상 반야를 물러가지 아니 하여서,
석가세존 저 용맹지와 같이 하오며,
님과 같은 큰 깨달음 얻고자 하나니,
문수보살 저 큰 지혜와 같이 하오며,
보현보살 저 큰 행동과 같이 하여서,
지장보살 가없는 몸 나툼 같이 하여,
관음보살 삼십이 몸 나타내리로니,
시방세계 이내몸 안 나툼이 없어서,
널리 중생 하여금 함 없는 곳 들게 해,
이 내 이름 듣는 자 삼도로글 면하고
내 형상 보는 자 큰 해탈을 얻게 하리.
우리가 있는 곳에 우주의 빛이 되고,
내가 하는 이 행동 중생의 길이 되며,
이 나라 이 세계에 평화의 힘이 되고,
우리 집 이웃집에 기쁨의 벗이 되리.
영원한 이 마음 자유 평등 간직하고,
복과 지혜 늘 길러 만 중생 나눠주며,
다 잘 알고, 다 잘 도와서, 다 잘 살도록,
이 생명 다 바쳐 님과 같이 되오리다.
이같이 교화함을 무량겁 계속하여,
필경 부처 또한 중생 없게 하오리니,
원이온대 삼보님은 두루 옹호하사,
이와 같은 큰 소원을 이루어지이다.
나무 구원본주 석가모니불
나무 붓다 달마 상가
나무 붓다 달마 상가
나무 붓다 달마 상가
다 잘 알자
다 잘 돕자
다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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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아래의 참고 문헌들은 편저자 김종헌의 서재 에 소장된 과 관련된 문헌들을 초판 발행연도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1. 및 해설서: 발간 연대순
김해안 저, 1965년 불서보금사
신소천 편역, 1968년, 홍법원 발행
金雲學 譯註, 1980년, 현암사
釋眞悟 譯解, 1988년, 고려원
Trmaslated by A.F. Price & Wong Mou-lam, 1990 Shambhala Dragon Editions, U.S.A.
松江 저, 1995년, 開花山 彌陀寺
금강선원 편, 1999년, 금강선원
김용옥 지음, 1999년, 통나무
Jae Woong Kim, 1999년, Wisdon Pubnlications, Boston, U.S.A.
2000년, 중화민국 和裕出版社
이현주 지음, 2001년 샨티
박영호 지음, 2001년, 두레
무비스님 편저, 2002년 도서출판 窓
이시우 편저, 2004년, 도피안사
민희식, 송근영 편저, 2006년 도서출판 블루리본
김성주, 박상준, 박준석 공저, 2006년, 신구문화사
황의현, 2006년, 도서출판 하늘북
沈載東 論著, 2007년, 도서출판 고려얼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역, 2009년 조계종출판사
정천구 지음, 2009년 개정판, 작가서재
이상규 편저, 2009년, 선연
吳靜宇 撰述, 중화민국 69년, 大千世界出版社
중화민국 82년, 世樺出版社
2. 불교사전
곽철환 편저, 2003년, 시공사
운허용하 엮음, 1962년, 법통사
3. 사경, 典籍善本 및 서예 관련 도서
石叔明 편찬, 民國65년 대만 藝術圖書公司
1997년, 중국 北京出版社
2000년, 중국 江蘇古籍出版社
1985년, 중국 新華書局天津發行所
千惠鳳 편저, 1989년, 한국브리태니커
1992년, 중국 上海書局
竹峰 黃晟現 書, 1994년, 一心書藝學院 出版部
, 사치유 편저, 1996년, 上海書局
任繼愈 편저, 2000년, 中國國家圖書館善本特藏部
2002년, 上海書畵出版社
4. 기타
외길 김경호 저, 2006년, 한국사경연구회, 도서출판 고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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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들어가는 말 – 인연기因緣記
나는 일찍 중학교 재학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 우연한 기회에 과 함께 의 법공양판法供養板을 받아 읽었다. 당시 나는 동양의 전통 예술과 학문에 대한 호기심에서 서예와 한문을 막 배우기 시작한 때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의 어린 불자佛子가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에서 열린 법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였다. 이때 를 만드시고 이끄신 이홍철李弘澈 법주法主님의 강설을 자주 듣는 가운데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불교에 심취하였던 나는 196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시절 법회에서 전진한錢鎭漢 박사, 황산덕黃山德 박사, 김기석金基錫 박사 등 당시 유명하셨던 불자 및 교수님들로부터 에 대한 강설을 종종 들었다. 그리고 황산덕 박사님의 부인되시는 황이선黃利善 여사가 번역하신 원고를 필사할 기회가 있었다. 책이 귀하던 당시 내가 시중市中에서 구하여 읽은 해설서들로는 과 신소천申韶天 (1897-1978)의 등 이 고작이었다.
1971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후로는 의 간부를 맡아 열심히 법회의 운영에 참가하였다. 당시 이기영李箕永 박사가 쓰신 을 열심히 공부하던 나는 졸업논문으로 에 관하여 썼다. 그리고 졸업을 기념하여 학창 시절 내내 심취心醉하였던 불교와 서예 공부의 성과를 내 나름대로 하나로 묶어 마명馬鳴의 을 필사筆寫하여 법공양판法供養版으로 출판하였다. 내가 쓴 첫 번째 불교와 관련된 책이다. 이 책 도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내 평생의 불자 생활과 서예 공부의 성과를 하나로 묶어 보고자하는 같은 동기에서 쓰인 두 번째 불교와 관련된 책이다.
과 을 만나 읽고 필사한 인연공덕이 있었던 덕분인지 나는 에서 아내 일심행一心行 이형숙李亨淑과 만나 결혼하였다. 우리 부부는 첫딸을 낳자 ‘세존世尊을 공경恭敬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세경世敬이라 이름 지었다. 우리 부부는 세경과 형태亨泰 남매를 불자로 키웠다. 다시 두 남매가 결혼하여 낳은 외손자 원우源祐, 영우寧祐와 친손녀 혜인惠仁이 모두 의 어린 불자가 되었다. 아울러 사위 최용훈崔容熏과 며느리 최인옥崔仁玉도 의 법도法徒가 되었다.
나는 중학교 재학시절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선생이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운영하셨던 에서 공부하였다. 대학시절에는 아내가 된 일심행과 함께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소지도인昭志道人 강창원姜昌元 선생의 에서 지도를 받았다. 그러다 소지도인 강창원 선생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신 1977년 이후로는 송천松泉 정하건鄭夏建 선생이 인사동에서 운영하시는 의 회원이 되었다. 나의 두 자녀들도 모두 대학시절에 송천 정하건 선생의 문하門下에 들어갔다. 따라서 나의 손자 손녀들이 장성하면 적당한 때에 서예를 이어 가르칠 계획이다.
소지도인 강창원 선생님과 송천 정하건 선생님께서 그들의 평생의 대표작으로 을 쓰신 것도 참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두 분 모두 성품이 곧고 맑으며 신심이 깊으신 까닭에 정성을 다하여 을 쓰셨다.
부처님께서는 제15분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던지 만약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천신과 인간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는 곳이 되리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이 되어, 모두가 마땅히 공경하고 예배하고 주위를 돌면서 갖가지 꽃과 향으로 그곳에 흩으리라.“
나는 두 분 서예가가 마치 탑을 쌓듯이 정성을 다하여 쓴 을 책으로 내면서, 이 책이 많이 보급되어 책이 있는 곳마다 “탑이 되어, 모두가 마땅히 공경하고 예배”하기를 발원한다.
나는 우리 가족 3대代가 의 이홍철 법주님을 통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입고 소지도인 강창원, 송천 정하건 두 분 서예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지도에 보답하고자 이 책 을 펴낸다. 아무쪼록 이런 소박한 뜻이 담긴 이 책이 많은 불자들과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의 발행에 즈음하여 를 써주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며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이 책을 만들어 주신 의 사장님과 편집을 맡아주신 편집자 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무쪼록 가 부처님의 선호념선부촉善護念善付囑하심을 힘입어 더욱 발전하기를 발원한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아침
안마산을 바라보며,
춘천 덕한재德翰齋에서
혜경慧鏡 김종헌金鍾憲 합장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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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법
나는 이번 을 편집하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특징을 살리면서 나름의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 본문의 한역본漢譯本은 2009년 조계종출판사에서 펴낸 을 저본底本으로 하였다. 그러나 읽고 이해하기에 편리하도록 연이어 붙어 있는 경문을 의미의 단위로 나누고 줄을 바꾸어 편집하였다.
* 한문 원문의 편리한 독송을 위하여 전통적인 방식의 현토를 붙였다. 현토는 현대 국어의 마침법에 따라 일부 재구성하였다.
* 현토懸吐가 붙어있지 않은 한역본 본문만 독송하기를 원하시는 독자께서는 소지도인 강창원과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쓰신 서예작품의 원문을 선택하여 읽으실 것을 권한다. 소지도인 강창원의 글씨는 중해中楷 – 중간 크기의 정자체의 비교적 큰 글씨로, 송천 정하건 선생의 글씨는 소해小楷 – 작은 크기의 정자체의 비교적 작은 글씨로 편집하였다.
* 한글 번역문은 편저자가 여러 번역본을 참고하여 현대 맞춤법에 따라 일부 수정을 더하고 윤문潤文하였다.
* 편저자가 쓴 에서는 한문으로 된 불교 전문용어들을 쉽게 한글로 풀어 쓰고자 노력하였다. 용어의 풀이는 1962년 법통사에서 출판한 과 2003년 시공사에서 출판한 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았다.
* 모든 분야에서 국제화가 깊어 가는 추세를 감안하여 영문 번역본을 함께 실었다. 영문 번역본은 영국인 Alex Johnson이 현대 일상 영어로 새롭고 쉽게 번역한 을 그가 관리 운영하는 홈페이지 www.diamond-sutra.com 에서 옮겨 실었다. 이 번역은 편저자가 이제껏 찾아 읽어본 의 여러 영문 번역본 가운데, 현대 일상 영어로써 번역된 가장 읽기 쉬운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경문의 의미가 아름답고 또렷하게 표현된 잘 된 번역이다. 이 새로운 영역 본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리어 전재轉載를 승낙하여 주신 번역자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이 번역의 일부 내용은 구마라습의 한역본과 이에 근거한 한글 번역본의 내용과는 완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곳곳에 있음을 양지諒知하기 바란다.
* 원문 및 번역본의 내용을 세 가지 색상으로 구분하여 인쇄하였다. 각 분分의 제목과 객관적 서술에 관한 부분은 으로, 부처님의 말씀은 으로, 수보리 큰 스님의 말씀은 으로 구분하였다.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문經文의 주체를 확실히 구분하여 파악하여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경전의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 및 영어 번역은 가로쓰기를 하였고, 서예가들이 쓴 사경의 작품들은 원작 그대로 세로쓰기로 되어있다. 서예가들이 쓴 들을 서로 다른 한역漢譯 저본底本을 쓴 까닭에 일부 서로 다른 부분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소지도인 강창원이 쓴 은 중해中楷의 비교적 큰 글씨로 독경讀經에 편리하도록 흰 바탕에 검은 글씨를 그대로 살려 편집하였다. 다른 한편 송천 정하건이 쓴 은 소해小楷의 비교적 작은 글씨로 사경寫經에 편리하도록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마치 탁본拓本과 같은 방식으로 편집하였다.
* 제판製版과 제책製冊 과정에서 양장본洋裝本과 전통 전적典籍의 선장본線裝本의 장점을 모두 살려보려고 애썼다.
* 욕심 같아서는 원문에 대한 내 나름의 주석과 해설도 싣고 싶었으나 이미 많은 주석서들이 시중에 출판되어 나와 있고 내 자신이 천학과문淺學寡聞한 까닭에 삼가 하기로 하였다. 그 대신 이라는 글로써 내 나름의 에 관한 생각을 부족하나마 짧게 정리하여 실었다.
* 이미 수백 가지 이상의 과 관련된 서적들이 출판되어있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들 책들 중에서 인연이 닿는 책 어느 책이나 한 권쯤 찾아 읽기를 권한다. 나는 내가 구하여 읽은 책들 중에서 특색이 있는 책 몇 권의 관련 서적을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중 어느 책이던 읽는 사람의 근기根機에 따라 선택되고 유용하게 읽히고 쓰였으면 한다.
1.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역, 조계종 출판사, 2009년: 한국불교조계종 종단에서 범어 전문가, 한문 전문가, 그리고 교학 전문가들의 오랜 학술적 검증을 거쳐 완성한 표준이 되는 이다. 이 책은 조계종의 근본적 이념을 담고 있는 을 쉽게 독송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구라마집 한역본을 원본으로 하되, 의미가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는 범본과 이역본을 참고함으로써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번역하였다. 번역의 역사성과 신뢰성도 높였다.
2. 김용옥 지음, 통나무, 1999년 : 도올 김용옥 교수가 해박한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 및 종교의 성과를 두루 원용하여 나름대로 해설한 책. 불교에 접해 보지 못한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깊고 어려운 내용을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풀이하였다.
3. 이현주 지음, 샨티, 2001년 : 이현주 목사가 쉬운 용어로 간략하고 명료하게 해설한 책. 등에 나오는 역대 선사와 도사들의 해설들을 골라 아름다운 우리글로 쉽게 풀어쓴 장점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이 불교와 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우리나라 전체 종교인 약 2,500만 명 중 약 1,000만 전후의 기독교인들도 이 책을 통하여 그들의 영성靈性이 보다 맑아지고 신앙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4. 박영호 지음, 두레, 2001년 : 우리나라의 현대의 대표적 영성가이자 사상가이신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의 사상에 근거하여 쓴 에 대한 해설서. 유불선 삼교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하나로 녹여 비교분석하여 엮어 쓴 독창적인 내용의 책이다.
5. Translated by A. F. Price & Wong Mou-lam, Shambhala Publication, Inc., 1990년 : 영어로 번역된 과 이 함께 실린 책이다. 영어로 과 더불어 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6. 심재동 지음, 고려얼, 2007년 : 한역 을 저본으로 삼아 한문원전에 대한 해석법을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한문 문법을 영어 분법에 적용시킨 신개념 한문해석 지침서로서 을 읽은 다음 여러 한역 불교경전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6. 이시우 편저, 도피안사, 2004년 : 을 설하신 붓다 개인의 경이 아니라 대중의 경이라는 관점에서 대중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연기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더 나아가 에서 설한 부처님의 불법이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유에 적용되는 우주 법계의 법임을 보이기 위해 경의 해석을 별들의 세계인 우주로 확장했다.
7. 민희식 송근영 편저, 도서출판 블루리본, 2006년 : 한역 본문과 한글, 영문본에 아름다운 관련 사진과 간략한 해설을 넣어 현대적 감각으로 꾸민 새로운 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그 밖의 많은 저자들이 쓴 책들은 ???~???쪽의 을 살펴보기 바란다.
* 은 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쓰인 경전 중의 하나이다. 특히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에서는 불심이 깊었던 서예가들이 즐겨 심혈을 기울여 쓴 경전이기도 하다. 을 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서예가는 중국 당唐나라의 유공권柳公權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서예가들이 금강경을 썼다. 나는 그 중에서도 소지도昭志道人인 강창원姜昌元과 송천松泉 정하건鄭夏建이 해서로 쓴 을 으뜸으로 꼽는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 두 분 서예가가 쓴 구마라습 한역본 사경 작품을 함께 실었다. 서예가들의 불심이 담긴 아름다운 서체로 쓰인 은 일반 활자체보다는 독경 또는 사경에 서예예술의 향취까지 더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최근 서예계의 작품경향이 전시를 목적으로 오직 큰 글씨에 너무 치중되어버린 잘못이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소지도인 강창원이 쓴 은 중해中楷 – 중간 크기의 한문 정자체 글씨의 공부에, 송천 정하건이 쓴 은 소해小楷 – 작은 크기의 한문 정자체 글씨의 공부에 알맞은 크기로 편집하였다. 아무쪼록 두 서예가가 쓴 이 독송과 사경 및 서예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발원한다.
amisan511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금강경>에서는 ‘무주상(無住相)’을 강조한다. 무주상(無住相)을 직역하면 상(相)에 머무름(住) 바 없다는 뜻이다. 일체의 상(相)과 염(念)의 분별을 떠난 상태에서 어디에도 결박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상(相)이란 무엇인가? 상(相)이란 관념과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네 가지 상으로 나눠 설명한다. 중생의 마음엔 이러한 네 가지 상(四相)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열반에 문 열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만약 상에 주함이 없다면 능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무주상(無住相)’은 그 무엇도 누구에게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붙들지도 붙들리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탐심이 없는 마음이 무주상이다. 때문에 무주상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착해야(어질어야) 한다. 마음 비움을 말한다. 무엇을 행하면서 ‘성공해야지, 실패하면 안 되지, 너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 좋은 일을 알아주겠지, 이렇게 해 주면 틀림없이 고맙게 여길 거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은 상(相)이 있는 마음이라서 무주상이 아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한다. 그리고 이 무주상보시를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 내가 보시를 한다는 데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을 무주상보시라 하는데, 무주상보시가 곧 보시바라밀이다. 반대급부를 바라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아니다. 자기 이름 내기 위해, 남에게 알리고 싶어서 하는 기부는 진정한 기부가 아니다.
특히 무주상보시 ( 無住相布施 ) 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베풂을 강조함으로써 , 베풂의 공덕을 받을 내가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라고 재우친다 . 자아라는 관념이 탐욕과 갈등의 씨앗인 탓이다 . 이와 같이 무주상보시는 무아를 전제로 한 베풂인 것이다 .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해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어떤 여성 작가가 말하는 히어로의 조건은 초능력이나 강력한 무기가 아닌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이익을 내려놓는 사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친절한 사람“이다. 바로 무주상보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 잘 나타나고 있다.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중약) 부주어상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중략) 不住於相)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여 일체의 아견(我見)이나 아상(我相)과 같은 상대적인 생각에 걸림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주를 체득한다면 바로 다음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보듯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재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경지로 직입(直入)하는 것이다. 결국 무주(無住)란 일체의 유윕법(有爲法)이 실재(實在)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함으로써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경계 위에서도 오히려 무애자재(無碍自在)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여 다시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堤,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수보리야, 보살이 무주상보시를 하는 복덕이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위와 같이 허공의 비유를 들어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서 도무지 쌜 수도 없고, 생각으로 상상할 수도 없다. 이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강조하고 계신다.
베풂에 있어서도 실리적 대가를 바란다면 그건 베풂이 아니라 거래다. 거짓이며 진실이 아니다. 어디 가서 무언가를 전달하면서 사진을 찍어 벽에 걸어 놓거나 기사에 싣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탐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가 뽀록나거나 베풂을 거절당하면 기분 나빠하기도 하고 비웃는다.
그래서 조선 중기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부부간에나 친구 간에나 당신은 내덕을 봤으니 ‘이제 갚을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덕 베푼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갚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고단한 법이다. 그러나 상대를 내 몸이라 생각하고 베푼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다가 보면 저절로 충만해지는 그 무엇이 거기 있으니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말 일이다.
무주상보시는 에고(ego)의 탐ㆍ진ㆍ치(貪嗔痴)가 소멸된 상태에서만이 가능하다. 불이(不二)를 전제로 할 때에 에고도 없고, 탐ㆍ진ㆍ치도 없는 마음이 된다. 불이란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미 마음은 사랑하는 자식의 마음과 늘 하나이지 어미 마음 따로 있고, 자식 마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미 마음에 어디 에고가 있으며, 자식이 가진 것에 탐ㆍ진ㆍ치를 발하겠는가. 그런 어미 마음보다 더 순수한 마음이 불ㆍ보살의 마음이라서 나와 너를 가려서 따지지 않는 불이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 하는 보시가 무주상보시라는 것이다.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라고 할 때는 남에게 해코지 할 수가 없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니 반대급부를 바라는 보시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일본 백은(白隱, 1685~1768) 선사 이야기이다.
백은 선사는 일본에 임제종을 중흥시킨 고승이다. 백은 선사가 어느 추운 겨울날에 큰 절의 초청을 받아 법문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 길가에 헐벗고 남루한 옷차림의 문둥병 환자가 떨고 있었다. 불쌍하고 보기에 딱해 자신이 입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그에게 주며 입혀 줬다. 그러나 문둥이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백은 선사가 그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남의 신세를 짓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인사나 무슨 표정이라도 지을 일이지 어찌 그러한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 문둥이가 말했다.
“여보시오 대사! 내가 대사가 주는 옷을 입어줬으니, 문둥이님! 보시를 받아주셔서 고맙다는 말이나 아니면 표정이라도 좀 지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며,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백은 선사는 그만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소승의 수행이 모자라 성현을 몰라 뵈었습니다. 거룩한 깨우침에 감사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들고 일어나보니 문둥이는 온 데 간 데 없고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가 그 자리에 피어 있었다. 그제야 백은 선사는 그 문둥이가 바로 문수보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무주상보시에 대한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불사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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