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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무테 지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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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가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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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다시 독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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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가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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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 양질의 규격화로 기계화를 긍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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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무테지우스 – 건축편집자 editing x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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Ç츣¸¸ ¹«Å×Áö¿ì½º(Hermann Muthesius 186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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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가

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1861~1927)

Adam Gottlieb Hermann Muthesius (20 April 1861 – 29 October 1927), known as Hermann Muthesius, was a German architect, author designer and diplomat, perhaps best known for promoting many of the ideas of the English Arts and Crafts movement within Germany and for his subsequent influence on early pioneers of German architectural modernism such as the Bauhaus.

풀네임 아담 고티브 헤르만 무테지우스(Adam Gottlieb Hermann Muthesius)은 독일 건축가,이론가,외교관,디자이너 영국의 미술공예운동( Arts and Crafts)으로 부터 영향 받아 독일의 디자인을 바우하우스(Bauhaus), 모더니즘까지 이끌어 가는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Muthesius was born in 1861 in the village of Gross Neuhausen near Erfurt and received early training from his father, who was a builder. After a period of military service and two years studying philosophy and art history at Frederick William University in Berlin, he enrolled to study architecture at Charlottenburg Technical College in 1883, while also working in the office of Reichstag architect Paul Wallot.

그는 1861 년 에르푸르트(Erfurt) 그로스 뉴하우젠(Gross Neuhausen)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 건축가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일찍이 배워왔다. 병역 기간 2 년 프레더릭 윌리엄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 후에, 또한 독일 의회 건축가 파울 발로트(Paul Wallot)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샤를로텐부르크 기술 대학(Charlottenburg Technical College)에서 1883 년에 건축을 공부하게된다..

Following completion of his studies Muthesius spent three years in Tokyo as an employee of a German construction firm, where he saw his first building completed—a German Evangelical church—and travelled extensively across Asia. He returned to Germany in 1891 where he spent periods working as a public architect and as the editor of a construction journal.

학업을 마친후 3 년 도쿄에서 독일 건축 회사-그가 처음 건물이 있는 독일어 복음 교회-의 직원으로 보냈다.또 광범위하게 아시아 전역 여행. 그는 공공 건축가로서 근무 기간을 보냈다가 건설 저널의 편집자로 독일로 1891년, 돌라오게 된다.

런던에서

In 1896 Muthesius was offered a position as cultural attaché at the German Embassy in London, from where he was to study report on the ways of the British. He focused the next six years investigating and residential architecture and domestic lifestyle and design, ending with a three volume report published as Das englische Haus. Although his subjects were wide-ranging, he was particularly interested in the philosophy and practices of the English Arts and Crafts movement, whose emphasis on function, modesty, understatement, individuality and honesty to materials he saw as alternatives to the ostentatious historicism and obsession with ornament in German nineteenth century architecture, and whose efforts to bring a sense of craftsmanship to industrial design he saw as a significant national economic benefit..

1896에 그는 영국의 방식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며 독일 대사관 런던에서 문화의 수행원으로 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6 년 주거 건축물 및 국내 라이프 스타일과 디자인에 중점을두고, 잉글리쉬 하우스(Das englische Haus)에 대해 3 개의 보고서를 발행했다. 그의 주제는 폭넓은었고, 그는 특히 철학과 영국미술공예운동 이해,소재,와 독일의 19 세기 건축 장식에 주목했고. 그리고 그의 노력은 산업 디자인에 그는 상당한 국가의 경제 이익과 풍파를 일으켰다.

다시 독일에서

Muthesius returned to Germany in 1904 and established himself as an architect in private practice, while retaining a role as an official advisor to the Government of Prussia. Over the next two decades he designed a series of houses throughout Germany, drawing upon and cementing the principles and practices expounded in his famous book.

무테지우스는 독일로 1904 년에 돌아오고 개인 건축가로서 활동한다. 프로이센의 정부에 공식적인 고문으로 역할을 유지하면서. 20년동안 그는 독일 전역 주택 일련의 설계, 그리고 원칙 및 관행에 따라 그림,그리고 책을 출간한다.

By this time Muthesius was widely recognised as an admirer of English culture, but this also laid him open to accusations of divided loyalties. In 1907 he was accused by the Fachverband für die wirtschaftlichen Interessen des Kunstgewerbes (“Association for the Economic Interests of the Arts and Crafts”) of criticising the quality of German industrial products in a lecture in Berlin. The resulting controversy saw several influential designers and industrialists withdraw from the association and set up the Deutscher Werkbund, explicitly aimed at bringing the highest standards of design to mass-produced output.

이떄 까지는 영국의 스타일에 있었지만, 1907 년 그는 베를린에서 강연에서 독일어 산업 제품의 품질을 비판,즉물성(卽物性)과 합리성을 앞으로 올 디자인계의 핵심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의 ‘질(質)’의 향상이 국가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확신에서 그 결과 논쟁은 여러 영향력있는 디자이너와 함께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을 결성하게된다.

The Deutscher Werkbund was a major influence on the early careers of Le Corbusier, Walter Gropius and Mies van der Rohe, but although Muthesius was in many ways its spiritual father and served as its chairman from 1910 until 1916, he had little sympathy with the emerging early-modernism, considering both Art Nouveau and the later designs of the Bauhaus to be just as much superficial styles as those of the nineteenth century.

그는 독일공작연맹의 르 꼬르뷔제, 발터 그로피우스와 앙리 반 데르 로에의 초기 경력에 큰 영향을 그고 그 의장으로 1910부터 1916 년까지 여러 방면에서 주축으 로활동했다.초창기 모더니즘태동에에 약간의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포스터

대표작 : Cramer house, Berlin-Zehlendorf, (1913)

한편으로는 1914년의 쾰른 총회에서의 논쟁에서 개성을 존중하는 앙리 반 벨데와 날카롭게 대립하여 디자인의 ‘통일과 규격화’를 중시했으면 동일공작연맹은 내분에 빠진다.

Muthesius continued designing houses and writing about domestic architecture until 1927, when he died in a road accident after a site visit in Berlin.

1927년까지 지속적으로 건축활동하다가 베를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 양질의 규격화로 기계화를 긍정하라

[ 헤르만 무테지우스

Hermann Muthesius 1861-1927 ]

” 양질의 규격화로 기계화를 긍정해라. ”

독일의 건축가이자 건축행정가이신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양질의 규격화된 형태로서의 대량생산을 추구했으며 산업디자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영국의 합리적인 주택 건축이나 명쾌한 공예품 생산에 감동을 받은 그는 강연과 논문을 통해 독일 공예계에 미술의 실생활화 및 기계생산품의 미적 규격화등을 주장한다. 특히 생활 속에 미술을 도입하자는 사상은 영국의 시인이며 공예 미술가이자 건축가이신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기능적인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한 조형 세계를 주장한다. 예술 – 공업 – 수공예의 협력에 의한 제품 향상을 목적으로 디자인 진흥기관 또한 결성했다.

독일공작연맹, 즉 베르크분트는 근대사회에서 기계화의 의의를 적극 인정하며 규격화된 기계생산품의 질적 향상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 이제까지의 신 공예운동보다 한 걸음 앞섰다고 할 수 있다.

[ 헤르만 무테지우스 건축물 ]

Haus Freudenberg Schloss Wendgräben Alte Simson-Villa Baudenkmal

예술적 창조성은 개인 영역인가, 표준화 가능한가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6>

그동안 모아놓은 책이 꽤 많다. 관심사가 중구난방인 데다 꽂히는 주제가 생길 때마다 관련 책부터 챙겨 놓는 습관 때문이다. 집안 책장에는 공간이 없어진 지 오래다. 몇 달 전부터 개인 라이브러리 겸 화실을 짓고 있다. 배가 하루 3번 들어오는 남쪽 끝 섬 바닷가다. 다 무너져 내린 미역창고를 구입해 창조적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이름도 거창하게 ‘미력창고(美力創考)’라 붙이고 신축에 가까운 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규격화’ 선언

“영국·프랑스 앞서려면 규격화 필수”

공작연맹 무테지우스, 10원칙 발표 ‘개성화’ 반박

“예술가는 규격 강요 따르지 않을 것”

반 데 빌데, 창조성은 개인 영역 강조

아주 환장한다. 공사 인부들이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섬이라 들어오겠다는 인부도 없고, 삼고초려해서 ‘모셔온’ 인부들은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배 타고 바로 떠난다. 돈은 돈대로 들고, 일은 도무지 진척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라도 스스로 시도해 보겠지만 전혀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이었다면 사정이 많이 다르다.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은 ‘표준화’

독일에는 ‘바우하우스’라는 건설·토목 관련 재료와 장비를 파는 건축 체인점이 있다. 이 연재의 주제인 ‘바우하우스’가 아니다. 이름만 동일한 건축체인점이다(‘OBI’라는 비슷한 유형의 체인점도 있다). 정말 없는 것이 없다. 여기만 열심히 들락거리면 특별한 손재주가 없어도 집 하나는 스스로 지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동 드라이버로 나사 돌릴 줄만 알면 표준화된 재료들을 사다가 붙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100년이 넘은 건물만 아니라면 각 건물 창문의 사이즈가 크기별로 표준화돼 있다. 건물 창문틀의 사이즈를 알면 거기에 맞는 창문을 사와 전동 드라이버로 돌리면 된다. 창의 커튼도 사이즈가 맞는 것을 구입해 걸기만 하면 된다. 커튼 업자가 집을 방문해 치수를 재가서 ‘맞춘다’는 것은 오버다. 이케아 가구 맞추듯 집도 지을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 건축체인점 ‘바우하우스’는 독일 ‘바우하우스’ 정신을 아주 잘 구현하고 있다).

독일인들에게 ‘DIY(Do It Yourself)’ 문화가 발달한 이유도 바로 이런 ‘짓는다(Bau)’는 행위와 관련된 철저한 ‘표준화’의 전통 덕분이다.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 또한 이 ‘표준화’의 전통에서 나온다.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생산 현장에서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정확하게 지시해야 정확한 퍼포먼스가 나온다. “무슨 말인지 알지?”를 반복하는 상사처럼 짜증나는 경우는 없다. 잘못되어도 모든 책임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부하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의미의 표준화’가 소통의 전제다. 그래서 리더의 언어는 명확해야 한다. 애매모호한 선문답은 리더의 언어가 아니다.

오늘날 ‘매우 독일적’이라 여겨지는 ‘표준화’의 전통은 1914년 쾰른에서 열린 독일공작연맹 전시회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표준화(Typisierung)’ 논쟁이다. 발단은 무테지우스의 일방적 선언이었다.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처진 독일이 공업생산에서 짧은 기간 내 비약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독일공작연맹이 추구해야 할 ‘10개의 원칙’을 발표했다. 핵심은 ‘규격화’였다. “건축은 물론 이와 연관된 공작연맹의 모든 활동은 ‘규격화’를 추구해야 한다. 규격화를 통해서만 일반적이고 확실한 취향에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다.”

낙후된 산업화는 시민계층의 ‘교양교육’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무테지우스의 생각이었다. 특히 주거와 생활용품의 규격화를 통해 취향 교육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영국 파견 외교관 시절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예술과 공예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헨리 콜(Henry Cole·1808~1882)이 주도했던 예술교육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프로이센 정부에 보고했다. 콜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총재로 있던 ‘왕립예술협회(The Royal Society of Arts)’의 실무를 책임졌던 사람이다. 1851년 영국 런던만국박람회 준비 조직을 이끌기도 했다.

런던만국박람회는 산업화의 선두국가인 영국의 위상을 한껏 자랑한 행사였다. 특히 정원 설계사이며 유리온실 건설전문가였던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1801~1865)이 설계한 ‘수정궁(Crystal Palace)’은 불과 17주 만에 완성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영국 연간 생산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유리와 이 유리를 지탱하는 수천 개의 철기둥으로만 지어진 수정궁은 ‘획일성’이라는 산업사회 건축을 상징적으로 예고하는 건물이었다. ‘획일성’이 어떻게 미학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수십 년이 지난 1914년 독일공작연맹의 쾰른 전시회에서 무테지우스의 도발적 선언으로 본격 시작된 것이다.

런던박람회가 끝난 후, 영국 공업생산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됐다. 1852년 콜은 만국박람회에서 얻은 이익금으로 영국 최초의 공예박물관인 ‘사우스켄싱턴 박물관’(오늘날의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과 ‘디자인 학교(School of Design)’를 설립했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이르면 연간 24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예술·건축·공예 관련 학교에서 체계적인 기술을 교육받고 배출됐다.

1900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프로이센 정부는 사우스켄싱턴 박물관의 운영방식과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무테지우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독일 예술 및 공예 교육 프로그램의 개혁을 시작했다. 1903년 페터 베렌스는 ‘뒤셀도르프 예술공예학교’의 교장으로, 표현주의 건축가 한스 푈치히(Hans Poelzig·1869~1936)는 ‘왕립 브레슬라우 예술공예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7년에는 독일 건축의 또 다른 스타 브루노 파울(Bruno Paul·1874~1968)이 ‘베를린 예술공예뮤지엄 부설 예술학교’의 교장이 됐다. 독일 건축·공예 분야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이들은 무테지우스의 주도하에 1907년 창립된 독일공작연맹의 핵심 멤버가 된다.

무테지우스의 사상은 ‘즉물성(Sachlichkeit)’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물질 스스로 규정하는 존재 방식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정이나 편견으로 결정하지 말고, 물질이 속해 있는 객관적 맥락에 따라 그 물질의 기능과 형태를 평가하자는 주장이다. 무테지우스의 이 같은 주장은 1920년대에 ‘신즉물주의(Neue Sachlicheit)’라는 이름의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부활한다. 20세기 초, 뿌리 없는 잡종적 고전주의에 경도된 프로이센 건축과 예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앞다퉈 독일공작연맹 설립에 동참했다. 그렇다고 무테지우스의 ‘즉물성’ 주장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무테지우스는 너무 성급했고, 너무 관료적이었다. 관료 특유의 권위적 소통방식 탓에 그는 불필요하게 많은 적을 만들었다. 1914년 일방적으로 배포한 그의 ‘표준화 선언’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누구보다 가장 강력하게 반기를 든 이는 헨리 반 데 벨데였다. 그로피우스의 가까운 동료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1880~1938)와 유겐트슈틸 건축가 아우구스트 엔델(August Endell·1871~1925)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헨리 반 데 벨데 편에 섰다. 젊은 그로피우스도 반 무테지우스 전선에 섰다(그러나 후에 ‘규격화’를 실천적으로 추구했다).

예술 및 공예 교육프로그램 개혁

무테지우스에 반대하는 반 데 벨데의 주장은 ‘개성화’로 요약할 수 있다. 반 데 벨데는 무테지우스의 10개 항에 상응하는 10개 항의 반대주장을 배포한다. 그중 첫 번째 항이다.

“공작연맹 속에 여전히 예술가가 존재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이 공작연맹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그들은 기준의 설정이나 규격화에 대하여 항의할 것이다.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감정이 격한 개인주의자이며 동시에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창조자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일정한 형태나 규격을 강요하는 원리에는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약화시키는 것을 모두 믿지 않는다. 또한 원래의 목표를 향해 생각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규격, 혹은 전화위복이라는 말로서 외관 밖에 볼 수 없는 일반적 형식으로 유도해 가는 규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10개 항에 달하는 무테지우스의 규격화 주장을 구구절절 반대하는 반 데 벨데의 주장에는 ‘개인주의적 예술관’이 숨겨져 있다. 산업화 시대에서는 표준화·규격화에 기초해야만 집단적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무테지우스의 주장이라면, 반 데 벨데에게 있어서 창조성이란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이며 인위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성이 개인의 영역인가, 아니면 집단의 영역에서도 존재 가능한가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은 ‘예술이 과연 교육 가능한가?’라는 바우하우스의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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