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9.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50)
본문 : 마 6:33
제목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이야기, 인간타락의 이야기, 족장들의 삶의 이야기, 왕들과 나라들 이야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덕적인 이야기, 문학적인 이야기, 역사적인 이야기, 예언과 약속에 관한 이야기, 수많은 명령들과 권고에 관한 이야기, 성공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의 퍼즐을 맞춰보면 어떤 그림이 나타날까요?
전체의 그림을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성경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여러 종류의 다른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들을 종합하여 성경은 윤리적인 삶을 위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과 선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성경은 선을 행하는 삶을 위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 많은 치유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성경은 병을 고치고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 많은 기적적인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성경은 보편적인 삶을 초월하여 신의 힘을 빌려서 기적적인 삶을 살게 하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성공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성경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고 또 때로는 그런 삶을 살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부분적인 이야기들에 심취되어서 성경 전체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엉뚱한 데로 가는 이단의 한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구속사라고 이해합니다.
구속사적 성경해석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바르게 알고 성경에 기록된 구원 즉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법을 좀 더 넓게 펼치면 “하나님나라의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이루면서 사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살면 늘 염려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그런 모든 것들을 즉 먹고 살고 입고 살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덤으로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했습니다.
1)“그런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런즉”이라는 말은 바로 앞 절의 말씀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바로 앞 절 31-3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다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럼으로,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염려를 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먼저”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중적인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국적을 가지고 사는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이 세상에서 먹고 살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을 위한 필요한 것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먼저 하나님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먼저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구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구하라는 말은 ‘찾다’ ‘조사하다’ ‘바라다’ ‘구하다’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찾고, 조사하고, 그 나라가 나의 나라가 되도록 구하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무엇인지 알아보고 조사하고 나의 것이 되도록 청구하는 정도의 말씀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미 그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다시, 없는 하나님나라를 발견하고 찾고 소유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가슴 속에서 완전히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해나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고 말은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마음대로 세상의 유행을 따라 세상의 쾌락을 따라 살기를 좋아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좀 멀리서 대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배를 한번이라도 덜 드리고
어떻게 하든지 교회에 한번 덜 오고
어떻게 하든지 말씀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무엇보다 우선하여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여기 맛있는 과일이 있습니다.
맛이 정말 좋습니다.
달콤하기도 하고 시큼하기도 하고 아주 기가 막힙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에 참 좋은 과일입니다.
하나만 먹어도 아프지도 않고 장수하는 장수식품입니다.
그렇게 말을 해도 여러분은 아 괜찮겠구나, 먹으면 좋겠구나, 라고 말은 하고 생각은 하면서 언젠가는 먹게 되겠지 하고 미루면서 먹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고 마음만 먹고 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중에 먹을 기회가 오기는 하겠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직접 먹어야 됩니다. 먹어봐야 맛을 알고 먹어야 그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 먼저 실천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유행 따라 멋 부릴 것 다 부라고, 재미 볼 것 다 보고, 자랑하고 싶은 것 다하고, 틈이 나면, 시간나면, 마음이 조금 동하면, 잠깐 교회에 왔다가 눈도장 찍고 그래가지고 그 맛을 알 수가 없습니다.
4)“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일까요?
하나님나라의 삶을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나라를 구성하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왕의로서의 하나님, 왕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백성, 그리고 땅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나라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왕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완전한 에덴동산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에덴동산이 하나님나라의 원형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했을 때 그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에서 쫓겨나서 멸망할 인생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나라의 모형들이 여러 가지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 완성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하나님나라인 에덴동산처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2.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앞서 인용한 대로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를 구하고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의란 무엇일까요?
“의”라고 할 때 로마서를 공부한 우리들은 먼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의가 생각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얻게 되는 칭의(稱義)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칭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의란 직접적으로 이신칭의의 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의란 칭의의 의가 아닌 성화의 의를 말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하는 것을 의로운 삶을 사는 것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산상보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상보훈을 통해 배운 대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을 것으로 입을 것으로 걱정하고 염려할 때 공중의 새를 보며 들의 꽃을 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의입니다.
이런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주신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의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배우면서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우리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율법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우선 율법을 통해서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서 살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제일 큰 목적이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요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하여 율법의 더 엄격한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도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2)율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율법을 행함으로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3)우리는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이 율법의 말씀들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롭게 산다는 것은 이 말씀들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해서 율법을 완전히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점점 더 거룩한 사람이 되고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4)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힘이 들고 때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손해가 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율법을 행할 때 율법에 기록된 말씀들을 지키고 살 때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스마트폰을 하나 샀습니다.
스마트 폰을 살 때 사용을 잘하기 위해서 설명을 해 놓은 책을 한권 같이 받았습니다.
그 책을 읽었게요 안 읽었게요?
안 읽었습니다.
안 읽어도 눈치로 대강 때려잡아서 중요한 몇 가지만 알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참 불편하고 스마트 폰 안에 있는 온갖 편리한 것들을 모르고 그냥 지냅니다.
전화만 받고 문자만 몇 개 보내고 그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설명서인 성경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무 두꺼워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바쁘고 복잡하니까 그냥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설명서대로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엄청 쉽고 엄청 편리하고 엄청 행복해질 것입니다.
3.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오늘 본문 말씀 하반 절에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재물과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하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은 하나님나라를 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산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보다 세상 것에 대해서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복 신령한 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 줄은 압니다.
세상의 것들은 잠시잠간이고 영적인 복은 영원한 것인 줄은 잘 압니다.
세상의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나님나라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선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바로 시급한 것은 이 세상의 복이요 이 세상의 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되었는데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먼저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에서 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세상에서 잘 되기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복 하늘에 속한 복을 먼저 사모하고 추구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현대성경에서는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도 덤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난을 받을수록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할수록 가난해지고 더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심으로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이 세상의 것들도 덤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받는 것입니다.
거기서 영생을 얻고 거기서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이 세상에서도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면 필요한 것들을 덤으로 보너스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의 축복, 장수의 축복, 재물의 축복,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축복, 가족들과 부부의 행복들, 성공적인 삶 이런 세상적인 복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함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쓸 모든 것들을 다 아시고 공급해 주심을 믿기 때문에 그들처럼 세상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질문] :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성경 말씀을 “먼저 너의 마음 그릇을 닦아라.”는 뜻으로 알고 있어도 되는지요? 예를 들어 말로써 남에게 상처 주는 일 같은 제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제 마음의 그릇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또 기타 종교 혹은 무종교에서의 마음 닦기와 기독교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스스로 수양하는 것과 기도하여 성령에 의지 하는 것의 차이인가요?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육의 문제는 금방 와 닿는데 영의 문제는 솔직히 막연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육의 문제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없다는 천국을 가본 적이 없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도 지금 여기서부터 그것을 구하는 것은 영의 문제라기보다 육의 문제에 대한 기도가 아닐까요? 영혼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혼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 몇 가지 서로 다른 주제의 심오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질문 주신 순서에 따라 최선을 다해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내용인지라 세 질문으로 나눠 답변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님 외의 일반 방문객들도 가능한 세 답변을 연결해서 읽으시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 타 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는?
– 천국 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육의 문제가 아닌가요?
문맥 안에서의 뜻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1-34)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선 제일 먼저 앞뒤 문맥을 잘 살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찾아내야 합니다. 일부만 인용했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의 의미는 반드시 마 6:27-34 전체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재물 때문에 염려하는 일”과 연관됨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속한 전체 문맥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좀과 동록과 도독이 설치기에 섞어 없어질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 가는 곳에 보물을 쌓기 마련인데 신자더러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오지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이유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중 나는 새나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먹이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은 더더욱 그럴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특별히 땅에서의 안전을 위해 재물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필요한 것들을 다 아시니까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차 혹시라도 재물이 부족해서 굶거나 헐벗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의미는 신자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행위를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필연적 결과는 그런 모습으로도 나타나겠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주인으로 재물과 하나님 둘 중에 어느 것을 모시느냐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 땅의 안전, 만족, 행복을 위해서 재물에만 의지하지만 신자는 그와 다르게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재물이 중요치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먼저가 아니면 됩니다. 꼭 필요한 재물이 있다면 간절히 구해도 됩니다. 그러나 필요(need)한 재물은 없으면 기본 생활이 안 되는 것이지, 자신의 욕망(desire)을 채우는데 소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신자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구절이 포함된 문맥 안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신자는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재물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주인으로 모신 그분의 뜻을 삶에서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보물을 이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으며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성경에서 일관되게 의미하는 바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의 일관된 의미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분의 통치는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기에 영원토록 가시적인 우주전체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 둘 다에서 완벽하게 이뤄집니다. 신자는 현세나 내세에서나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 때문에 이미 그분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진심으로 자신의 구주로 모시는 순간 이미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보장되었다는 것은 그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천국 가기 위해 믿음 외에 추가로 요구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를 향한 성경의 모든 권면은 사실상 이 땅에 살 동안에만 해당됩니다. 천국은 이미 죄와 고난과 무관한 곳이기에 따로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세세토록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이 땅에서 행하는 것으로 천국에서의 상급은 달라집니다. 그 의의 면류관을 더 받기 위한 소망을 품고서 열심히 그분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 내 대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너무 좋아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지, 상급만이 거룩하게 살려는 원인이라면 그 신앙은 조금 재검토해봐야 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 뜻입니다. 이 땅의 고난을 빨리 끝내고 천국에서 슬픔과 한숨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의미로 적용해선 안 됩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상급만 바라는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 이루고자 원하시는 뜻을 “이 땅에서 실제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의미임을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고 이미 쉽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서 사는 것이 보물을 하나님께 즉,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천국가면 다른 주인이란 아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분의 ‘의’는 뜻(will), 계획(plan)을 말하는 의(意)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 나라” 안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 입니다. 주인으로 모신 자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이미 그는 주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태여 그의 뜻을 구하라고 중복해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신에 그분의 의로우심(righteousness)을 뜻하는 의(義)인데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뜻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로마서는 1:1부터 3:19까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풀어 설명합니다. 그리고선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고 결론 내립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公義, justice)를 실현하자면, 도덕적 원칙대로 벌을 주자면, 모두가 사형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러면 당신께서 창조하였고 찬양을 받을 대상인 인간은 당장 이 땅에서 몽땅 다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선 차마 그럴 수 없습니다. 대신에 완전한 대속제물인 독생자 예수를 죽여서 인간의 죄 값을 철저히 치르게 하고 그 사죄의 은혜를 믿는 자는 구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아무 소망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긍휼입니다. 또 그래서 공의와는 다른 그분만의 의로우심(righteousness)인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한마디로 죄인이 예수 믿으면 그 믿은 것으로 의롭다 칭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의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상식으로는, 불신자들의 반박이 이 부분에 집중되듯이, 아무 선행이나 공적도 없이 예수만 믿었다고 구원을 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공의(justice)의 차원으로만 따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주시기로 한 것 자체가 그분의 의라고 합니다. 의로운 그분이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주기로 했으니 그 구원도 당연히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하신 일이니 무조건 의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십자가 구원 자체가 실제로 공의와 사랑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완벽한 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십자가 외에는 아무리 경건하고 심오한 방식의 구원이라도 절대로 부족하고 공의라는 측면에서마저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한다는 일반적 상식에 오히려 치명적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쉽게 간과되고 있는 의미
이외에 이 말씀을 이해함에 거의 모든 신자들이 간과해버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상기에선 직접 연관되는 문맥에서의 뜻만 살폈지만 아시는 대로 더 크게 보면 산상수훈(마5-7장)에 포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많은 일반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는 것만 자기들 신에게 혹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방인과는 다르게 살라는 것이 그 근본적 의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가장 일차적으로는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하는 말씀이 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지낸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과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만 중시하는 유대교를 떠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기독교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과 여호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어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과 화목하여 그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십자가 예수님의 대속 죽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당시의 상황에선 이미 믿은 신자더러 도덕적 의로움과 종교적 경건함을 추구하라는 것보다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참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그 복음의 은혜 가운데서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이 말씀에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너무 심오하게 적용하려다 보면 자칫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은 신자가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살고 있다면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종교적 의미도 자연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선 맨 먼저 살펴 본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문맥상의 뜻도 주님의 십자가 의(義) 안에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누리는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35절)을 의미합니다. 또 38-39절에 확장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장래 일”도 포함됩니다. 영생을 주신 당신의 자녀는 천국으로 인도할 때까지 그 일생을 하나님이 보호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인도 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은사(아무 받을 자격 없음에도 무상으로)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십자가) 의를 이미 구하여 그분을 믿은 자라면 그 다음 단계로 “그분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아니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예수 믿는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분의 환난에서 지켜주는 인도 보호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온전한 뜻(意)과 계획을 자신의 일생을 통해 실현해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스스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또 그분이 자신에게 맡긴 화목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또 어쩌면 그 글이 본 질문의 더 구체적인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예를 든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 중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일에 속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의 전부 혹은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해선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는 일 중의 일부입니다. 또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당시 상황과 예수님의 의도에 바탕을 둔 문맥상의 의미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뜻을 함께 아우르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의 특권과 관련시켜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간혹 목사님들이 이 말씀을 교회 행사나 봉사에 적극 참여하는 일로 제한시켜서 해석 내지 적용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분적 의미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준비요 훈련입니다. 바울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 로마서 11장까지 자세히 설명한 이후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신자가 복음을 실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 의를 구하여서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즉,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 안에 들어온 자라면 자연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혹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렇게 살려는 열망은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나아가 여호와를 믿는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다른 유일한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義)로 온전히 덧입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 꿈틀거려도 하나님께 이미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주님의 자녀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신하기에, 인생의 목적이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으로 이미 수정되었고 또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의 삶의 방식(재물 대신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방식)으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준에 따라 질문하신 두 번째 주제인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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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9 강 / 이창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 / 마태복음 6:19-34
요절 /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주 교보문고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1위가 무엇일까요? 책의 제목은 ‘더 해빙(The Having)’이고 부제로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 트레일러에 보면 ‘가장 빠르게 부자되는 법(37-86억 가능)’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대 정신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이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지구 상에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유일한 종족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왜 재물을 축적할까요?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남을 재물을 축적해 놓고도 계속 더 쌓기 위해 혈안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쌓아 놓은 재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쌓아 놓은 재물을 빼앗아 가는 세 가지 적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값비싼 옷도 좀이 슬면 다 망가집니다. 동전도 녹이 슬면 가치가 사라집니다. 가장 안전해 보일 것 같은 보석도 도둑이 훔쳐가면 그만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디에 재물을 쌓아 둡니까? 주식에 투자하기도 하고 부동산을 매입하기도 합니다. 시중 은행에 예금으로 넣어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식에 잘못 투자하면 쪽박을 차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부동산은 불패라지만 언젠가 거품이 꺼지면서 폭락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보이싱 피싱 사기범에게 감쪽같이 당해 예금 두었던 돈을 한순간에 다 날려 버리기도 합니다. 재물에 미래의 안전과 자신의 가치를 걸었던 사람이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물의 사라짐과 함께 인생의 안전도 가치도 의미도 함께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쌓아 두었던 재물을 모두 잃은 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일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보물을 어디에 쌓아 두어야 하겠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는 좀이나 동록이나 도둑이 없어서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하늘에 쌓은 재물은 영원히 그 가치가 보존됩니다.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땅에서 얻은 재물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과 가족들을 잘 부양하기 위해 재물을 잘 관리하길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일에 재물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제와 봉사를 위해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위해서 물질을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번에 우리가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어려움에 처한 개척 지부와 선교지를 위해 모은 특별 헌금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입니다. 이렇게 섬기기 위해서 쓴 돈은 내 계좌를 빠져나가 어디로 없어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스란히 다 천국 계좌에 쌓여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을 담아 적은 물질을 드렸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드린 것 이상으로 모두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음은 보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으면 마음이 땅으로 향하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주가가 얼마나 오르고 내리는가에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를 여러 채 사 놓은 사람은 아파트 시세에 마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를 위해 구제금을 보낸 사람은 그때부터 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물질을 드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보물을 땅에 쌓느냐? 하늘에 쌓느냐? 꼭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볼 필요가 있느냐?’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도 있지 않습니까? 보물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땅에, 반은 하늘에 쌓으면 안 될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재물의 원어는 ‘맘몬’으로서 재물의 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재물은 우리 삶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필요합니다. 또한 재물이 있어야 선한 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종종 신이 되어 인간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마력을 갖기도 합니다. 세익스피어는 ‘돈은 검은 것을 희게 하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하고, 늙은 것을 젊게 하고, 문둥병조차 사랑스럽게 하며, 늙은 과부에게 젊은 청혼자들이 몰려들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다 이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재물은 이때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나를 섬기면 네가 원하는 윤택한 삶과 행복을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빼앗고 충성심을 가져갑니다. 재물이 그의 새 주인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돈에 대한 사랑은 공기처럼 퍼져 있어서 제자들 역시 언제든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롯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다가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지 않고 땅에 쌓다가 보면 우리 마음은 땅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물을 섬기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재물에 눈이 멀어 마음까지 어두워져 분별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물을 하늘에 쌓게 되면 우리 마음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 곧 성한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밝아져 참된 지혜와 분별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음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사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는 예수님 말씀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땅에 쌓아 둔 보물이 별로 없습니다. 그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내 장래는 어떻게 하나? 노년은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들면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분열되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물질이 없어 염려하기 쉬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서 목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들도 당연히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중을 나는 새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그 새가 먹고 살 수 있도록 각종 곤충과 곡식과 열매들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그 백합화에게 솔로몬 왕의 옷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우게 하셨습니다. 제자의 목숨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 한 쪽 면만 보신 것 아닐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굶어 죽는 새도 있고 말라 죽는 들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였던 바울은 선교 사역 중에 한 때 궁핍함으로 인해 크게 고통받기도 했습니다(빌4:11).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물질 문제로 힘든 선교사님이나 개척 센터가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을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창3:19). 이 때부터 사람은 염려와 걱정 근심이라는 족쇄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염려는 너무나 우리와 가까이 있어서 염려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없는 염려까지 만들어 냅니다. 오죽하면 사람은 염려 공장의 공장장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여기서 키는 수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염려하면 수명이 연장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염려를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쌓여 위장병, 신경쇠약, 불면증, 각종 암에 걸려 단명할 수 있습니다. 염려가 지나치면 일에 집중할 수 없어 도리어 문제 해결을 못하게 만듭니다. 염려는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을 알아도 염려를 떨쳐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염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30절에 보면 예수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을 가리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32절에는 염려하는 자들을 이방인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흔히 염려는 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 보면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섭리로 온 세상을 돌보고 계십니다. 인간의 반역과 죄악에 불구하고 때마다 비도 내려 주시고 해도 비추게 하셔서 농작물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셨듯이 당신의 자녀들을 지금도 신실하게 먹히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염려와 걱정과 근심 불안이 말끔하게 사라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도 하늘의 아버지를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모든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염려 대신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앞선 25절에서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목숨 곧 생명을 주셨을까요? 있으면 있는 대로 더 쌓으려고 아등바등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전전긍긍하며 살라고 생명을 주셨을까요? 일생 재물에 매인 노예처럼 살라고 생명을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죽을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서 흘리신 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고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말씀이 모두 다 직장을 때려 치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선 순위에 관한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는 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게 됩니다(34). 모레 일도 염려하게 되고 한 달 후의 일도 염려하게 되고 일년 후, 십년 후의 일도 염려하게 됩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쌓인 염려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는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작년에 그 누가 올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대유행 할 것을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내일 일을 통제하려고 해도 우리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당겨와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주신 선물과 같은 하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하루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하루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감사로 하루를 마무리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모아지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해질까요? 우리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탐심과 염려에서 해방되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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