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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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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평가[편집]
역사적 사실[편집]
각주[편집]
[그때 오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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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로댕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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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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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조각상 ‘칼레의 시민’ – 굿뉴스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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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 명작, ‘칼레의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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Ä®·¹(Calais)ÀÇ ½Ã¹Î – ³óÃÌ¿©¼º½Å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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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칼레의 시민은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에서 벌여진 사건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를 소재로 하여 오귀스트 로댕은 ‘칼레의 시민’이라는 작품을,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는 1917년에 이 소재를 바탕으로 3막 희곡을 선보이며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스퍼트를 끊기도 했다.
역사 [ 편집 ]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게 된다.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다른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고, 이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평가 [ 편집 ]
이 일은 ‘그들이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행한 주요한 예로 꼽히고 있다.
역사적 사실 [ 편집 ]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모두 약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화를 숭고한 희생으로 윤색하고 미화한 것은 14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이다. 그는 1322~1400년 프랑스에서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5권의 연대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그의 연대기가 사건 발생일, 발생지 등의 정보가 부정확하며, 애국적인 성향에 따라 많은 부분 왜곡이 있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칼레의 항복 속설 또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장 프루아사르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된 것이다.[1]
이처럼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어 민족주의가 발호하자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칼레의 시민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였던 것이다.[2]
각주 [ 편집 ] [분류:1889년 조각 작품]
[그때 오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
로댕이 형상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칼레 시청 앞에 설치돼 있다. 칼레의 영웅 6인은 동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목에 밧줄을 건 채 맨발로 길을 떠났다. 시장통에서 6인이 떠나는 모습을 본 시민들은 항복했다는 굴욕감, 그럼에도 대다수가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를 위해 고귀한 신분의 시민 6인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자괴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백년전쟁(1337~1453)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한 뒤 여세를 몰아 도버 해협에 면한 도시 칼레로 진격, 식량보급로를 끊고 포위했다. 11개월 동안 완강하게 저항하던 칼레는 식량이 떨어지자 1347년 마침내 항복했다. 항복 사절은 주민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칼레 시의 완강한 저항에 분노한 에드워드 3세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한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칼레의 지체 높은 시민 6명이 맨발에 속옷만 걸치고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성 밖으로 걸어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라는 것이다. 6명을 교수형 시키는 대신 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내가 그 6명 중 하나가 되겠소”라고 말했다.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였다. 그러자 뒤이어 시장·법률가 등 귀족 계급에 속한 5명이 동참했다.
다음 날 6인의 시민 대표는 시장통에서 에드워드 3세의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시장통에 모인 사람들은 통곡을 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눈에, 사라져가는 6인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영국 왕은 그들의 처형을 명했다.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영국 왕비가 왕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그들을 사면해달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왕은 6인의 시민을 살려줬다. 기적 같은 반전(反轉)이었다. 동시대 사람인 프르와사르(1337~1404)는 사건의 전 과정을 연대기에 기록했다. 6인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1884년,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칼레 시로부터 이들 위대한 6인의 모습을 형상화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6인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로댕은 10년 넘는 세월을 작품에 바쳐 1895년 완성했고, 작품은 칼레 시청 앞에 설치됐다. 시장통에서 떠나는 6인의 모습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1878~1945)는 로댕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희곡 ‘칼레의 시민’(1914)을 썼다. ‘신의 손 로댕 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월 22일까지 열린다. ‘칼레의 시민’도 왔다. 스폰서 검사들이 꼭 봐야 할 작품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칼레의 시민 로댕
이번에는 명화대신 조각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년 – 1917년)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서양 현대 ‘회화’를 만들어 낸 것은 19세기 초부터 연달아 등장한 다수의 전위적인 화가들이지만, 현대 ‘조각’의 문을 연 것은 단 한 사람, 로댕이다. 회화사에서는 아무도 독점하지 못한 지위를 차지하며,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댕은 생전부터, 그리고 사후에도. 미켈란젤로와 견줄만하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18-9세기를 거치며 뒤떨어진 장르가 되어버린 듯했던 조각을, 19세기말에 그가 다시 미술의 중요한 한 분야가 되게 했다.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김진희)
프랑스 파리의 유명 박물관인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로댕 박물관이 있습니다.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해마다 방분하는 관람객이 70만 명 정도로 오르세 박물관보다 관람자가 많다고 합니다.
로댕 미술관은 조각 작품들도 감동이지만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저택이 소유주의 이름을 딴 비롱 저택(Hotel de Biron)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3헥타르에 달하는 정원이 파리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답고 정원 구석구석에 로댕의 작품을 전시해 놓아서 구경하기 좋습니다. 박물관 들어가자마자 우측 나무숲 속에 높이 앉아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 관람객을 제일 먼저 맞이합니다. 안으로 들어 갈수록 신의 손, 청동시대, 발자크 흉상, 우골리노, 칼레의 시민 등 로댕의 대표작 들이 나무사이나 연못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댕은 1840년 파리에서 경찰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여 졸업할 때까지 글을 잘 못 읽었다고 합니다. 그 후 프티 에콜 이라는 미술을 가르치는 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에 대해서 별다른 재능은 발견하지 못하였지만은 거기에서 그는 조각이 자기의 적성에 맞는 분야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급미술 학교인 그랜드 에콜에 응시하였지만 3번 연속 낙방하고 맙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하여 건축일과 조각가의 조수 등의 작업을 전전하지만 바쁜 중에도 짬을 내어 조각을 계속 공부합니다. 학교졸업 후 20년이나 지나서 거의 40세가 되어서야 조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일과 후에 시간을 쪼개서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티 에콜 졸업 후 거의 20년 동안 조각가의 조수로 일하다가 방문한 이태리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감명을 받습니다. 그 후 발표한 작품인 ‘청동시대’는 너무나 인체의 모습과 가까워 심사위원들이 인체를 조각한 것이 아니라 모델의 몸에 석고를 발라 직접 거푸집을 만든 것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여 수상을 거부당하고 심사위원과 관객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작품 만들던 당시의 사진을 보내고 가까이 있던 주위 조각가들이 증인을 서주어서 3년이나 지나서 누명을 벗지만 이는 역으로 그의 조각 솜씨가 그 누구보다도 빼어났다는 것을 역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당시 그림이나 조각의 유행이 성경의 인물이나 그리스 신 등의 남성의 육체를 근육질의 완벽한 모양으로 조각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일반인을 누드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제작 한 것도 관객이나 심사위원의 심기를 건드린 요인이 되었습니다. 차즘 조각가로서 명성이 쌓인 1880년 파리시에서 주문받아 제작을 시작한 ‘지옥의 문’은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30여 년 동안 평생을 작업한 작품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테마를 얻었고 피렌체에 있는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200여명이 등장하는 큰 작품을 만드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기다리던 파리시가 지쳐서 지원금을 끊자 본인이 직접 인수해서 완성을 시켜 나가기 시작합니다.
로댕은 40대때 10대 제자 였던 카미유 클로텔 하고의 애증 관계는 영화로 나올 만큼 유명 합니다. 사랑과 경쟁 질투 등으로 로댕과 헤어진 카미유 크로텔은 정신병에 걸려 40년간 정신병원에서 투병 생활하다가 사망 합니다.
로댕은 40년간 세계적인 조각가로 활동하면서 ‘생각하는 사람’ ‘발자크상‘ 등의 대표작 수천 점을 남겼으며 대부분이 로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에 ‘지옥의 문’이 있다고 합니다. 같은 작품이 프랑스에도 여러 개, 미국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다고 해서 이상해서 찾아보니 조각 작품은 석고나 청동 틀이 있기 때문에 같은 작품을 여러 개를 만들 수 가 있다고 하며 서울 로댕 갤러리에 설치된 작품은 12번째 주물이라고 합니다.
칼레의 시민
칼레는 도버해협에 영국과 20마일 밖에 안되는 마주보고 있는 최단거리에 있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입니다. 그래서 영국이 프랑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곳이요 반대로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국의 보급로를 막기 위해서는 내주면 안 되는 도시입니다. 프랑스 왕의 왕위계승문제를 핑계로 시작된 백년전쟁(1337-1453) 당시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승을 거둔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여세를 몰아 칼레항을 포위 합니다. 칼레시민들은 거의 1년간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도와주겠다던 프랑스 왕마저 도와주지 않고 식량마저 다 떨어지자 항복하고 맙니다. 시민대표들은 에드워드 3세를 찾아가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 합니다.
지난 1년간 저항의 책임을 져야 한다며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모든 주민을 다 죽일 작정이었지만 주위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 들여 파격적인 항복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 시민 전체를 대표해서 처형 하겠다’
다음날 아침 칼레의 갑부인 외수타슈 생피에르를 비롯한 6명의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해서 목에 밧줄을 걸고 칼레 성벽의 열쇄를 들고 영국왕 앞에 나갑니다 (혹자는 외수타슈가 혹시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릴까봐 그 전날 미리 집에서 자살 했다고도 합니다). 그들이 사형대에서 사형이 집행 되려는 순간 임신하고 있던 에드워드 왕비의 간청으로 이들 마저도 석방 됩니다. 당시 역사가 프르와시르가 이사건의 전말을 연대기에 생생히 기록 했습니다. 그 후로 6인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의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작품은 명작여부를 떠나서 칼레 시민의 명예임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합니다.
그후 500년이 지난 1884년 칼레의 시민들은 이 위대한 장면을 길이 보존하고자 로댕에게 여섯 시민을 기리는 상의 제작을 의뢰 한 것입니다. 로댕도 자청해서 동상의 제작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후 10년에 걸쳐 제작된 1895년 목메 밧줄을 걸고 적을 향해 나아가는 시민 6인의 기념상이 완성되게 됩니다.
그러나 로댕의 작품을 본 시민들은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영웅적이고 서사시적인 멋진 투사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동상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슬픔에 잠겨 넋이 나가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갑작스런 이별과 죽음에 대한 공포 걱정과 불안으로 잠 못 자고 수척해진 모습, 뒤로 돌아다보며 혹시 돌이킬 수 있을까 하지만 차마 돌아보지 못하는 동생의 모습, 자기도 돌아보고 싶지만 동생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슬픈얼굴로 제지하는 형, 제일 우측에 성문의 키를 들고 가면서 넊이 빠진 모습들이 그들이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동상의 높이도 일반인이 우러러 보는 높이인 2-3 미터 위에 설치되기를 원했지만 로댕의 반대로 일반인의 키 높이에 일부러 맞춰서 낮게 설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의 반대로 원래 설치 예정인 칼레시 시청 옆에 설치되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야외 한적한 리슐리외 공원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로댕은 이에 대해서
‘너무 아름답게 표현 했다면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높은 곳에 두었다면 영웅성을 찬양하며 진실을 잊게 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칼레의 시민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알려진 것과 다른 그러나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습니다.
일단 칼레의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문건은 영국과 플랑드르, 프랑스, 부르고뉴,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교황청의 기록까지 합하여 약 20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당시 기록에는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나 영국 여왕의 간청 따위는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1년 정도 공성전을 벌인 후 결국 필리프 6세가 먼저 철수하고, 영국이 칼레를 점령한 후, 시민들을 소거했다”라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로, 사실 칼레 공성전이나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다가, 나폴레옹 3세 시절 프랑스가 프러시아제국에 져서 파리가 함락 된 후에 민족주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부 정치가에 의해서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로댕은 일부러 영웅적인 모양으로 조각을 만들지 않고 슬프거나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시민들을 조각했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별로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죽기 싫어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모습을 멋진 작품으로 승화시킨 로댕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서 눈과 마음이 즐거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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