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불과 동쪽 3km의 거리에 위치한 베다니에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3남매가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가정으로 평소에도 잘 들리셨고, 수난 주간에도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저녁이면 베다니의 그들의 집에 가셔서 쉬신 집이기도 하다.
특히 언니인 마르다는 헌신적이어서 음식을 잘 준비해서 예수님을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동생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 곁에 앉아 말씀듣기를 좋아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장단점을 가지고 비교하며 함부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는 말씀을 하셨는데, 더 좋은 선택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 한다.
첫째: 마르다의 신앙
1) 책망 받은 마르다(눅 10:38~42)
예수께서 제자들과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와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 극진한 사랑의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려고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돕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다.
사실 언니의 입장에 선 자기는 너무도 바쁜데 도우려 하지 않고 노는 것만 같아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 마리아에게 놀고만 있지 말고 자신을 돕도록 명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면서 오히려 마르다를 책망하셨다. 이럴 때 마르다는 마음이 몹시 상했을 것이고 반면에 마리아는 통쾌하게 여기면서 여자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묘한 마음가짐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을 초청하고 음식을 잘 대접하려는 것은 당연하고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다.
눅10:41~42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입장에선 음식 대접이 과히 중요하지 않고 그의 말씀 들어주는 것이 그를 더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그런데 마르다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로지 음식을 잘 대접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마음을 분주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를 책망한 것이다. 주님을 위한 명목으로의 봉사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신다.
2) 확신 있는 신앙(요 11:21~27)
나사로가 병들어 누웠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 예수께 사실을 알리고 예수께서 오라비의 병을 낫게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급히 나사로를 찾지 않으시고 이틀이 지난 후 그곳을 떠나 베다니에 도착 하셨고, 그때에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때였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한다(요 11:21). 이 말은 연락을 했는데도 제 때에 오시지 않았다는 원망도 아니고,그렇다고 하여 마르다가 이제라도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말도 아니다(22, 24,39절).
다만 예수께서 오심으로 마르다가 설움에 복받쳐 사무치는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주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손을 써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22절에서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다음 전개되는 대화로 간단히 알 수 있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7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부활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으나 사두개파는 부활을 반대하고 있었다(행 23:8). 고로 마르다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산다고 했을 때 종말론적 부활을 상기시키는 조문 인사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을 찾아 가셔서 기도한 후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 가까이 다가가 돌을 옮기라 하시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의 명령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권위적임을 보여주었다. 이로서 마르다는 처음 주님을 뵈었을 때 오라버니의 일로 원망과 불만스럽게 말하였으나 확신하는 신앙으로 신앙고백 하는데 이르렀다.
예수의 역사는 슬픔을 당한 마르다와 마리아 가정에 기쁨을 안겨 주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셨다. 그러나 요 12:10~11에 보면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부활을 거부한 사두개인들은 예수는 물론 나사로까지 죽일 음모를 하게 되었다.
둘째: 마리아의 신앙
1) 향유를 부은 여인(요 12:3~8)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그의 발밑에 앉아 말씀 듣기를 좋아하므로 ‘발 밑의 여인’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예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 보통 향유가 사용되는 경우는
① 기쁨이 넘치는 자리
② 속죄에 대한 감사의 의미
③ 장사 지낼 때 시체에 방부제로 사용되곤 했다.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시 산 기쁨과 유월절 엿새 전이므로 예수께서는 장사를 위한 것이라(7절) 말씀하셨다. 또한 마리아의 행위는 진정한 헌신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드 한 근은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5,000명 이상을 먹일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막 6:37~마가가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 한 것을 보라). 마리아에게는 예수에게라면 아까운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다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비난 하였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발에다 부어 허비하는 것보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함이 마땅히 여기게 될 것이나,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은 30에 넘겨줄 정도였던 가룟 유다로는 6절의 말씀대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2) 예수의 칭찬(마 26:6~13)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구제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것이고, 마리아에게 있어선 한 번의 주어진 기회를 가장 선용 한 경우로 평가하셨다. 기회란 항상 우리에게 열려있는 것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것도 신앙생활 잘하는 방법 이다. 마태복음엔 제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하시며 오히려 그의 사랑과 신앙적 행위에 대해 칭찬하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동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의지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할 때가 많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였기 때문에 칭찬은 물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접은 마르다와 같이 음식보다는 말씀 듣기를 원하신다.
롬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는데, 마음으로만 아니고 물질, 몸까지도 주님의 사역에 온전히 쓰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향유를 붓고 있는가? 우리의 몸으로 주님을 위해 어느 정도의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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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 본문 : 눅10:38-42 -*
Ⅰ. 상황배경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와 예루살렘 주변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갈릴리에서 주된 사역이 이루어졌다. 유대인의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킨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면 베다니를 거쳐 갈 때가 많이 있었는데 이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남매들이 있었다. 성경에 그들의 부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남매들만 살고 있는 듯하다. 베다니에 살고 있는 이 남매들은 예수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인데 예수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예수님은 나사로에 대해서 우리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Ⅱ.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점 문제점
성경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한계점을 드러내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유사점이 있다. 나아가서 두 사람이 성숙해진 모습은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베다니의 자매들을 통해서 들려주고 싶은 깊은 교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자매의 다른 상황에서의 행동들을 살펴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배우고자 한다.
1.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점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마르다라는 한 여인이 자기 집으로 예수님과 일행을 초대했다. 초대받은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서 식사를 기다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일행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언니의 분주함은 아랑곳없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에 한참 음식을 준비하던 마르다는 일손이 딸리고 분주한데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 야속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불평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잠잠히 충언을 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 두 자매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서 두 자매의 유형이 상반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우리가 정말 중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름 마리아 마르다 차이점 ▶ 소극적, 차분함, 수동적임 마리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언니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적극적, 활달함, 주도적임 오늘 본문에 보면 마르다 라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고 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도적으로 영접한 것은 마르다였다. ▶ 관계중심의 유형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무언가 얻을 것이 없는가? 하는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정신적인 교감을 하기를 원한 것이다.(에너지가 안으로 향하는 유형) ▶ 일 중심의 유형 마르다는 일 중심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무언가 자신이 움직여서 일을 해야 하는 스타일이다. 대접하기를 좋아하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무언가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유형이다.(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유형) ▶ 마음이 평온함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는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잘 받아 들이고 있었다. ▶ 마음이 분주함 예수님에게 무언가를 대접하려는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했다. 마르다는 스케일이 큰 여인이었다. 화끈하니까! 예수님에게 대접할 때도 멋들어지게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준비하다 보니까 너무 바쁜 상태에 있다.
교훈 : 성격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적용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가 살고 있다. 성격이 급한 사람, 적극적인 사람, 일하면 손이 큰 사람,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마음이 느긋한 사람,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사람, 에너지가 안으로 향하는 사람 등 그 종류를 세분화해서 말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손금이 다 다른 것처럼 깊이 들어가면 우리의 성향들이 다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성향이 좋고 나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각 사람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향들을 잘 활용하여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마리아나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마르다나 그 성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약 오늘날 모두가 마리아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배우기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가정과 교회의 부엌이 불이 꺼져 있다면 역동성은 떨어지고 풍성한 나눔의 장들은 빈약해 질 수 밖에 없다. 또 반면에 모두가 마르다와 같은 사람만 있다면 착실히 배우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주도적이 되려고 한다면 하나 되고 화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유형의 성격을 좋고 나쁜 것으로 가르지 말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서로의 장점을 잘 살려 연합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 문제점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격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르다만이 문제가 있고 마리아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쉽게 생각하면 마리아도 상황을 보고 언니가 너무 분주하게 준비하는 것을 보면 좀 도와주어야 하는 거시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마르다를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마르다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문제점을 무엇인가?
1. 지나치게 많은 것을 준비하려고 한 것이 문제이다.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분수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의 저변에는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욕구가 그 내면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일을 벌여놓고, 분주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 불평과 원망이 자기 동생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마르다였다. 그는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을 벌여 놓고 자기가 감당할 상황이 되지 않자 염려와 근심이 생기고 그 힘든 상황의 원인이 동생에게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눈치 없이 말씀만 듣고 있는 동생이 야속한 것이다. 슬금슬금 속에서 열이 뻗쳐오르는 것이다. 처음에 즐겁게 대접하려고 했던 마음이 불평으로 원망으로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따진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생각지 않으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즉 마르다는 일이 뒤틀린 것이 동생이 도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분주하여 염려와 근심이 커지다 보니까 그 원망을 동생에게 향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다의 문제인 것이다.
적용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르다같이 일을 분주하게 벌여놓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 내면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 것입니다. 많은 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을 많이 벌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정말 잘 하려고 했으면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도 동생과 상의해야 했고,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어야 했습니다. 동생과 상의를 해서 같이 준비하는 쪽으로 하던지 동생을 설득하지 못했으면 자신이 감당할 만큼만 준비하도록 짜임새 있게 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실제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내면의 욕심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순수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내면을 감찰하십니다.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감당할 영역을 기쁨으로 정성껏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2. 마르다와 마리아의 유사점(현실의 문제점에 눌려있는 자매들(요11:1-44))
한 번은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있을 때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자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두 자매는 예수님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내게 된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고 이틀을 더 유하시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베다니로 향하게 된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반응을 보면 이들이 성격이 대조적인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격이 대조적인 것을 떠나서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사람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르다의 반응
예수님이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급한 성격처럼 예수님을 맞이하러 달려나간다. 그리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예수님에게 말한다.
마르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절)
사실 마르다의 표현이 매우 믿음이 있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예수님이 황당한 말씀을 하신다. 죽인지 나흘이나 되는 오라비가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는 속히 답변한다.
마르다 :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마르다는 생각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마지막 부활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산다는 표현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그 말씀이라면 나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이 표현 속에는 마르다 속에 서운한 감정이 가득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어서 꾸짖듯이 말씀하신다.
예수님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선언하신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다. 나를 믿으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현존하는 지금 마르다 앞에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러자 마르다고 고백한다.
마르다 :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마르다의 고백이 멋진 고백이다. 그리고 이제서 예수님의 의도를 아는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르다는 여전히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마르다는 여전히 내면속으로는 나중에는 미래에는 주님이 그렇게 하시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너무 마음이 아프답니다. 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는 일시적으로 멈추게 된다. 마르다는 자기 동생에게 가서 예수님이 찾는다고 일러준다.
마리아의 반응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을 맞이한다. 마리아가 맞이하러 나갈 때 예수님은 마르다를 만났던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오라비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어서 예수님이 오신 다는 소식을 알고도 요동하지 않았던 마리아를 찾고 계신 것이다. 자기 슬픔에 압도되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마리아를 마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그 마리아가 예수님이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그제서야 급히 예수님에게 나아간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딱 한마디 표현이었다. 그 표현이 어쩌면 그렇게 마르다의 표현과 똑같을 수 있을까!
마리아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32이하)
예수님은 마리아조차도 현실의 문제에 눌려서 원망 섞인 표현을 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그리고 함께 온 유대인들이 슬퍼하며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비통히 여기셨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다. 현실의 문제에 매여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비통한 마음을 가지시게 되었다. 그리고 연민의 정을 느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어디 두었냐고 물으신다. 마리아의 대답은 와서 보시옵소서 라고 대답한다. 주님이 직접 보시라는 것입니다. 말할 힘조차 없음이요, 너무나 큰 슬픔에 잠겨 참담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나사로가 잠잔다고 했고, 나사로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인줄 이미 알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문제에 눌려 있는 사랑하는 두 자매의 모습이 안타깝고 영의 눈을 뜨지 못하는 많은 중생들을 보니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사로의 무덤 굴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때 마르다가 또 나섭니다.
마르다 :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마르다의 표현을 보십시오. 좀 전만 하더라고 멋진 신앙고백을 해서 큰 믿음을 소유한 것 같아 보였잖아요. 그러나 그때의 표현도 현실에 직면하지 못하고 막연한 미래로 소망이 없는 미래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미래로 생각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예수님 :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그리고 예수님은 손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시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놀라운 사건이었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과거의 원망 속에서 살지 말 것과 막연한 미래적 신앙의 삶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믿으라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분이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믿으라는 선포였던 것이다.
문제점
마르다와 마리아는 동일하게 커다란 현실의 슬픔과 문제 앞에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원망석인 표현을 했다. 그리고 마르다는 심지어 멋진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미래로 도피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큰 문제점 앞에서 역사하시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교훈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모든 문제는 의미가 있다. 과거의 후회와 원망 속으로 남을 탓하는 책임전가로 회피하지 말고, 불투명한 미래로 신앙을 이상화하지 말고 오늘 여기 나의 문제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오늘 여기서 문제를 풀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이다.
적용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현실의 문제에 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그 어둠의 터널에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또는 주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에 회의가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소망없는 미래를 들먹이며 신앙이 있는 척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십니다.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이 주님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에 머물르면서 현실의 문제에 눌려 고통하는 자들이여 현실의 죽음에 놓여있는 자들이여 나오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3. 영적으로 성숙한 마르다와 마리아(요12:1-11)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유대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대책회의를 열고 본격적을 예수님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유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잠시 유대지방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왔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베다니를 거치게 된다. 유월절 엿세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다시 들리게 된다. 이때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었다.
마르다
예수님을 다시 맞이한 마르다는 자신의 주특기인 음식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분주함도 불평도 없어 보인다. 마르다는 아주 기쁨으로 자기의 장기인 음식 만드는 일을 한다. 아주 큰 잔치를 베푸는 것 같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다. 그 뿐인가 예수님에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된 것이다. 이젠 참 기쁨으로 음식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사로가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불평이 아니고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 지는 것이다. 감사하다. 이것이 행복이다.
마리아
마리아는 특별한 것을 준비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 그러자 나드 향유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에게 드린 것이다. 그 나드 향유의 값은 300데나리온이었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300일 동안 벌어서 모은 돈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액수는 마리아가 평생 모은 향유일 것이다. 그것을 아낌없이 예수님에게 부어드린 것이다.
보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실 처음에 언급했던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접을 한다고 하면서도 준비하는 것이 많아서 분주하고… 결국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서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된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정제되지 못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마리아는 어땠는가?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지만 받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호기심 가득하고, 배우려고 하고, 익히려는 수준이다. 그러던 그녀들이 커다란 문제 앞에 직면하자 동일하게 예수님을 원망하는 듯 한 표현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마리아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담아두지 못하고 말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두 자매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리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마르다는 기쁨으로 음식을 준비했고, 마리아는 정성껏 자기 헌신의 표시를 다했다. 사실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마리아는 훗날 신랑을 맞이하면 사용하려고 모아 두었던 혼례품인 나드 향유를 다 부어 드린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아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는 어려움이 닥칠 때 어려움가운데에서 탄식하고 한 숨 쉬고, 괴로워했지만 현실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난 두 여인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교훈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감사하는 신앙입니까? 드리는 신앙입니까? 경배하는 신앙입니까? 아직도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채우려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현실의 문제 앞에 무기력하고 과거를 탓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주님을 원망하는 신앙입니까… 허공을 치는 입술의 고백이 아닌 오늘 현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주님 안에서 전진합시다. 그리고 나아가서 감사하는 신앙, 경배하는 신앙, 드리는 신앙이 됩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결론
1. 서로의 성격과 기질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2. 현실의 큰 슬픔과 문제 앞에서 부활과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자
3. 감사하며, 경배하며, 드리는 신앙인으로 성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