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32 과학 시 모음 Trust The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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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욱 짧은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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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 모음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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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 모음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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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Ú¿¬¿¡ °üÇÑ ½Ã ¸ðÀ½> – ´ç´ç´º½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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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시화대회 – 수상작보기 – 대한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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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시화대회 - 수상작보기 - 대한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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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넷 – 좋아하는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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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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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푸른밭 사랑 어두운 서가를 뒤진다. … 사서는 칡넝쿨로 얽혀 있다. … 화두 하나 참구한다. … 깎아지른 듯 가로막고 서 있는 절벽. … 한 그루. … 밝은 해를 닮고자 함 … …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푸른밭 사랑 어두운 서가를 뒤진다. … 사서는 칡넝쿨로 얽혀 있다. … 화두 하나 참구한다. … 깎아지른 듯 가로막고 서 있는 절벽. … 한 그루. … 밝은 해를 닮고자 함 … 오세영 시 모음 55편 ☆★☆★☆★☆★☆★☆★☆★☆★☆★☆★☆★☆★ 1월                                                              오..푸른 밭같이 늘 푸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푸른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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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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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실험키트 오토마타 만들기 놀이 수업 재료 모음 –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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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실험키트 오토마타 만들기 놀이 수업 재료 모음 -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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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 모음 45편

고재종 시 모음 45편

☆★☆★☆★☆★☆★☆★☆★☆★☆★☆★☆★☆★

《1》

6월의 童謠

고재종

6월은 모내는 달, 모를 다 내면

개구리 떼가 대지를 장악해버려

함부로는 들 건너지 못한다네

정글도록 땀방울 떨구어서는

청천하늘에 별톨밭 일군 사람만

그 빛살로 길 밝혀 건넌다네

심어논 어린 모들의 박수 받으며

치자꽃의 향그런 갈채 받으며

사람 귀한 마을로 돌아간다네

☆★☆★☆★☆★☆★☆★☆★☆★☆★☆★☆★☆★

《2》

개기월식

고재종

이웃들과 아랫마을에 문화예술단 공연 보러 갔다가

공짜 공연 본 죄로 강권하는 만병통치약을 한 박스 이고 왔다

수십만 원 되는 외상값 미처 못 갚아서 독촉장 수없이 받았다

붉은 도장 팡팡 찍은 재산 압류 계고장 계속 받고

오밤중이건 새벽녘이건 협박 전화질 받다가

자식 직장 상사까지 알아내 전화질 한 ‘그놈 목소리’ 때문에

자식 앞길 막았다고 순창할매 홀로 제초제를 마셨다

전직 경찰관이라는 그 해결사의 쇠갈고리에 찍힌 삶을

캄캄하게 조문하고 있는 오늘, 개기월식의 지구라니!

☆★☆★☆★☆★☆★☆★☆★☆★☆★☆★☆★☆★

《3》

고요를 시청하다

고재종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 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 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

《4》

광채

고재종

석모도 방죽, 그 아득한 억새 밭에 섰더니

일몰에 젖은 네 눈동자는

되레 무슨 깊고 푸른 수만 리로 일렁거렸다

억새 때문만도 아니게 길 하나 보이지 않고

내 눈은 내 눈동자를 보지 못할 때

네 눈동자에서 터져 나오는 광채는

저 수평선까지를 황홍(黃紅)으로 물들여놓곤

되레 넌 깊고 푸른 네 심연으로 잦아들었다

억새꽃 금발들이 하염없이 반짝거렸다

☆★☆★☆★☆★☆★☆★☆★☆★☆★☆★☆★☆★

《5》

그 희고 둥근 세계

고재종

나 힐끗 보았네

냇갈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딴 세상에서인 듯한

풍덩거리는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키들거림이여

때마침 어디 마을에선

훅, 끼치는 밤꽃 향기가

밀려왔던가 말았던가

☆★☆★☆★☆★☆★☆★☆★☆★☆★☆★☆★☆★

《6》

그리운 죄

고재종

산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은

눈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

《7》

기도하는 사람

고재종

길가의 오락기에서 아무리 두들겨대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두더지 대가리처럼

한사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퇴행성 고독의 습관 같은 게 그를 홀로 세운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우느냐고 하지 말아라

울 수라도 있다면 왜 기도하겠느냐고

반문하는 데에도 지쳐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없는 생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던 랭보여

중대장의 명령 하나에 인분을 먹은 병사들의

굴욕 같은 생도 이미 참았으니

다만 오그라지고 우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과일 도사리 같은 것으로

그를 아무도 눈여기지 않는 곳에 홀로 세우는

저주받은 고독의 습관이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저 풍찬노숙의 나날을 누구에게 물을까

☆★☆★☆★☆★☆★☆★☆★☆★☆★☆★☆★☆★

《8》

꽃의 권력

고재종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 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

《9》

날랜 사랑

고재종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

《10》

너의 얼굴

고재종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 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 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대한 서러움이라기보단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차마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중독된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너의 계시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

《11》

누님

고재종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저 아가씨 얼굴 좀 보아

홍색 자색 연분홍 드네

가슴 봉긋한 저 아가씨

꽃물 든 손 가슴에 얹네

저 먼 데로 까치발 딛네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어쩌자고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치다 깨어나니

울 밑의 봉선화 비에 젖네

☆★☆★☆★☆★☆★☆★☆★☆★☆★☆★☆★☆★

《12》

눈물을 위하여

고재종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로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

《13》

달밤에 숨어

고재종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 오르며

갈대 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 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익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

《14》

대설

고재종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

《15》

면면함에 대하여

고재종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

《16》

무늬

고재종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오솔길을 쓸고

오솔길에 무늬를 짠다

나뭇잎 그늘 없는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가

나뭇잎 그늘에

누워 마음의 상처를

쓸지만 상처 없이는

생의 무늬를 짜지못한다

아. 사랑의 그늘은

나를 이윽하게 하지

이윽함 없는 봄날은

찬란히 갔지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내 생의 이정(里程)을 쓸고

그 이정의 무늬를 밟으며

나는 이제 막 중생의

하루를 통과하는데

시방 눈앞에 일렁이는 게

나뭇잎인가 그 그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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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묵정지 이 쓸쓸함의 저편

고재종

한때의 푸르른 피를 잘 씻어낸

억새꽃 은발들이 잔광에 반짝인다.

한때의 무성한 살을 잘 비워낸

억새꽃 은발들이 바람에 쓸린다.

이때쯤 개울물 소리는 청천에 닿고

나는 묵정지 서 마지기, 할말이 없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서러움을 잘 부린

머슴새가 시방도 쭉쭉쭉쭉 소를 몬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그리움을 잘 빛낸

머슴새가 시방도 그 누굴 호명한다.

이곳저곳 구절초가 속속 듣고

너는 못 뒤엎는 자리, 들을 귀가 없다.

바람은 또 우수수히 풀밭에서 인다.

풀들은 또 소슬하게 그만큼 시든다.

하여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먼가.

꽃도 새도 어둠으로 눕는 자리엔

두루총총 별이 참 많이는 돋는다.

두루총총 서리 쓴 들국빛으로 돋아선

너나 나나의 눈물의 사리를 닦는다.

그러면 타는 밭과 빠지는 수렁을 넘던

우리의 외진 사랑과 노래여, 안녕.

이 저녁 아득아득 저무는 길에서도

찔레 열매들 형형, 사상을 묻고

실베짱이 씨르래기 풀무치 한 떼는

시간 너머의 더 높은 꿈을 연주한다.

너와 난들 이 무명을 무얼로 점등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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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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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봄 마당에서 한나절

고재종

하늘은 쪽빛이고 마당은 환하다.

햇병아리 몇 마리가 무언가를 콕콕 찍고

토방의 늙은 개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세상 살며

바람에 꾸벅이는 제비꽃이나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주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담 너머 대숲의

고요 모르는 수런거림과

사립 옆 윤기 나는 감나무 잎의

반짝거림에, 한때는 목숨이라도 걸 듯

그리움과 노여움을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먹이 모자라던 까치 지난 겨울엔

개밥 그덩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더니

그 까치 시방은 마당을 차고 오르며

흰 무늬 날개 활짝 펴서 대숲 위를 다닌다.

그 부신 꿈의 비상엔 언제나

차고 오를 마당과 몇 알의 밥알이 필요했던

것인데, 나는 시방 생의 어디쯤

어슬렁거리며 날개 짓 해보는 것인가.

마당은 환하고 불혹은 눈앞이다.

헛간의 녹슨 경운기와 담장 밑의 풀덤불이

세월을 가르치고, 장독대의 곰삭은 옹기들은

미륵불처럼 처연하다. 서러운 것들의

모든 가슴이 미륵불 되면 좋으련만

아직도 외양간의 부사리는 영각을 쓰며

마당을 한바탕 뒤흔드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 사랑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마당 귀퉁이의 참배 꽃은 펄펄

져내리고, 나는 목이 메이는 것도 지쳐

물끄러미 생의 안마당을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우편배달부는 늘 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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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북극성을 일별하다

고재종

별 볼일 없는 일들 때문에

별 한번 보지 못하고 살다가

추석날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사이

북극성, 당신을 일별합니다.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채비를 마친 채

저를 내려다 보시는 당신의

恒心 아래서 저는 떠돌이였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사랑하는 소녀와

늦도록 강둑에 앉아 애너벨 리를 읽고

아예 씨르래기 울음을 연주 삼아

당신을 애너벨 리로 명명했지요.

그 호명 이후 늘 당신은

제가 부자될만하면 가난케 하고

제가 날 것 같으면 어깨를 치시고

제가 연애할 양이면 눈멀게 하셔서

쌀싸라기 같은 그때 그 순결을

호젓이 돌아보게 했지요.

제가 헌 상자며 넝마 등을 가득 싣고

좌우로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는

굽은 등허리의 리어카꾼 노인처럼

생을 낑낑대며 끌어대다 돌아와

이제 이렇게 당신께 고백합니다.

애초에 당신을 함께 호명했던 소녀마저

이젠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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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死因

고재종

세상에 아름다운 시신은 없다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박혜진 씨는 다만

사회가 외면하는 시신의 침묵을

묵묵히 대변할 뿐이라며 웃는다

부검 날엔 몸에 배는 부패 냄새 때문에

밖에 나가 점심도 먹을 수 없는 그녀가

토막 난 사체의 위장을 가르고

썩어 문드러진 사체에서 피를 뽑고

유괴 후 숨진 아이 부검 때는 펑펑 울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녀가 고독과 죽음을 관통하며

그토록 밝히고자 하는 사인은

저마다에게 어떻게든 있긴 있는 것일까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하인이 없고

공포를 휘두를 제국이 없어서 자신을 증오하는

우리들의 너무도 의당한 천국에서

우리들의 죽음은 스스로 저당 잡힌 게 아니던가

인간에 대한 예의

그 관대한 거짓말 때문에

오월 강변의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보석처럼 짤랑거린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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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숙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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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월의 여자

고재종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의 상족암에

때아닌 겨울비 치는 바다,

파도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 말한

그녀는 거기 홀로 견디는 거다.

그녀와 거기서 좀 지체해도 좋았던 그곳엔

백악기 때의 공룡 발자국과

만권서 쌓은 듯한 퇴적암에 층층 새겨진 세월,

그것과 함께 그곳에선

그녀 가슴에 패인 삶의 사랑의 상처도

빗물 고이는 공룡 발자국처럼 오래

가리라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해야 한다.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혀

그 가슴의 울혈, 퇴적암처럼 더께 얹고 나니

고독은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이더라며

그녀는 오연한 눈빛이던 거다.

어쩌면 그녀는 일억 년 전까지는 추억되는

무상의 시간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 만권서보다 더한 것들을

세월 밖에까지 쌓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바다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난 비 아니라도 온통 젖어 그만이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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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수선화 그 환한 자리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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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수숫대 높이만큼

고재종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 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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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수평선

고재종

저렇게는 저렇게는

물낯에 꽂히는 빛의 작살 떼와

그 작살 뗄 맞고 번쩍번쩍

물낯 위로 튀는 숭어 떼와

그 또 숭어뗄 채고 채는

하도나 무정한 갈매기 떼여

이런 날엔 이런 날엔

네게 차마 못 닿고 부서지던

서러움, 서러움의 떼까지

이내 까치놀 이는 먼 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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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숲의 묵언

고재종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 숲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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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시간에 기대어

고재종

강의 면목이라면 면면한 유수와 범람,

강물 따라 걷는 마음은 넘치고 또 흐르네.

보리숭어며 비오리 떼가 튀고

창졸간의 갸륵한 것들이 좋이 울어도

순간의 꽃보다는 이야기로 더 유장할 터,

금결은결 반짝이는가 했더니 금세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아닌가.

한때는 한도 없이 파닥거렸던

강변 은백양 잎새와 첫사랑의 흑단머리는

바람의 갈래 갈래로 흩어지고

오늘은 강가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

강섶을 일구는 고라니며 노인장과 함께

또 무엇, 그 누구로 흘러드는 구름 떼라니!

구름이 깊어지면 강물도 높아져서는

서러움 밖의 그 무엇이라도 소환할 듯한 모색,

서녘 놀이 비쳐 든 갈대밭 속의 연애 너머

썩지 않고 들끓는 고독의 항성으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유정의

경계 같은 것들을 오늘도 추문 하는 것이랴.

흐르는 강에 차마 가닿지 못하고

사소한 마음 하나에도 수만 물비늘을 뒤채는,

지금은 결락한 꿈의 시간에 기대어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강의 명색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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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고재종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 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날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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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고재종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 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 난발의 바람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 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것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이 보인다.

어깨를 들썩이는 망나니를 쓸어댄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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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로스의 혀

고재종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입는 육체는

타는 듯이 취하는 향기와

터진 석류의 신음이 퉁기는 탄금

한 세계를 발사하는 치명의 눈빛과

붉은 입술의 이승저승

출렁이는 파도의 무한을

하루 더 춤추게 할 시간의 깊숙한 창날

차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음부에서

새어나온 고유의 방언들이

처절하게 미끄러지는

모든 색택과 조형의 전위인 달항아리

막 따낸 수밀도를 베어 물며

달고 탄탄한 모든 것의 목록을 해독하는

미뢰, 에로스의 극히 사적인 혀는

뜨거운 왕국의 첫 글자

추문의 고요라면 더 뜨거울 왕국의 화두

승인하라, 시와 나비의 리듬

질정 없는 연주의 알레그로비바체

아편 먹은 듯 번지는 총천연색의 꽃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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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외로움에 대하여

고재종

들어봐, 저 처서철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 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들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이 목 늘어나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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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웅숭 깊어지는 사랑

고재종

수수 꽃 다리 꽃이

바람에 우수수 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 내느데요

수수 꽃 다리 꽃을

정 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 꽃 다리 꽃도 우리네 사랑도

아, 연자줏빛으로

웅숭깇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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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유서

고재종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

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

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었따!

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

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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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승 꽃의 향기에 저승 새가 취하면

고재종

고산의 석남화라 했지요.

네가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으면

나도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는소리에

너와나와가 함께 깨어난다고 했지요.

백두산 골짝 암벽에 피는 꽃,

노랑만병초라고도 하는데요.

그 향기가 하도나 좋아선, 네 오랜 체증도

내 밭은 정기도 새삼새삼 씻는다는데요.

그것이 광대고원을 달리는 바람 향이거나

그것이 감사나운 강풍이 잠깐 비낀 날,

아청빛 하늘의 흰구름 향이거나

그것이 구름 저편에 아스라히 묻힌

시간 밖의 시간을 일깨우는 은하 향이어서

그래요, 석남화 향기 맡으면

妙音鳥라던가 그런 새가 울 것 같아요.

극락정토 설산에 살아서

너무도 춤 잘 추고 너무도 미음을 내어선

네가 병들고 내가 죽을지라도

왜 아니 싱싱하고 왜 아니 생생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새가 울고 말겠지요.

그러면 석남화주, 내 마시고 너도 마시고

한 오십년 더 우는 거예요, 그 눈물로

꽃향기와 새 노래 듣는 꿈길을

너와나와는 조금은 닦을 수가 있어서

두발부리 두억시니와 같은 세상의

서러운 사랑들 먼저 걷게 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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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정자나무 그늘 아래

고재종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느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새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늘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 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은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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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즐거운 경배

고재종

나는 가난해서 면서기의 권세도 없이

냉이, 패랭이, 감국, 바람꽃

그 여린 숨탄것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유는 꽃들에게 가서 물으라

다만 그 애젖함에 목이 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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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천지간의 네 속삭임

고재종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무어라, 종일 속삭이는

저 봄비 아득한 숨결은 돌아와

이제 마악 옴짓거리는 살구나무의

어린 꽃망울엔 무슨 구슬이 엉기는지

와르르 무너지는 해동의 담 너머

앞들 메말라터진 보리밭엔

무슨 꿈들이 파릇파릇해지는지

고요하여라, 다만 천지가 속삭이며

서로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뿐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 오랜 지글거림도, 그 지글거림의

내 영혼 속 쓸쓸한 적막산천도

이제는 깨어나 봄비 머금는 시간,

동구밖 당산나무 둥치는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대는지

거기 때까치는 젖어드는 날개를 접고

왠 생각에 골똘히 잠겼는지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내가 그저 살아낸 모든 상처들이

저 봄비 융융한 숨결로 넘쳐나

十方이 촉촉히 젖어든다면

세상 모든 죽은 것들의 흙은

산 것들의 새싹들을 속속 틔우는지

아니 이 고요의 밀림 속, 무엇 하나

속삭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봄비는

내 생의 작은 뜰을 꽤는 적셔볼 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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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첫사람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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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청춘

고재종

동백꽃 송이송이가

저렇게는

빨갛게 탐나는

피어나는 시간을

사무치는

사무치는 시간이라 할까.

저 동박새 한 마리

동백가지에 앉아

동백꽃 송이송이를

차마 쪼다간

한 번 울고는

먼바다를 바라보는데

목이 메이는

목이 메이는

무엇이라도 있어서일까.

동백꽃 송이송이가

빨갛게 무참하게

지는 날에는

저 파랗게 질린 바다도

야심하도록

야심하도록 문창가에

해조음을 밝혀놓고,

너와 나는

홍역을 앓듯

홍역을 앓듯

목놓아 울지도 못하던

자청의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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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출렁거림에 대하여

고재종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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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침묵에 대하여

고재종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침묵의 폐허를 차마 감추지 못하는 달빛은

이것이 무장무장 은산철벽을 치는 것이어서

용과 거북이의 뿔 자라는 소리 듣다 보면

나는 나일 것도 없다고 할 때가 오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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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고재종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시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새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 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는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갓씨 고추씨 오이씨 죄다 뿌린다네

할매에겐 땅 한 뼘 없어도 걸어댕겨 보면

천지에 온통 오목조목 씨뿌릴 땅이어서

어느 누가 거두어 가든 상관 않고 뿌린다네

누가 됐든 흡족하게 묵으면 월매나 좋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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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화음

고재종

나의 사랑은 가령

네 솔숲에 부는 바람이라 할까

그 바람 끌어안고 또 흘려보내며

온몸으로 울음소리 내는 것이

너의 사랑이라 할까

나의 바람 그러나

네 솔숲에서만 그예 싱싱하고

너의 그지없는 울음 또한

내 바람맞아서만 푸르게 빗질하는

그런 비밀이라 할까 우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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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보낸 한철

고재종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노래한 시인은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적었네.

오늘 나는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고 적어도

나의 큰 죄과는 어쩔 수 없네, 늘 삶의 바깥에

숨은 음모가 있는 거라고 핑계댔으니

불행은 내가 창조한 신이어서,

저 황홀한 아편 송이송이 같은 색들

아편 맛 같은 색정에 저항하지 못하는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회의하다니 몽상하다니, 고통은 여기 있고

우울이라니 동경이라니, 죽음은 내가 원했다.

새 애인을 만나 전 남자의 아이를 지우러 가는

여자가 걷는 길처럼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나의 형벌이었으니

삼복염천 개는 제발 목 달지 말고, 피비린내는

참수의 무리가 닥치기 전에

온통 색뿐이어서 색정뿐이어서

천지가 따로 없는 저 황홀로 터지며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 해도, 복날

개처럼 늘어진 환멸 때문에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나는

내 비명의, 송이송이의, 목백일홍만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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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관한 시 모음>

<자연에 관한 시 모음> 배한봉의 ‘과수원 시집’ 외

+ 과수원 시집

봄 과수원에

파릇파릇 돋는 저것은 풀이 아니다

노랗게 발갛게 피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바람에게 물어봐라

햇빛에게 물어봐라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산비둘기가 나뭇가지에 두고 간 울음

그 여운 끝자락을 붙잡고 화들짝 꽃봉오리 여는 홍매에 대해

지난겨울의 눈바람을 먹고

열병처럼 퍼지는 가뭄을 먹으며

온몸으로 대지가 쓰는 시, 나무가 쓰는 시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저 시 없다면 누가 봄이라 하겠나

저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어떻게 봄을 말할 수 있겠나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배한봉·시인, 1962-)

+ 자연을 닮아

내 마음은 달을 닮아

차오르기도 하고 기울기도 해

그리고 해를 닮아

떠오르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

내 마음은 파도를 닮아

밀려오기도 하고 밀려가기도 해

그리고 밭을 닮아

씨앗을 키워서 열매를 맺기도 하지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자연 예찬

꽃은 속삭이고 나무는 외친다

잎새 흔들림에도 삶이 묻어

바람이 언어를 실어다 준다

더러는 詩를 읊조리고

더러는 천일야화 이야기쟁이가 되고

더러는 가락이 되어 찬미 노래를 부른다

예지를 알고 깨닫기보다

타성에 길들어

세속 독기로 다듬잇돌 된 나

어느 산 속

깊숙한 바위틈에 기대어

흐르는 물에 몸의 먼지를 씻어내듯

내 안의 독소를 씻어내어

자연에 동화되어 볼거나!

(성지혜·시인, 1945-)

+ 자연이고 싶다 -자기·75

조금씩 개인이고 싶다

조금씩 자연이고 싶다

(이생진·시인, 1929-)

+ 자연의 아름다움

푸른 잎사귀를 옥토에 심었더니

삽시간에 거대한 잎사귀 모양의 나무로 자라나다.

엽맥이 줄기와 가지가 되어 죽죽 뻗었거니

짹짹짹 무성한 잎사귀들은 어느덧 새로 변신해 있다.

(박희진·시인, 1931-)

+ 자연의 미소

왜 이리 자연의 소리가 그립다.

그래서 자연 속에 파묻히러 간다.

꽃이 미소 짓고 반기는 꽃밭으로 간다.

말이 없는 돌의 진실함을 보러 간다.

자연 속에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다.

자연 앞에 우리는 꾸밀 필요가 없다.

바람의 속삭임을 귀로 들으며

풀의 다정함에 손을 잡는다.

어느 것 하나도 거짓이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다.

언제든지 있는 그대로

어디서든 주어진 그대로

창조하시고 만드신 그대로

생긴 내 모습 그대로

잔잔한 미소 그대로

늘 그 자리에서 말없이 있다.

그분의 뜻하시는 대로 살고

그분의 만드신 자연동산이

너무나도 깨끗한 아름다운 동산

찾아와 보니 눈물이 난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조동천·아동문학가, 서울 출생)

+ 자연의 법칙

때가 와서 꽃은 피고

때가 되면 꽃은 진다.

어쩔 수 없이 와서

어쩔 수 없이 가는

생.

불러내지 않아도 해는 뜨고

보내지 않아도 해가 지는 것처럼.

(정성수·시인, 1945-)

+ 자연의 시간표

자연 그대로 간다

창조주가

애초에 설계하고 만든 대로

순리에 따라 조용히 순응하며 간다

억지를 쓰지 않는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

탐하여 뒤돌아보지 않고

역리는 한사코 배척하며 간다

지은 바대로 그저 물 흐르듯이

아무 것도 해치지 않고

서두름도 지체함도 없이

자연의 시간표 그대로 묵묵히 간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자연은 신이다

자연은 신이고 신은 자연이다

인간이 신을 이길 수 없듯

자연을 이길 수도 없다

신을 모욕하는 인간에게

신이 노하듯

자연을 해하는 인간에게

자연도 노한다

신이 절대자라면,

자연은 과학을 초월하는

또 다른 신이다

신을 섬기는 것만큼

자연을 섬기는 인간은 없다

환경 파괴와 방종으로

거세어만 가는 자연의 진노

(안재동·시인, 1958-)

+ 자연율

오지에 가서 알았다.

저절로 싹트고 피는 풀꽃을

가랑잎 밟고 알았다.

미물처럼 사람도 바스락거림을

풀쐐기에 쏘이고 알았다.

은자처럼 숨어사는 생명을

풀벌레 울음 뚝 그치고 알았다.

천적처럼 무서운 사람을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서 알았다.

천년이 한결같은 바람 소리를

풀꽃 지는 걸 보고 알았다.

바람처럼 머물다 가는 사람을

사람 없는 곳에서 알았다.

달빛처럼 그리운 새소리를

(권달웅·시인, 1944-)

+ 자연의 은혜 – 서울의 소년소녀들에게

애들아 들어라

이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라.

지금은 12월 겨울이지만

이윽고 내일

봄이 온다.

자연은 커다란 문을 열고

자연의 은혜를

활짝 열어 줄 것이다.

산이나 들에

꽃이 만발하고

싱싱한 나무가

너희들을 맞이할 것이다.

자연의 은혜는

너무도 넓고 기쁘다.

시골에 가서

그 자연의 은혜를

맛보아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자연의 교훈 앞에

이른 봄

알몸으로 피어난 홍조 띤

벚님의 요염함도 일색이었습니다만

4월이 지나는 길목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연둣빛 싱그러움에 하얀 그리움을

가미한

고고함을 자랑하는 이팝꽃 줄선 숲길

아침 햇살 받으며

오늘을 향한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아름다운 세상에 먹칠하는 이

이 맛을 알까

계절에 순응하는 초목

어제의 화려함에

미련 두지 않고

새롭게 단장하는 저 푸른 잎새 앞에

털어내지 못하고

비우지 못한

내 부끄러움을 고백해 본 아침

상쾌한 바람 눈이 시리다

(하영순·시인)

+ 자연 닮기

산에 사는 이는

산을 닮았다

바다에 사는 이는

바다를 닮았다

산을 닮아 포근하고

바다를 닮아 넉넉하다

도시에 사는 이는

도시를 닮아 창백하다

그러므로

자연에 의지하여 산다는 건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공석진·시인)

+ 천연의 음악회

수풀 속 아름다운 새들의 소리

구슬 구르듯 계곡의 물소리

천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빨간 햇빛이 산너머 숨바꼭질하며

엷은 먹물 붓끝으로

어둠에 쌓여가는 세상을 그리네

달빛이 밝은 밤에

푸른 솔밭 끝없는 백사장에

살며시 밀려오는 작은 파도소리

은은히 들려오는 바다의

작사 작곡 모두 그분의 작품

그 누구도 부를 수 없는 노래

천연의 노랫소리

그분의 음악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이 모두가 그분이 창조한

아름다운 천연의 소리

(황순이·시인)

+ 열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세영·시인, 1942-)

+ 자연으로

떠나자.

향내음 맡으러

엉킨 것 풀고

신선 마시러 가자.

무거운 짐 부리고

순수 세계로 출발하는

예의 바른 손님이여!

그대를 부른다.

(강신갑·시인, 1958-)

+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동차는 잠시 세워두고

휴대전화는 던져두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자연의 숨결을 느껴보자

텔레비전은 꺼두고

컴퓨터는 밀쳐두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푸른 하늘에 그림 그리는

구름도 보고

나뭇잎 간질이는

바람도 보고

산새들의 멋진 춤도 보면서

자연을 즐겨보자

도시에 찌든

눈과 귀

몸과 마음

자연 속에 풍덩 빠뜨려 보자.

(이문조·시인)

+ 자연으로 돌아가라

훌훌 버릴 것은 욕심이요 집착이니 다 버리고

숲속 향기 속으로 빠져버린 우린 행복하다.

소유할수록 무겁고 힘겨운 것을…

버릴수록 가벼워지는 것을 알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나

자연으로 돌아가라

아픔과 고통이 줄고 자연의 어머니가

너희를 살릴 것이니

잘못을 하루에 고치려 말라

급히 쓰는 약은 다른 것을 망가트리며

세월에 약은 느리지만 확실하여 숲속의 향기와 같고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

행복의 안식을 느끼리라.

(정윤칠·시인)

+ 자연으로 가는 길섶

약혼식 날 끼워주었던

백년가약의 다이야 반지

아파트의 평수를 늘이느라

처분하고부터는

패물 없이 살아간다

그 잘난 반지 하나로

집을 비울 땐

화분 속에 집어넣거나

쌀뒤주에도 감추면서

항상 불안하였다

가스 밸브만 확인하고

대문을 나서면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대지에

입맞춤한다

과거의 굴레를 벗기 위해

각종 기념패도 없애고 나니

지붕에 비만 안 새고

양식만 떨어지지 않으면

더없는 행복이다

(김내식·시인, 충북 영주 출생)

+ 한 송이 꽃

이름에 속지 마라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이름은

항상 그 이름으로 있는 게 아니다

이름이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다

말이나 글에 얽매이지 마라

세상만사 이치를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대신 말이 전하려는

그 무엇에 아무쪼록 가 닿도록 하라

이렇다 저렇다 상대성을 말하지만

우리가 가 닿으려는

모순통일의 제자리에서 들여다보면

아름다움과 추함이 없고

대와 소가 따로 없고

빈부도 그렇다

산지사방 흩어져서

모두가 하나 되는 자연의 품안에서는

어떤 모양, 나름대로 되었건

한 송이 꽃

(문무겸·시인, 충남 당진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푸른밭 사랑

오세영 시 모음 5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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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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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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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오세영

흐르는 계곡 물에

귀기울이면

3월은

겨울옷을 빨래하는 여인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만발한 진달래 꽃숲에

귀기울이면

3월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 같다.

새순을 움 틔우는 대지에

귀기울이면

3월은

아가의 젖 빠는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아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연녹색 잎들이 손짓하는 달, 3월은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 외치던

만세 소리로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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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오세영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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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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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오세영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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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2

오세영

우리 모두

시월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습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의 가을.

시월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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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紹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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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녘에 서서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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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日記)

오세영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속에 평안이 있다.

아내의 싱싱한 머리카락 사이에

여름 햇빛들이 수런대고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액자 옆에는 시들어 버린 꽃, 또는

고개를 숙인 인형,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해안엔

어부가 호올로 그물을 깁는다.

찢어진 생활의 한 컷을 넘기면서

1971年 1月4日,

날씨, 흐리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찢었다.

얼어붙은 시간의 저쪽에서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생애의 슬픔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물거품을 밀어 올린다.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그 속의 평화,

그 속에 잠든 아내의 얼굴,

흰 파도에 부서지는

여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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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나절

오세영

눈 올 듯 말듯

햇빛 날듯 말듯

포장마차 집에서 막소주 한잔, 꽃가게 가서 실없는

농담, 시계방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돌아와서 눈물 찔끔,

그리고 다시 또 소주 한잔,

행여 동백꽃 실려올까,

불현듯 달려가 본 간이역 플랫폼.

남녘에서 오는 열차는 멎지 않고

오늘도 벌써 해 저무는데,

우체부 올 시간은 지났고

아직도 누군가

올 듯 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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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

오세영

온 천지

혹독하게 얼어붙은 겨울 들판에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냘픈 연기.

코로 따뜻한 숨을 내뿜는

그 살아 있음의

경건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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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오세영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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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1 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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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 그리워

오세영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듣 타 보는 완행 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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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병(病)

오세영

소녀는 질병을 앓았다.

기울어진 햇빛 속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사熱砂의 지평地平을 달리는

한 마리 사자獅子,

소녀는 사랑을 꿈꾸었다.

잠 못 드는 밤엔

세계의 끝에서 숨쉬는

에프엠을 듣고

병든 지구에 내리는 빗물처럼

울 줄도 알았다.

러브스토리를 읽으며

인생과 예술이 술잔 속에서

페시미즘에 젖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 사자獅子가 낮잠을 자는

아프리카 해안의 부서지는

푸른 파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다만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이 지상에 잠드는 것인가를

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사람들이 각기 등불을 켜 들 때도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으로,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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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오세영

도서관은 골 깊은 산이다.

등산하듯 층계를 올라

어두운 서가를 뒤진다.

이 골짜기는 역사 서가, 저 산봉우리는 철학서가,

저 능선은 과학 서가

고서는 이끼 낀 바위로 앉아 있고

사서는 칡넝쿨로 얽혀 있다.

이곳 저곳 걸으며

화두 하나 참구한다.

나는 누구일까

청노루, 백사슴 다 아는 산길에서

길을 잃고 망연히 헤매는데

앞에는 문득

깎아지른 듯 가로막고 서 있는 절벽.

그 까마득한 벼랑에 핀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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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오세영

나무가 쑥쑥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은

밝은 해를 닮고자 함이다.

그 향일성(向日性)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을 닮고자 함이다.

잎새마다 어리는

그 눈빛.

나무가 저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은

별들을 닮고자 함이다.

바람 불어 한 세상 흔들리는 날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견디는 그

따뜻한 가슴.

나무가 촉촉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것은

은핫물을 닮고자 함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흘려 준

한 방울의 물

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산으로 가는 길은 하늘 가는 길.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 마음. 하늘생각 가슴에 품고

먼 날을 가까이서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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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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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오세영

이제는 더 이상

느낌표도 물음표도 없다.

찍어야 할

마침표 하나.

다함 없는 진실의

아낌없이 바쳐 쓴 한 줄의 시가

드디어 마침표를 기다리듯

나무는 지금 까마득히 높은 존재의 벼랑에

서 있다.

최선을 다하고

고개 숙여 기다리는 자의 빈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빛과 향으로

이제는 神이 채워야 할 그의 공간,

생애를 바쳐 피워 올린

꽃과 잎을 버리고 나무는

마침내

하늘을 향해 선다.

여백을 둔 채

긴 문장의 마지막 단어에 찍는

피어리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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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음으로

오세영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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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오세영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그 안에 삶이 있다.

굳이 피하지 말라. 슬픔을 …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방을 비우고 걸레로

구석구석 닦는다.

내일은

우리들의 축일(祝日)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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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자

오세영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양(羊)떼보다 더 간절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행여 놓칠까,

긴 겨울, 대지에 귀를 열고 견디는 양.

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까닭에

결코 오는 봄을 의심치 않는다.

봄을 맞이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고운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먼데서 오는 그가 행여 추위에 떨까,

포근한 털옷으로 감싸 안은 양.

양은 항상 이웃과 더불어 사는 까닭에

남의 고통을 안다.

봄을 간직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순결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찬란한 봄빛이 행여 더럽혀질까,

정결한 흰옷으로 갈아입고 강가에 서는 양.

양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은 까닭에

한 모금의 사랑도 나누어 마실 줄 안다.

대지에 귀를 대면 아아,

지금은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

들린다, 어디선가 강물 풀리는 소리.

졸졸졸 어디선가 눈 녹는 소리.

온 누리 빛 밝은 그 날이 오면

온 누리 찬란한 새 봄이 오면

강물에 풀리는 얼음장처럼

우리도 하나되어 남북(南北)으로 흐르자.

우리도 양떼 되어 이제는

더불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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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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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그늘 아래서

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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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까

오세영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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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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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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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오세영

밤에

홀로 듣는 빗소리.

비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비가 된다.

잠든 흙 속에서

라일락이 깨어나듯

한 사내의 두 뺨이 비에 적실 때

비로소 눈뜨는 영혼.

외로운 등불

밝히는 밤.

소리 없이 몇 천 년을 흐르는 강물.

눈물은

뜨거운 가슴속에서만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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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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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오세영

쓰라리지만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물이 타서 굳은

숯덩이, 소금은

슬픔을 아는 까닭에

남의 상처를 아무릴 줄 안다.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안아 올리듯

작은 슬픔은

큰 아픔이 위로하는 것,

그러므로 비록 쓰라리지만

우리

상처는 비누로 씻지 말고

소금물로 씻자.

비누는

쾌락의 때를 벗기는 데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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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새날은

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부터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빛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

슬픔

오세영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

신념

오세영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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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짝

오세영

진흙 털고,

먼지 털고,

해진 신발을 깁는다.

풀꽃을 밟았을까.

이슬냄새가 난다.

벌레를 밟았을까

쇠똥냄새가 난다.

돌멩이에 챈 신발 한 짝,

애증과 영욕의

하루는 저물었다.

지팡이여, 지팡이여,

돌베개의 꿈은

차구나.

웃음 털고

울음 털고

피곤한 육신이 잠드는

길섶.

해진 신발 한 짝

꿈꾸는 길섶.

☆★☆★☆★☆★☆★☆★☆★☆★☆★☆★☆★☆★

역두에서

오세영

우리는 단지

잠깐 쉬고 있을 뿐이다.

저무는 플랫폼

길은 영원으로 열려 있고

영원에 종점이란 없다.

쉰다는 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

달리는 순간엔 모두가

하나다.

떠난 자를 미워마라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긴 터널과 외로운 가교

복사꽃 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폭풍우 치는 밤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은

승차와 하차로 이루어지는

평행선.

그 끝없는 레일을 달리며

우리의 이별은

만남을

다시 꿈꾼다.

☆★☆★☆★☆★☆★☆★☆★☆★☆★☆★☆★☆★

연기

오세영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경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어른을 몰라보는 놈!

– 아른아른

떠오르지 않는 생각,

– 어질어질

분명치 않은 물상,

– 비틀비틀

허공을 짚은 두 발,

– 흔들흔들

무너져 내리는 중심,

바위나, 성벽이나, 궁전이나

이 지상을 연모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확고하지만

하늘로 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안개, 아지랑이 혹은 술기운이 거나한

개망나니.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네 발로 땅을 짚는 자들은

대지의 아들,

그들은 술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두 발로 걷는 인간은

두 손으로 항상 하늘을 움켜

쥐고자 한다.

술잔을 들어라.

술은 하늘로 흐르는 물,

불타는 물의

연기.

하늘의 논리는 이룸이 아니라

깨짐에 있는 것이다.

☆★☆★☆★☆★☆★☆★☆★☆★☆★☆★☆★☆★

연꽃

오세영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달아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 놓는지를

☆★☆★☆★☆★☆★☆★☆★☆★☆★☆★☆★☆★

열매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 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

오월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은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이별의 말

오세영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걱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

이별이란

오세영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 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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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오세영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떼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 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각 제 놓일 자리에 놓여있구나. 그러므로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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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아름답다

오세영

아름답구나

호수 루이스

에머랄드 색깔이라 하지만

어찌 보면 고려의 하늘색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육사의 청포도색 같기도 한 너의

눈빛,

살포시 치켜뜬 자작나무 속눈썹 사이로

꿈꾸듯 흰 구름이 어리는구나.

태고의 만년설로 면사포를 해 두른 너 로키는

지구의 정결한 처녀,

내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거니

그 청옥한 눈매가

그 무구한 눈짓이

바로 병색임을 내 오늘 알았노라.

모든 독을 지닌 것은 아름다운 것,

모든 침묵하는 것은 신비로운 것,

산성비에 오염된 호수에서는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

결핵을 앓는 소녀가 아름다워지듯

아마존에서, 킬리만자로에서

폐를 앓는 지구는 더 아름답다.

박명한 미인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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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양식

오세영

너희들의 비상은

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

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 밭에 뒹구는

낱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

모순의 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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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오세영

입술은 타고

몸은 떨리고

땀에 혼곤히 젖은 이마,

기다림도 지치면

병이 되는가,

몸살 앓는 봄밤은 길기만 하다.

기진타가 문득 정신이 들면

먼 산 계곡의 눈 녹는 소리,

스무 살 처녀는 귀가 여린데

어지러워라

눈부신 이 아침의 봄멀미.

밤새 地熱에 들뜬 山은

지천으로

열꽃을 피우고 있다.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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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오세영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暴風,

질그릇에 담긴 空間,

그 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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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

오세영

시행의 마지막 구절을 막 끝내자

잉크가 다한 볼펜

기진맥진 원고지의 여백에

펄썩 쓰러져 버린다.

편히 쉬어라.

피어리어드는 내 눈물로 찍겠다.

돌아보면 너무도 혹사당한 일생.

경지는 다만 소만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참 많은 밭을 갈았구나.

땀과 눈물과

심장에 고인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아낌없이 쏟아내고 너는 지금

후회 없이 이승을 떠나는구나

내 시가 너를 따를 수만 있다면…

잘 갈아 씨 뿌린 밭 두렁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진

착한 소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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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나

오세영

나는 참 수많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널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을 내주었습니다

헤엄쳐 건너면서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뗏목으로 건너면서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배로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동전조차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들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건네주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리면서 슬픔을 주었습니다

비탈에 오르면서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서는 마침내

당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왔기에

내겐 이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불어

당신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으므로

지금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텅 빈 나를 더 반기실 줄

아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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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오세영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파도가 밀려온다.

울고 웃고,

웃고 울고

한나절, 갯가에

빈 배 지키며

동,

서,

남,

북,

소금밭 헤매는 갈매기같이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萬里長書로 밀리는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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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오세영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 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봄날

진달래, 산벚꽃의 소매를 뿌리치고

끝 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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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스커트의 지퍼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 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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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시

오세영

시가 되지 않은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너를 버리는

배신의 아름다움,

인생이란 한 줄의 시,

버리는 것이 많아야 오히려 충만해지고

완전한 슬픔에 이르기 위해선 그 슬픔

괄호 안에 묶어야 한다.

행간을 건너뛰는

두 개의 콤마,

사랑과 이별의 줄넘기, 그러나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이별의 길목에서 돌아온 나는

원고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한 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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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꽃

오세영

꽃밭도 텃밭도 아니다.

울가에 피는 해바라기,

모든 꽃들이 울안의 꽃밭을 연모할 때도

해바라기는

저 홀로 울 밖을 넘겨다본다.

푸른 하늘이 아니다.

빛나는 태양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산과 들

그리고 지상의 인간,

신(神)은 머리 위에 있지만

인간은 항상 그 앞에 서 있다.

모든 꽃들이 다투어 위로 위로 꽃잎을

피워 올릴 때

앞을 향하여 꽃눈을 틔우는

해바라기,

흔히 꽃 같은 처녀라 하지만

해바라기는

인간이 피워 올리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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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오세영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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