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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장 주석 – 마가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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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L NOCR –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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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3장 주석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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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가복음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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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장 헬라어 주석강해]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막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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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막 131-8)
HANGL한글 Lingua Franca – 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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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¹À½ 13Àå – ±³»ç¿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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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3(ê¸) âë§ê°ë³µì 13:1-13â / ìì±: ì í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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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장 1-37절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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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북뉴스 –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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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장 주석
마가복음 제 13장
=======13:1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그를 선생이라고 호칭한 다음 놀라움과 감탄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 뜰과 발코니, 콜로나레와 행각으로 된 성전의 거대한 돌들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 헤롯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헤롯 왕조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의 놀라운 건축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크고 흰 돌들과 광택이 있는 풍부한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것이었다. 그것은 옛 예루살렘 땅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성전만큼 장엄하고 굉장한 것은 없었다.
===========13:2
예수의 대답은 이 엄청난 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질 것이다.” 예수께서 강한 이중 부정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은 그의 말씀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불길한 예언은 성전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한 예수의 심판의 결과이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한 세대 내에 성취되었다. A.D. 70년 티투스는 성전을 불태우고 나서 전 도시를 파괴하고 그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13:3-4
기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 바라보며 앉았다. 감람산은 바다의 수면보다 약 2700피트 높이 솟아 있었지만 예루살렘보다는 약 100피트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감람산 서쪽에 성전과 예루살렘 시가 위치해 있었다.
제자들은 예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질문은 두 부분으로 표현될 수 있다. (1)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2)그것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날 징조가 무엇인가?
제자들은 구약 성경의 예언의 관점만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성전의 파괴와 인자가 다시 재림하는 그 종말 시간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 현 시대의 끝이 일어날 사건이며 그때에 비로소 메시야 왕국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3:5-6
“주의하라”(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라고 주장할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13:7-8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3:9
“너희는 주의하라”라는 훈계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박해 아래서 사악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정신을 차리도록 경고하셨다. 그들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회당에서 열리는 지방 유대인의 법정인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회당에서 이교도들처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증거한 그 증거가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하실 때 그들을 박해한 자들의 고소하는 증거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13:10
복음이 반드시 먼저 모든 민족 즉 전 세계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나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최우선 적으로 해야 될 일이며 또 그의 목적에 따라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 것은 가 세대의 책임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다는 것이 곧 이 시대에 혹은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마25:31-46)
=======13:11
제자들이 체포되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질 때에 변명하기 위해서 염려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도움이 꼭 석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13:12-13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공공연하게 일어날 것이며, 또한 가까운 자기의 친척들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반대는 매우 심각하여 가족들이 서로 대적자들에게 넘겨 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경고에 관한 이러한 말씀은 예수를 위한 충성 때문에 박해로 고통 당하는 로마에 잇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고통을 전 세계적인 복음 전도와 변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게 될 때 더 한층 그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있게 된다.
=========13:14
“가증한 것”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을 가리켰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표현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 너무 가증하여 성전을 버리게 하고 황폐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뢰아 요단강을 건너 산으로 도망하라는 신호이다.
요세프스는 A.D. 67-68년에 유대 열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가증한 것”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장래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13:15-18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될 우기인 겨울철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
========13:19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에도 해당되지만 거기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을 넘어서 재림에 앞서 있을 마지막 대환란 이기도 한 것이다.
==========13:20
“만약 주께서 그이 구언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된 그날들을 감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13:13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택하신 그 택한 자들 때문에 마지막 때 환난 기간을 감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A.D. 70년에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마지막 때의 대환란인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13:21-22
“그 때에” 즉 심한 고통과 도망하는 그날 중에 만약 누가 그리스도가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고 주장하여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말고 계속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의 목적은 선택받은 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3: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기의 날에 거짓 함정에 바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다시 교훈 하셨다.
=====13:24-25
“그러나”라는 말이 기적적인 이적들을 베푸는 거짓 메시야의 출현과 재난 이후의 때에 참 메시야의 극적인 오심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표현은 14-23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리킨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무질서가 바로 재림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예수는 정확하게 어느 한 편의 구절만 인용하지 않고 이사야 13:10과 34:4 둘 다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주 속에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천체 변화를 언급하신 것이다.
===========13:26
방금 언급한 우주적인 사건이 발생한 그 때에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은 신이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그는 큰 권능을 행하실 것이며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13:27
또 그때에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그의 택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 사방이란 세계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방향으로부터를 의미한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언급은 없지만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대환란 동안 순교한 신자들이 부활을 언급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13:28
제자들이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기에서 그런 의미를 의도하지는 않아다.
======13:29
이 절은 28절의 교훈을 응용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너희 제자들은 14-23절에 언급한 이러한 일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은 임박한 위기가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임박한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상징인 것이다. 만약 이런 사건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면 제자들은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3:30-31
엄숙한 서론적인 말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주장은 그의 예언(30절)의 성취를 보증한다. 현재의 우주는 대변동으로 종말이 올 것이나 이 예언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말씀들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은 영원히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의 말씀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3:32
비록 위기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은 식별해 낼 수 있으나 다가오는 그 날과 그 시의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지식의 한계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육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예수는 자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13:33
“그 때”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정한 때가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라고 거듭 훈계하셨다.
==========13:34-37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는 비유를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다.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3장
=======13:1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그를 선생이라고 호칭한 다음 놀라움과 감탄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 뜰과 발코니, 콜로나레와 행각으로 된 성전의 거대한 돌들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 헤롯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헤롯 왕조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의 놀라운 건축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크고 흰 돌들과 광택이 있는 풍부한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것이었다. 그것은 옛 예루살렘 땅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성전만큼 장엄하고 굉장한 것은 없었다.
===========13:2
예수의 대답은 이 엄청난 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질 것이다. 예수께서 강한 이중 부정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은 그의 말씀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불길한 예언은 성전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한 예수의 심판의 결과이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한 세대 내에 성취되었다. A. D. 70년 티투스는 성전을 불태우고 나서 전 도시를 파괴하고 그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13:3 – 4
기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 바라보며 앉았다. 감람산은 바다의 수면보다 약 2700피트 높이 솟아 있었지만 예루살렘보다는 약 100피트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감람산 서쪽에 성전과 예루살렘 시가 위치해 있었다. 제자들은 예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질문은 두 부분으로 표현될 수 있다. (1)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2)그것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날 징조가 무엇인가? 제자들은 구약 성경의 예언의 관점만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성전의 파괴와 인자가 다시 재림하는 그 종말 시간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 현 시대의 끝이 일어날 사건이며 그때에 비로소 메시야 왕국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3:5 – 6
주의하라 (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 라고 주장할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13:7 – 8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3:9
너희는 주의하라 라는 훈계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박해 아래서 사악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정신을 차리도록 경고하셨다. 그들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회당에서 열리는 지방 유대인의 법정인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회당에서 이교도들처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증거한 그 증거가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하실 때 그들을 박해한 자들의 고소하는 증거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13:10
복음이 반드시 먼저 모든 민족 즉 전 세계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나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최우선 적으로 해야 될 일이며 또 그의 목적에 따라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 것은 가 세대의 책임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다는 것이 곧 이 시대에 혹은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25:31 – 46).
=======13:11
제자들이 체포되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질 때에 변명하기 위해서 염려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도움이 꼭 석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13:12 – 13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공공연하게 일어날 것이며, 또한 가까운 자기의 친척들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반대는 매우 심각하여 가족들이 서로 대적자들에게 넘겨 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경고에 관한 이러한 말씀은 예수를 위한 충성 때문에 박해로 고통 당하는 로마에 잇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고통을 전 세계적인 복음 전도와 변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게 될 때 더 한층 그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있게 된다.
=========13:14
가증한 것 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 을 가리켰다. 멸망의 가증한 것 이란 표현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 너무 가증하여 성전을 버리게 하고 황폐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 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뢰아 요단강을 건너 산으로 도망하라는 신호이다. 요세프스는 A. D. 67 – 68년에 유대 열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가증한 것 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장래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13:15 – 18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될 우기인 겨울철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
========13:19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에도 해당되지만 거기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을 넘어서 재림에 앞서 있을 마지막 대환란 이기도 한 것이다.
==========13:20
만약 주께서 그이 구언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된 그날들을 감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13:13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택하신 그 택한 자들 때문에 마지막 때 환난 기간을 감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A. D. 70년에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마지막 때의 대환란인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13:21 – 22
그 때에 즉 심한 고통과 도망하는 그날 중에 만약 누가 그리스도가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고 주장하여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말고 계속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의 목적은 선택받은 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3: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기의 날에 거짓 함정에 바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다시 교훈 하셨다.
=====13:24 – 25
그러나 라는 말이 기적적인 이적들을 베푸는 거짓 메시야의 출현과 재난 이후의 때에 참 메시야의 극적인 오심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표현은 14 – 23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리킨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무질서가 바로 재림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예수는 정확하게 어느 한 편의 구절만 인용하지 않고 이사야 13:10과 34:4 둘 다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주 속에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천체 변화를 언급하신 것이다.
===========13:26
방금 언급한 우주적인 사건이 발생한 그 때에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은 신이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그는 큰 권능을 행하실 것이며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13:27
또 그때에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그의 택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 사방이란 세계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방향으로부터를 의미한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언급은 없지만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대환란 동안 순교한 신자들이 부활을 언급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13:28
제자들이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느냐? 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기에서 그런 의미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13:29
이 절은 28절의 교훈을 응용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너희 제자들은 14 – 23절에 언급한 이러한 일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은 임박한 위기가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임박한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상징인 것이다. 만약 이런 사건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면 제자들은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3:30 – 31
엄숙한 서론적인 말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주장은 그의 예언(30절)의 성취를 보증한다. 현재의 우주는 대변동으로 종말이 올 것이나 이 예언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말씀들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은 영원히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의 말씀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3:32
비록 위기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은 식별해 낼 수 있으나 다가오는 그 날과 그 시의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지식의 한계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육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예수는 자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13:33
그 때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정한 때가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라고 거듭 훈계하셨다.
==========13:34 – 37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는 비유를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다.
본장의 강화 역시 12장과 마찬가지로 수난 주간 중 화요일에 주어진 말씀으로서 묵시 문학적 특성으로 인해 해석상 어려움이 따른다. 본 강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두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1) 인내에 관한 교훈. 이는 본서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되며, 특히 예수의 공생애의 마감 시점이 가까울수록 더욱 부각되는 주제인 ‘제자 훈련'(discipleship training)의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는 사항이다. 아울러 이 교훈은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강화가 성격상 묵시 문학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강화가 주어진 가장 큰 목적은 장래사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주려는 데 있었다.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로서 본 강화에서는 ‘. . . 하라’는 명령내지는 권면의 말씀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무릇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핍박이 따르며 이 핍박은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심해진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후에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듯이 성도들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고난을 견뎌내야 함을 가르친다.
(2) 종말에 관한 예언. 본 강화는 또한 역사의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특히 이는 본문이 묵시 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끄는 사항이다. 묵시 문학 형태는 1C경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으며, 성경 전체 중에서 ‘묵시적’인 내용의 책은 다니엘, 요엘, 아모스, 스가랴, 말라기, 요한 계시록 등이며 본장과 마 24장에 수록된 감람산 강화와 살전 4:13이하 내용도 묵시 문학적이다. 이런 책들은 정경(Canon)에 포함되지 않은 묵시문학(apocalytic literature)과 마찬가지로 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역시 종말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편 본문의 내용은 네 문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각 문단에서는 종말에 관한 예언 및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에 관한 교훈이 교차적으로 반복된다. 다시 말해서, 1-8절은 종말에 나타날 징조에 관한 예언이며 9-13절은 종말시의 핍박에 직면했을 때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14-27절은 대환난과 주의 재림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예언이며, 28-37절은 항상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성할 것에 대한 교훈의 내용이다.
* 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종말론(eschatology)에 관한 학자들간의 다양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그들은 성서에 기록된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분석, 종합하면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일어날 일들을 어느 정도 상세히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란이 되었던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 간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다. 소위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은 천년 왕국 후 짧은 배교의 시기, 즉 선과 악의 세력간의 극심한 싸움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래한다는 견해로서 어거스틴(A. Augustinus), 핫지(Charles Hodge), 워필드(B. B. Warfield)등이 주장했다. 반면에 랑게(J. P. Lange), 알포드(H. Alford)등의 견해인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은 천년 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먼저 임한다고 본다. 그리고 무천년설(ammillennialism)
은 천년 왕국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여 재림 전까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통치하는 전 기간을 바로 천년 왕국 시기로 이해하며, 이 학설의 대변자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게할더스 보스(Gerhardus Vos)등이다.
(2) 슈바이처의 견해 : 슈바이처(A. Schweitzer)의 ‘철저적 종말론’에 의하면, 예수는 세상의 임박한 천재지변적 종국과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급작스런 도래는 선포하는 데 전적으로 사역의 초점을 집중시켰던 한 유대인 묵시주의자였다고 한다. 예수는 곧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하리라고 믿고 설교하였으나 결국 그러한 확신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천국은 철저히 미래적인 소망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3) 도드의 견해 : 도드(C. H. Dodd)는 슈바이처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미 도래하였다고 보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했다. 즉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러한 현재적, 종말론적 위기 상황을 기술할 때 사용한 묵시적 언어들은 역사를 넘어 항상 현존하고 있는 것은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였으며, 이러한 초역사적이며 절대적인 영역이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시간과 공간 속으로 이미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현된 종말론에 의하면 세상의 끝에 별도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일어나지는 않는 셈이다.
(4) 볼트만의 견해 : 볼트만(R. Bultamnn)은 성경상의 종말론을 실존주의적으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있어 종말에 관한 예언들은 신화에 불과하며 종말론적 시각이란 강렬한 신인식(神認識)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직면했을 때 책임있는 결단으로써 응답하는 자는 종말론적 실존에로 돌입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오늘날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학자들은 ‘철저적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에는 둘다 진리의 일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하였으되(already), 다만 그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not yet) 미래의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다(마태복음 24장 주제 강해 “성경은 종말론의 관심과 그 해석상의 문제점” 참조)
1. 종말의 징조들과 성도의 인내(13:1-13)
감람산 강화는 성전의 화려한 웅장한 외양에 감탄하는 제자들의 아둔한 모습을 묘사하는(1절) 내용으로부터 도입되고 있다. 그들은 방금 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을 책망하는 예수의 호된 경고를(12:38-40)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저들의 가식과 부패상을 깨닫지 못하고 성전의 외면적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이러한 영적 암매(暗昧) 상태를 꿰뚫어 보시고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으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그 때의 징조를 묻자 예수의 감람산 강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문을 특히 제자 훈련 내지는 모든 성도들에 대한 교훈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몇 경고 사항들에 주목하게 된다.
(1) 종교적 형식주의. 성전 숙정 사건(11:15-18)과 마찬가지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2절) 또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특히 뚜렷이 나타났던 형식주의와 위선에 대한 심판 선고라 할 수 있었다.
(2) 거짓 메시야. 말세에는 미혹하는 영들이 많이 출현하며 스스로 메시양인양 가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킨다는 경고이다(6절). 사도행전에 나오는 드다(Theudas)(행 5:36)와 갈릴리 유다(행 5:37) 및 마술사 시몬(행 8:9) 등도 메시야로 자처한 듯하며, 현재 우리나라에도 자칭 메시야를 따르는 이단 종파가 있다.
(3) 세계의 격변에 따른 동요, 말세지말이 가까와 음에 따라 전쟁과 지진 그리고 기근(饑饉)등이 빈발하게 될 것이지만, 성도들은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의 최종적인 도달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곳이며, 본문에 예언된 난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달하기 이전에 거처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기 때문이다(히 12:26).
(4) 핍박으로 인한 실족. 본문 중 무려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내용이 핍박을 대비하라는 경계의 말씀이다(-913절). 이는 감람산 강화의 주목적인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하는 단적 실례라 하겠다.
이와 같은 경계의 말씀은 당시 예수의 강화를 듣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설사 본문에 기록된 말세지말의 징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징조에 버금가는 현상들이 세계 도처에서 빈발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 무장을 게을리하는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컨대 예수의 조속한 재림을 대망하며 늘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 깨어 기도함으로썸나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엡 6:18;딤후 2:26).
*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이단은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대두하였으며(벧후 2:1) 교회사의 진전과 더불어 수많은 이단들이 출몰하였다. 여기서는 편의상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중세 시대 이전까지 출몰했던 이단 사상들 및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창궐(猖獗)하고 있는 이단 종파들 중 대표적인 것들만 대략적으로 지적해 보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이단’의 개념 및 특성에 관해서는 요일 4:1-6의 주제 강해 ‘이단의 개념’을 참조하라.
(1) 중세 초엽까지의 이단들 중 대표적인 이단은 다음과 같다.
(까) 영지주의(Gnosticism). 신앙보다 지식을 우위에 두었고, 그노시스(지식)야말로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육체를 포함한 물질은 모두 약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주의’ 참조).
(다) 오리게네스주의(Origenism). 일종의 기독교적 영지주의라 하겠으며, 성자를 신격으로 간주하되 성부께 종속시켰다. 그리고 만물이 그 근원인 가장 지고한 존재,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므로 사단마저도 하나님께로 회복된다고 주장했다.
(따) 마르키온주의(Marcionism). 하나님이 두 분 계시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모두 폐지하였고, 열 개의 바울서신과 누가복음의 일부만을 정경을 간주했다.
(마) 몬타누스주의(Montanism). 몬타누스는 요 14장에 약속된 보혜사 성령이 자기에게서 나타났으며, 자신에게 특별한 예언의 말씀이 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말이 박두하였음을 외치면서 혼인을 대체로 반대하고 엄격한 금식 생활을 권했다.
(바) 모나키아니즘(Monarchianism:군주신론). 이 이단 학설은 예수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들이워진 인간이었다는 양자설(養子設), 혹은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 영성론 등 두 가지 주장으로 대별된다.
(빠) 마니교(Manichaeism). 악의 실체성과 영원성을 긍정하고, 사단과 하나님에 의해 각각 다스려지고 있는 어둠의 왕국과 빛의 왕국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싸) 아리우스주의(Arianism). 인간을 영, 육, 이성으로 삼분하고, 그리스도는 이성 대신 로고스(Logos)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높이긴 하였으나 그분의 진정한 인성을 거부한 셈이다.
(짜)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이 병존해 있고 또한 서로 협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두 속성은 결코 하나로 융합되거나 서로 유통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카)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여 원죄의 영향력을 부인하였다.
(2) 현대의 이단 종파들은 성경의 절대성을 부정, 교주의 신격화, 행위 주권등을 주장하며 범람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실례는 다음과 같다.
(까) 통일교(Unification church). 교주인 문선명은 성경이 진리를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고 진리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으며 하나님을 남성과 여성의 중화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천사 루시퍼와 성관계를 가진 것을 의미하고 이것을 영적 타락이라 규정했다. 예수는 영적 구원만 이루었을 뿐이며, 육적 구원은 재림주인 문선명 자신을 통해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다) 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Seventh Day Advenist).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1844년 10월 22일을 그리스도의 재림일로 예언했다가 그 예언이 빗나가자 그날 예수께서 지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따)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 창시자인 럿셀은 1914년 10월에 종말이 올 것을 예언했다가 그 예언이 빗나가자 이를 수정하여 천국이 현재는 공중에 임해 있으며, 여화와의 중인들에게만 그 문이 열려 있다고 주장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첫 피조물인 인간으로 단정하며, 성령의 인격서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인하고 지옥의 존재 또한 부인한다. 또한 교회 제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고 보며, 인간의 부활을 영적인 측면에서만 인정한다.
(마) 몰몬교(Mormonism: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다신론적이며, 신들도 성이 있어 결혼하고 그 결과 자녀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담 또한 신들의 육체적 결합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에 신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만인 구원을 믿으며, 일부다처를 권장했다.
(바)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미국의 메리 베이커 에디 부인에 의해 창시되었다. 에디는 기독교가 상실해버린 치료 법칙이 자신에게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외관상으로는 성경에 궁극적 권위를 둔다고 말하나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실제적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에디 부인의 책들이다. 에디가 본 하나님은 범신론적인 하나님이며, 그녀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이원론적으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죄나 악이란 단지 착각내지 환상에서 비롯된 개념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이상으로 우리는 여러 이단들에게 관해 지극히 개략적인 한도 내에서 고찰하였다. 이단은 인간적 야욕을 종교적 허울을빌어 성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리를 미혹시키는 데서 생겨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편협하고 왜곡된 성경 이해에서 생겨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성경 구절마다에 담긴 심오한 진리를 미시적(微視的)으로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을 잇는 통전적(通典的) 의미에 유의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며(신 17:11), 오직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출 수 있어야 하겠다. 아울러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 성경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단의 세력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하겠다.
2. 대환난과 재림에 관한 예언(13:14-27)
본문은 계시록에 언급된 종말론적 대환난과 예수의 재림에 관한 예언(계 6-19장)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14-23절의 내용은 종말론적 대환난의 때와 A. 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때를 동시에 예언하는 예언적 단축법(prophetic foreshortening)을 보여 준다. 이 예언에 관한 구성상의 특징이나 내용상의 강조점에 대해서는 마 24:15-28, 29-31의 강해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예언된 사건 자체 보다는 이 예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신 예수의 교훈이라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기로 하자.
(1) 환난에 대한 인내. 앞 문단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환난을 당하여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할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본문 또한 부활과 재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의 제자 훈련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14-23절의 내용 자체는 대환난의 불가피성과 심각성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전후 문맥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환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 또한 매우 강조되고 있다 하겠다. 마지막 때를 당하여 성도들은 불신 세력에 의해 핍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천재지변과 범세계적인 환난 또한 맞게 된다. 하지만 본문은 택한 자들을 위해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시고’라고 예언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성도들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따라서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도래하기로 작정된 대환난 자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려들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환난을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도록 매진(邁進)하여야겠다.
(2) 재림에 대한 소망.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대환난을 견디어 낸 모든 성도들을 세계각처로부터 불러모으시리나는 24-27절의 예언은 말세의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더없이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의 극심한 핍박을 당했을 때, 굴복하여 배고(背道)의 길을 걷기보다는 차라리 순교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재림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재림하실 예수의 모습은 초림 때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께서 초림 때에는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극히 초라한 모습으로 오사(눅 2:7)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당하셨지만(갈 3:13), 재림 때에는 모든 죄악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정복자로서 그리고 온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예수의 재림 사건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므로, 인간 이성을 최선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이 재림의 예언을 미신이나 공상의 산물로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 엄연한 역사상의 사건이었듯이, 주의 재림 또한 역사의 마지막에 가까운 한 시점에서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와 같은 재림을 대망하는 굳건한 믿음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경주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한 유혹이나 위협을 능히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한편 역사의 한 정점에 이르러 세상의 마지막이 임한다고 하는 이 예언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역사관의 특징을 고찰해 볼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 기독교적 역사관. 기독교적 역사관이란 인간 역사의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단과 하나님과의 관계 혹은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에서 해석하는 역사관을 의미한다. 이제 이러한 역사관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역사의 진행 과정을 직선형으로 본다. 원형과 같이 무한히 반복 윤회(輪廻)한다는 불교적 시간관이나 나선형으로 무한히 발전해 간다는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가)의 역사관과는 달리, 성경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것으로서 처음과 끝이 일직선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서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시간의 흐름은 재림주이신 예수의 백보좌 심판을 끝으로 하여 멈춰지며, 그 이후에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2) 역사의 진행 과정이 목적 지향적이라고 본다. 인류와 우주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진행되며, 하나님은 역사의 주(主)로서 역사를 통해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당신의 선하신 목적과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 목적 가운데 으뜸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함 받은 무리들을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성도는 역사의 주역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해야 함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3)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이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며, 역사에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O. Cullmann). 그리스도를 통해 무한하고 영원한 구속선(球贖線)이 일반사를 꿰뚫고 들어왔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영원한 세계와 만나게 된다.
3. 경성(警醒)에 관한 교훈(13:28-37)
본문은 감람산 강화의 결론에 해당하며, 두 가지 비유를 통해 항상 종말론적 긴장을늦추지 말고 깨어서 주님 오실 날에 대비하라는 교훈이다. 이 중 무화과나무의 비유(28-33절)는 이제까지 본장에 묘사된 종말의 여러 징조들에 대한 결론으로서 내용상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깨어있는 문지기 비유는(34-37절) 이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내용이다.
한편 마태는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을 마 24:32-25:46에서 여러 비유들을 통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본문의 두 비유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종말의 임박성. ‘이 세대'(30절)라는 표현이 주는 어감과 ‘홀연히'(36절)라는 말 등에서 종말의 임박성이 강조된다. 특히 ‘이 세대’라는 말은 모든 인류를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당시의 세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어쨌든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벧후 3:8), 우린 정확한 재림 날짜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낼 필요는 없으며, 다만 항상 종말론적 긴장과 재림에 관한 소망을 가지고서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2) 경성(警醒)을 촉구함. 33, 34, 35, 37절 등에는 ‘깨어 있으라'(keep, watch, NIV)는 말씀이 거듭 반복되고 있어 본 강화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드러낸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약해지고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더욱 멀어져만 가는데, 많은 성도들은 영혼의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날 생각을 않고 있다. 죄악된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자포자기 상태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들은 주께서 홀연히 임하시는 날에 책망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마가복음13장 주석
마가복음13장
13:1-2.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성전의 장엄한 모습에 압도되어 감격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에게 “네가 이 성전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감동이 되느냐 이 성전은 조금 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리라”고 말씀 해 주셨다. 제자들은 감동할만한 가치도 없는 것에 감동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마땅히 보아야 할 것들을 보고 있는 지” 묻고 계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기에 좋은 것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았을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먹었다. 만일 그 열매가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먹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성전을 보고 감탄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능력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이상의 성전을 건축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은 자기 시대에서 풍요로움을 보았지만 다가오는 심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향락에 도취 되어 살았고, 롯은 소돔에서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그들 가운데 있는 악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했을 때 그도 함께 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실패는 이처럼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성전의 외적 모습만을 보고 감격하고 있는 제자들이 이런 실패의 삶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외형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감탄할만한 곳이었다. 헤롯이 지은 이 성전은 뛰어난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다. 이 성전은 모리아 산 위에 세어졌고 그 성전의 기초는 육중한 석조 벽을 쌓아올려 일종의 광대한 단을 형성했다. 이 단 위에 세워진 돌기둥들은 가로 13미터, 세로 6미터 높이 4미터였다. 성전 정면 바깥쪽은 황금 판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해가 떠오를 때는 빛이 반사되어 매우 아름다운 광채를 발했지만, 멀리서보면 금박을 입히지 않은 부분은 매우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마치 눈 덮인 산과 같이 보였다고 한다. 헤롯은 이 성전을 46년 동안 지어졌지만 예수님 당시까지도 완성 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갈릴리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이런 웅장한 성전을 보았을 때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성전 건물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 보이는 이 성전은 다만 철거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빈집과 같이 무가치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람의 눈에는 위대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주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볼 때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청하신다. 우리가 그토록 감탄하고 있는 것들이, 그토록 부러워하고 있는 것들이, 그토록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그토록 누리고 싶은 것들이 주님께서도 우리가 보는 것처럼 보기에 좋으신 것일까?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우리가 보기에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묻고 계신 것이다.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무엇을 볼 수 있느냐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지금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지 묻고 계시다. 헤롯은 46년 동안 세계에서 뛰어난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인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그러나 그가 건축한 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여 질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일생동안 수고하여 지은 집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릴 것이라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삶 자체가 낭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반복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능력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헤롯의 마음에 있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욕망에 이끌려 서로 경쟁하며 사막에 피라밋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정글 속에 웅장한 신전들을 세우고, 도시마다 수많은 사원들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일생을 수고함으로 이루어 놓은 이것들이 결국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여 질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삶의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일화를 알고 있다. 그는 중세 철학과 신학의 거장으로서 교회와 동료들의 기대 가운데 카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신학대전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러나 8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던 이 책을 어느 날 갑자기 중단함으로 그 책은 미완성된 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가 집필하던 것은 도중에 그만둔 것은 미사 중에 본 계시로 인하여 자신이 저술하고 있는 일은 마치 지푸라기처럼 가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이나가키 료오스케, 토마스 아퀴나스, 새남, 1995, P163). 토마스에게 일어났던 예를 우리는 바울의 삶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에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자랑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 후 그것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을 해로 여겼다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라(빌3:7,8)” 언급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그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이 “그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로부터 “그 일이 참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가?”로 바꾸어 졌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이처럼 그들에게 시각이 변했을 때 그들의 삶도 변한 것이다. 만일 우리도 그들처럼 사물을 보는 시각이 바꾸어진다면 일생동안 지푸라기 같은 것을 위하여 힘을 다해 수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일들은 어떤 것들일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세 가지 영원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들은 사랑이고 구원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 보다는 사랑하는 일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일에 전심할 것이다. 즉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되, 그 일이 세상에 사랑을 보다 더 풍성히 하고,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고, 보다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는 것이라는 의미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일도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이다. 주님은 헤롯처럼 불가사의한 성전을 지으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상아탑(象牙塔)을 쌓으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허락된 환경에서 요청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심으로 바로 그 일을 통하여 세상에 사랑이 더 풍성해 지도록 하셨고 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셨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는 일을 하셨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위대해 지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어 세운 모든 바벨탑들은 모두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막 가운데 세운 웅장한 피라밋도, 정글에 세운 거대한 신전들도, 그리고 대도시마다 세워진 불가사의한 수많은 건축물들도 시간이 더해 갈수록 무너져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웅장했던 건축물들 가운데는 이미 폐허되어 돌기둥 몇 개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벽돌 조각들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집은 시간이 더해 갈수록 더욱 견고히 서가고 있다. 우리는 필립부룩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한다. “이제까지 진군한 모든 육군과 이제까지 편성되었던 모든 해군과 이제까지 의회에 참석하였던 모든 의원들과 그리고 이제까지 통치하였던 모든 왕들을 합쳐 놓아도 이 고독했던 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 만큼 능력 있게 이 지상에서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준 분은 없습니다”
주님은 성전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묻고 계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막13:3-13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제자들은 주님께서 성전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용한 시간에 주님께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물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물음에 대하여 종말의 증조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즉 세상의 마지막 때 나타날 징조로서 미혹이 있을 것이고(13:5), 각처로부터 난리의 소문이 들려 올 것이고(13:7,8), 기근이 있을 것이고(13:8),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을 것이고(13:9,13),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있을 것이고(13:12), 만국에 복음이 증거 될 것이다(13:10). 그러나 정확한 시기는 오직 성령님만 아신다(13:11).
특별히 제자들의 주된 관심이었던 종말에 대한 시기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할 때,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종말을 자신들의 생애 동안에 임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과 사도들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종말이 자신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임할 것으로 믿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재림이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성경이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성경을 통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이 종말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분명히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고 있었다. 사도들이 주님께 “때와 시기”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 자신들의 생애 어는 날인가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고 물었을 것이다(마24:3,행1:6).
실제로 이런 종말에 대한 임박 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과 신앙에 많은 문제점을 주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종말과 관련하여 갖게 된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 쓴 서신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 재림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지만 재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믿음의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재림 전에 죽은 믿음의 형제들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신앙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고(살전4:13-18), 또한 그들 중에 일부는 종말에 대한 그릇된 신앙으로 인하여 규모 없는 생활을 하였다(살후3:6-15). 이처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임박한 종말에 대한 신앙으로 인하여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쓴 것이다. 사도들조차 처음에는 주님께서 곧 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체 될수록 그들은 종말의 시기에 대하여 숙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임박한 종말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믿음의 여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바르게 지도해 줄 수 있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림의 시기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볼 때 주님께서 때와 시기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다음의 몇 가지 개념들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 하루는 우리에게 천년과도 같고 우리에게 하루가 하나님에게는 천년과도 같다는 것이다(벧후3:8).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시간에 대한 개념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시간의 개념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심으로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사용하실 때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과는 다를지라도 그 언어를 통하여 전달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오류 없이 전달해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실 때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시는지” 주의해 보아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시간은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시간이며,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시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와 시기”에 관하여 알아야할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마지막 때” 또는 “마지막 날”이라는 말은 주님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사이의 모든 시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바로 그때가 “마지막 때”이었던 것처럼,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도 “마지막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어떤 사람들이 “마지막 때”라는 말을 마치 현재만을 의미하는 특별한 시간인 것처럼 말한다면 그가 무지함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때와 시기”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선지자적 단축법”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하여 동일한 시점에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이런 것을 “선지자의 단축법”이라고 한다.
이처럼 “때와 시기” 우리가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예들 가운데 하나를 마태복음24, 25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언급된 “마지막 때”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표적인 세 가지 학설이 있다. 이 학설들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언급된 내용들이 모두 A.D.70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A.D.70년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것이지만 그 예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상의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한 예표라는 설이고, 마지막은 A.D.70년 예루살렘 멸망뿐만 아니라 종말에 있을 사실적인 예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언의 말씀에서 시간의 문제는 해결하는 일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의 말씀에 나타난“ 때와 시기”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려는 호기심에 이끌리기보다는 시간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계시해 주고자 하신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시간에 대하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바른 태도일 것이다(여기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D.M 로이드 존스,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기독교문서 선교회, PP122124. 참조).
13:14-23.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날의 징조를 말씀하신 후, 그와 같은 징조들 가운데 결정적인 징조를 볼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말씀해 주셨다. 마지막 날에 대한 결정적인 징조로서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말씀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3:14-16)” 주님은 제자들에게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 특별히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도망하라고 말씀하실 때 집에 있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미련도 두지 말고 즉시 도망하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 날에 임할 환란의 극심함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도망하라”는 것은 마지막 때의 환난을 피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때를 알리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야 말로 마지막 때를 알리는 결정적인 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70인 역의 다니엘12장 11절을 문자적으로 취한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우상을 의미하고 그것이 “서지 못할 곳”은 성전을 말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은 “우상이 성전에 세워진 것을 보거든”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예언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행위와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다. B.C.168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 번제단 위에 주피터를 위한 제단을 건립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주석가들은 이 사건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시대의 예표로 해석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드은 이 예언을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사건과 연관 시켜 해석하고 있다. 70년 9월 26일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하고 그들의 군대기를 성역(聖域) 동문 맞은편에 세우고 거기에서 희생제를 드렸다.
주님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볼 때 어째서 도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그 날 이후로 극심한 환란이 시작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날의 환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13:17-20)” 그날로부터 시작 되는 환난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대 환난이 될 것이라는 의미다. 만일 이와 같은 환난이 지속 된다면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환난을 피하여 도망하라고 말씀하셨고 그 날을 감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날의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특별히 여기 기도하라는 것은 환난의 날에 즉시 피할 수 있도록 방해 되는 모든 환경을 제해 주시도록 구하라는 의미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가 있는 자는 환난의 날에 피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날이 안식일에 임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에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하여 즉시 피하는 일에 방해 받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그날에 거짓 선지지들의 미혹을 주의할 것을 말씀하셨다.
13:24-27.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종말에 대한 징조로서 성경은 천지지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24:4-14).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포함하여 하늘에 무서운 징조들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마24:29,30.막13:24,25.눅21:25,26). 이와 같은 때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여기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는 것은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함이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주로 오실 때에는 초라한 말구유로 오셨지만 이처럼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중에 오실 것이고 그것을 모든 사람이 볼 것이다. 그 날에 이루어질 또 다른 하나는 믿는 자들을 모든 곳으로부터 불러 모으시는 일이다. 주님은 그 날에 있을 또 다른 한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까지“란 모든 곳을 의미한다. 주님은 이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하여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
13;28-37.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24:29-32).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보이면 세상 끝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교훈은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분별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의 사람들 역시 세속화에 휩쓸려 갈 것이다. 특별히 동일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자기 시대에 무감각함으로 멸망 받은 노아의 시대를 예로 들어 교훈 해 주심으로 시대를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해 주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도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니라(마24:37,38)” 노아의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홍수 심판을 경고하셨지만 아무도 이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노아가 홍수 전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만 전심했다. 즉 그들은 너무 현실에 집착하여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노아의 식구들 외에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멸망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징조를 보여 주신다. 이 징조를 살피는 자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비유를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과 회심과 관련시키고 있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예언들은 많은 있다(슥12:10,13:1,고후3:15,16,롬11:25-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마8:11-12, 마21:28-32, 21:43, 마22:1-14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상반되는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심을 종말의 징조로 볼지라도 그 기준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은 한 개인이 복음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스라엘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그들 각 사람이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한 국가 또는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고 영적 의미로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천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리고 디아스포라로서 살아온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독립했다고 하여(1948년), 그것이 재림의 징조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집단적으로 복음을 믿고 구원받으리라는 기대도 성경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재림의 징조로서 이스라엘의 회심에 대한 언급 역시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더 많은 사람들 즉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민족적 구별이 없이 하나님께서 구원하도록 예정하신 충분한 수가 구원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일여야 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를 알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13:29-33)” 이 모든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를 알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종말의 때를 알아야 하는가? 종말에 대한 징조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종말의 징조”라는 언어 자체가 주는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종말이라는 언어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것은 고난의 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언제나 소망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날이 오늘이 될지 아니면 오랜 후가 될지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뿐만 아니라 재림을 준비하며 살게 될 것이다.
여기 믿음으로 미래를 전망하며 산다는 것은 종말의 징조를 통하여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말한다. 실례로서 마지막 때가 가까워올 수록 복음이 세상에 넓게 전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 전파 될 것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사람들이 과학과 사회 발전을 예를 들며 앞으로 오는 세상은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때 일어날 징조에 비춰볼 때 앞으로 사람들은 복음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시대 복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종말이 가까이 이를수록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가운데 충분한 수가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종말의 징조를 통하여 마지막 때가 가까이 이를수록 믿음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믿는 자들을 유혹할 것이고 박해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종말의 징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장래를 예측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믿음의 승리를 위하여 준비하도록 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셨다. 여기 “깨어 있으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는 의미이고(13:34),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한 일을 언제든지 셈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의미다(13:35,36). 그러므로 주님의 “깨어 있으라”는 권고의 말씀은 충성과 관계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마지막 권고로서 충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여기 충성된 종이란 주인이 언제나 곁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주인이 위임해 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를 의미한다.
종말에 대한 교훈과 적용에 대하여(막13:3-37를 중심으로)
마가복음13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과 그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리는 징조들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예언과 징조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하나의 예표(豫表)일 뿐이고 실제로 본문은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이처럼 마가복음13장은 가까이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징조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만 멀리는 이 세상의 멸망에 대한 예언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가르침을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큰 원칙을 말씀해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 가르침이 자신들의 삶 가운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고 적용하려 하기 보다는 단순히 그 사건 자체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호기심이 제자들의 삶 가운데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이 세워지기도 하고 파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그들의 삶 가운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즉 그 가르침이 그들의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무엇보다 먼저 지적 관심과 적용 문제는 언제나 함께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지적 관심만 가지고 있고, 적용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관심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지적 관심과 적용 문제를 함께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릇 행하였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대한 교훈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교훈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지적 호기심은 그들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데 이르렀던 것이다. 종말론에 대한 그릇된 호기심으로 인하여 이단에 빠지게 된 경우라든지, 또는 이와 같은 호기심에 너무 깊이 빠져버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모두 그릇된 지적 호기심으로 인하여 받게 된 해악들이다. 이런 해악은 종말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표적과 기사 또는 치유 등과 같은 가르침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릇된 지적 호기심으로 인하여 위험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공통적인 것은 지적 관심과 적용 문제를 함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절은 제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주님은 제자들의 지적 호기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해 주셨는가? 주님은 그들의 지적 호기심에 만족할만한 지식을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는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믿는 자들로 하여금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미혹들이 많아질 것이고(13:6), 곳곳에서 전쟁의 소문과 지진과 기근에 대한 소문들이 들려올 것이고(13:7,8),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것이고(13:9-13),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표적과 이적을 행할 것이고(13:21-23), 천지에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13:24-27) 주님은 이처럼 제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가 지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가르쳐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무지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지적 관심을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도록 지식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에 대한 지적 관심뿐만 아니라 일반 학문에 대해서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는 신앙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삶에 필요한 모든 지적 관심에 대하여 성실해야한다. 만일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 제자들처럼 종말에 대한 지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연구할 수 있고 또한 신앙생활에서 체험의 문제들 즉 기도응답, 치유, 표적과 기사 등에 대하여 지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성실히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처럼 제자들의 지적 관심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것으로만 만족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제자들의 물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후, 그들에게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13:28,29)”고 말씀하시고 계속하여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13:33)”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얻었다면 그 지식이 그들의 삶 가운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진지하게 살피고 그것을 삶의 교훈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 대한 만족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그들에게 생명과 멸망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생명과 멸망의 길 중 어느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 지식이 우리에게 이처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음의 두 가지 방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지식의 중요함을 충분히 가르쳐 주셨다. 하나는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이 지식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들을 통하여 종말을 대비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삶을 결단하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BC.722년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한 역사적 사건을 대하거나 또는 BC.586년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한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 언제나 갖게 되는 물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 그들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과 경고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겠는가”라고 의심하므로 그 날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을 그처럼 비극으로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장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홀연히 그 날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때 그들처럼 비극으로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나간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주시는 교훈과 앞으로 다가올 종말에 대한 예언들은 우리에게 예언의 말씀을 무시했을 때 오는 불행을 보게 해 주고 앞으로 임하게 될 주의 날을 준비하도록 한다. 그러면 주님은 이처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첫째는 미혹을 받지 않도록 말씀하셨다.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거짓으로부터 미혹을 받아왔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로 하여금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미혹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 어떤 미혹은 마치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신앙에서 떠나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필요가 보장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며 영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 진리에 굳게 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미혹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둘째, 주님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특별히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될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 되시며 세상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 있도록 말씀하셨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13:33,34)” 여기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라는 말은 우리의 부르심에 깨어 있으라는 의미다. 삶의 주변에 속한 것들에 대하여 주위를 빼앗김으로 삶의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할 교훈은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도록 허용해 주신 시간 동안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2020. 8. 24.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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