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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꿈, 하나님의 큰 그림 (창 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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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꿈 하나님의 큰 그림 (창 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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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세 가지 꿈에 대한 묵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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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요셉의 세 가지 꿈에 대한 묵상 1 창세기 37장을 통하여, 요셉이 자다가 꾼 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셉의 꿈은 밤에 꾼 꿈일까요, 하나님의 뜻이 … 창세기의 말씀 중에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과연 내가 밤에 자다가 꾸게 되는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가장 기억에 남..성서유니온,매일성경큐티,말씀묵상,새벽예배설교,새벽예배짧은설교,새벽예배10분설교,구약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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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세 가지 꿈에 대한 묵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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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으로 잘못 해석된 요셉의 꿈 < 칼럼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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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 KLB – 요셉의 꿈 이야기 – 야곱은 – Bible Gate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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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89강) 요셉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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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구약 – (89강) 요셉의 꿈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요셉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즉 요셉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신 것이 요셉의 꿈이 지니고 있는 의미 … …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구약 – (89강) 요셉의 꿈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요셉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즉 요셉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신 것이 요셉의 꿈이 지니고 있는 의미 … 창 37:5-11http://onlycross.net/videos/gen/gen-370511.wmv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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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의 꿈 ] 요셉의 꿈은 누가 준 꿈일까? 내 꿈일까 하나님이 주신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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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 #요셉의 꿈 ] 요셉의 꿈은 누가 준 꿈일까? 내 꿈일까 하나님이 주신 꿈일까? 요셉이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말했듯, 모든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두 애굽인들은 요셉에게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하고 요셉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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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꿈, 하나님의 큰 그림 (창 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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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꿈, 하나님의 큰 그림 (창 45:4-5)
설교에서 ‘꿈’하면 단골로 등장하는 성경인물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요셉의 꿈” “꿈꾸는 자 요셉”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이런 설교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 요셉의 인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야곱은 늘그막에 요셉을 낳았다. 요셉은 늦둥이이자 막둥이였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하는 짓도 애비랑 쏙 빼 닮았다. 야곱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 25:27)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야곱은 요즘 하는 말로 집돌이였다. 온종일 집에 머물면서 엄마 아빠랑 도란도란 얘기 나누고, 살림살이를 도와 주는게 야곱의 행복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가정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셉도 똑같았다. 심지어는 야곱이 형 에서에게 했던 것처럼 형들에게 얄미운 짓을 하는 것 까지도 어쩜 그렇게 쏙 빼다 박았다.
(창 37:2)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이렇게 요셉은 형들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사사건건 아버지께 고자질 했다. 보통 형제지간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아버지는 잘못 저지른 쪽을 혼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자질 한 쪽을 꾸중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어느 한 쪽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양쪽 모두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지간히 큰 잘못을 저지른게 아닌 이상 형제간에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도록 유도하기 보다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화합해 나가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마음은 철저하게 요셉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요셉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요셉은 날이 갈수록 더욱 기고만장해지고, 안하무인이 되어갔다. 쉽게 말해서 요셉은 응석받이 특유의 당돌함이 있었다. 야곱의 편애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야곱이 어찌나 요셉을 편애했던지, 열두 아들 중에서 오직 요셉에게만 채색 옷-지금으로 치면 명품 옷을 입혔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채색 옷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면서 동시에 요셉의 유악함을 나타내 주는 상징이었다. 생각해보라. 채색옷 씩이나 입고 뭘 할 수 있겠는가? 농사를 짓겠는가? 양떼를 치겠는가? 사냥을 하겠는가? 채색 옷을 입고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채색 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
형들이 하루 종일 땡볕에서 농사짓고 양을 치는 동안 요셉이 하는 일이라고는 채색 옷을 입고서 보란 듯이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면서 형들 잘못이나 고자질 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서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리는 것 밖에 없었다. 부모 눈에는 이런 모습마저도 그저 마냥 사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형들에게는 꼴불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형들은 요셉을 대놓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창 37:4, 쉬운성경)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요셉에게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아마 요셉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걸 눈치 채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요셉은 여기에 쐐기를 박아 버렸다. 괜히 쓸데없이 꿈 얘기를 한 것이다.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형들이 자기 발아래에 엎드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이 따위 소리를 하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심지어 요셉은 꿈 얘기를 두 번씩이나 했다. 형들은 요셉의 꿈 얘기를 듣고 단순히 미워하는 감정을 넘어서서 증오심을 불태우게 된다.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그러다가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만다. 형들이 홧김에 요셉을 종으로 팔아넘긴 것이다. 사실은 그나마 이것도 꾹꾹 눌러 참아서 이 정도였지, 원래는 죽이려고 했었다.
(창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창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이렇게 해서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그런데 형들이 요셉에게 손을 대기 전에 자기들 끼리 쑥덕거린 말이 있다.
(창37:19)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37:20) 자, 그를 죽여…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형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다. 비아냥이었다. 쪼그만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엄마 품에 안겨서 조잘거리는 거 밖에 없으면서 감히 형들을 자기 발밑에 두는 그런 꿈이나 꾸고 있으니, 형들 눈에는 요셉이 얼마나 가잖고 아니꼬웠겠는가? 그래서 “꿈꾸는 자? 그래, 니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자”는 심뽀로 일을 벌인 것이다.
“우리가 너를 없애 버려도 니 꿈이 이뤄지는지, 노예로 팔아 넘겨도 니 꿈이 과연 그대로 남아 있을지 한번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요셉의 꿈은 그렇게 형들의 발길질에 짓밟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성경에서 요셉의 꿈 얘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창37:28) 자신의 꿈을 떠올리면서 밑그림을 그려 나갔을까? “자고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지, 가나안은 너무 좁아. 아무렴 애굽 정도는 돼야지. 용이 개천에서 놀 수 있나”, “가만있어 보자, 지금 애굽으로 팔려가고 있으니까, 일단 거기서 종살이부터 한 5년 정도 하다가, 주인한테 인정받아서 애굽 시민권을 획득하고, 그 다음에 관직에 진출하면 대충 20대 중반, 여기서 좀만 더 출세하면 그 때부터는 슬슬 형들을 발아래 둘 수 있겠다” 이렇게 인생을 설계해 나갔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 그 어디에도 요셉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인생을 계획해 나갔다는 기록이 없다. 요셉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냥 울고불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그렇게 팔려갔다. 이 판국에 꿈은 무슨 꿈인가? 아마 여기서 인생 종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후로 요셉의 인생은 악화일로를 거듭하게 된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 까지 한다.
(창 37:36)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창 39:19-20) 그의 주인이…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이런 일을 겪는 동안 요셉은 고향에서 꾸었던 꿈을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 판국에 꿈이 웬 말인가? 일은 자꾸 꼬여만 가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데, 여기서 어떻게 꿈을 품고, 무슨 수로 인생을 설계하고 큰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겠는가? 요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요셉은 꿈을 잃었다. 아니, 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여전히 함께 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도 함께 계셨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할 때도 함께 계셨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해주신 덕분에, 요셉은 형통을 누릴 수 있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형통이 무엇인가? “온갖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종살이 하고 있는 사람에게 형통이 뭐겠는가? 당연히 종살이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옥살이를 하는 사람에게 형통이 뭐겠는가? 출옥하는 것이다. 이게 형통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게 아니었다.
요셉은 여전히 보디발의 종이었고,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면서 허락하신 형통이라는게 기껏해야 ‘종으로서’ 형통한 것이었고 ‘감옥에서’ 형통한 것이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놀랍게도 ‘고작’ 이 정도의 형통이 요셉을 상상 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중간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고,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무가 된다.
(창 41:38-39)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그 후에 요셉은 결혼을 해서 아들 둘을 낳았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이고 둘째는 에브라임이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이고(창41:51),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창41:52).
무슨 말인가? 형들에게 팔려서 여기까지 오게 된 지난 세월들은 이제 다 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 출발 하겠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사실 요셉은 그동안 지난 과거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형들의 미움이고, 꿈이고 뭐고 아예 그냥 싹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저 애굽의 총리로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형통을 누리면서 살고 싶었다. 자, 그렇다면 요셉은 꿈을 이룬 사람인가, 이루지 못한 사람인가?
그렇게 요셉이 애써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덮어두고 총리로서 애굽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치 7년 동안 엄청난 풍년이 들었고, 8년 째 부터는 가혹한 흉년이 시작되었다. 흉년이 어찌나 심했던지 애굽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 국가들도 양식이 없어서 쩔쩔 맬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애굽에는 비축해둔 양식이 있었다. 요셉이 지난 7년간 풍년이 들었을 때 미리미리 잘 예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창 41:47-49)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창 41: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바로 이 시기에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찾아 갔다. 이때 요셉은 형들을 한 눈에 알아 봤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20여 년 전에 노예로 팔아넘긴 동생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둘의 입장은 완전히 정 반대가 되었다. 그때는 형들이 요셉을 살리고 죽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요셉이 형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 그때는 형들이 위에 있었고 요셉은 구덩이 아래에 있었지만 지금은 요셉이 갑이고-그것도 슈퍼갑이고 형들은 철저하게 을이다. 요셉은 권좌에 꼿꼿하게 앉아 있고, 형들은 그 앞에 납작 엎드린 채로 바짝 얼어 있다.
(창 42:3, 우리말성경) 요셉의 형들 열 명이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창 42:6, 우리말성경) 그때 요셉은 그 땅의 총리가 돼 그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요셉이 꿨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얼마나 짜릿했을까? 얼마나 통쾌했을까? 나 같으면 “네 이놈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하면서 호통부터 쳤을 것 같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바라보면서 “마침내 내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형들을 상대로 지난날의 아픔을 한풀이 하며 보복하지도 않았다. 요셉은 형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누가 요셉을 애굽으로 보냈는가? 형들인가? 아니다. 하나님이었다. 누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웠는가? 바로 왕인가? 아니다. 하나님이었다. 요셉은 꿈을 이룬 사람일까? 아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요셉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거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계획하고 노력했다는 말이 없다. 요셉은 그냥 하루하루 살아갔을 뿐이다. 꿈을 잃어버린 채, 꿈도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요셉이 꿈을 이루었다”는게 아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는데 있다. 요셉이 자기 발 앞에 엎드려 있는 형들을 보면서 깨달은게 무엇인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였는가? 아니다. “아, 이래서 하나님이 그때 그런 꿈을 꾸게 해주신 거구나”였다.
그렇다. 요셉은 어렸을 때 꿨던 꿈을 기억하고, 꿈을 가슴에 품고 꿈을 꾸며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 반대로 현재를 통해 과거의 꿈을 해석해낸 사람이었다. 요셉은 꿈을 꿨다. 하지만 그 꿈의 진정한 의미는 모르고 살았다. 한동안은 꿈을 잃고 살았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꿈이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요셉이 꾼 꿈의 의미가 무엇인가? 형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었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고, 적대감이 아니라 위로와 평안이었다.
잊지 말라. 요셉은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다. 꿈이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 꿈은 요셉의 꿈이기 전에 하나님의 꿈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꿈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요셉 이야기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여러분은 꿈이 있는가? 만약 여러분들에게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면, 그래서 꿈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만약 여러분들에게 꿈이 없고, 그래서 지금 내딛고 있는 이 발걸음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종잡을 수가 없다면, 심지어 애초에 꿈이라는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꿈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어느 누가 속단 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게 요셉의 꿈이었던 것도 아니다. 요셉은 총리를 꿈꾸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으니까 요셉의 꿈, 그리고 총리가 된 것이 연결고리로 보인다. 하지만 요셉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총리가 된 건 총리가 된 것이고, 형들과 재회 한 것은 재회한 것이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면서 뭐라고 했는가? “이제 고지가 코앞이다”라고 했는가? 아니다. “지난날은 잊겠다, 여기서 새 출발 하겠다”고 했다. 요셉은 결코 총리가 된 것과 자신의 꿈을 연결시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셉은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었다. 꿈을 꾸며 산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겨우겨우 버텨내며 살았을 뿐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그래서 형통했고, 그래서 꿈이 이루어졌다. 형들은 요셉을 보면서 말했다.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요셉은 형들에게 말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형들은 그 꿈이 요셉의 몫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요셉을 없애면 꿈도 물거품이 될 줄 알았다. 요셉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꿈은 요셉의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것이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큰 그림의 일부였다. 그래서 꿈을 이룬 것도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요셉이 아닌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보라, 꿈꾸는 분이 오는 도다”
말씀을 맺겠다. 우리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무엇일까? 꿈이 없는 것일까? 아직까지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어느 대학에 지원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는 것일까? 진로는 정했는데 성적이 안 되서 고민하는 것일까? 맞다. 이것도 문제다. 하지만 이게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래서 요셉은 비록 종살이를 했지만 형통했고, 감옥에 갇혔지만 형통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형통이 요셉을 크나큰 형통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형통을 누리고 있는가?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길 바란다.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만 한 꿈도 없고, 그래서 막막하고,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고, 되는게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마치 한참이나 뒤처진 인생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형통을 누리길 바란다. 우리 삶 가운데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큰 그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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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세 가지 꿈에 대한 묵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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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말씀 중에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과연 내가 밤에 자다가 꾸게 되는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중의 하나가 무의식 속에서 꿈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혹은 미래에 대한 나의 소망이 꿈으로 투영되는 것일까?
정확하게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에 대한 해석이나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7장을 통하여, 요셉이 자다가 꾼 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셉의 꿈은 밤에 꾼 꿈일까요, 하나님의 뜻이 담긴 꿈일까요?
목동 집안의 요셉이 곡식 단과 해달별 꿈을 꾸다
목차
요셉의 세 가지 꿈에 대한 묵상 1
1. 들어가며
창세기 37장부터 시작하는 창세기 37장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에서 계속적으로 흐르는 사건들의 연관점은 “꿈”에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3번의 꿈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각 꿈을 꾼 이후에 극적인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꿈의 흐름을 따라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2. 세 번의 꿈들
(1) 요셉의 꿈
1) 성경의 이야기
요셉과 관련한 세 번의 꿈들 중에 첫번째 꿈은, 당연히 요셉이 직접 꾼 꿈입니다. 창세기 37:5-11까지의 말씀에 등장하는 첫 번째 꿈 사건은,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요셉이 꾼 꿈에 대한 성경의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세기 37:7, 개역개정 성경)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세기 37:9, 개역개정 성경)
12아들 중 11번째인 요셉의 입장에서는, 이 꿈이 매우 신기하고도 즐거운 꿈이었지도 모릅니다. 비록 아버지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형들에게는 여전히 막내 동생과도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연속해서 형들에게 절을 받는 꿈을 꾸었으니 얼마나 통쾌하고도 흥분했겠습니까?
약 17세의 소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형들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상황입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불만이 있었는데, 이제는 요셉이 자기 입으로 온 가족의 절을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형들이 보인 반응은 요셉에 대한 “미움”(사네, שָׂנֵא)이었습니다(5절, 8절).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적대적이고 혐오적인 사람’, ‘부정한 물건’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형들은 요셉을 적대적이고도 부정한 존재,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채색옷을 입은 요셉과 곡식단이 절하는 꿈을 꾸는 요셉
2) 특별히 생각할 부분 – 목자에게 곡식 단과 해달별의 꿈이라니?
단,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요셉이 꾼 꿈이 곡식과 해달별과 관련된 꿈이라는 부분입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대대로 양을 치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양을 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곡식 단”에 대한 꿈과 농사와 관련 깊은 “해달별”의 꿈을 꾸었다는 것은, 흔히 꿀 수 있는 꿈이 아닙니다. 요셉의 경험을 투영하거나 요셉이 갈망하는 부분이 꿈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요셉과는 상관이 없고 야곱의 집안과도 크게 상관없는 것들이 꿈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꿈에 나온 곡식단과 해달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요셉의 경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 꿈에 나왔다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으로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를 통하여, 요셉에게 미리 알려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 보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됩니다.
3) 생애의 가장 큰 전환점과 그 해석
하지만 이 꿈을 통하여 요셉의 일생에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머나먼 타국으로 억지로 팔려 가며, 그 곳에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종의 일과 가보지 않았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꿈 사건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4) 더 읽어볼 글 : 창세기 37장 설교
2020/08/31 – [나의 설교/새벽예배 설교 – 매일성경] – 창세기 37:1-17, 꿈, 야망 그리고 비전 Dream, Ambition or Vision 매일성경
2020/09/01 – [나의 설교/새벽예배 설교 – 매일성경] – 창세기 37:18-36,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
두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하는 중세풍의 요셉
(2) 두 관원장의 꿈
1) 성경의 이야기
보디발의 집안에서 가정 총무로 성실하게 일하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계략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거나 즉결처형을 당해도 무방한 사건이지만, 어쩐 일인지 요셉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창세기 39:20, 개역개정 성경)
이 곳에서 요셉은 왕의 두 관원장을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왕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음식과 관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의 사회에서는, 왕을 암살하려는 무리들이 많았고,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던 암살의 방법이 바로 독살이었습니다.
왕의 음식에 독을 넣어 왕을 살해하는 일들이 많음으로 인해, 왕궁에서는 왕의 최측근을 왕의 음식과 관련된 직책에 임명하였습니다. 왕의 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요셉과 같은 감옥을 쓰게 된 두 명의 감방 동료들이 아니겠습니까?
고대의 이집트 사회에서는, 빵을 굽기 위해서는 빵을 맡은 주방장이 머리를 화덕 속에 집어넣어서 빵을 화덕 벽에 붙였다고 합니다. 이때 주방장의 다리를 아들이 붙잡아 주는데, 가끔씩 아들이 아버지의 다리를 놓쳐서 아버지가 불 속으로 빠졌다는 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고 특별한 기술을 가진 관원장들이 하필 요셉의 감옥에 같이 있었고, 그들이 동시에 비슷한 꿈을 꾸게 됩니다.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창 40:5, 개역개정 성경)
이들의 꿈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 내용이 다르고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창세기 40:11, 개역개정 성경)
라고 하였으며, 떡 맡은 관원장은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창세기 40:17, 개역개정 성경)
라고 합니다.
2) 특별히 생각할 부분 – 두 관원장의 차이가 뭐길래?
세 포도가지와 세 광주리는 모두 3일을 뜻하는 것이며, 3일 후에 한 사람은 복직이 될 것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사형을 당할 것임을 요셉이 해석해 줍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3일 후에 두 관원장은 모두 ‘머리를 들게’ 되지만, 한 사람은 복직을 위하여 또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을 위하여 머리를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창세기 40:10-11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창세기 40:10-11, 개역개정 성경)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서, 포도가지의 세 가지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정상적인 포도열매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정상적인 과정 속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직접 열매들을 따서 즙을 짜고 그 잔을 바로에게 직접 드립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특별히 문제점이 있을까요? 자연스러운 순서를 따라갑니다. 자연스럽게 자라고 익어가고 즙을 생산합니다. 그의 꿈에는 생명의 성장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권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떡 맡은 관원장은 어떠합니까?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창세기 40장 16-17, 개역개정 성경)
떡을 만드는 일련의 생산적인 과정은 없고, 이미 만들어진 떡이 자신의 머리 위의 광주리에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떡 맡은 관원장이 한 일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떡은 이미 있었으며, 생산이 아닌 소비적인 의미로써 그 떡을 새들이 먹었습니다. 있던 것을 새에게 빼앗기는 이러한 꿈을 통하여, 어떤 생명과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3) 요셉을 잊은 관원장과 그 해석
실제로 요셉이 해석한 대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미 해석 후에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자신의 무죄함도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잊지 말고 감옥에서 건져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아마도 해석을 들은 직후에는 술 맡은 관원장이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흔쾌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잊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세기 40:23, 개역개정 성경)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요셉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하여 감옥에서 나가고 무죄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하여 요셉을 건져 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요셉은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셉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요셉이 꾼 꿈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버림받고 잊힌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꿈의 과정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4) 더 읽어볼 글 : 창세기 40장 설교
2020/09/04 – [나의 공부/창세기 주석] – 창세기 40장 주석, 설교를 위한 자료
2020/09/04 – [나의 설교/새벽예배 설교 – 매일성경] – 창세기 40:1-23 내 삶의 해석자 – 성서유니온 매일성경
(3) 바로의 꿈
2020/09/04 – [나의 공부/내 마음대로 공부하기] – 요셉의 세 가지 꿈에 대한 묵상 2
바로 위의 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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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내용이 교정되어야 우리가 꿈꿔야 할 하나님나라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등장했던 여러 구호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Be the Reds’, ‘꿈★은 이루어진다!’ 등이 그것이다. 그중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후 치뤄진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그대로 사용됐다. ‘꿈★은 이루어진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표현인가. 우리는 늘 꿈을 꿨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기독교가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끌었던 것도 기독교를 통하여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오늘도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통하여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열심 있는 믿음이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서점에서도 가장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이 성공과 꿈을 이룰 수 있는 신앙적인 법칙을 설명해 주는 것들이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는 우리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종교일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무슨 꿈을 이루어 주게 할까. 오늘 우리는 모두 꿈을 이루기를 원한다. 무슨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꿈꾸는 사람, 요셉
꿈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꿈꾸는 사람의 대명사, 꿈의 실현자 요셉은 우리에게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요셉이 이룬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어렸을 때부터 꿈꿔 왔던 그 꿈은 이루어진 것일까. 우리들도 꿈을 꾼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꿈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의 승리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을 향하는 꿈, 야망
요셉의 첫 꿈은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두 번째 꿈도 비슷했다.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이 꿈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요셉 자신의 영달을 의미한다. 그가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마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야망이 있었던 사람 같다. 그가 처음부터(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 야곱의 특별난 대접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그런 욕망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야망의 사람임이 틀림없다. 자신의 야망이 그런 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도 많은 꿈을 꾼다. 그런데 많은 꿈 중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을 대변하는 꿈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영달을 위한 꿈, 야망은 결국 우리를 고립되게 만든다. 요셉도 마찬가지로 그런 고립을 경험했다.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고립되었다. ‘왕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야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야망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야망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아름답고 귀한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야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야망은 우리로 하여금 생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야망으로 가득 찬 우리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향하는 야망을 갖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와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모두 야망을 갖도록 유도되고 있지 않는가. 오늘 교회에서도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나 교인들도 대형 교회라든지 유명해지는 것이라든지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탄 사람들이 아닌가.
한국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목회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국교회가 얼마나 야망에 가득 차 있는가를 볼 수 있으며, 또 야망에 찬 젊은이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젊은이들이 한창 몰리는 교회나 인기를 끄는 설교자 중에서 한 사회나 한 역사의 한 부분에서 나름대로 정의를 외치거나 혹은 불의를 향하여 항거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는가. 인기 설교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초라했던 위치를 벗어나 지금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 있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나름대로 야망을 성취한 사람들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 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야망이라는 꿈을 꾸게끔 만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설교를 통하여, 성경 공부를 통하여, 그리고 각종 신앙 강좌라는 미명 아래 열리고 있는 성공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에 매료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성공이라는 야망과 그리고 그 ‘야망은 이루어진다!’에 몰두하고 있다.
누가 진정한 지도자인가
오늘 한국 사회의 경제·정치·문화·체육 등 거의 전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한국이 이제 불교 국가가 아니라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종교 인구통계면에서 이미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앞지르고 있고 경제·정치·사회적 활동면에서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한국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영적 스승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영적 스승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오늘 한국 사회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들이 과연 영적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는가. 소위 한국 교계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개신교 목사들 대부분이 영적 스승보다는 큰 사역을 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로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진정한 영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왜 그런가.
사실 종교인들은 자신이 이룩한 성공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온 삶과 정신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기독교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한결같이 어떤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야망의 꿈을 꾸지 않았다. 오히려 야망의 꿈을 줄이면서 다른 꿈을 꿔 왔던 사람들이다.
오늘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꿈★은 이루어진다!’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이 야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진정한 꿈을 구별할 수 있도록 신앙의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꿈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욕망과 야망은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산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서 진정으로 영적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이 없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된 꿈을 이루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꿈을 이룬 요셉?
수 주 전에 한 교회에서 어떤 전도사의 간증 집회가 열렸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한국의 요셉과 같은 사람이라고 추앙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화제의 인물은 보수 기독교인에게 ‘믿음의 총리’로 불리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다. 기사에 의하면, 그 교회 담임목사는 어느 날 “믿음 좋은 요셉 같은 총리를 모시고, 간증 집회를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그를 초청하여 집회를 열게 되었다.
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그의 간증 요약을 보면 그는 분명 창세기의 요셉과 같은 인물로 간주되어도 좋을 듯하다. “무명의 소년은 예수를 믿으며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됐다. 신학교도 졸업했다. 28년간 공직 생활을 했다. 잠깐의 변호사 생활을 거쳐, 법무장관과 국무총리가 됐다.(박수) 다 하나님께서 해 주신 거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믿고 나서 ‘무명한 자’가 ‘유명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간증했다고 한다. “693일(2015.6~2017.5) 동안 국무총리를 지냈다. 매일매일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정쟁이 될 수 있기에 지금 자세히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 당시에는 고난 같았는데,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런 은혜를 계속 받으려면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궁하지 않아도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룬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국무총리 재임 기간 중 발생한 국정 농단 사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행한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연 그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나라의 꿈을 이룬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야망을 이룬 것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꿈의 내용이 교정되어야
우리가 꿈꿔야 할 하나님나라
우리 모두는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의 내용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요셉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꿈의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야망에 가득 차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의 꿈은 점차 변화되어 갔다.
야망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좋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진정한 꿈, 참된 꿈,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꿈이 교정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선물을 받는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화해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아래의 성경 기록은 바로 이러한 요셉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가치관이 변화된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주시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 45:7-8)
야망이 사라지고 하나님나라를 향한 꿈을 갖게 되자, 그는 이러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꿈이 있는가. 우리의 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야망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행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꿈,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는 어떤 꿈을 심어 주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존 레논은 ‘imagine’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나라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당신 노력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에요. 발 아래는 지옥이 없고, 우리 위에는 오직 하늘만이 있겠죠. 모든 사람들이 이날을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이념을 위해서) 살인이나 죽음도 없고 종교도 없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소유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당신이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탐욕과 굶주림에 대한 필요도 없고 인류애로 뭉치는 온 세상을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눈다고 상상해보세요. 내가 공상가라고 당신은 말할지 모르지만 나만이 그런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당신도 우리와 함께해서 세상이 하나 되어 살기를 바라요.”
존 레논도 이런 꿈을 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가 야망에 불타 있어서야 되겠는가. 신앙을 자기 야망의 실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지금 예수를 믿은 지 50년이 됐다. 주일예배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다. 행여 내가 잘못하면 교회를 공격할까 봐 처신에 신중을 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그의 간증이 오늘 이 아침에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가 이룬 꿈의 정체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홍인식 / 순천중앙교회 담임목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연합신학대학교(ISEDET)에서 해방신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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