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19 마태 복음 5 장 주석 Quick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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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마태복음5장_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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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 – 마태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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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 - 마태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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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태복음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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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태복음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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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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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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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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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L NOCR –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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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L NOCR -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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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970 – 마태복음 5장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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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970  - 마태복음 5장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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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CTU-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 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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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CTU-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 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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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 BIB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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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본문

마태복음 5장 - BIBLE STORY
마태복음 5장 – BIB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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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 마태복음 5:13~16 호크마 주석 ~ 족자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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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 마태복음 5:13~16 호크마 주석 ~ 족자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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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5 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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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5 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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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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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

마태복음 제 5장

=====5:1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

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

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

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

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

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

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

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

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신약의 시내

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

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

(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

키는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

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

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갈이'(출19:12) 백성들을 접

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

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5:2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

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

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가르쳐 –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

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 , 호이 프토코

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 ,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

(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

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

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

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

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

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

리어 ‘아쉬레'(* )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

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

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

할수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

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

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

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

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

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

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

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

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5:4

애통하는 자(* ,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

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

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

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

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

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

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

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

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 )와 ‘부른다'(* )의 합성어

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

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

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

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

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5:5

온유한 자(* ,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 )

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

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

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

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

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

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

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

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

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

(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

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구별되는 장소(6:10;9:6), 지

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

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

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

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

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

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

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

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

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

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

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

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

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

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

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

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

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

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

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

)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

)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

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

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

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

)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 )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

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

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

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

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

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

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

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

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5:8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이스인들

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

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

바브'(* )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

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

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

(* )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

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

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

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 )

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 )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 )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

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

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5:9

화평케 하는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

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 )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

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

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

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

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

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

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

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

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

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

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

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

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

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

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

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5:11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

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

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

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

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

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

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

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

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

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 카

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

다'(* ,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

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러면 그들의 받을 ‘상'(* ,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

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

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

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

(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

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

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

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

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

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

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

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

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

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

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

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것이 ‘노새의 태(

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

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

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

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

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

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

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

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

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

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

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

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

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

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

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

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

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

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

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

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

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

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

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

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

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

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

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

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

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

(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

(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

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

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

다’고 하였다.

=====5:17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

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

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

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

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

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

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

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

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

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

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

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

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

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

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

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

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

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

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

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

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

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

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일점 일획(一點 一劃)(* ,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

)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

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 )라고 하

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

들(* ; / ;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

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

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

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

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

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

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

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

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

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

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서 이루어질 것이다.

=====5:19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곳에서는 ‘극히 작은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

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

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

(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

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

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

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

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

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

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

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

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Carson).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

(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

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

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

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

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

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

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

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

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

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

(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

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

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

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

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

을 강조하고 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

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

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

)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

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 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

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

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

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

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

하는 사람은 심판(* ,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

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

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

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

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

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

(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

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

게 되는 것이다(Carson).

지옥불(* , 게엔나 투 퓌로스).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

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

(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

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

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짝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

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

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

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라가(* ,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 )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미련한 놈(* ,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

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 )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

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

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

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

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5:23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

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

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

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

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

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

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

力)해야 할것이다.

=====5:24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 )는 제 2부

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

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 )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

타'(* )가 아닌 ‘디아'(* ,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것 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

(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

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

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

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5:25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

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

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

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

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

는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

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

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

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

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

중된다. 한편 ‘옥'(* ,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

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

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

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

다(Lange).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

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

각했다(Schweizer).

호리라도(* ,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

의 ‘우메'(* )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5:27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

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5:28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

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

)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

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음욕을 품는(* ,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

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

텐'(* )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

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

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

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

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

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5:29,30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

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

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

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

‘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 )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

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

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

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

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

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

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

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

(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

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

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

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5:31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

속사 ‘데'(* ,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

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

이다.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

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

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

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

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

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

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

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

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5:32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

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

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

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

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

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

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

(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

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버리면(* ,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

(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간음하게 함이요(* ,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

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 보다 약한 뜻

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

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5:33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

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

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

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

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

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

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

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5:34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

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

(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

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

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

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

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

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

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5:35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 옴뉘나이 엔)

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

다'(* ,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

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

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

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

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

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

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5:36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

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

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

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

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

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

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5:37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

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

(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

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

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

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

(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

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

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

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

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

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

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5: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

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

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

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

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

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

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

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

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

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

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5:39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

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

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

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

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

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

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

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

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

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

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

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

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5:40

너를 송사(頌辭)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

(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

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

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

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

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

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

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

어 있다.

=====5:41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

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

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

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

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

이 아니라 도울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

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

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

자에게 칼도 줄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

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

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5: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

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

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

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

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

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

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

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

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

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

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

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

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

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

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

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

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

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

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

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

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

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

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

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

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

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

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빈(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

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래동안 은총을 베

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

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

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

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

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 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

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

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

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

나님의 성품의 연장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

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5:46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

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

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 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

다. 그 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

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

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

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

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무슨 상이 있으리요 –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5:47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

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

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

인'(* , 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

(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

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

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

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

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

다”(Scott).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라 –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온전'(* , 텔레이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탐밈'(*

, 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탐밈’이라는 말은 희생 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

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한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전

14:20; 엡 4:13;히 5:14;6:1).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앞의 대립 명제와 관계된 권위

있는 율법 해석에서 보여졌듯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할

것이 바로 이런 온전함이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

(脈絡)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反映)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던 것처럼(레 11:44,

45;19:2;20:7, 26)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서 이같은 특

징(벧전 1:16)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France).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있게 예

수가, 무제약적인 온전함이 제자들에게 가능 하다고 가르친 거스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들이 영적으로 파산(破産)하였다(3절)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사'(6:12)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던 종말론적

인 목표인 아버지의 온전함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추구(追求)하여야 하는 것이다.

헬라어 마태복음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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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 데 투스 오클루스 아네베 에이스 토 오로스 카이 카디산토스 아우투 프로셀단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개역개정,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새번역,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 ㉠그, ‘그가’

우리말성경,1 그때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그의 제자들이 다가왔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영어NIV,1 Now when he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영어NASB,1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the mountain; and after He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영어MSG,1 When Jesus saw his ministry drawing huge crowds, he climbed a hillside. Those who were apprenticed to him, the committed, climbed with him. Arriving at a quiet place, he sat down

영어NRSV,1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the mountain; and after he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 ιδων δε τους οχλους ανεβη εις το ορος και καθισαντος αυτου προσηλθον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videns autem turbas ascendit in montem et cum sedisset accesserunt ad eum discipuli eius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כראותו את המון העם ויעל ההרה וישב שם ויגשו אליו תלמידיו׃

성 경: [마5: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 제자들이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같이'(출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카이 아노잌사스 토 스토마 아우투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레곤

개역개정,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새번역,2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그, ‘그가’

우리말성경,2 예수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영어NIV,2 and he began to teach them, saying:

영어NASB,2 He opened His mouth and began to teach them, saying,

영어MSG,2 and taught his climbing companions. This is what he said:

영어NRSV,2 Then he began to speak, and taught them,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ανοιξας το στομα αυτου εδιδασκεν αυτους λεγων

라틴어Vulgate,2 et aperiens os suum docebat eos dicens

히브리어Modern,2 ויפתח את פיהו וילמד אותם לאמר׃

성 경: [마5: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 가르쳐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새번역,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그, ‘심령이’

우리말성경,3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3 “You’re blessed when you’re at the end of your rope.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영어NRS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3 beati pauperes spiritu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3 אשרי עניי רוח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심령이 가난한 자(*,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마카리오이 호이 펜둔테스 호티 아우토이 파라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4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영어NI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영어NASB,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영어MSG,4 “You’re blessed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영어NRS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헬라어신약Stephanos,4 μακαριοι οι πενθουντες οτι αυτοι παρα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4 beati mites quoniam ipsi possidebunt terram

히브리어Modern,4 אשרי האבלים כי הם ינחמו׃

성 경: [마5: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라에이스 호티 아우토이 클레로노메수신 텐 겐

개역개정,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영어NI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영어NASB,5 “Blessed are the gentle,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영어MSG,5 “You’re blessed when you’re content with just who you are–no more, no less. That’s the moment you find yourselves proud owners of everything that can’t be bought.

영어NRS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5 μακαριοι οι πραεις οτι αυτοι κληρονομησουσιν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5 beati qui lugent quoniam ipsi consolabuntur

히브리어Modern,5 אשרי הענוים כי המה יירשו הארץ׃

성 경: [마5: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논테스 카이 딮손테스 텐 디카이오쉬넨 호티 아우토이 코르타스데손타이

개역개정,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새번역,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우리말성경,6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배부름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영어NI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영어NASB,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영어MSG,6 “You’re blessed when you’ve worked up a good appetite for God. He’s food and drink in the best meal you’ll ever eat.

영어NRS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μακαριοι οι πεινωντες και διψωντε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οτι αυτοι χορτασ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6 beati qui esuriunt et sitiunt iustitiam quoniam ipsi saturabuntur

히브리어Modern,6 אשרי הרעבים והצמאים לצדקה כי הם ישבעו׃

성 경: [마5: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엘레에모네스 호티 아우토이 엘레에데손타이

개역개정,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7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이여,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영어NI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영어NASB,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receive mercy.

영어MSG,7 “You’re blessed when you care. At the moment of being ‘carefull,’ you find yourselves cared for.

영어NRS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receive mercy.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οι ελεημονες οτι αυτοι ελε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7 beati misericordes quia ipsi misericordiam consequentur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הרחמנים כי הם ירחמו׃

성 경: [마5: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마카리오이 호이 카다로이 테 카르디아 호티 아우토이 톤 데온 옾손타이

개역개정,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새번역,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우리말성경,8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영어NI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영어NASB,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영어MSG,8 “You’re blessed when you get your inside world–your mind and heart–put right. Then you can see God in the outside world.

영어NRS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ι οι καθαροι τη καρδια οτι αυτοι τον θεον οψονται

라틴어Vulgate,8 beati mundo corde quoniam ipsi Deum videbunt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ברי לבב כי הם יחזו את האלהים׃

성 경: [마5: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마카리오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호티 아우토이 휘오이 데우 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 ㉣그, ‘아들들이라고’

우리말성경,9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영어NI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NASB,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MSG,9 “You’re blessed when you can show people how to cooperate instead of compete or fight. That’s when you discover who you really are, and your place in God’s family.

영어NRS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μακαριοι οι ειρηνοποιοι οτι αυτοι υιοι θεου 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9 beati pacifici quoniam filii Dei vocabuntur

히브리어Modern,9 אשרי רדפי שלום כי בני אלהים יקראו׃

성 경: [마5: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마카리오이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호티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새번역,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0 “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0 “You’re blessed when your commitment to God provokes persecution. The persecution drives you even deeper into God’s kingdom.

영어NRS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μακαριοι οι δεδιωγμενοι ενεκεν δικαιοσυνης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0 beati qui persecutionem patiuntur propter iustitiam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10 אשרי הנרדפים על דבר הצדקה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1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마카리오이 에스테 호탄 오네이디소신 쉬마스 카이 디옼소신 카이 에이포신 판 포네론 칻 휘몬 프슈도메노이 헤네켄 에무

개역개정,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새번역,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터무니없는 말’이 없음

우리말성경,11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

가톨릭성경,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영어NI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NASB,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and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MSG,11 “Not only that–count yourselves blessed every time people put you down or throw you out or speak lies about you to discredit me. What it means is that the truth is too close for comfort and they are uncomfortable.

영어NRS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헬라어신약Stephanos,11 μακαριοι εστε οταν ονειδισωσιν υμας και διωξωσιν και ειπωσιν παν πονηρον ρημα καθ υμων ψευδομενοι ενεκεν εμου

라틴어Vulgate,11 beati estis cum maledixerint vobis et persecuti vos fuerint et dixerint omne malum adversum vos mentientes propter me

히브리어Modern,11 אשריכם אם יחרפו וירדפו אתכם וידברו בשקר עליכם כל רע בעבורי׃

성 경: [마5:1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카이레테 카이 아갈리마스데 호티 호 미스도스 휘몬 폴뤼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후토스 가르 에디옼산 투스 프로페타스 투스 프로 휘몬

개역개정,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새번역,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우리말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

가톨릭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영어NIV,12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NASB,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n heaven is great,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MSG,12 You can be glad when that happens–give a cheer, even!–for though they don’t like it, I do! And all heaven applauds. And know that you are in good company. My prophets and witnesses have always gotten into this kind of trouble.

영어NRSV,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χαιρετε και αγαλλιασθε οτι ο μισθος υμων πολυς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ουτως γαρ εδιωξαν τους προφητας τους προ υμων

라틴어Vulgate,12 gaudete et exultate quoniam merces vestra copiosa est in caelis sic enim persecuti sunt prophetas qui fuerunt ante vos

히브리어Modern,12 שמחו וגילו כי שכרכם רב בשמים כי כן רדפו את הנביאים אשר היו לפניכם׃

성 경: [마5:1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에안 데 토 할라스 모란데 엔 티니 할리스데세타이 에이스 우덴 이스퀴에이 에티 에이 메 블레덴 엨소 카타파테이스다이 휘포 톤 안드로폰

개역개정,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새번역,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리말성경,13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이 짓밟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영어NI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영어NASB,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s become tastel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by men.

영어MSG,13 “Let me tell you why you are here. You’re here to be salt-seasoning that brings out the God-flavors of this earth. If you lose your saltiness, how will people taste godliness? You’ve lost your usefulness and will end up in the garbage.

영어NRS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can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but is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μωρανθη εν τινι αλισθησεται εις ουδεν ισχυει ετι ει μη βληθηναι εξω και καταπατεισθαι υπο των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13 vos estis sal terrae quod si sal evanuerit in quo sallietur ad nihilum valet ultra nisi ut mittatur foras et conculcetur ab hominibus

히브리어Modern,13 אתם מלח הארץ ואם המלח היה תפל במה ימלח הן לא יצלח עוד לכל כי אם להשליך חוצה והיה מרמס לבני אדם׃

성 경: [마5:1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휘메이스 에스테 토 포스 투 코스무 우 뒤나타이 폴리스 크뤼베나이 에파노 오루스 케이메네

개역개정,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새번역,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우리말성경,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가톨릭성경,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영어NIV,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영어NASB,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영어MSG,14 “Here’s another way to put it: You’re here to be light, bringing out the God-colors in the world. God is not a secret to be kept. We’re going public with this, as public as a city on a hill.

영어NRSV,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built on a hill cannot be hid.

헬라어신약Stephanos,14 υμεις εστε το φως του κοσμου ου δυναται πολις κρυβηναι επανω ορους κειμενη

라틴어Vulgate,14 vos estis lux mundi non potest civitas abscondi supra montem posita

히브리어Modern,14 אתם אור העולם עיר ישבת על ההר לא תוכל להסתר׃

성 경: [마5:1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우데 카이우신 뤼크논 카이 티데아신 아우톤 쉬포 톤 모디온 알 에피 텐 뤼크니안 카이 람페이 파신 토이스 엔 테 오이키아

개역개정,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새번역,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우리말성경,15 등잔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 그 빛을 온 집안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영어NIV,15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영어NASB,15 nor does anyon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asket, but on the lamp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who are in the house.

영어MSG,15 If I make you light-bearers, you don’t think I’m going to hide you under a bucket, do you? I’m putting you on a light stand.

영어NRSV,15 No one after lighting a lamp puts it under the bushel basket, but on the lamp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υδε καιουσιν λυχνον και τιθεασιν αυτον υπο τον μοδιον αλλ επι την λυχνιαν και λαμπει πασιν τοις εν τη οικια

라틴어Vulgate,15 neque accendunt lucernam et ponunt eam sub modio sed super candelabrum ut luceat omnibus qui in domo sunt

히브리어Modern,15 גם אין מדליקים נר ושמים אותו תחת האיפה כי אם על המנורה ויאר לכל אנשי הבית׃

성 경: [마5:1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후토스 람프사토 토 포스 휘몬 엠프로스덴 톤 안드로폰 호포스 이도신 휘몬 타 칼라 에르가 카이 돜사소신 톤 파테라 휘몬 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개역개정,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새번역,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우리말성경,16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가톨릭성경,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영어NIV,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영어NASB,16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in such a way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영어MSG,16 Now that I’ve put you there on a hilltop, on a light stand–shine! Keep open house; be generous with your lives. By opening up to others, you’ll prompt people to open up with God, this generous Father in heaven.

영어NRSV,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τως λαμψατω το φως υμων εμπροσθεν των ανθρωπων οπως ιδωσιν υμων τα καλα εργα και δοξασωσιν τον πατερα υμων τον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라틴어Vulgate,16 sic luceat lux vestra coram hominibus ut videant vestra bona opera et glorificent Patrem vestrum qui in caelis est

히브리어Modern,16 כן יאר אורכם לפני בני האדם למען יראו מעשיכם הטובים ושבחו את אביכים שבשמים׃

성 경: [마5:1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메 노미세테 호티 엘돈 카탈뤼사이 톤 노몬 에 투스 프로페타스 우크 엘돈 카탈뤼사이 알라 플레로사이

개역개정,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우리말성경,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

가톨릭성경,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영어NIV,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영어NASB,17 “Do not think that I ca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did not come to abolish but to fulfill.

영어MSG,17 “Don’t suppose for a minute that I have come to demolish the Scriptures–either God’s Law or the Prophets. I’m not here to demolish but to complete. I am going to put it all together, pull it all together in a vast panorama.

영어NRSV,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come not to abolish but to fulfill.

헬라어신약Stephanos,17 μη νομισητε οτι ηλθον καταλυσαι τον νομον η τους προφητας ουκ ηλθον καταλυσαι αλλα πληρωσαι

라틴어Vulgate,17 nolite putare quoniam veni solvere legem aut prophetas non veni solvere sed adimplere

히브리어Modern,17 אל תחשבו כי באתי להפר את התורה או את דברי הנביאים לא באתי להפר כי אם למלאת׃

성 경: [마5:1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아멘 가르 레고 휘민 헤오스 안 파렐데 호 우라노스 카이 헤 게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우 메 파렐데 아포 투 노무 헤오스 안 판타 게네타이

개역개정,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새번역,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 ㉥그, ‘한 이오타’

우리말성경,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 가운데 한 점,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가톨릭성경,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어NIV,18 I tell you the truth, until heaven and earth disappear,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roke of a pen, will by any means disappear from the Law 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영어NASB,18 “For truly I say to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the smallest letter or stroke sha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영어MSG,18 God’s Law is more real and lasting than the stars in the sky and the ground at your feet. Long after stars burn out and earth wears out, God’s Law will be alive and working.

영어NRSV,18 For truly I tell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one letter, not one stroke of a letter, wi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μην γαρ λεγω υμιν εως αν παρελθη ο ουρανος και η γη ιωτα εν η μια κεραια ου μη παρελθη απο του νομου εως αν παντα γενηται

라틴어Vulgate,18 amen quippe dico vobis donec transeat caelum et terra iota unum aut unus apex non praeteribit a lege donec omnia fiant

히브리어Modern,18 כי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עד כי יעברו השמים והארץ לא תעבר יוד אחת או קוץ אחד מן התורה עד אשר יעשה הכל׃

성 경: [마5:1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 일점 일획(一點 一劃)(*,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호스 에안 운 뤼세 미안 톤 엔톨론 투톤 톤 엘라키스톤 카이 디닼세 후토스 투스 안드로푸스 엘라키스토스 클레데세타이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호스 드 안 포이에세 카이 디닼세 후토스 메가스 클레데세타이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새번역,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 ㉦또는 ‘폐하고’

우리말성경,19 이 계명 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영어NIV,19 Anyone who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practices and teaches these commands wi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9 “Whoever then annul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so the same, sha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keeps and teaches them, he sha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9 “Trivialize even the smallest item in God’s Law and you will only have trivialized yourself. But take it seriously, show the way for others, and you will find honor in the kingdom.

영어NRSV,19 Therefore,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does them and teaches them wi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ς εαν ουν λυση μιαν των εντολων τουτων των ελαχιστων και διδαξη ουτως τους ανθρωπους ελαχιστος κληθησεται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ος δ αν ποιηση και διδαξη ουτος μεγας κληθησεται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9 qui ergo solverit unum de mandatis istis minimis et docuerit sic homines minimus vocabitur in regno caelorum qui autem fecerit et docuerit hic magnus vocabitur in regno caelorum

히브리어Modern,19 לכן מי אשר יפר אחת מן המצות הקטנות האלה וכן ילמד את בני האדם קטון יקרא במלכות השמים ואשר יעשה וילמד אותן הוא גדול יקרא ב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1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레고 가르 휘민 호티 에안 메 페리슈세 휘몬 헤 디카이오쉬네 플레이온 톤 그람마테온 카이 파리사이온 우 메 에이셀데테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

개역개정,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새번역,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말성경,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영어NIV,20 For I tell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you will certainly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20 “For I say to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20 Unless you do far better than the Pharisees in the matters of right living, you won’t know the first thing about entering the kingdom.

영어NRSV,20 For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exceed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20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εαν μη περισσευση η δικαιοσυνη υμων πλειον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και φαρισαιων ου μη εισελθητε εις την βασιλειαν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20 dico enim vobis quia nisi abundaverit iustitia vestra plus quam scribarum et Pharisaeorum non intrabitis in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20 כי אני אמר לכם אם לא תרבה צדקתכם מצדקת הסופרים והפרושים לא תבאו אל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2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 우 포뉴세이스 호스 드 안 포뉴세 에노코스 에스타이 테 크리세이

개역개정,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21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0:13

우리말성경,21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너희가 들었다. 출20:13

가톨릭성경,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murder, and anyone who murders will be subject to judgment.’

영어NASB,21 “You have heard that the ancients were told, ‘YOU SHALL NOT COMMIT MURDER’ and ‘Whoever commits murder shall be liable to the court.’

영어MSG,21 “You’re familiar with the command to the ancients, ‘Do not murder.’

영어NRSV,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ose of ancient times, ‘You shall not murder’; and ‘whoever murders shall be liable to judgment.’

헬라어신약Stephanos,21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τοις αρχαιοις ου φονευσεις ος δ αν φονευση ενοχος εσται τη κρισει

라틴어Vulgate,21 audistis quia dictum est antiquis non occides qui autem occiderit reus erit iudicio

히브리어Modern,21 שמעתם כי נאמר לקדמונים לא תרצח ואשר ירצח מחיב הוא לבית דין׃

성 경: [마5:2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오르기조메노스 토 아델포 아우투 에노코스 에스타이 테 크리세이 호스 드 안 에이페 토 아델포 아우투 라카 에노코스 에스타이 토 쉬네드리오 호스 드 안 에이페 모레 에노코스 에스타이 에이스 텐 게엔난 투 퓌로스

개역개정,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새번역,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 ㉨그, ‘형제에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까닭없이’가 첨가되어 있음 ㉩그, ‘형제에게’ ㉪그, ‘라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람어 라가는 욕하는 말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또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사람도 공회에서 심문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보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떨어질 것이다.

가톨릭성경,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영어NIV,22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영어NASB,22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shall be guilty before the cour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You good-for-nothing,’ shall be guilty before the supreme court; and whoever says, ‘You fool,’ shall be guilty enough to go into the fiery hell.

영어MSG,22 I’m telling you that anyone who is so much as angry with a brother or sister is guilty of murder. Carelessly call a brother ‘idiot!’ and you just might find yourself hauled into court. Thoughtlessly yell ‘stupid!’ at a sister and you are on the brink of hellfire. The simple moral fact is that words kill.

영어NRSV,22 But I say to you that if you are angry with a brother or sister, you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if you insult a brother or sister, you will be liable to the council; and if you say, ‘You fool,’ you will be liable to the hell of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οτι πας ο οργιζομενος τω αδελφω αυτου εικη ενοχος εσται τη κρισει ος δ αν ειπη τω αδελφω αυτου ρακα ενοχος εσται τω συνεδριω ος δ αν ειπη μωρε ενοχος εσται εις την γεενναν του πυρος

라틴어Vulgate,22 ego autem dico vobis quia omnis qui irascitur fratri suo reus erit iudicio qui autem dixerit fratri suo racha reus erit concilio qui autem dixerit fatue reus erit gehennae ignis

히브리어Modern,22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כל אשר יקצף על אחיו חנם מחיב הוא לבית דין ואשר יאמר אל אחיו רקא מחיב הוא לסנהדרין ואשר יאמר אתה הנבל מחיב לאש גיהנם׃

성 경: [마5:2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 지옥불(*, 게엔나 투 퓌로스). –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 라가(*,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 미련한 놈(*,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에안 운 프로스페레스 토 도론 수 에피 토 뒤시아스테리온 카케이 므네스데스 호티 호 아델포스 수 에케이 티 카타 수

개역개정,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새번역,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 ㉬그, ‘네 형제’

우리말성경,23 그러므로 네가 만약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네 형제가 너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가톨릭성경,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영어NIV,23 “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영어NASB,23 “Therefore if you are presenting your offering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영어MSG,23 “This is how I want you to conduct yourself in these matters. If you enter your place of worship and, about to make an offering, you suddenly remember a grudge a friend has against you,

영어NRSV,23 So when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if you remember that your brother or sister has something against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3 εαν ουν προσφερης το δωρον σου επι το θυσιαστηριον κακει μνησθης οτι ο αδελφος σου εχει τι κατα σου

라틴어Vulgate,23 si ergo offeres munus tuum ad altare et ibi recordatus fueris quia frater tuus habet aliquid adversum te

히브리어Modern,23 לכן אם תקריב קרבנך אל המזבח ושם תזכר כי יש לאחיך דבר עליך׃

성 경: [마5:2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것이다.

아페스 에케이 토 도론 수 엠프로스덴 투 뒤시아스테리우 카이 휘파게 프로톤 디알라게디 토 아델포 수 카이 토테 엘돈 프로스페레 토 도론 수

개역개정,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새번역,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 ㉭그, ‘네 형제’

우리말성경,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두고 우선 가서 그 사람과 화해하여라. 예물은 그 다음에 돌아와 드려라.

가톨릭성경,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영어NIV,24 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영어NASB,24 leave your offering there before the altar and go; first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present your offering.

영어MSG,24 abandon your offering, leave immediately, go to this friend and make things right. Then and only then, come back and work things out with God.

영어NRSV,24 leave your gift there before the altar and go; first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or sist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φες εκει το δωρον σου εμπροσθεν του θυσιαστηριου και υπαγε πρωτον διαλλαγηθι τω αδελφω σου και τοτε ελθων προσφερε το δωρον σου

라틴어Vulgate,24 relinque ibi munus tuum ante altare et vade prius reconciliare fratri tuo et tunc veniens offers munus tuum

히브리어Modern,24 עזוב תעזב שם את קרבנך לפני המזבח וקדם ללכת לכפר פני אחיך ואחרי כן בוא הקרב את קרבנך׃

성 경: [마5:2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가 아닌 ‘디아'(*,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이스디 유노온 토 안티디코 수 타퀴 헤오스 호투 에이 멭 아우투 엔 테 호도 메포테 세 파라도 호 안티디코스 토 크리테 카이 호 크리테스 토 휘페레테 카이 에이스 퓔라켄 블레데세

개역개정,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새번역,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서둘러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너를 간수에게 내어 주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영어NIV,25 “Settle matters quickly with your adversary who is taking you to court. Do it while you are still with him on the way, or he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may hand you over to the officer, and you may be thrown into prison.

영어NASB,25 “Make friends quickly with your opponent at law while you are with him on the way, so that your opponent may not deliver you to the judge, and the judge to the officer, and you be thrown into prison.

영어MSG,25 “Or say you’re out on the street and an old enemy accosts you. Don’t lose a minute. Make the first move; make things right with him. After all, if you leave the first move to him, knowing his track record, you’re likely to end up in court, maybe even jail.

영어NRSV,25 Come to terms quickly with your accuser while you are on the way to court with him, or your accuser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to the guard, and you will be thrown into prison.

헬라어신약Stephanos,25 ισθι ευνοων τω αντιδικω σου ταχυ εως οτου ει εν τη οδω μετ αυτου μηποτε σε παραδω ο αντιδικος τω κριτη και ο κριτης σε παραδω τω υπηρετη και εις φυλακην βληθηση

라틴어Vulgate,25 esto consentiens adversario tuo cito dum es in via cum eo ne forte tradat te adversarius iudici et iudex tradat te ministro et in carcerem mittaris

히브리어Modern,25 מהר התרצה לאיש ריבך בעודך בדרך אתו פן יסגיר אתך איש ריבך אל השפט והשפט יסגירך לשוטר והשלכת את בית הכלא׃

성 경: [마5:2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옥'(*,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아멘 레고 소이 우 메 엨셀데스 에케이덴 헤오스 안 아포도스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개역개정,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새번역,2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그, ‘코드란테스’

우리말성경,26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1고드란트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어NIV,26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영어NASB,26 “Truly I say to you, you will not come out of there until you have paid up the last cent.

영어MSG,26 If that happens, you won’t get out without a stiff fine.

영어NRSV,26 Truly I tell you, you will never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헬라어신약Stephanos,26 αμην λεγω σοι ου μη εξελθης εκειθεν εως αν αποδως τον εσχατον κοδραντην

라틴어Vulgate,26 amen dico tibi non exies inde donec reddas novissimum quadrantem

히브리어Modern,26 אמן אמר אני לך לא תצא משם עד אשר שלמת את הפרוטה האחרונה׃

성 경: [마5:2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 호리라도(*,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우 모이큐세이스

개역개정,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0:14

우리말성경,27 ‘너는 간음하지 말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너희가 들었다. 출20:14

가톨릭성경,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27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Do not commit adultery.’

영어NASB,27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영어MSG,27 “You know the next commandment pretty well, too: ‘Don’t go to bed with another’s spouse.’

영어NRSV,27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헬라어신약Stephanos,27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τοις αρχαιοις ου μοιχευσεις

라틴어Vulgate,27 audistis quia dictum est antiquis non moechaberis

히브리어Modern,27 שמעתם כי נאמר לקדמונים לא תנאף׃

성 경: [마5:2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블레폰 귀나이카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 에데 에모이큐센 아우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개역개정,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새번역,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우리말성경,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음란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으로 간음죄를 지은 것이다.

가톨릭성경,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영어NIV,28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looks at a woman lustfully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영어NASB,28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looks on a woman with lust for her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영어MSG,28 But don’t think you’ve preserved your virtue simply by staying out of bed. Your heart can be corrupted by lust even quicker than your body. Those leering looks you think nobody notices–they also corrupt.

영어NRSV,28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looks at a woman with lust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οτι πας ο βλεπων γυναικα προς το επιθυμησαι αυτης ηδη εμοιχευσεν αυτην εν τη καρδι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28 ego autem dico vobis quoniam omnis qui viderit mulierem ad concupiscendum eam iam moechatus est eam in corde suo

히브리어Modern,28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כל אשר יביט באשה לחמד אותה נאף נאפה בלבו׃

성 경: [마5:2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 음욕을 품는(*,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마음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에이 데 호 옾달모스 수 호 뎈시오스 스칸달리제이 세 엨셀레 아우톤 카이 발레 아포 수 쉼페레이 가르 소이 히나 아폴레타이 헨 톤 멜론 수 카이 메 홀론 토 소마 수 블레데 에이스 게엔난

개역개정,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새번역,29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29 네 오른쪽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 눈을 뽑아 내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영어NIV,29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gouge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영어NASB,29 “If your right eye makes you stumble, tear it out and throw it from you; for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the parts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영어MSG,29 “Let’s not pretend this is easier than it really is. If you want to live a morally pure life, here’s what you have to do: You have to blind your right eye the moment you catch it in a lustful leer. You have to choose to live one-eyed or else be dumped on a moral trash pile.

영어NRSV,29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29 ει δε ο οφθαλμος σου ο δεξιος σκανδαλιζει σε εξελε αυτον και βαλε απο σου συμφερει γαρ σοι ινα αποληται εν των μελων σου και μη ολον το σωμα σου βληθη εις γεενναν

라틴어Vulgate,29 quod si oculus tuus dexter scandalizat te erue eum et proice abs te expedit enim tibi ut pereat unum membrorum tuorum quam totum corpus tuum mittatur in gehennam

히브리어Modern,29 ואם תכשילך עין ימינך נקר אותה והשלך ממך כי טוב לך אשר יאבד אחד מאבריך מרדת כל גופך אל גיהנם׃

성 경: [마5:29,3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카이 에이 헤 엨시아 수 케이르 스칸달리제이 세 엨콮손 아우덴 카이 발레 아포 수 쉼페레이 가르 소이 히나 아폴레타이 헨 톤 멜론 수 카이 메 홀론 토 소마 수 에이스 게엔난 아펠데

개역개정,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새번역,30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30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 손을 잘라 내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영어NIV,30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영어NASB,30 “If your right hand makes you stumble, cut it off and throw it from you; for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the parts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영어MSG,30 And you have to chop off your right hand the moment you notice it raised threateningly. Better a bloody stump than your entire being discarded for good in the dump.

영어NRSV,30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ι η δεξια σου χειρ σκανδαλιζει σε εκκοψον αυτην και βαλε απο σου συμφερει γαρ σοι ινα αποληται εν των μελων σου και μη ολον το σωμα σου βληθη εις γεενναν

라틴어Vulgate,30 et si dextera manus tua scandalizat te abscide eam et proice abs te expedit tibi ut pereat unum membrorum tuorum quam totum corpus tuum eat in gehennam

히브리어Modern,30 ואם ידך הימנית תכשילך קצץ אותה והשלך ממך כי טוב לך אשר יאבד אחד מאבריך מרדת כל גופך אל גיהנם׃

에르레데 데 호스 안 아폴뤼세 텐 귀나이카 아우투 도토 아우테 아포스타시온

개역개정,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새번역,31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 ㉤신 24:1

우리말성경,31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이혼증서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신24:1

가톨릭성경,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하신 말씀이 있다.

영어NIV,31 “It has been said,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must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영어NASB,31 “It was said, ‘WHOEVER SENDS HIS WIFE AWAY, LET HIM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영어MSG,31 “Remember the Scripture that says, ‘Whoever divorces his wife, let him do it legally, giving her divorce papers and her legal rights’?

영어NRSV,31 “It was also said, ‘Whoever divorces his wife, let him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ρρεθη δε οτι ος αν απολυση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δοτω αυτη αποστασιον

라틴어Vulgate,31 dictum est autem quicumque dimiserit uxorem suam det illi libellum repudii

히브리어Modern,31 ונאמר איש אשר ישלח את אשתו ונתן לה ספר כריתות׃

성 경: [마5:3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아폴뤼온 텐 귀나이카 아우투 파렠토스 로구 포르네이아스 포이에이 아우텐 모이큐데나이 카이 호스 에안 아폴렐뤼메넨 가메세 모이카타이

개역개정,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새번역,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

우리말성경,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면 그 아내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가톨릭성경,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영어NIV,32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marital unfaithfulness, causes her to become an adulteress, and anyone who marries the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영어NASB,32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the reason of unchastity, makes her commit adultery; and whoever marries a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영어MSG,32 Too many of you are using that as a cover for selfishness and whim, pretending to be righteous just because you are ‘legal.’ Please, no more pretending. If you divorce your wife, you’re responsible for making her an adulteress (unless she has already made herself that by sexual promiscuity). And if you marry such a divorced adulteress, you’re automatically an adulterer yourself. You can’t use legal cover to mask a moral failure.

영어NRSV,32 But I say to you that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on the ground of unchastity, causes her to commit adultery; and whoever marries a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헬라어신약Stephanos,32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οτι ος αν απολυση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παρεκτος λογου πορνειας ποιει αυτην μοιχασθαι και ος εαν απολελυμενην γαμηση μοιχαται

라틴어Vulgate,32 ego autem dico vobis quia omnis qui dimiserit uxorem suam excepta fornicationis causa facit eam moechari et qui dimissam duxerit adulterat

히브리어Modern,32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המשלח את אשתו בלתי על דבר זנות עשה אתה נאפת והלקח את הגרושה לו לאשה נאף הוא׃

성 경: [마5:3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 버리면(*,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 간음하게 함이요(*,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팔린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 우크 에피오르케세이스 아포도세이스 데 토 귀리오 투스 호르쿠스 수

개역개정,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33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 ㉥레 19:12; 민 30:2; 신 23:21(칠십인역)

우리말성경,33 또 옛 사람들에게 ‘네가 한 맹세를 어기지 말고 주께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가톨릭성경,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영어NIV,33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break your oath, but keep the oaths you have made to the Lord.’

영어NASB,33 “Again, you have heard that the ancients were told, ‘YOU SHALL NOT MAKE FALSE VOWS, BUT SHALL FULFILL YOUR VOWS TO THE LORD.’

영어MSG,33 “And don’t say anything you don’t mean. This counsel is embedded deep in our traditions.

영어NRSV,33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ose of ancient times, ‘You shall not swear falsely, but carry out the vows you have made to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33 παλιν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τοις αρχαιοις ουκ επιορκησεις αποδωσεις δε τω κυριω τους ορκους σου

라틴어Vulgate,33 iterum audistis quia dictum est antiquis non peierabis reddes autem Domino iuramenta tua

히브리어Modern,33 עוד שמעתם כי נאמר לקדמונים לא תשבע לשקר ושלם ליהוה שבעותיך׃

성 경: [마5:3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에고 데 레고 휘민 메 오모사이 홀로스 메테 엔 토 우라노 호티 드로노스 에스틴 투 데우

개역개정,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새번역,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영어NIV,34 But I tell you, Do not swear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영어NASB,34 “But I say to you, make no oath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the throne of God,

영어MSG,34 You only make things worse when you lay down a smoke screen of pious talk, saying, ‘I’ll pray for you,’ and never doing it, or saying, ‘God be with you,’ and not meaning it. You don’t make your words true by embellishing them with religious lace. In making your speech sound more religious, it becomes less true.

영어NRSV,34 But I say to you, Do not swear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the throne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4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μη ομοσαι ολως μητε εν τω ουρανω οτι θρονος εστι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34 ego autem dico vobis non iurare omnino neque per caelum quia thronus Dei est

히브리어Modern,34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לא תשבעו כל שבועה לא בשמים כי כסא אלהים המה׃

성 경: [마5:3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메테 엔 테 게 호티 휘포포디온 에스틴 톤 포돈 아우투 메테 에이스 히에로솔뤼마 호티 폴리스 에스틴 투 메갈루 바실레오스

개역개정,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새번역,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5 땅을 두고도 하지 말라.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또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하지 말라.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영어NIV,35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영어NASB,35 or by the earth, for it is the footstool of His feet,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영어MSG,35 (SEE 5:34)

영어NRSV,35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헬라어신약Stephanos,35 μητε εν τη γη οτι υποποδιον εστιν των ποδων αυτου μητε εις ιεροσολυμα οτι πολις εστιν του μεγαλου βασιλεως

라틴어Vulgate,35 neque per terram quia scabillum est pedum eius neque per Hierosolymam quia civitas est magni Regis

히브리어Modern,35 ולא בארץ כי הדום רגליו היא ולא בירושלים כי היא קרית מלך רב׃

성 경: [마5:3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옴뉘나이 엔)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다'(*,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메테 엔 테 케팔레 수 오모세스 호티 우 뒤나사이 미안 트리카 류켄 포이에사이 에 멜라이난

개역개정,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새번역,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6 네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어NIV,36 And do not swear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even one hair white or black.

영어NASB,36 “Nor shall you make an oath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영어MSG,36 (SEE 5:34)

영어NRSV,36 And do not swear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헬라어신약Stephanos,36 μητε εν τη κεφαλη σου ομοσης οτι ου δυνασαι μιαν τριχα λευκην η μελαιναν ποιησαι

라틴어Vulgate,36 neque per caput tuum iuraveris quia non potes unum capillum album facere aut nigrum

히브리어Modern,36 ]73-63[ אף בראשך אל תשבע כי אין ביכלתך להפך שער אחד ללבן או לשחר אך יהי דברין הן הן לא לא והיותר מאלה מן הרע הוא׃

성 경: [마5:3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에스토 데 호 로고스 휘본 나이 나이 우 우 토 데 페리손 투톤 에크 투 포네루 에스틴

개역개정,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새번역,37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또는 ‘악한 자’

우리말성경,37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하라. 그 이상의 말은 악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성경,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영어NIV,37 Simply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No’; anything beyond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영어NASB,37 “But let your statement be, ‘Yes, yes’ or ‘No, no’; anything beyond these is of evil.

영어MSG,37 Just say ‘yes’ and ‘no.’ When you manipulate words to get your own way, you go wrong.

영어NRSV,37 Let your word be ‘Yes, Yes’ or ‘No, No’; anything more than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헬라어신약Stephanos,37 εστω δε ο λογος υμων ναι ναι ου ου το δε περισσον τουτων εκ του πονηρ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37 sit autem sermo vester est est non non quod autem his abundantius est a malo est

히브리어Modern,37 ]73-63[׃

성 경: [마5:3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 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옾달몬 안티 옾달무 카이 오돈타 안티 오돈토스

개역개정,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1:24; 레 24:20; 신 19:21

우리말성경,38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출21:24;레24:20;신19:21

가톨릭성경,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

영어NASB,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영어MSG,38 “Here’s another old saying that deserves a second look: ‘Eye for eye, tooth for tooth.’

영어NRSV,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헬라어신약Stephanos,38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οφθαλμον αντι οφθαλμου και οδοντα αντι οδοντος

라틴어Vulgate,38 audistis quia dictum est oculum pro oculo et dentem pro dente

히브리어Modern,38 שמעתם כי נאמר עין תחת עין שן תחת שן׃

성 경: [마5:3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에고 데 레고 휘민 메 안티스테나이 토 포네로 알 호스티스 세 라피제이 에이스 텐 뎈시안 시아고나 수 스트렢손 아우토 카이 텐 알렌

개역개정,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새번역,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우리말성경,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

가톨릭성경,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영어NIV,39 But I tell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 If someone strik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영어NASB,39 “But I say to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l; but whoever slap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to him also.

영어MSG,39 Is that going to get us anywhere? Here’s what I propose: ‘Don’t hit back at all.’ If someone strikes you, stand there and take it.

영어NRSV,39 But I say to you, Do not resist an evildoer. But if anyone strik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he other also;

헬라어신약Stephanos,39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μη αντιστηναι τω πονηρω αλλ οστις σε ραπισει επι την δεξιαν σου σιαγονα στρεψον αυτω και την αλλην

라틴어Vulgate,39 ego autem dico vobis non resistere malo sed si quis te percusserit in dextera maxilla tua praebe illi et alteram

히브리어Modern,39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אל תתקוממו לרע אך המכה אותך על הלפי הימנית הטה לו גם את האחרת׃

성 경: [마5:3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카이 토 델론티 소이 크리데나이 카이 톤 키토나 수 라베인 아페스 아우토 카이 토 히마티온

개역개정,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새번역,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우리말성경,40 누가 너를 고소하고 속옷을 가져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어라.

가톨릭성경,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영어NIV,40 And if some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s well.

영어NASB,40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shirt, let him have your coat also.

영어MSG,40 If someone drags you into court and sues for the shirt off your back, giftwrap your best coat and make a present of it.

영어NRSV,40 and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coat, give your cloak as well;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τω θελοντι σοι κριθηναι και τον χιτωνα σου λαβειν αφες αυτω και το ιματιον

라틴어Vulgate,40 et ei qui vult tecum iudicio contendere et tunicam tuam tollere remitte ei et pallium

히브리어Modern,40 ואשר יחפץ לריב עמך ולקחת את כתנתך תן לו גם את חמעיל׃

성 경: [마5:4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訟査)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카이 호스티스 세 앙가류세이 밀리온 헨 휘파게 멭 아우투 뒤오

개역개정,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새번역,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우리말성경,41 누가 네게 억지로 1밀리온을 가자고 하거든 2밀리온을 같이 가 주어라.

가톨릭성경,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영어NIV,41 If some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영어NASB,41 “Whoever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영어MSG,41 And if someone takes unfair advantage of you, use the occasion to practice the servant life.

영어NRSV,41 and if any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also the second mile.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οστις σε αγγαρευσει μιλιον εν υπαγε μετ αυτου δυο

라틴어Vulgate,41 et quicumque te angariaverit mille passus vade cum illo alia duo

히브리어Modern,41 והאנס אותך ללכת עמו דרך מיל לך אתו שנים׃

성 경: [마5:4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토 아이툰티 세 도스 카이 톤 델론타 아포 수 다니사스다이 메 아포스트라페스

개역개정,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새번역,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우리말성경,42 네게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마라.

가톨릭성경,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영어NIV,42 Give to the one who asks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the 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영어NASB,42 “Give to him who asks of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him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영어MSG,42 No more tit-for-tat stuff. Live generously.

영어NRSV,42 Give to everyone who begs from you, and do not refuse any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헬라어신약Stephanos,42 τω αιτουντι σε διδου και τον θελοντα απο σου δανεισασθαι μη αποστραφης

라틴어Vulgate,42 qui petit a te da ei et volenti mutuari a te ne avertaris

히브리어Modern,42 השאל מאתך תן לו והבא ללות ממך אל תשב פניו׃

성 경: [마5:4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아가페세이스 톤 슬레시온 수 카이 미세세이스 톤 에크드론 수

개역개정,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레 19:18

우리말성경,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레19:18

가톨릭성경,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영어NASB,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영어MSG,43 “You’re familiar with the old written law, ‘Love your friend,’ and its unwritten companion, ‘Hate your enemy.’

영어NRSV,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헬라어신약Stephanos,43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αγαπησεις τον πλησιον σου και μισησεις τον εχθρον σου

라틴어Vulgate,43 audistis quia dictum est diliges proximum tuum et odio habebis inimicum tuum

히브리어Modern,43 שמעתם כי נאמר ואהבת לרעך ושנאת את איבך׃

성 경: [마5:4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에고 데 레고 휘민 아가파테 투스 에크드루스 휘몬 카이 프로슈케스데 휘페르 톤 디오콘톤 휘마스

개역개정,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새번역,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우리말성경,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가톨릭성경,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영어NIV,44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영어NASB,44 “But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영어MSG,44 I’m challenging that. I’m telling you to love your enemies. Let them bring out the best in you, not the worst. When someone gives you a hard time, respond with the energies of prayer,

영어NRSV,44 But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44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αγαπατε τους εχθρους υμων ευλογειτε τους καταρωμενους υμας καλως ποιειτε τους μισουντας υμας και προσευχεσθε υπερ των επηρεαζοντων υμας και διωκοντων υμας

라틴어Vulgate,44 ego autem dico vobis diligite inimicos vestros benefacite his qui oderunt vos et orate pro persequentibus et calumniantibus vos

히브리어Modern,44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אהבו את איביכם ברכו את מקקליכם היטיבו לשנאיכם והתפללו בעד מכאיביכם ורדפיכם׃

호포스 게네스데 휘오이 투 파트로스 휘몬 투 엔 우라노이스 호티 토 헬리온 아우투 아나텔레이 에피 포네루스 카이 아가두스 카이 브레케이 에피 디카이우스 카이 아디쿠스

개역개정,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새번역,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 ㉩그, ‘아들들이’

우리말성경,45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가톨릭성경,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영어NIV,45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영어NASB,45 so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for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영어MSG,45 for then you are working out of your true selves, your God-created selves. This is what God does. He gives his best–the sun to warm and the rain to nourish–to everyone, regardless: the good and bad, the nice and nasty.

영어NRSV,45 so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Father in heaven; for he makes his sun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on the unrighteous.

헬라어신약Stephanos,45 οπως γενησθε υιοι του πατρος υμων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οτι τον ηλιον αυτου ανατελλει επι πονηρους και αγαθους και βρεχει επι δικαιους και αδικους

라틴어Vulgate,45 ut sitis filii Patris vestri qui in caelis est qui solem suum oriri facit super bonos et malos et pluit super iustos et iniustos

히브리어Modern,45 למען תהיו בנים לאביכם שבשמים אשר הוא מזריח שמשו לרעים ולטובים וממטיר על הצדיקים וגם על הרשעים׃

성 경: [마5:4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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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오직 복음을 선포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1-12절, 팔복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 . . .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말한다.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 같다. ‘무리’는 이런 혹은 저런 관심을 가지고 또 이런 혹은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실천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고 본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고 하여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부른다.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어떤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항상 교만과 함께 간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이라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며 장차 지옥의 불못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다. 이사야 66:2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을 것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이 지식과 지혜가 없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 이것은 사람이 겸손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자 곧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심령이 교만치 않고 겸손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물론, 구원받은 자는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애통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17).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듯이(눅 7:47, 50),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죄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케 되기 때문이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믿는 자 또는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 몇 평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받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힘센 자나 억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1:3-4).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히 11:16).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도 여전히 온유해야 한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엡 4:2), 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했다(골 3:12).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 즉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경건과 도덕성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의가 없고 죄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듯이, 사람이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깨닫고 의를 갈망하면 의를 풍성히 얻을 것이다. 그 풍성한 의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얻는 완전한 의를 말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롬 3:20-22).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 . . .

7절부터의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주께서는 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와 긍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했다(엡 2:4-5). 예정(豫定)도, 속죄(贖罪)도, 중생(重生)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태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엡 4:32).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들을 긍휼 없이 대하실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약 2:13).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마땅하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렘 17:9). 주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의 마음이 더러운 것은 물욕, 정욕, 명예욕 같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죄씻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마음이 더러운 자, 곧 죄와 탐욕으로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또 그의 영광의 형상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잘 유지해야 한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 . . .

예수께서는 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화평케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골로새서 1:20-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은 복음 전파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증거하였다(고후 5:18).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것은 사람들 간의 화목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서로 간에도 화목하기를 힘쓸 것이다. 서로 화목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이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갈라디아서 5:19-21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전통사본] 등 아홉 가지를 육체의 일들로 말하였고 또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야고보서 3: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는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성도다운 행위, 즉 거룩하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표요 확증이다. 특히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의 일과 하나님 안에서 서로 화목시키는 일은 성도다운 선한 일이다.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 . . .

주께서는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의 때문에’라는 뜻이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확실히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표라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를 사모하고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의를 위해 살고 의를 전파하고 의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당한다.

예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욕과 핍박을 받을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마 16:24-25). 그것은 핍박받을 것도 예상되는 길이다. 마귀는 예수 믿는 자를 미워하고 세상을 충동하여 성도를 핍박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로 비난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상을 말씀하시며 핍박받을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 구절은 또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죄악에 대한 형벌에 차등이 있을 것이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에도 차등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역사에서 참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바른 말을 하였기 때문이고, 그 바른 말이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회개치 않는 사람들은 참된 목사들의 설교를 미워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악간에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공명정대하게 보복하실 것이다.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표가 되며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힘있게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자.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바르게, 충성되게 살자.

본문을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에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 것 같다.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또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구원받은 자들의 덕을 보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을 깨끗케 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며 또 서로 화목하며, 의를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또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화목케 하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가?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 믿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믿지 않는 자들이며 성경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소금은 무슨 역할을 하는 물질인가?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하나도 만들지 못할지 모른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젓갈, 찌개, 김치를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너무 짜지 않고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금간은 최고의 음식맛을 낸다.

이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인생의 최고의 맛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에 맞는 삶을 가리킬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인생의 맛이 없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아름다움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맛이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의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들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을 뿌려 절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소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것도 영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가 더욱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로 악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요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른 생활교훈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악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그 교훈대로 산다면 세상은 급격하게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만일 그들이 짠맛 곧 경건성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밀교(密敎)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다. 설교들은 다 공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 혹은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 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말쟁이라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웃 사랑을 교훈한다(레 19:18). 이웃 사랑은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특히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탈북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함은 서로 친절히 대하고 또 서로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4-7).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종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주인들은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엡 5:22, 25; 6:1-4, 5-9).

욥은 선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였고, 숙박할 곳이 없는 나그네에게 유숙할 방도 제공하였다(욥 31:16-20, 31-32).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잘 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롬 2:23-24).

오늘날에는 어떤 교회의 직분자들이 음행하고 공금횡령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아주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관계를 조심해야 하고 돈 욕심을 버리고 돈 거래에 있어서 정정당당하고 깨끗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소금의 맛을 잃지 말고 잘 유지하라고 암시하셨다. 소금의 짠맛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필수물이다. 그것 없이는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없을 정도이다. 인생의 참 맛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또 그의 뜻대로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실천할 때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참 맛이 있다. 또 소금이 부패 방지에 쓰이듯이,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도가 도덕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깨어 있다면 세상은 급속히 부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도덕성, 특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서 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이런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사랑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7-20절, 구약성경을 이루려 오심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의 책이며 그것을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완전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는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성경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관계, 즉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속죄 사역은 모세의 율법의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즉 도덕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이루셨다. 예레미야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리리라고 예언했고(렘 23:5-6) 다니엘은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때에 대해 예언하였다(단 9:2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도덕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도 성취하셨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 제사 제도, 성막 제도, 절기 등의 실체로 오셨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골 2:16-17).

또 히브리서는 “이 장막[구약의 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했고(히 9:9-12), 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히 10:1).

초대교회의 말시온이라는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서로 다른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폐지하기 위해 오셨고,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큰 오해이었다.

역사상, 율법주의라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반율법주의라는 사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 두 사상은 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 . .

주께서는 또, “[이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이룰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구약의 율법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켰다고 본다. 주께서는 구약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하신 것이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표현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신적 권위를 가짐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단어 영감]을 증거한다. 아니, 단지 축자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逐點) 영감 혹은 축획(逐劃) 영감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법이나 성경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남김없이 성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이루셨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 . . .

주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는 신약교회를 가리키고(마 11:11-12; 13:24, 31, 33, 44, 45, 47), 둘째는 장차 임할 영광의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신약교회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으로 완성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생활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성경을 다 믿고 힘써 지키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차이가 내세 천국에서의 인격의 차등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은 상급의 차등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의 정도에 따른 내세의 인격의 차등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 즉 영화를 믿는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인격의 차등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자는 확실히 교회 안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온전한 순종, 작은 부분까지의 순종이 요청된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 . . .

주께서는 또,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수준의 의처럼 보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별로 흠 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의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온갖 탐심과 거짓으로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마 15:8; 23:25, 28).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심의 율법 준행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신 6:5).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15:8). 우리가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할 때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그의 대속(代贖)의 완전한 의를 가리키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얻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성도는 율법을 행하되 단지 외적으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성심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천국에 들어갈 성도의 더 나은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이다. 그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 의가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 의지하고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을 충돌시키지 말자. 그 둘은 조화를 이룬다. 복음은 율법의 성취이다. 도덕법의 성취이며 의식법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충돌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한 의를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믿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그 의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덕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든 계명과 성경 교훈을 성심으로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함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21-26절, 살인에 대하여

[21-22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죄악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출산하기 전의 태아도 인간이므로, 낙태도 태아 살해 즉 살인이며, 자기의 목숨을 끊는 자살도 살인이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고 낙태도 하지 말고 자살도 하지 말아야 한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 . . .

주께서는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 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들이 제6계명에 포함된 내용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그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 자마다’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다. 화는 정당한 경우에 낼 수 있을 것이지만, 까닭 없이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유 없이 내는 화는 형제에 대한 미움의 표현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3:5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라는 아람어는 ‘바보, 빈 머리’라는 뜻으로 남을 경멸하는 욕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바보, 빈 머리, 미련한 놈’ 등의 욕을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6:10은 후욕하는[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남을 미워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나 형제에게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 즉 오늘날 말로 하면 법정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들어갈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께서는 화목하는 생활, 즉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예배의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을 원하신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선한 삶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25-26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엄격하고 철저할 것을 말씀하신다. 죄는 깨닫는 즉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것은 율법에 말씀하신 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신 6:5)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며(레 19:18; 마 22:39) 또 주께서 친히 새 계명으로 주신 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전 13:5). 에베소서 5:21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했다.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전 13:4-5). 에베소서 4:29, 31-32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한 말을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3:13-17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했다. 성도는 거룩하고 화목하며 너그럽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낙태나 자살도 포함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화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27-30절, 간음에 대하여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치 말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간음’(adultery)이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며, ‘음행’(fornication)이란 보통 결혼관계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합의적 성관계를 가리킨다. 제7계명은 부부관계 외의 성행위, 즉 간음, 음행, 근친상간, 강간, 매춘, 동성애, 수간(獸姦) 등을 정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보인다. 사람은 보는 데서 감정적 충동이나 소유의 충동을 가진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보면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은 좋은 옷이나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사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한다. 그런 충동을 안 가지려면 안 보는 것이 상책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었으므로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창 3:6).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고(삼하 11:2)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해 동침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안 보고도 상상할 수 있고 또 보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충동을 받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낫고 보아도 잠깐만 보고 두 번 보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를 포옹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그와 함께 눕는 불결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성도덕이 심히 해이해진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접대 문화, 유흥 문화가 성행하고 매춘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또 이런 풍조를 조장하는 음란물들이 인터넷 문명을 통해,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통해 홍수처럼 밀려오며 많은 사람들이 악한 풍조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과연 말세이다.

우리가 여성의 미니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 너무 파진 옷, 짝 달라붙는 옷 등을 반대하며 또 청년들의 은밀한 남녀 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점을 깨닫고 그런 일을 피해야 한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까닭 없이 노하고 또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간음해야만 간음이 아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실재하며 범죄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불구자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범죄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눈으로 범죄한다면 한 눈으로만 보는 자나 장님이 더 낫고, 손으로 범죄한다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불구자가 더 유익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는가, 두 손이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눈과 손으로 범죄하는가 범죄하지 않는가이다.

이 구절은 또한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를 보인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는 자는 복되며 천국백성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며,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또 그 회개는 죄의 철저한 청산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의 지체들이 범죄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롬 6:13).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선한 일, 곧 전도와 심방과 봉사의 일에 빠른 발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마음으로 미워함이나 까닭 없이 노함이나 형제에 대해 욕함이 마음의 살인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죄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두 눈과 두 손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눈과 한 손을 가지고 범죄치 않고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두렵고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계명을 어기는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범죄하는 모든 죄인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31-32절, 이혼에 대하여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 외에도, 신앙적 이유 때문에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경우를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33-37절, 맹세에 대하여

[33-36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엄숙히 무엇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맹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표이며 그런 자만 할 수 있다고 본다. 신명기 6:12-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고, 신명기 10:20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예루살렘으로나 네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요, 모든 맹세를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26:63-64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할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맹세를 긍정하셨다. 고린도후서 1:23에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맹세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맹세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그것으로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거기서 그것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러한 일들에서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는 합법적 맹세는 행해져야 한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할 때 예와 아니오를 명확히 말하여야 한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주장하거나 증거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불성실하게 약속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주장하고 증거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약속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해야 한다. 우리는 맹세에 대해 바로 알고 행하자.

38-42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 그 의를 받은 자는 또한 완전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의의 삶은 단순히 외적 규례를 지키는 삶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고 사랑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며, 거짓 맹세하지 않으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구약 율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른 데 있다.

사실, 구약의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거한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의 벌을 거두어주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말씀은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경찰이나 군대, 사형이나 전쟁은 사회와 국가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온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들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자. 그가 악하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그에게 선을 베풀며 선하게 대하자.

43-48절, 원수를 사랑하라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전통사본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말씀 다음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본다. 누가복음 6:27-28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고 더 강화하신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47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먼저 악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성도들 가운데 낯선 형제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자. 신입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존 교인들의 온화한 태도로 말미암아 편안함을 느끼게 하자. 끼리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특히 낯이 익지 않은 분들에게 인사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태도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는 성도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친절과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그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시간에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 . . .

주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씀은 존재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자, 완전자시요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자, 불완전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도 신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문맥적으로는 친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온전, 즉 도덕적 온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속성, 특히 그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은 온전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해 사귄 교우들에게뿐 아니라,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에게도,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자.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그러하자.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온전함의 내용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자.

[역대상 2장 주석강해설교] 유다의 자손 야곱에서 다윗까지(역대상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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