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40 율법 과 복음 The 195 Detailed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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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율법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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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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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시각[편집]

개혁주의[편집]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차이점[편집]

감리교회의 관점[편집]

복음과 율법[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율법과 복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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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바른 이해 – 바른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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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바른 이해 - 바른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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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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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과 복음은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왼손, 오른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탄이 창조물가운데 완전한 혼돈을 일으키려는 것을 저지 … 복음은 가장 남용되고 오용된 단어중 하나입니다. 복음을 규명하고 정의하는데 있어 종교개혁의 원리는 복음을 율법으로부터 구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신학에서 그는 복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참 아름다운 “삶”은 늘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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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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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율법과 복음 –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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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율법과 복음 –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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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와 신약과 구약의 차이 < 전문가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본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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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와 신약과 구약의 차이 < 전문가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본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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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관계 > 성경이야기 | 은혜와평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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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야기

성경이야기

율법과 복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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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 김형익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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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율법과 복음 – 김형익 : 두란노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변함없이 조건 없이 받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가 우리의 영혼을 … 속박에서 자유로 가는 여정율법과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 추천박영선 남포교회 원로 백금산 예수가족교회 담임 이정규 시광교회 담임 서자선 광현교회 집사 하용조,팀켈러,데이비드플랫,카일아이들먼,닉부이치치,폴손,스카이제서니,김양재,이동원,조정민,이재훈,timothy keller,david platt,paul sohn,Skye Jethani,Nick Vujicic,Kyle Idl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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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이럴 땐 이책#창세기 #태초 #시작 #처음

율법과 복음
김형익 지음

율법과 복음 - 김형익 : 두란노
율법과 복음 – 김형익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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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은 개신교에서는 율법과 복음 즉 하나님의 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이며, 루터교와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적 사상이다. 다른 기독교 교파들도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이 문제는 보통 루터교와 개혁교회 전통에서처럼 뜨겁게 논의되거나 엄격하게 규정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율법과 은혜’, ‘죄와 은혜’, ‘성령과 서간’, ‘자선·봉사의 사역(διακονíα, 디아코니아)’, ‘성령/권능의 사역’ 등의 제목 아래 이 문제가 논의되기도 한다.[1]

루터의 시각 [ 편집 ]

율법과 복음의 구별에 대한 구체적인 공식은 마르틴 루터(1483–1546)에 의해 기독교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복음주의 루터교 성서 주해의 토대로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1) 제4조에 규정되어 있다: “모든 성경은 이러한 것들로 나누어져야 한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가지 주요 주제 어떤 곳에서는 율법을 제시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제시하는데, 즉 구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를 위하여 죄의 경감, 명분, 생명이 영원할 것을 약속하거나,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나신 이후, 죄의 사면을 약속한다. 죄와 명분과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2] 일치 신조도 마찬가지로 5조에서 이러한 구별을 확인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법과 복음의 구별은 매우 성실하게 교회에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3]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이유로, 누구든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이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은, 그가 가장 앞에 서서 그를 성경의 박사라고 부른다.”[4] 루터 정통 시대(1580–1713) 전반에 걸쳐, 루터 신학자들에게는 이 해석학적 규율이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같은 구분은 패트릭 해밀턴의 Patrick`s Places(1528년) 첫 논문에서였다.[5]

루터교회의 초대(그리고 세 번째) 총회장이었던 칼 페르디난트 빌헬름 발터(1811–1887)는 1884–85년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열린 저녁 강연에서 이 신학적 기술에 대한 관심과 관심을 새롭게 했다.[6]

개혁주의 [ 편집 ]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표준적인 공식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루터교 신학이라고 특징지었다.[7]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논평에서 율법과 복음을 “중요하고 일반적인 성경 나눔”으로 극명하게 구분했다.[8] 루이스 벌코프는 율법과 복음을 “주님의 말씀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두 부분”이라고 불렀다.[9]

1536년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개혁가 장 칼뱅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구분했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능과 사용을 간단히 논해보자. 지금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신의 의를 보여준다… , 그것은 경고하고, 알려주고, 판결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한다.”(2.7.6). 그것은 “법상의 끔찍한 위협을 듣고 강요받지 않는 한, 어떤 것이 옳고 옳은 것인지에 대해 어떠한 주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특정 인간을 구속하는 처벌의 두려움”(2.7.10) 기능을 한다. “신자들을 훈계하고 잘 행하도록 촉구한다.”(2.7.12-13) 이 주장은 첫째와 둘째가 전환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치 신조와 동일하다.

후기 개혁주의에서는 순서가 루터교도와 같다. 세 가지 용도를 다음과 같이 부른다.

usus politicus sive civilis :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는 죄에 대한 구속이며 구원의 과업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신앙인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일반적인 계시나 공통의 은혜의 일부분이다. usus elenchticus sive paedagogicus : 죄와 맞서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중요한 교육적 방법.

usus didacticus sive normativus : 오직 신자들을 위한 교도의 용어로 의의의 길을 가르침[10] usus didacticus sive normativus : 오직 신자들을 위한 교도의 용어로 의의의 길을 가르침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율법의 세번째 용도를 설명하면서 십계명에 담긴 도덕법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이 있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데 나타난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봉사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고 가르친다. 장 칼뱅은 이와같은 율법의 세번째 용도를 주된 용도로 여겼다.[11]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차이점 [ 편집 ]

스콜라적 루터교와 개혁파 신학자들은 율법의 제3의 사용이 신자들을 위한 기능을 하는 방식에서 주로 달랐다. 개혁파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선행을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세 번째 용법(tertius usus legis)을 강조했다. 일부 루터교인들은 여기에서 행위의 의로움의 위험을 보았고, 궁극적인 규범이 되기보다는 제3의 용도가 신자를 항상 제2의 용도로,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이 루터에게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필립 멜란히톤에게서 나왔다고 제안한다. 일부 루터교인들은 그 견해를 거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율법의 “제3의 사용”의 타당성에 대해 완전히 논쟁을 벌였다. 예를 들어, Paul Althaus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날 하나님의 명령은 각 개인에게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항상 새롭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나(및 각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 현재 순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지식의 살아 있고 영적인 특성은 규칙과 규정에 의해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신학자들은 제3의 사용이 일종의 율법주의로 이어지거나 조장한다고 믿고 있으며 아마도 이것이 오직 믿음에 대한 암시적 부정으로 보았다. 반대로, 개혁파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일부 현대 루터교도들의 이러한 이중 사용 계획을 일종의 반율법주의로 이끄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루터에게는 율법의 교육학적 사용이 일차적이었고 칼빈에게는 이 세 번째 또는 교훈적 사용이 주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루터교와 개혁파 전통 모두 율법의 삼중적 개념화를 유지한다.

감리교회의 관점 [ 편집 ]

존 웨슬리는 감리교 설교자들에게 율법과 복음을 강조하라고 충고했다[12] [12] 의심할 여지 없이 둘 다 그들의 자리에서 설교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둘 다 한꺼번에 설교하거나 둘 다 설교되어야 한다. 모든 조건적 약속들은 이것의 예들이다. 그것들은 율법과 복음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모델에 따르면, 나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복음의 정신으로 접목되고, 강화되고, 활기를 띠는 법칙을 설교할 것을 지속적으로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러한 설명을 알리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집행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모든 설교에서 (그리고 더 명시적으로 좋을수록 좋음)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싯돌과 같은 위대한 명령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선언하는 동안, 그리스도는 모든 것, 우리의 지혜, 의, 거룩함, 구원, 모든 생명, 사랑,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이처럼 영혼을 계몽하고 튼튼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가르친다는 것, 믿는 영혼의 길잡이, ‘음식, 약’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방법론은 모세에게 주어진 십계명인 의례법과 도덕법을 구별한다.[13] 감리교에서 도덕법은 “우주의 근본적 존재론적 원리”이며 “영원히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깃들어 있다.”[13] 루터교회의 가르침과 대조적으로 감리교회는 율법과 복음을 심오한 의미에서 함께 가져온다. 은총과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삶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좋은 소식을 발견한다.”[13]라고 감리교 전통의 아버지 존 웨슬리가 가르쳤다.

[13]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 복음의 확립을 위해 율법이 사라질 필요는 없다. 사실 그들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을 대체하지 않지만, 그들은 완전히 잘 일치한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고찰한 바로 그 같은 말들은 율법과 복음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것들이 계명으로 여겨진다면, 그것들은 율법의 일부분이다: 약속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계명으로 생각될 때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율법의 한 갈래로, 약속으로 간주될 때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즉 약속으로 제안된 율법의 명령이다. 따라서 영혼의 빈곤, 마음의 순결,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결합되어 있는 그 어떤 것이든 복음적인 빛으로 볼 때, 그렇게 많은 위대하고 귀중한 약속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가장 가까운 관계가 있다. 한편으로 법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계속해서 우리를 더욱 정확하게 법을 이행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아직 성서에 있는 모든 명령이 단지 가려진 약속일 뿐이라는 것을 더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Sermon 25, “Sermon on the Mount, V,” II, 2, 3)

복음과 율법 [ 편집 ]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율법에서 시작하여 복음으로 나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은총과 사랑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먼저 강조하고 율법을 말한다. 이것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가들이 보는 순서를 완전히 변경시킨 신학적 활동이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율법과 복음의 바른 이해

율법과 복음을 성경 안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율법을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서 칭의를 부여해주신 동기와 더불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부패, 타락한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통한 의의 전가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에 현시대에도 율법주의자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논하고 율법과 복음의 전반적인 의도와 취지를 살펴봄으로 양자간을 구별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이지만 이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율법의 기능

성경의 가르침은 율법의 기능을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롬 3:20).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죄의 구성요건 적법성 책임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인 병을 얻어 고침을 받으려면 병원에 가서 진료와 치료 그리고 약의 처방을 통하여 병든 몸을 치료받을 수 있는 듯이 율법의 기능이란 어렵지 않게 경하게 해석을 한다면 진료의 단계 그것도 아주 명확히 우리가 어떠한 죄 가운데 있고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고정밀도 X-Ray 와 MRI 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하지만 병자의 치료는 진료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이 아무리 고밀도, 고성능의 첨단기구라 하여도 이것의 기능은 진료와 진단이라는 기능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소위 환자의 기대인 병적 치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환자의 병명과 병세가 어떠한가를 가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위와 같은 내용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율법의 기능이란 인간의 죄의 인식과 죄인임을 깨달아 알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함이니라”(갈 3:24) 하였다.

또한 이에 대하여 서철원 박사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 저서에서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의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롬 3:19-31; 갈 2:16-21)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하는 것 외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하고 거룩해도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여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이다 라고 율법을 주신 목적을 설명하면서,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복음의 정의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복음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아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롬 1:16),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롬 3:21). 복음이란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하심을 확인하고 실현했기에 ‘그림자’(umbra)에 ‘몸’(corpus)을 부여했다(기독교강요, 2.9.4)라는 표현을 들고 있다. 그러니까 복음은 이전에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백성들이 들었다(골 1:4-5).

율법에는 복음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기독교강요, 2.10.3). 율법에 계시된 언약의 약속이 복음에 의해서 계시되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요 복음의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히 7:19; 시 110:4; 히 7:11, 19; 9:9; 10:1).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율법을 통한 언약의 약속을 실현하며, 확인하며, 인준한다(기독교강요, 2.11.4). 그런고로 복음은 율법의 진료와 관계성을 띠고 있는 치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5:17).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폐함’의 관계의 지속과 조성이 아니라 ‘완전케 함’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더욱 넓게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대립적 차원에서의 ‘폐지’의 관계가 아니라 ‘완성’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통한 율법의 완성과 성취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15조는 “인간의 본성은 지극히 타락하여 연약하고 불완전하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할 수 없다(신 5:29; 롬 10:3). 그러므로 율법의 목표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의와 속죄 안에서 그를 온전히 붙잡는 것이 우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삶이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에 순종하는 행위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복종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지구상의 그 누구도 그 율법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할 때는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솔직한 심정으로 무익한 종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눅 17:10)” 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율법의 목표요 완성이셨다. 소위 하나님의 율법은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점에 둔 것이지 인간들이 완벽하게 준수하도록 요구한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를 준수하는 공로는 전혀 불가하여서 그것을 자랑하는 행위는 아주 가증스러운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우리 인간이 타락 가운데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고 이루고 사는 것 같아 목소리를 높여 우리의 행위와 의를 드러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늘 정죄 아래 있으며 고통과 저주 가운데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지고 죽음으로(갈 3:13)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 죽음과 부활로 의의 전가를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율법과 복음 안에서의 바른 믿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성경의 해석과 신학의 오류를 표명하거나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새 언약 가운데 의롭게 중생한 백성으로 율법의 마침표이시며 복음의 진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깨달아 상기하며 기쁨과 감사에 삶을 살아가는 바른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일 목사는 중앙대학교 법학 수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B.A) 호서신학대학원 & 개신원(M.Div) 총회신학연구원 (Th.M) 에서 공부를 하였고 경북 영주 현대중앙교회(예장 백석 ) (1993~현재)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성경 중심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여 바른신학, 바른믿음, 바른생활의 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정진하고 있고, 늦은감은 있지만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해설집 공동 집필 및 기타 칼빈주의 정론에 관한 서적 집필에도 신학자들과 동역하며 연구하는 사역에도 주력하고자 뜻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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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 2: 기능들 율법은 복음의 세 기능들에 의하여 응답되는 세 가지 기능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적 설교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들이 생에 있어서의 그들의 참된 삶의 상황을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때로 율법을 설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삶을 위한 성령의 변형시키는 능력에 개방되어질 것입니다.

1. 율법의 기능들

(1) 거울

율법의 첫 번째 그리고 주된 기능은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고 또 원하는 것이 되는데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미 양심에 의해, 경험에 의해 고소당한 상태에 있으며, 이것이 인생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인 종교생활에 있어서 쉽사리 피상적이고 자기 만족적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몇가지 삶의 실천, 선행을 통해 우리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참된 메시지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롬 3:19)”이 됩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역과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대로 보며 복음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한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연석

연석이란 자동차, 자전거, 등이 보도로 들어오거나 사람들을 상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로를 따라서 놓여진 방어막을 말합니다. 율법은 사회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무모하게 상해를 가하는 일이 없게 막습니다.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할 수는 없지만,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모든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으며, 구약의 율법역시 이스라엘 사회의 법입니다. 성, 재산, 결혼, 정부, 정의 같은 모든 것을 통제하여 사회적 안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갈 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율법, 정부, 양심, ‘후견인’이 되는 종교를 주셨습니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는 동기를 주신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안내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건전한 행위에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분별하도록 해 주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닮아 그대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모델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이 율법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죄되고 죄책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복음안에 있다 해도 우리의 힘으로 은혜안에 거할 수는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2. 복음의 기능들

(1) 위로

율법의 거울로서의 기능으로 인해 우리는 정죄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복음이 주는 답변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며,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롬 5:8) 율법과 복음이 가지는 첫째 기능의 역동성은 바로 회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참된 기독교적 삶의 시작이며, 용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기회입니다. (2) 재창조

새로운 회개의 삶은 복음의 능력에 의하여 주도되고 또 효력을 발생하는데, 복음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좋은 능력입니다. (롬 1:16) 이 구원은 죄의 영원한 효력(죽음과 정죄)에서 뿐만 아니라 죄의 현재의 능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새로운 능력은 외부적으로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안에 있는 새로운 영이 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줄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99%는 부작위(不作爲)의 죄입니다. 부작위란 말은 “의무 불이행”, “태만”이라는 죄입니다. 죄에는 omission과 commission의 죄가 있는데, 부작위(omission, nonfeasance)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소극적인 죄)이며, commission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죄”(적극적인 죄)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렘 17:10, 삼상 16:7, 왕상 8:39, 롬 8:27, 계 2:23)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이 악의 파급을 막는 것이었다면, 복음의 두 번째 기능은 재창조의 능력으로 인류를 변화시키는데 대한 희망을 얻습니다. (3) 자유케 함

복음의 세 번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변형의 최종단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안내를 말했는데, 이제 복음으로서 이 죄에 대한 옛 속박은 깨어졌고,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롬 6:18) 죄의 세력과 율법의 몸가짐으로부터의 이러한 새로운 자유를 성령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특별한 특징입니다. 기독교인은 더 이상 자신의 성행에 대한 어떠한 보상, 어떠한 인정, 어떠한 사례, 어떠한 감사도 기대하지않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합니다. 기독교인의 선행은 이제 새로운 본성입니다. 보상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랍니다. 선을 행하려는 새롭고 자발적이고 관대한 의지를 가진 것, 이러한 자유가 복음안에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기능들은 상호간의 역동적인 관계속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양자는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한가지 선한 뜻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선물을 왜곡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의롭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위탁을 피하게 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은 죄의 힘입니다. (롬 7:7) 율법의 선한 목적은 죄의 세력이 깨뜨려져야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 승리하는 능력은 복음을 통하여 성령(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정적인 어떤 속성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롬 1:16-17) 이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구속적인 의에 대한 재발견은 구약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을 촉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인 동시에 복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미 만물을 의롭게 하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의를 위해 일하십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율법들은 압박받는 자들을 속박으로부터 보호하고 해방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복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은 새로운 요소입니다. 그는 의로써 판단하시고 의를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율법과 복음이 지니는 독특한 소식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왼손, 오른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탄이 창조물가운데 완전한 혼돈을 일으키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복음은 악을 대항하고 의를 수호하기 위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충성된 동반자로 변화시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수용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기쁨’이 됩니다. (시 119)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은 복음 충만한 마음에 있어서는 자유케 하며 풍요하게 하는 순간이 됩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이 둘의 분명한 이해는 우리는 믿는 성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안에는 신학의 부재시대, 다시 말해서 성서신학적 연구가 빈약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없이 성경을 단지 하나의 종교적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라고 하는 책속에 갇히신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속에서 인간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시는 인격의 주체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이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이 두가지의 긴 역사성과 역사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를 해야만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이 둘의 큰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적기 때문에,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고 창세기나 요한 계시록을 같은 시각과 해석력을 가지고 읽습니다. 실상은 해석할 아무런 도구나 사전 지식이 없이 성경을 봄으로써 성경을 함부로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1. 율법과 은혜 신약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나, 구약에는 전체적으로 율법아래 있는 예언이며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법제화된 율법은 실제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약 2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이후 430년이나 지나서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갈 3:17-18)

그런데 율법이든 신약의 복음이든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려고 쓰여진 책들입니다. 때문에 율법과 복음이라는 말을 대조시키기 보다는 율법과 은혜라는 말로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 율법과 복음은 사실상 대조라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이고 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율법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질서와 백성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율법이 분명하게 주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은 주전 4114년경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에 태어났으며 아담후 1948년 이후입니다. 출애굽은 주전 1446년에 이루어졌고,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1446.2-1445.3)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후 이스라엘백성도 역시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자체가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으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전체를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범주가 존재합니다. (1) 도덕적인 율법의 계명 (출 20:1-26, 십계명), (2) 재판 (민법) (출 21-24장), (3) 의식 (출 24-31장 & 레위기의 대부분).

2. 율법의 바른 이해 율법이 당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보호하고 질서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한 시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요1:17) 복음이 분명히 나타나기 전까지만 율법이 유효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을 때의 모습은 심판의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계속 머물러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감사하지도 않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조건이 붙은 순종과 축복을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으며 자신들의 중한 죄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수 있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고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은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은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안에 이미 복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이 은혜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더해진 것일 뿐이다. (갈 3:19)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게 될 것이다. 이 조건이 붙은 율법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삶의 축복을 전제로 한 유대교인들은 바로 이 율법의 축복을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오해의 문제가 있다.

(1) 율법주의 (legalism):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이 쓴 책이 로마서입니다.

(2) 반율법주의 (Antinominism):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살아갈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 야고보서 &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3) 갈라디아주의 (Galatianism): 우리가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것 역시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정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롬5;13)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만으로 인간의 죄를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생각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정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정죄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로운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나, 인간의 죄를 밝혀줄 뿐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켜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율법은 시대적으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은혜로 구원받을 때까지 몽학선생(초등교사)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율법은 인간의 축복과 저주를 약속하지만 축복을 받으려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저주,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사망과 저주의 문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이 저주를 끊어내는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의 저주를 중단시키고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온전한 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갈 3:24-25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부유한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노예)이란, 옛날에 서당에서 한자를 배울 시절에 학생들이 서당에 안가고 땡땡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유지들이 합심하여 타 동내에서 하인을 하나 사서, 학생들을 집에서 서당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게하고 학생들 공부하는 동안 장작을 팬다던가 서당 선생님 뒤 바라지를 하게 하기 위한 하인으로 글은 가르치지 않고, 양반 자재들을 집에서 서당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일만 하는 가짜 선생이며, 학생들이 그 하인(가짜 선생)의 말들 잘 듣게 하기 위하여 붙여준 이름이 몽학선생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몽학선생 번역은 아주 잘 된 것이다. 최근 개역판은 “초등교사”라고 하여 그 의미가 다시 불분명해졌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죄없으신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율법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타나났고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은혜안에 있게 되면 그를 힘입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롬 13;10)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롬 8:3-4) 굳게 세우는 것이다. (롬 3:31) 율법에서 해방되고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 6:2, 약 1:25) 율법안에 희미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의, 그 은혜와 사랑의 빛은 복음안에서 분명해졌으며, 온전히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율법안에만 있다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복음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양심과 율법안에서는 충분히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의 세력의 힘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었지만 그 죄와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데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율법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헛된 욕망과 자기 만족적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죽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자주 율법적 삶과 행위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그 역할을 오해한 때문이며, 율법적인 삶이 인간으로 하여금 쉽게 종교적인 생활을 정의해 주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의 한 도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하나의 종교적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 유대교를 믿은 이들이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바울의 말대로라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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