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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파의 불행
삿18:1-10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전체 옷매무새가 어그러진다는 말이 있다. 단 지파가 이런 경우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줬다. 제비 뽑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적절하게 분배해 주셨다. 그러나 그 땅은 텅 빈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던 7 족속들이 산재해서 살고 있는 땅이었다. 여호수아의 주력 부대가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서 이미 이겨놨지만, 가나안 족속을 다 죽이거나 가나안 땅 밖으로 쫓아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지파는 자신이 분할 받은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들을 지배하면서, 자신들이 살 지역을 개발해야 했다. 다른 지파들은 이것을 잘했다. 그런데 단 지파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거꾸로 토착민들에게 되잡혀서 쫓겨나게 되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않았다”(삿1:34)
결과적으로 단 지파는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정착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5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이주할 땅을 찾게 했다. 정탐꾼들은 정탐할 지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 집을 만나게 되었다. 미가의 집안에서 익숙한 모습의 사람을 봤다. 절기 때마다 실로의 성막에 가면 볼 수 있는 제사장의 ‘에봇’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본 것이다. 단 지파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미가집의 거짓 제사장이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자신은 떠돌이 레위인으로서, 미가집의 개인적인 신상(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고용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미가집이 축복받기를 위해서 사역하는 사적인 제사장이라고 말했다. 단지파의 정탐꾼들이 솔깃해서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미가집의 신상에게 기도해서 물어보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미가집의 거짓 제사장은 실로에서 보았던 제사장들의 행위를 흉내 내며 자기가 섬기는 신상(우상)에게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삿18:10).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단 지파는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땅을 무단이탈(無斷離脫)하고. 거짓 제사장에게 예언을 부탁하고, 거짓 제사장은 우상에게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예언하고, 도대체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다(출20:7). 단 지파는 이 거짓 제사장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이 모든 일은 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삿18:1)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중심에 왕이 없고, 왕이 제정한 법도 없었다. 기준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단 지파는 멸망했고, 계시록에 보면 단지파의 이름이 영원히 삭제되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온전해야 한다. 비슷한 것은 다 가짜이다.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비슷한 것에 잘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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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의 근간, 신앙의 인프라가 되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이 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 첫째 그 이유는 예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이 땅에 오시기로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의 저변에는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우리에게 살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약속 새 언약, ” 서로 사랑하라”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언약, 그분의 모든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약속에 살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난주 메세지의 요점입니다.
오늘은 예수를 믿어야 할 또 다른 이유입니다. 삼손의 실패에 이어 단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멸절의 위기를 통해 그 답을 찾고자합니다. 사실 사사기 전체의 메세지이기도 합니다.
둘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가 거하는 이 땅을 통치하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셔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서있는 이 땅도 통치하시는 이 땅의 왕이시라 뚯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아직도 믿고 있기에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오실 때 왕궁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침실에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교회의 성도들은 마구간에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신 왕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처럼 건장하지 안았지만 다윗 왕처럼 어린 목자의 모습으로 오실 예언들을 통해서 이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온 땅을 통치하며 우리의 모든 방황을 끝내고 나를 따르라고 인도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굴복해야 하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왕의 명령과 말을 너무나 자주 거절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며,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자는 왕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쓰는 자입니다. 왕을 가까이함은 그분의 보호와 그분의 존귀함과 거룩함을 누리는 축복을 누리게 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오늘 날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땅의 참 주인 왕이기에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 땅의 주인, 왕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법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사기는 참된 왕이 없음이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법하게 살 때 내 멋대로 살 때 어떤 불행이 우리의 인생에 오는지를 뼈저린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 한마다가 당시 사사시대의 사람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중간, 중간에 자꾸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그 때는 그들에게 왕이 없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 왕이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삶의 결말이 되는지 우리는 지난 주 삼손의 삶을 통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영웅, 사사 조차도 죄의 단맛에 빠져 살면 결국엔 단번에 쓰러지는 인생의 쓴맛을 보게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집과 가문 그 족속이 결국엔 하나님의 축복의 반열에 민족의 반열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봅니다. 바로 단 지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뜻을 알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았고 그리고 결국 우상의 숭배의 근거지가 됨으로 결국은 그 지파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맏습니다. 사사기는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사라져버린 단지파의 이야기와 음란함과 그것을 회개하지 안음으로 족속의 남자들이 전쟁에 몰살됨으로 자기 민족에 의해 완전히 사라 질뻔한 베냐민 지파의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면 결국은 망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8장1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단 지파는 이 핑게 저 핑게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포기했습니다.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에 겁을 먹고 그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쫓겨 평지로 내러 오지 못하고 쉽게 정복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1:34,&18:1) 그래서 온유한 라기서 족속의 땅을 찾아 그들을 쫓아내고 그 곳에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함께 섬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맘과 삶은 참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신앙적인 삶이 아니라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종교적인 삶, 우상숭배적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결말을 예정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족속들을 벌벌 떨게 하는 그들의 자손 삼손을 두고서도 자기의 기업의 땅을 정복하지 않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신 환경의 어려움만을 보았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과 축복을 발견하지 못했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은 망했습니까? 왜 그들은 12지파에 끼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려야 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왕이 없어서 자기의 생각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 뜻대로 맘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왕을 따르는 자에게는 그 인생을 왕이 책입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왕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집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이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사실 왕이 없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다 결국은 멸망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의 왕을 믿고 우리의 왕을 따릅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람을 찾으시면서 ”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십사만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
계7장과 계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사만 사천의 수가 하나님께서 인을 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택한 받은 백성들의 수라는 것에는 예수 믿는 성도들 중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계7:4, 계14:1-3)
십사만 사천은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성령)을 맞아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다. 그리고 이들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배워 하나님을 찬양한다. 중요한 것은 십사만 사천은 땅에 살면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고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계14:3-5)
계7:4절에서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자와 계14:1절에서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과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고후1:22절과 엡1: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인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지만 이 수가 택한 백성의 상징적인 수인지 문자 그대로 십사만 사천 명인지 묻는다면 누구도 쉽게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7:4절과 계14:1절과 3절에서 택함 받은 성도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사람은 성경 적으로 말할 때 분명히 십사만 사천 명이다. 이 십사만 사천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고(계20:15,계21:27),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들이고 예복을 입은 자들이고(계19:9),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사람들이고(계7:14), 계14:4-6절에 의하면 이들은 여자로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사람이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고,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고 영원한 복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십사만 사천이 상징적이든 문자 적이든 이들의 신앙은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예수의 종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어놓기까지 한다(계6:9-11).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은 과연 상징적인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의 수인가? 문자 그대로 십사만 사천의 수인가? 계7:4절에 의하면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숫자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하나님께 인 맞은 자들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가 각 지파에 일만 이천 명씩 합해서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했는데(계7:5-8),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계7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은 구약의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7:9절에서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서 셀 수 없는 무리는 누구라고 할 수 있는가? 흰옷을 입은 자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구원받은 자들이다.(계7:13-14) 문제는 계7:4절에서 구원받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과 계7:9절에서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이다.
십사만 사천 명과 셀 수 없는 무리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구약에서 하나님이 열두 지파를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신 언약 때문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숫자이다. 그렇다면 십 사만 사천이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과 동일한 사람들인가? 동일하다면 왜 따로 분리해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고 셀 수 없는 무리라고 하는가? 한꺼번에 셀 수 없는 무리들이라고 하든지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든지 하지 않고 왜 나누어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을 설명하고 있는가?
계7장에서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들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십사만 사천은 구약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고, 셀 수 없는 무리는 계7:4-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 맞은 십사만 사천을 포함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십사만 사천은 구약적 표현으로서 계7:4-8절 말씀 그대로 열두 지파의 택한 받은 백성들이고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은 창15:5절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는 차원에서 셀 수 없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십사만 사천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이다. 즉, 계7장에서의 구약에서의 택함 받은 수가 십사만 사천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택함 받은 무리들의 수로 표현하여 상징적으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계7장의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를 동일하게 보는 관점도 있는데 여기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제자를 곱하고 거기다가 천을 곱해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를 만드는데 의도는 좋지만, 계7장의 십사만 사천은 분명히 구약의 열두 지파에 속한 택함 받은 성도 일만 이천 명씩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가 구약의 성도와 동일한 인물들이라는 것은 성경 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선입견을 전제로 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14장에서의 십사만 사천도 구약의 이스라엘 택한 백성인가?
그렇지 않다. 계14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은 땅 위의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계21:11-17절에 보면 천사가 성곽을 척량 할 때 십사만 사천 규빗이 나오는데 이 십사만 사천 규빗의 의미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구약 모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천사가 성곽을 척량 하는 일은 계11장과 슥2장과 겔40장에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척량 하는 것이다.
그리고 롬11:25-2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나오는데 25절의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고 26절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포함한 새로운 이스라엘 즉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오신 후에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유대인을 구원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드린 제사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히8:5-7,히9:9-10, 히10:4-5) 예수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예수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요14:6) 할례도 무 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다(갈6:15) 그러므로 롬11:26절의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예수 안에서 선택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 십사만 사천은 분명히 상징적인 수이기는 하지만 계7장에서의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와는 같은 무리들이 아니라 구별되었다고 볼 수 있고, 계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사만 사천과 계21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사만 사천 규빗은 땅위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구원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7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을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과 동일하게 보는 것을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십사만 사천이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성경적 근거도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동일한 택함 받은 백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고 해서 성경해석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보다 명확한 해석을 위해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좋기 때문에 계7장의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와 계14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을 구분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수와 같은 단어라고 해서 무조건 같지는 않다. 단어와 문자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십사만 사천이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다는 것이다.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이들이 시온 산 즉 새 예루살렘에 서 있는 이유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는 이유는 현재 땅에서 고난 받고 있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결국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섯 천사의 등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즉 승리한 십사만 사천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를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 주기 위해 등장하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땅 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 노릇을 하는 자들만이 십사만 사천의 대열에 들어가 있는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삽입장>
어린양이 여섯째 인까지 떼고 난 이후에 일곱째 인을 떼셔야 하는데, 일곱째 인은 계8장에 나오고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계7장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간장 또는 삽입장이라고 한다. 삽입장은 계7장과 계10장과 계11장과 계12장과 계13장과 계14장이 삽입장인데 삽입장이 왜 들어가 있는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 한꺼번에 나오고 삽입장 같은 것은 후렴부에 넣어도 되는데 왜 인과 나팔 중간 중간에 집어넣어 놓았는가?
계8:13절에 의하면 일곱째 나팔재앙인 대접 재앙은 세 번째 화로서 마지막 재앙이다. 그러나 첫째 화와 둘째 화는 일곱 나팔 재앙 중에서 다섯째 여섯째에 해당하는 재앙으로서 경고성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들은 가공할 만큼 엄청난 재앙들이다.
그러니까 여섯째 인 재앙부터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큰 재앙들인데 중요한 것은 신자가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강한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불신자들이 두렵지만 결국 그들이 멸망하고 재앙을 받는 것을 보여 주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신자가 승리한다는 확신과 믿음을 줌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울 것을 당부하고 격려하기 위해 이런 삽입장을 넣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신자의 위치와 믿음과 신분과 능력과 권세가 그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계7:1-8절까지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모습이 나오는데 먼저는 십사만 사천이 나오고 계7:9-12절까지는 구원받은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나오고 계7:13-17절까지는 이들이 어떻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서 승리하였고 마침내 영광에 나라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계9장에서는 첫째 화와 둘째 화가 나오지만 그들의 결국은 불과 유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계10장에서는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고
계11장에서는 두 증인 나오는데 죽임을 당하지만 다시 살아남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12장에서는 용이 패배하는 모습이 나오고
계13장에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나오지만 계14장과 15장에서 승리한 성도들과 어린양을 보여주면서 성도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삽입장을 통하여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의 확신 즉, 악한 마귀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마침내 승리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죽어도 이기는 승리, 이것이 신자의 승리이다. 롬8:31절 이하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받을 재앙의 말씀들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이다. 이것을 놓치면 엉뚱한데 가서 벌벌 떨고 있게 된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놓치는 순간 마귀는 달려든다. 그들의 멸망을 두려워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요한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 두 가지 환상을 동시에 보고 있다.
여러분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안다면 이제 악인의 멸망에 두려워하지 말고 신자의 마땅히 할 일에 대해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싸워 이겨 나가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단 지파와 에브라임 자파가 빠지고 요셉이 들어간 이유>
구약성경의 역사는 야곱의 열두 아들인 열두 지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두 지파는 구약성경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열두 지파의 형성과정은 일괄적이지 않고 수시로 변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창49장의 야곱의 열두 지파 예언 속에 있는 단 지파가 계7장에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은 택함 받은 십사만 사천의 무리 속에서는 빠져 있다 대신 요셉의 아들 므낫세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로 하나님께 선택됨에 따라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열두지파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창48:5-6,민3:12-13)
그렇다면 에브라임 지파가 계시록의 택함 받은 무리 속에서 빠지는 이유는 요셉이 다시 들어갔기 때문이다. 요셉은 두 아들 대신 빠졌다가 왜 다시 들어갔는가? 그리고 요셉이 들어갔는데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는 왜 빠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열두 지파의 형성과정의 역사는 창49장과 신33:22절에 있는 야곱과 모세의 예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의 내용은 각각 다르지만 예언 성취는 빈틈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구약성경에 나타난 열두 지파의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야곱은 개인적으로 자식들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영감으로 예언했기 때문이다(딤후3:16-16) 그러므로 말씀의 원칙에 의해 야곱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볼 수 있다.(민23:19)
야곱이 단에게 어떤 예언을 하였기에 요한 계시록에서 단 지파가 빠졌는가? 창49:16-18절에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신33:22절에서는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고 했다.
단 지파의 멸망 예언은 삿18:30절에서는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니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고 했다.
이러한 단 지파의 멸망 예언은 솔로몬 왕을 떠나 북쪽으로 열 지파를 이끌고 간 여로보암 왕이 단이라고 이름하는 곳에 두 금송아지 신상을 세워서 우상숭배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왕상12:28-30) 단이라고 이름하는 장소는 본래 라이스라는 곳인데 단 지파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했다.(삿18:29) 단에서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새긴 신상을 만들고 우상을 숭배했다.(삿18:30) 이렇게 단이 야곱 예언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발꿈치를 물게 됨으로 열두 지파에서 탈락이 되는데 그 대신에 므낫세가 들어간다.
에브라임이 빠진 이유는 삿8:1절 이하에서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워 이기고 왔을 때 기도온에게 자기들을 싸움에 나갈 때 부르지 않았다고 불평했었다. 그때 기드온이 시시한 우리들이 나가서 싸우는데 꼭 당신들과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을 부를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기드온의 겸손 때문에 넘어갔다. 그러나 삿12장에서 입다가 암몬 자손들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전쟁이 겁이나 나가지 않았던 자들이 기드온에게 했던 짓을 입다에게 하다가, 입다가 에브라임을 쳐서 에브라임을 므낫세 중에 있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삿12:4)
그러므로 요셉이 다시 열두 지파 대열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에브라임 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두지파 형성과정은 행1장에서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넣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언약의 말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