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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시편강해(시편1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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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8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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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시편 18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시편 18편 서론>. 여호와의 종 다윗의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를 말로 … <시편 18편 서론> 여호와의 종 다윗의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를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시 18편과 같은 시들에 실려 있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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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시편 18편 & 성경주석 본문
2018/05/14(ì) \”ìí¸ 18:1-50\” / ìì±: ì ì¬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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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시편 18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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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9 – 수요기도회 설교문(시편18:1-3) – 숭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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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2020.04.29 – 수요기도회 설교문(시편18:1-3) – 숭실교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본문말씀: 시편 18:1-3 시편 18편은 본래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시였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너무도 은혜로 … …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2020.04.29 – 수요기도회 설교문(시편18:1-3) – 숭실교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본문말씀: 시편 18:1-3 시편 18편은 본래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시였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너무도 은혜로 …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본문말씀: 시편 18:1-3 시편 18편은 본래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시였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너무도 은혜로워서 시편에 조금 수정이 되어 수록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엄청난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시편 18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2가지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 설교문에서는 그 두 가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다윗은 가장 평안한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18편의 부제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바로 사울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면 사울 왕에게도 인정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울 왕이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서 다윗을 질투하여 원수로 생각하기 했습니다. 사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고향과 나라를 떠나 이곳저곳서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고난의 기간을 10년 이상이나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고난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다윗의 생명을 노리던 사울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다윗이 지은 시편이 시편 18편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시편 18편은 사무엘하 7장부터 11장 사이의 시간에 다윗이 지은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하 7장에는 다윗을 죽이려하던 사울 왕이 죽고 나서 왕이 되어 평안한 삶이 시작된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7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다윗)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에게 드디어 평안의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다윗을 따랐고, 나라가 강대해져서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적대국들과 싸우러 직접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밧세바와 더불어 범죄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이 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에 다윗이 시편 18편을 적은 겁니다. 무슨 말씀이냐면요? 다윗이 가장 전성기에, 가장 평안의 시기에 이 시편을 적었다는 겁니다. 그 전성기의 모습을 사무엘하 8장에 두 가지로 기록하는데요. 외적으로는 8장 6절과 14절 후반에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는 주변의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였습니다. 내적으로는 8장 15절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라고 말씀합니다. 내적으로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것과 동일하게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위대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18편을 지었을 때 다윗은 가장 평안의 때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 때문에,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릴 그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다윗은 시편 18편을 지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겁니다. 제가 본 시편을 묵상하면서 다윗의 이 모습이 참으로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스스로를 시편 18편을 짓고 있는 다윗과 비교해 보십시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와 여러분이 어느 때에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되나요? 기도제목이 있을 때입니다. 정말 힘이 들 때입니다. 부끄럽지만,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가만히 저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때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생길 때에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갈급함이 해소되면, 영적으로 게을러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윗도 고난의 때에 정말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18편 4절에서 6절을 보십시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10년 이상의 시간을 어떻게 살았냐면요? 매일같이 사망이, 스올의 세계가 자신을 엄습해올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다윗은 그렇게 두려움에서 구원을 받고, 최고의 전성기와 평안한 시기를 보내면서도, 갈급한 기도의 제목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평안의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대로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평안을 주셨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18편을 한 번 주의깊게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상대적으로 긴 시편에 해당하는 이 시편의 주어가 누구냐면요? 거의 다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주어로 등장하는 것은 3절에서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그리고 29절에서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정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누구의 일인가? 인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의지하는 일에는 주어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에는 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다윗이 주변의 대적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0년 이상이나 생명의 위협을 가했던 사울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게 다 누가 성취한 일이었는가? 다윗 자신이 이루어낸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행해 주신 일이었다는 겁니다. 7절로부터 19절을 보시면 다윗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만물을 이용하셔서 다윗을 구원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9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그렇게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인생의 최고 전성기에도, 그리고 가장 평화로워서 갈급한 기도의 제목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믿음의 비결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기에만 갈급하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안의 시기에도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반쪽에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어느 분의 말씀을 빌자면 “다윗은 하나님께 순종의 복을 당당하게 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0절에서 2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조금 전에 제가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이 “자신이 누리는 구원의 은혜, 평안의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기억하고 고백한 점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 24절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이상하게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깨끗하게 살아온 것을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완전하여서 죄악에서 멀리한 것을 하나님께 공적으로 내어놓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치 다윗이 구원을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된 것을 다윗이 의롭게 살아서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께 보상을 주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공로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0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25절에서 2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여기에 다윗이 가진 “신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고백되고 있는데요. 한 마디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비로운 자, 완전한 자, 깨끗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사악한 자, 교만한 자에게는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과 저주의 장이잖아요. 2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반면에 15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면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어떻게 기도하였을까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저를 구원해주시고, 축복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다윗과 유사한 예를 보여주냐면요? 히스기야 왕이 보여줍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나서, 종교개혁을 하잖아요. 모든 우상을 철폐하고, 오직 하나님만 믿는 나라를 만들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병이 들었습니다. 좋다는 약 다 써보고, 용하다는 의원 다 불렀지만, 결국에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 기도합니다. 열왕기하 20장 3절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제까지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이것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았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은혜를 내려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제가 살아온 모습을 보시고, 약속하신대로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를 따라”라는 표현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았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 구절을 해석한 것을 보니까, “구원은 은혜를 통해서 받지만, 축복은 순종을 통해서 받는다.”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순종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순종의 복을 누리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2. 코로나 19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3. 연약하신 환우분들과 어르신들을 지켜 주옵소서! 특히 지금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박성림 집사님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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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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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말씀 서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로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건짐 받고 이방 민족을 물리치고 통일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모든 승리를 체험한 후 부른 노래입니다. 다윗은 이 노래를 통하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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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편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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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단상] 시편 18편 1절 – 15절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3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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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시편강해(시편18편)
시편 18편
[개 요]주제-이 시에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 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삼하 22장). 그러나 사무엘하와 시편에 나오는 예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다윗은 각각 다른 시기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억하며 기록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가 수없이 임했던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서 은혜에 감격하여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를 “감사의 회상”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 시의 머리말은 주의해서 읽어 보아야 한다. 다윗은 이 시를 지을 때 이미 왕이 되어 있었지만, 자신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다의 왕이라는 사실보다도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실에 대해 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옳은 것이다. 시인으로서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 사용할 시를 지으며 여호와를 섬겼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소하거나 평범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음악과 시에 재능이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성가대장이 찬송시를 작사하고 지휘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이 시의 내용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향한 말이라는 것에 주의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린다는 한 가지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이 찬양은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를 향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가치가 없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께만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오직 여호와께만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시의 49절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두 번 인용되었다(히 2:13; 롬 15:9). 그러므로 다윗보다 크신 이가 이 시에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독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우리 주님을 안다면 이 아름다운 시에 그분의 슬픔과 구원과 승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결심을 선언하는 머리말.
4-19절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노래함.
20-28절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변호함.
29-45절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되돌아보며, 미래의 승리를 예측함.
46-50절메시아, 다윗의 씨,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예측함.
[강 해]1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1절. “나의 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힘이 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고난 중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가 하는 일에 승리를 거두게 하신다. 이 구절은 사무엘하 22장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여기에 이 구절이 포함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구절이 이 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성전 꼭대기와 같고, 피라미드의 정상과도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받는 은혜 중에서 가장 귀한 은혜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께 나아가나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듯, 아내가 남편을 가까이하듯,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했다. 이 단어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며, 가장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내 깊은 정성을 다하여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리이다.” 다윗은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가까이할 것을 결심했다. 우리는 마땅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던 첫사랑을 잃지 않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한다. 성급한 마음으로 이런 결심을 하고 곧 잊어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런 결심을 한다면 가장 지혜롭고 적합한 일이다.
2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다윗은 그를 추적하는 사울을 피해 유대의 동굴과 험준한 바위산에 거했다. 그는 하나님을 이처럼 안전을 제공하는 것들에 비유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람들의 비방과 폭풍 같은 어려움에서 보호해 주신다. 영원한 반석이 되신 하나님께 피해 숨으면 우리는 안전하다.
“나를 건지시는 자.”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은 내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구해 주신다. 대적들이 우리를 거의 사로잡을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손으로 대적들을 막으시고 주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며 감사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만큼 귀한 사실은 없다. 무한한 번영과 행복이 이 사실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고 내게 무한한 선을 베풀어 주신다. 이 사실 때문에 나는 무한한 복을 누릴 수 있다. 진실된 마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낙심하지 않는다.
“나의 피할 바위.” 이 바위는 움직이지 않고 변함이 없으며 힘이 있다. 그러므로 바위와 같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에게서 영원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분께 피해야 한다. 그분께 피하려면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아니라면 믿는다는 흉내만 내는 것일 뿐이다.
“나의 방패.” 방패는 원수들이 나를 향해 쏘는 화살과 찌르는 칼을 막아 주며, 나를 보호해 준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병사들에게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를 공급해 주신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무기가 있어서, 어느 누구도 무장을 하지 않은 채로 전투에 나갈 필요가 없다.
“나의 구원의 뿔.” 하나님은 내 원수를 땅에 굴복시키시고, 승리하신다.
“나의 산성.” 하나님은 험준한 산꼭대기에 있는 요새와 같다.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놀람이나 두려움이 없이 원수들의 진노를 바라보며, 요단 강 저편까지 하나님의 자비가 폭넓게 내리는 전경을 바라본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들이 나타났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런 구절들을 잘 살펴보면 유익할 것이다. 이것을 요약한다면, 칼빈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신실한 자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보호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절.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구원을 베푸셨던 것처럼, 이제 앞으로도 모든 환난과 다툼에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믿으며 여호와께 즐거이 부르는 노래를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되, 마땅히 기쁨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돌려야 한다. 여호와께서 지난 과거에 행하신 그 모든 선함을 인해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고 느낀다면, 이와 같은 일을 미래에도 해 주실 것을 담대히 간구할 수 있다.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노래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서도 슬퍼하며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이 굳건했다. 그는 싸우면서도 노래할 수 있었고, 그 입술로 노래하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지난 과거에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자비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새로운 환난이 닥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을 갖고서 믿음으로 이 환난을 당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두려움과 의심이 없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여호와께서 공급하시네’라고 노래하리.
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8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0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11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4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15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18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가장 시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여기에는 슬픔과 부르짖음, 하나님의 도우심, 고난받는 자의 구원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이 노래는 금으로 만든 하프로 부를 만큼 감미로운 노래이다. 이 노래의 주제는 우리 구주 메시아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 시를 자세히 상고하면 상고할수록 여기 나오는 내용이 그분 안에서 가장 깊고 심오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독자들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한때는 고난을 당하셨으나 이제는 승리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4절.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죽음은 잔혹한 정복자처럼 다윗을 고난의 줄로 얽어매었을 것이다. 가장 두려운 형태의 죽음이 그를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폭풍에 배가 깨어지고, 큰 파도에 밀려 암초에 걸린 선원과 같았다. 죽음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그를 삼키려 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나, 이처럼 슬픈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때로 그분의 자녀들을 이렇게 대하시는 것이다.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의롭지 못한 자들, 불의한 자들이 파도처럼 몰려와서 의로운 자들을 덮쳤다. 사람들은 경건한 자들을 비웃고 멸시했으며, 그들의 소망이 끊어지는 듯했다. 이 위협은 위협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을 삼켰으며, 마침내 골리앗을 죽였던 영웅까지도 두려워했다. 가장 용감했던 자, 가장 최선의 것을 바라던 자도 때로는 최악의 것을 두려워한다. 다윗은 이처럼 그가 체험했던 두려운 일을 돌아보며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여호와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지극히 어려운 환경, 두려운 상황에서 주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체험한다.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두려워할 만큼 곤경에 처해 있는가? 우리 주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분은 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5절.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지옥이 나를 잡으려 쫓아오면서 내는 소리와도 같았다. 지옥의 병사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추적하고 그 포위망을 압축해 갔다. 그가 도망갈 길은 다 막혀 버렸다. 사탄은 슬픔의 철갑선으로 우리가 있는 해안을 포위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라. 기도의 항구는 아직도 열려 있다.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향해 사탄의 포위를 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사 하늘에서 땅으로 축복을 내려 주신다.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우리의 원수는 그가 사로잡고자 노리는 자를 추적한다. 사탄은 지옥의 개를 데리고 추적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게 만든 치명적인 올가미를 가지고 추적한다. 그는 그물을 가지고 내게 가까이 나아와 포위망을 압축하고, 마침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모두 막아 버렸다. 나는 꼼짝없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지옥의 밧줄이 나를 둘렀고
죽음의 덫이 내 발을 묶었네.
다윗에게는 이처럼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고, 오직 전능하신 분의 팔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는 사형장에서 처형될 악인처럼 몸이 묶였고, 파선당한 배의 선원처럼 두려움에 싸였다. 사냥꾼에게 몰린 수사슴이 해변까지 몰린 것처럼, 그물에 사로잡힌 새처럼,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떨고 있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6절.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원수들이 성을 둘러싸고, 밖으로 나가는 길이 모두 막혔을 때에도 기도의 비밀 문은 열려 있다. 사람이 갱도에 갇혀 있고, 그곳에 홍수처럼 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절망의 구덩이에서 영적인 광부는 곧바로 위를 향한다. 그가 “아뢰며” 또 “부르짖었다”는 것을 주의해서 보라. 그는 기도를 계속하면서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의 열기를 더해 간다. 그는 “여호와”라고 부르며 기도하다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더 친밀하게 부르면서 기도한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 운동을 계속하면서 믿음은 더욱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로 알았던 그분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 어떤 괴로움이 우리를 덮쳐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죽음의 물결이 미친 듯 몰아치고, 지옥의 개들이 아무리 짖어 대도, 신실한 성도들이 올리는 기도가 아무리 약해도, 우리 하나님은 이것을 들으신다.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하늘 위에서는 보석으로 단장된 방에서, 진주문을 통해서 고난받는 성도들의 기도가 들린다. 천사들의 노래와 스랍들의 합창도 겸손히 부르짖는 그 소리를 무색하게 하지 못한다. 항상 꺼지지 않는 빛이 비치는 궁전에서 왕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아!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귀와 하나님의 마음까지 도달하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는 다른 성도들이나 성자들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 바로 여호와께 다다른다:”그 앞에서······들렸도다.” 하나님은 그분께 드리는 기도를 지체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들으시고, 개인적으로 직접 들으신다. 우리 아버지께서 직접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끈기 있게 부르짖어야 한다.
7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시고, 그분의 고난받는 자녀들을 즉시 구원해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시내산에서, 그리고 여호수아와 사사들에게 여러 장소에서 나타나신 것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을 이들에게 나타내셨던 것처럼, 그 자신에게도 영광스럽게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던 그 언어로, 이제 다시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땅은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간구하는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땅도 진동하며 그 힘을 느꼈다. 기도는 집을 흔들고, 옥문을 열며, 교만한 자들로 겁을 먹게 한다. 기도는 비상종을 울리고, 이 종소리를 듣는 집주인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구조에 나서는 것이다.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기둥으로 받쳐 두신 조물주는 그 기둥을 흔드시고 세상을 요동하게 하실 수 있다. 여호와께서 진노 가운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치실 때면 거대한 산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이다. 산들이 두려움으로 떠는데, 어떻게 보잘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겠는가?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의 날이 올 때에도 평안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8절.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이 표현은 맹렬한 분노를 나타내는 동양적인 표현이다. 코로 숨을 내쉬는 것은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을 나타낸다. 전능하신 구원자께서 코로 연기를 뿜어 대는 것은 맹렬한 분노와 열정으로 행동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어떤 것보다도 그분의 자녀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시면 가장 분노하신다. 그분의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그분의 눈동자를 해치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분노한 사람이 신속하게 온 힘을 다해 행동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고 행동하시는 것과 방불하다.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분은 입을 열기만 해도 그분의 원수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불은 잠깐 동안 붙는 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타는 불이다:”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돕기 위해 강림하신 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분이 강림하실 때는 지진과 폭풍이 일어난다. 또한 땅이 흔들리고, 구름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번개가 타오르는 불처럼 땅을 불태운다. 얼마나 장엄한 묘사인가! 맨트(Mant) 주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뜨거운 코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그 입에서는 불길이 솟아나네
타는 숯불에는 그분의 분노가 나타나고
질주하는 불길이 번쩍거리네.
9절.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보수하시는 여호와께서 폭풍의 두려움 속에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속히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모든 것을 물리치시고, 이곳에 급히 오셨다. 그리고 두터운 구름으로 그분의 영광을 감추게 하셨다:”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군인이 먼지와 연기와 구름 사이에서 싸우듯 그분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싸우셨고, 날카로운 분노의 칼로 원수들의 심장을 찌르셨다. 어두움이 하나님을 막지 못한다. 그분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다. 성도들이 기도하면 하늘과 땅을 움직이고, 폭풍이 일어나 일순간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물리치는 것을 보라. 다윗이 기도하기 전에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기 시작하자 그의 원수들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0절.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이 구절에는 장엄한 모습이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룹이란 하나님의 전차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밀턴은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위대하신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룹의 날개를 타신 그분
아버지의 영광 중에 높이 오르셔서
어둠 속으로 멀리 타고 가셨네.
그룹의 신비스러운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논쟁보다는 천사들이란 우리를 지키는 자들이고, 우리를 섬기는 친구들이며, 그들은 박해받는 성도들을 구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분은 그룹을 타고 날으셨다. 또한 이 세상의 자연은 우리를 돕는 존재들이다. 바람까지도 여기에 순응한다.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여호와께서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날아오신다. 그러나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실 때는 오랫동안 지체하신다. 그분이 날아오시는 모습은 신속할 뿐만 아니라 장엄하기도 하다.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지 않고 넓게 펴고서 장엄한 모습으로 하늘로 솟구쳐 오르듯, 여호와께서는 전능하신 분의 위엄을 갖추시고 그분의 백성들을 돕기 위해 오신다.
11절.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폭풍이 몰아치고, 빽빽한 구름이 비를 몰아와서 보이지는 않지만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눈으로도 “빽빽한 구름” 저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에게 영원한 선을 베풀기 위해 비밀스럽게 일하신다는 것을 알라. 이것은 감미로운 일이다. 어리석은 자들도 햇빛과 평화로움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이 흑암과 두려운 폭풍 중에서도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다.
12절.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갑자기 하늘의 무서운 대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숨어 계시던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듯, 번개의 “광채”가 구름을 비추었다:”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그리고 우박과 숯불이 원수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번개는 구름을 가르며 이것을 불태우는 듯했고, 우박과 불꽃의 장엄한 모습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이 모든 장엄하고 두려운 장면에, 이제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천둥과 같은 소리가 울린다. 이 소리는 진노의 불길에 어울리는 소리이다. 천둥 소리를 멀리서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인생들. 그들이 마지막 날에 천둥과 같은 소리로 심판을 선고받으면 어찌 견딜 것인가? 이 모든 두려운 광경 중에서도 다윗은 노래할 줄 알았다. 이처럼 각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중에서도 거룩한 찬송을 그분께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다윗이 이 구절을 앞 절에 이어서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의 손이 이것들을 주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혼(Horne)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천둥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분노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날, 하나님의 천둥 소리를 들을 것이다.” 우리는 이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친구 되시는 그분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면 우리는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군대들로 인하여 우리는 낙심하지 말자.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세력보다 강하고 위대하시다.
14절.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을 쏘듯이, 그들을 향해 번개를 치며 속히 흩어 버리신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하시면, 오만하게 굴던 죄인들도 보잘것없는 겁쟁이로 변하고 만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멸시하고 말로 대적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면 신속히 도망할 수밖에 없다. 번쩍이는 불꽃, 맹렬한 불화살이 그들을 무찔렀다. 하나님께 무기가 부족한 적은 결코 없다. 자신을 지으신 분과 다투는 자는 화 있을진저! 하나님이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이다. 그 화살은 번개처럼 날아가,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간다. 죄인들아! 이 화살이 너희의 영혼을 찌르기 전에 피난처 되신 바위로 피신하라.
15절.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공격하자 그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자연계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강바닥의 밑이 밖으로 드러나고, 바다가 말라 버렸다:”물밑이 드러나고.” 동굴과도 같은 땅의 내부가 모두 겉으로 드러났다:”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여호와의 “꾸지람”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여호와의 “콧김”이 이러할진대, 그분이 팔을 들어 치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분은 말씀으로 땅의 깊은 곳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분이 속삭이듯이 작은 말로 해도 온 땅이 두려움에 떠는데, 그분이 콧김을 뿜으며 꾸지람을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분께 순종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것은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
16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이제 구원의 소식이 나타난다. 그분이 “위에서” 보내신 것이다. 이 일은 하늘에서 하신 일이다. 또한 그분이 베푸신 구원은 놀라운 구원이다:”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다윗도 모세처럼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던 것이다.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다. 우리 주님은 많은 고난의 물에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그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악의 물결이 급류처럼 몰려와도 하나님의 백성을 물에 빠지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홍수 위에 계셔서 악한 자들의 분노를 저지하시며, 그분의 자녀들을 보호하신다.
17절.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는,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우리를 정복하려다 마침내는 하나님의 정복을 받은 원수들이 우리보다 강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의 영적 대적은 “강한 원수”이다. 가련하고 약한 우리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마지막까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는가? 우리가 연약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셨다. “연고로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의해서 살펴보라:”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18절. “나의 재앙의 날.” 그날은 나쁜 날이었다. 재앙의 날이었던 것이다. 악한 대적들은 교활한 방법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라고 고백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 어려운 일을 해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 안에 거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19절.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요셉은 한동안 감옥에서 탄식하며 지내다가 궁정에 도달했고,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방황하다가 보좌에 올랐다. 고난 뒤에 오는 즐거움은 진정 감미로운 것이다. 극한 가난, 외로움, 슬픔, 이러한 일을 지나서 자신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은 더욱 큰 기쁨을 자아낸다. 성이 포위되고 도망갈 곳이 없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몰아내시고 성문을 열어 주시고 광활한 약속의 땅을 보여주실 때에 더욱 기뻐한다. 하나님은 중도에서 그만두시는 법이 없다. 그분은 원수들을 쫓아내신 후,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진정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가 얻은 특권에는 제한이 없고, 우리가 누릴 평화도 무한하다.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그분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기초한 것이다. 깊은 구덩이에 빠질지라도 안심하라. 그곳에는 자비의 샘이 있고, 이 샘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자리잡고 있다. 멀고 깊은 하나님의 바다에 나아가 원양 어업을 한다면, 바다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특별한 사랑의 진주를 건져낼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천사들도 이 신비를 풀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수없이 베풀어 주신다. 성도들이여! 이 구절을 조용히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라.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인자를 베풀어 주신다.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5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27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0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이 구절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면 자신의 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의복은 눈처럼 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다윗의 말로 이해하고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 표현이 갖는 원래의 의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다윗의 말로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에 사람의 공로와는 관계 없이 주권적으로 베푸시지만, 공의를 따라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 마침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적의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서 그를 핍박했던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비방이 모두 거짓 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를 비방하는 무리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 그에게 의로움을 주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한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를 비방하는 무리 앞에서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자신의 손이 깨끗하고, 자신이 의롭게 살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정직한 자가 자신이 정직하다고 믿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정직함을 인해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은 이 세상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영적인 세계에까지 연장하면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 된다. 영적 세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에 근거해서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정직한 자가 악한 말로 비방을 받을 때에 자신의 정직함을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행동도 아니고, 구원론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경건한 사람은 맑은 양심을 가졌고, 자신이 정직하다는 것을 안다. 그가 자신의 양심을 부인하고, 자신이 실제 모습보다 더 악한 자처럼 위선적으로 말하며, 성령의 하시는 일을 멸시해야 되겠는가?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정직함을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가 존경받을 만한 성품을 지킨다고 해서 그를 교만한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경건한 자들은 자신의 의로움과 진리로 인해서 마침내 상을 받을 것을 안다. 그가 상을 받을 때에 이 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지 않겠는가? 이 구절과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읽으면서, 경건한 자가 그를 향한 욕설과 핍박과 학대를 벗어나 선한 양심을 따라 부르는 노래로 생각하라.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자신의 도덕성보다 더 높게 자신을 평가한다고 비난하지 않게 될 것이다.
21절.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다윗은 자신의 순결함을 다시 강조한다. 이 구절에는 그가 행한 일과 행하지 않은 일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삶은 진실로 성화된 삶 속에 나타나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일이 있고, 또 무엇을 하도록 권고하시는 일이 있다. 다윗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 순례자로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여호와의 도”를 따라 걸었으며, “악하게” 살아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걷기를 기뻐하시는 길이 있다. 다윗은 자신의 뜻을 따라 고집스럽게 살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버리지도 않았다. 이러한 내용이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다윗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지속하며 살았고,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알고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2절.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성품과 행하심을 항상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들을 배우고 늘 묵상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망각해 버린다. 그러나 성도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애정과 기쁨으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늘 우리 앞에 두고서 그 형상을 닮아 가야 한다. 우리가 옳은 일에 대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이 샘에는 거룩함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야 한다. 그리하면 이 샘에서 순수하고 은혜로운 샘물이 흐르게 될 것이다.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성경을 멀리하면 성경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자들, 그들은 먼지 낀 성경으로 시작하여 더러운 옷을 입게 되었다.
23절.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다윗은 자신이 성실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 앞에서 성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만큼 성실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좋은 견해를 품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악에서 자유하게 되기를 바랐다:”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우리의 성품이나 기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쇠사슬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강한 고리들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포착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는 성급한 성격으로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나오는 말처럼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도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다.
24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주시고, 후에는 이 일로 우리에게 상을 내리신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를 만드신 것은 거룩하게 살라고 만드신 것이다. 사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그에게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이 그릇을 만드신 조물주에게 속한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선발하는 대회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선정하고 꽃에게 일등의 영광을 부여하지만, 사실은 정원사가 이 꽃을 재배한 것이며, 영광은 그의 것이다. 학생은 선생님에게서 상을 받는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상을 주지만, 그 영광의 주인공은 그 학생을 가르친 선생님이다.
25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일반적인 원리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분은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시고, 각 사람에게 합당한 상과 벌을 내리신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저울로 자신의 무게를 달고, 그 자신의 되로 자신의 부피를 재며, 자신의 잣대로 자기를 측정하고 판단을 받을 것이다. 어떤 윈리보다도 이 원리는 가장 공평하다. 악인에게는 이보다 더 무서운 원리가 없고, 자비로운 자에게는 이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없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부정한 속임수로 결국에는 자신이 멸망당할 것을 안다면,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그들은 속이는 저울을 던져 버리고, 거짓 잣대를 꺾어 버릴 것이다. 이 구절에서 또한 주의해야 할 내용이 있다. 자비한 자라 할지라도 자비가 필요하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아무리 불쌍히 여기고, 원수들을 용서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비를 받아야 한다. 여호와여, 나는 죄인이오니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26절.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죄인이 자신의 뜻을 따라 외고집을 부리는 것은 죄스럽고 반역적인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은 죄인들을 엄하게 대적하시고, 그들의 뜻을 저지하시며, 그들의 사악한 변덕과 기분대로 모든 일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칼빈은 이렇게 강력하게 말했다:”이처럼 야비하고 괴물같이 어리석은 사람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레위기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레 26:23-24). 그들의 완악함과 고집스러움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이 늘 베푸시는 관용과 온유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개의치 않고 닥치는 대로 그들을 대적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의 완고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을 더욱 굳게 하시고, 그들을 벌주신다. 그들이 돌처럼 굳은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그들로 쇠처럼 굳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맛이 달랐다고 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각 사람의 성품을 따라 자신을 계시해 보이신다.
27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이 구절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구절이다. 영적 슬픔을 겪는 자는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만 위로를 받는다.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다른 사람들을 멸시는 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이 멸시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싫어하신다. 이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회개하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 겸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겸허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기쁨을 누리고 때로는 슬픔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상과 벌이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고, 현재 당하는 일들에 큰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한다.
28절.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빛의 자녀들도 때로는 “등불”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 중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에 빛은 떠오르는 법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불로 우리의 등에 불을 붙이실 것이다. 하나님이 붙이신 불은 마귀가 끌 수 없다. 모든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현재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니다. 등불의 은유는 어두움은 슬픈 것이고 빛은 기쁨을 나타낸다는 일반적인 특성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다. 진실로 빛이란 감미로운 것이며, 태양의 빛을 받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면 모든 슬픔을 제하시고, 성도들로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긴긴 겨울밤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빛을 받는 것은 더욱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애굽의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아껴서 등의 기름을 산다고 한다. 어두움 속에서 앉아 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 영혼을 기쁘게 하도록, 우리는 이 세상의 기쁨을 포기할 수 있어야겠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32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33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37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39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40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42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성경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쓸데 없는 반복은 아니다. 포도주통의 바닥에 남은 포도주가 그 맛이 더욱 강렬하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할수록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은 더 강렬해지고 감미로워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구절들은 감사하는 영혼에게서 나온 익은 과일처럼 감미로운 것들이다. 여기 나오는 언어들은 은쟁반과 같고, 이 구절에 담긴 내용은 금사과와도 같다. 이 구절들에는 성도들의 승리와 원수들의 혼돈과 패배가 나타나 있다.
29절.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우리가 원수를 넓은 들판에서 만나든지, 아니면 우리가 사는 성벽 뒤에서 숨어 살피는 그들을 덮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이 수많은 군대로 우리를 포위하든지, 돌벽으로 우리를 에워싸든지, 우리는 그들을 이기고 자유를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곤경을 이겨 내고 불가능한 산들을 기어오르며 이런 위업을 이루어 냈다. 하나님의 군병들은 어떤 종류의 전투도 믿음으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승리의 월계관을 여호와의 발 앞에 드리며 “나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전쟁의 신께 드리며,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30절.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루시는 데에는 어떤 실수도 있을 수 없다. 그분의 행하심은 정의와 진리, 온유함과 자비와 거룩함으로 빛이 난다. 그분은 선을 행하신다. 우리를 축복하기 시작하신 그분이 이 일을 완전하게 이루실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가? 그분의 도는 “완전”하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여호와의 “말씀”도 찬양의 대상이다. 이 말씀은 용광로에서 연단한 은처럼 연단을 받은 것이다. 말씀에 나타난 교리는 영광스럽고, 그 교훈은 순수하며, 여기에 나타난 약속은 신실하고, 이 모든 계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다윗도 이 말씀을 시험해 보았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도 시험해 보았으며, 우리도 시험해 보았지만 이 말씀은 결코 거짓 되지 않았다.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 우리가 여호와의 도와 그 말씀을 높였다면, 또한 당연히 여호와를 높여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라고 덧붙였다. 어떤 무기도, 어떤 방패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 전쟁터에서 그분의 백성을 지키시는 것처럼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 여호와, 바로 그분이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지키는 방패가 되신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 그분을 신뢰하는 영혼들에게 이 얼마나 평강을 주는 말씀인가!
31절.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자, 시편 기자의 가슴이 불타며 그의 말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는 하늘과 땅을 향해 여호와처럼 찬송과 신뢰를 받아야 할 자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고 도전한다. 매튜 헨리가 말했듯이, 그의 하나님과 같은 분은 어디에도 없다. 이방인들의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호와를 제외하고 누가 감히 하나님이라 할 자가 있는가?” 여호와 외에 누가 세상을 만들고, 붙들며, 앞날을 미리 보고 통치하는가? 그분 외에 누구의 도가 완전하고, 그 행하는 것이 영광스러운가? 피조물이 경배할 분이 여호와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세상의 어느 신이 피조물의 사랑과 봉사를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 되시는가?” 우리의 소망을 누구에게 두어야 하겠는가? 세상의 영혼들이 누구에게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신가? 누가 진정 강한 분이신가?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과 피난처를 발견한다.
32절. “띠 띠우시며.” 시편 기자는 그가 싸우고 원수들을 정복하는 데 사용했던 무기들을 살펴보며,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의 여러 부분을 말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한다. 그는 먼저 허리에 차고 있는 띠를 언급한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힘으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서, 피조물의 어떤 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채워졌다. 그는 이 놀라운 띠가 없었던들 나약한 존재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의 띠를 띠고서 삶의 목적이 분명해졌고, 용감하게 힘을 집중하여 싸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고, 치명적인 실패도 겪지 않아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넉넉히 이기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는 띠로 띠우시고, 전투에서 승리하며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피곤하지 않게 하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자.
33절. “암사슴 발.” 하나님은 정복자의 발에 신을 신기셨다. 그래서 정복자는 이렇게 노래했다:”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원수들을 추격하는 데 이 정복자의 발은 젊은 노루처럼, 사슴처럼 빨랐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빠른 것으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우리의 생각이 민첩하고 빠르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난공불락의 산성으로 올라가면서, 다윗은 미끄러지지 않고 오직 야생 염소나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시 영광, 봉사, 시련, 위험 등의 높은 곳에 처했었으나 넘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하프를 타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즐거운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 우리가 넘어졌더라면 우리는 슬프게 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섰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자.
34절.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다윗은 감사한 마음으로 무기를 잘 사용하고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결과라고 인정한다. 타고난 기술이나 후에 훈련으로 습득한 기술이라도 자기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으로 알고서 이것을 주신 분께 감사를 올린다. 성령님은 천국의 군사들을 훈련하는 훌륭한 교관이시다.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KJV에는 “내 팔이 철 활을 부러뜨리도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 활은 놋 활을 말할 것이다. 이런 활은 팔의 힘만으로는 구부릴 수 없다. 궁사가 발의 힘까지 쓰지 않으면 구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활을 구부리고 둘로 부러뜨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활은 원수들의 활이다. 그는 원수의 손에서 이 활을 빼앗고, 이것을 부러뜨려서 원수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불 같은 제안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부러뜨리셨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도 계시된 진리의 검으로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꺾으며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다윗은 아마 건장한 육체를 가졌을 것이다. 그는 삼손처럼 때로는 비상한 힘을 쓰곤 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그는 자신이 얻은 승리를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돌린다. 우리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가로채지 말자. 그리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려 드리자.
35절.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으로도 사탄이 쏘아 대는 불화살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방패는 하늘에서 제작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직접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온전한 구원의 통로가 되고, 구원을 얻은 표이며, 구원의 보증이 된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보존하고, 주권적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홀로 설 수 없다. 그러나 주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면 우리는 쇠기둥처럼 튼튼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이 구절을 몇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먼저 “주의 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선을 베푸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위대하게 된 것을 자신의 선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으로 돌렸다. “주의 섭리가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선하심이 꽃봉오리와 같다면, 섭리는 꽃과도 같다. 또는 선하심을 씨앗에 비유한다면, 섭리는 추수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도우심”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섭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으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로 성도들을 도우시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신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주의 겸손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주의 겸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마 종합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기 언급된 여러 가지 의미를 합한 종합적인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며, 이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시지 않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그대로 나타내셨더라면, 우리는 미천한 존재이기에 모두 그분의 발 아래 짓밟혔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 머리를 굽히셔야 하고, 천사들이 행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셔야 할 만큼 위대하고 높은 분이시다. 그런 위대하신 분께서 미천하고 통회하는 자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크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원문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해석들을 소개한 것이지만, 성경의 역본에는 이와 달리 해석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70인역에는 “주의 경계가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주의 경계”란 “아버지가 베푸시는 교훈”과 같은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의 아람어 역본에는 “주의 말씀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의역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다. 다윗은 그가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고 선을 베푸신 까닭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신 까닭이라고 한다. 우리도 모두 이와 같은 마음을 갖자. 하나님께서 어떤 선을 베푸시거나 우리를 크게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면류관을 그분의 발 아래에 던지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고백하자.
36절.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광활한 대지와 들판으로 인도하는 길이 그에게 열려 있었다. 좁은 산길을 걷거나 동굴이나 바위틈에 숨는 것이 아니라 평원을 가로지르고 그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거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의 발로 실족지 않고 이러한 자유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더욱 큰 자비이다. 고난의 바위산에서 바로설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요로운 평원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
37절.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성도들이 보존된다는 것은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아주 나쁜 징조이다. 아말렉 족속은 그들의 전리품을 탈취하여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윗의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아말렉 족속을 추격하게 하셨을 때, 다윗은 그들을 덮쳐 멸망시키고 말았다(삼상 30:16-20).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죄와 슬픔은 도망간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은 은혜의 능력 앞에서 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묘사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
38절. “내가 저희를 쳐서.” 우리의 영적 원수들은 철저하게 멸망당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죄와 죽음과 지옥을 정복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는 기뻐 뛸 수 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도’ 이렇게 승리하시기를 바란다.
39, 40절. “대저 주께서······주께서.”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에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구원의 하나님께 이 승리를 돌려 드려야 한다. 우리 자신이 영적 원수들을 대하여 씨름하고 투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야심가처럼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의 도구로 쓰임받았다는 것에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41절.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기도란 진정 성능이 우수한 무기이다. 원수들까지도 절망의 구덩이에 처했을 때는 이 무기를 쓰려고 한다. 악인들도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보지만, 이는 쓸데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누이지 않았고,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친구들을 희생시키면서 원수들을 도우시지 않는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있으며, 이런 기도는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맹렬한 진노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악한 마음을 만족시키고자 어떤 사람에게 그의 자식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인성을 무시한 이런 부탁을 듣고서 그가 오히려 화를 내고 진노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원수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이단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교회를 파멸시켜야 한다고 했다면, 여호와께서 이 악한 마음을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42절. “바람 앞에 티끌같이······거리의 진흙같이.” 다윗 왕은 그를 대적하던 나라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마치 절구에서 가루로 부수듯이 부숴 버렸다. 그들의 힘은 산산조각이 나고 마침내 바람 앞의 먼지처럼 약해졌고, 길의 진흙처럼 천해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후손께서 십자가에서 얻은 승리로 하나님의 원수들은 힘을 잃고 비천해진 것이다. 내 영혼아, 일어나라. 너의 원수들을 대적하라. 그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네가 담대히 나가기만 하면 땅에 엎드러질 것이다.
지옥과 내 죄가 나의 가는 길을 막으나
지옥과 죄는 정복당한 원수라네
예수께서 그들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다시 일어나실 때에 승리의 노래를 불렀네.
43절.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내부의 분열과 다툼은 정말 다루기가 어렵다. 한 나라의 내전은 그 나라에 가장 비참한 일이다. 민족이 조화와 화합을 이룬다면 이는 깊이 감사할 일이다. 시편 기자는 그가 통치하는 나라에 평화와 일치를 허락하신 여호와께 찬양을 돌린다. 우리의 영과 혼과 육에 조화를 이루고 평강을 누린다면, 우리도 역시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돌려 드려야 한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면 이 역시 감사할 일이다.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유다의 왕에게 굴복했다. 아! 모든 땅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거룩한 기쁨으로 그분을 섬길 때가 언제쯤에나 이를 것인가? 이 구절은 그 내용으로 보아서 다윗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글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머리로 모신다는 선포에서 선교사들은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4절.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한때는 외롭게 고군분투하던 자가 이제는 멀리까지 알려진 승리자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쉽게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는 예수께 대한 말을 하고자 한다.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도 때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이 속히 전파되는 것을 보기도 한다. 복음을 전혀 들어 보지도 못했던 자들이 그 메시지를 처음 듣고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도 한다. 아!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서도 그 가르침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퍅하게 만들고 만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마른 그루터기에 불이 맹렬히 타는 것처럼 속히 번져 한 나라를 단시간에 거듭나게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사랑을 고백하실 때, “첫눈에 반한 사랑”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분의 복음이 전해지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받아들인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이방인에게 전하는 데 이 얼마나 격려가 되는 말씀인가!
45절.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불에 탄 나무와 잎사귀처럼, 우리의 원수와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진액이 다 빠지고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 대해 이방인들은 행복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며, 진정한 기쁨을 알지 못한다. 생명의 샘에서 물을 얻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곧 시들고 만다.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들의 높은 산성에서 떨며 나올 것이다. 이와 같이 자만심의 성곽과 세상에서 얻는 안락의 구덩이에서 죄인들은 허리를 굽히고 나와서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 굴복할 것이다. 우리의 죄도 우리의 육신과 피를 성곽으로 삼아 우리 안에 숨어 있다. 그러나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곧 쫓겨나고,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과거에 있었던 승리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앞으로 얻을 승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린다.
46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48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46절.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여호와께서는 누구에게서 생명을 이어받지도 않으시고, 스스로 계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다. 우리는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거나 생명이 없이 죽어 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분만이 영존하신 분이다.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겠다. 새로운 마음으로 영존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자. 우리 하나님이 사시는 동안, 우리도 살 것이다.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그분은 우리 소망의 근원이시다. 우리의 찬양을 그분께 돌려 드리자.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찬양하고, 거룩한 사랑으로 그분을 높이자.
여호와께서 사시니, 내 반석을 찬양하라
내게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소서.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우리 구세주로서 여호와는 항상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십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택, 아들의 구속,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가 멸망당해야 마땅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은 참으로 귀하신 분이다. 하늘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피로 씻어 주신 그분께 찬양을 돌린다. 땅에서도 성도들이 모인 곳마다 이런 노래가 울려야겠다.
47절.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는 것은 악한 일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징벌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그가 이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면 그는 책망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죄인이 멸망당한다는 것은 죄인에게는 고통스런 일이지만, 여호와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것은 의로운 자에게는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심판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심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그분은 심판을 행하되 공의롭게 행하시고, 또 오래 참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심판을 맡길 수 있다.
48절.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여호와는 모든 원수들에게서, 특히 강포한 자에게서 그분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보존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사울과 다른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영광스럽게 통치하셨다. 이와 같은 일이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어 낮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셨으나, 이제는 모든 권세자들 위에서 높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49절.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바울은 이 구절을 로마서에서 인용했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9). 이 구절은 다윗이 주께 찬송을 돌리는 것이 명백하다. 다윗은 악인들이 있는 중에서도 하나님을 자랑하는 본을 보인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 앞에서 우리의 입을 닫고 있어야 하겠는가?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배반자에게 지나치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 왕께 반역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다.
50절.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이 구절로 다윗은 충만한 기쁨을 표현하며 시를 마친다. “구원”은 히브리어로 복수형 명사이다. 이것은 구원에 여러 가지 면이 있고, 온전한 구원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큰” 구원이다. 무엇에서 구원받았는가? 구원을 받아 어떻게 되었는가? 무엇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이것들을 생각한다면 이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우리는 이 모든 자비를 우리의 왕이시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안에서 받았다. 이 자비를 영원히 받을 자들은 진정 복을 받은 자들이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신실하셨다. 그분은 또한 다윗의 후손, 메시아와의 언약을 지키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 시는 시작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마친다. 순례자의 길을 걸으면서 힘에 힘을 얻고, 사랑의 노래를 계속하여 부를 수 있는 자는 복된 자들이다.
[주해와 설명들]시 18편 전체. 이 시는 “장엄한 감사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온전하신 하나님, 시편 기자에게 도움을 주셨던 그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체험했던 위험, 원수들의 힘과 이 위험에서 속히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 그리고 심판에 나타난 구원자의 진노와 능력을 묘사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생생한 색깔로 묘사하며, 이것을 읽는 동안 사람들은 번개를 보고, 천둥 소리를 들으며, 지진을 겪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전투를 직접 목격한 자로서, 그리고 이 전투에 참가한 자로서 그가 얻은 승리를 묘사한다. 그는 제국이 널리 확장되는 것을 예언하고, 그를 구원하고 승리하게 하신 여호와께 감사의 찬양을 돌리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 시의 문체는 지극히 수사적이고 시적이고 장엄하며, 여러 가지 진귀한 수사법이 동원된다. 빼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대한 감동과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에 대한 경외심에 차서 이 시를 지었다. -존 브라운(John Brown, D.D., 1853).
시 18편 전체. 키토(Kitto)는 그의 저서 픽토리얼 바이블(The Pic- torial Bible)에서 사무엘하 22장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이것은 시 18편과 같다······유대교에서는 이 둘 사이에서 74가지의 다른 점을 찾아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다. 아마 사무엘하 22장은 그가 어린 시절에 지은 것이고, 시 18편은 후에 나이가 들어서 이 시를 개작하고 영장에게 보낸 것일 것이다. 물론 사무엘하를 먼저 기록했을 것이다.”
시 18편 전체. 미카엘리스(Michaelis)는 이 시를 모세의 시보다 더 인위적이라고 했다. 형식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그 내용은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성경에서 가장 장엄한 시들 중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치 시인이 눈앞에 펼쳐지는 찬란하고 황홀한 빛을 따라서 기록한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원수들에게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시기까지 했겠느냐고 물으며 반대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은 가까이 계셔서 우리가 부르짖거나 바라보기만 해도 바로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 하나님의 위엄에 걸맞은 장엄한 모습으로, 불빛이 번쩍이는 구름 가운데서 오시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분이 땅에 내리신다면 왜 위풍당당하게 오실 수 없단 말인가?
시 18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림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다. 또한 이 시에서 “나”와 “당신”이 미묘하게 반복되는 것도 사람들을 매혹한다. 히브리 시에서 대구법이 주요 문학 기법이라는 것을 언급했다. 우리는 이 대구법이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구원을 받는 자와 구원하는 자가 시 18편 전체를 통해서 나타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절).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3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16절).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28절).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32절).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35절).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43절). “나”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 반대편에 있는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논리가 있었다.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 시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뚜렷하게 인식한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지고 느끼며, 감사와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조지 길필란(George Gilfillan, The Bards of the Bible, 1852).
시 18편 전체.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는 잠언을 읽으라. 거룩해지고자 하는 자는 시편을 읽으라. 시편에는 거룩함이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시편의 앞 부분에 위치해 있지만, 그 머리말에 나타난 것처럼 다윗의 노년기에 기록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다윗의 생애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로 남아 있다. 이 시는 성경에 두 번 기록되어 있으며(삼하 22장, 시 18편), 그것으로도 이 시가 감미롭고 탁월한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시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 마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애에 겪었던 어려움과 하나님의 구원을 돌아보며, 여호와께 찬양을 돌리기 위해 이 시를 기록했다. 인생을 다 살고 노년기에 이른 자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선하심과 그 섭리를 기억하고, 자리에 앉아서 그분이 베푸신 자비로운 일들을 기록하라. 이것은 당신 자신과 후손들에게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께 어떻게 선을 베푸셨는가를 안다면, 당신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이처럼 당신의 자녀들도 당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다윗이 노년기에 이 시를 기록했는데, 그는 당신이 따를 아름다운 본이 되었다. 그가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을 받고서,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서, 그가 세상에서 겪었던 이 훈훈하고 좋은 소식들을 세상에 남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가 이 시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의해 보라. 그는 인생의 여정에서 얻은 트로피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린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절).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자비를 보이시듯이, 우리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흐르는 냇물의 근원을 추적해 가면 샘에 이르게 되듯이, 우리가 받은 모든 선물을 추적해 보면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이르게 된다.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질병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당신은 나에게 은혜와 위로를 베푸셨나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께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을 돌린 후에(2절),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1) 그가 당한 위험(4-5절).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음부의 줄”, “사망의 올무.” (2) 하나님께 기도함(6절).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부르짖으면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다.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거나 훌쩍거리고 울면 엄마는 이것을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비명을 지르듯이 온 힘을 다해서 운다면, 엄마는 하던 일을 제쳐 두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준다. 우리가 속삭이듯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묵묵히 계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는다면 여호와께서는 “내가 이제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신다. (3) 하나님의 구원(7-20절). 하나님은 강하고 능한 손으로 그분의 종을 돕고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신다. 그분은 자녀들을 사자의 발톱에 남겨 두지 않고, 하늘과 땅을 진동하며 자녀를 구원하신다. (4)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20절 등).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의롭게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향하여 이렇게 간구하는 것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25절).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 Plain Discourse upon Uprightness, 1670).
시 18편 전체. 때로 하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면서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은 때로 사람을 낮추기도 하실 뿐 아니라, 또한 높이 들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때에 우리는 위로를 받고 무척 즐거워한다. 겨울이 지나면, 사람들은 곡하는 옷을 벗어 버린다. 아! 하늘의 은총을 받은 영혼들은 하나님께 감미로운 찬양을 돌려 드린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케 하시고 높이 드시는가?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찬양으로 높인다. 이 시의 머리말과 1-3절을 보라.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셨을 때, 모세와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그들은 감사의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출 15장). -존 플라벨(John Flavel).
머리말. “여호와의 종.” 이 이름은 모세를 지칭하는 이름이고(수 1:1, 13, 15, 그리고 여호수아서에 아홉 군데가 더 있다), 또한 여호수아를 지칭하는 이름이다(수 24:29; 삿 2:8). 그러나 이 두 사람 외에는 다윗에게만 주어진 이름이다(시 18편과 36편의 머리말).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려 준다. 그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잇는 후계자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땅에 이스라엘의 주권을 세운 왕이다. -케이(W. Kay, 1871).
머리말. “쉬라”(hryv, 노래)라고 머리말이 붙어 있는 이 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대적에게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머리말, 그리고 사무엘하 22장을 참조하라). 또한 이 시는 시편에서 자리한 그 위치가 적합하다. 이 시는 고난 이후에 오는 부활을 노래한다. 이 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고 머리말이 붙었는데, 이 시는 다른 구원의 시(시 36편)와 연관되어 있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Christopher Wordsworth).
1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명사형은 히브리어로 “레헴”(!jr)이라고 하며 이는 ‘자궁’이란 뜻이다.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내장으로부터 또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단어는 사람의 내장을 움직이는 그런 동정심과 자비를 함축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나의 깊은 곳에 있는 내장으로부터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시 119:159).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
1절.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사랑”이란 어머니가 그 자궁에서 나온 아이를 사랑하듯이, 그처럼 친밀한 사랑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집회의 주석(1651).
1, 2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도들에게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라고 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백성들의 구원이고 분깃이 되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이 아니라면, 그들은 구원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즐기는 것을 더 기뻐했다. 거짓 영이나 육신을 좇는 영은 하나님보다는 구원이나 천국이나 영광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구원을 좋아하지만 구세주와는 무관하게 산다. 그러나 믿음이란 하나님, 그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분은 나의 구원이 되신다. 그분을 소유하면 구원은 따라오는 것이다. 그분은 나의 생명이시며, 나의 위로시며, 나의 부와 명예와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 이처럼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힘이 되신다는 것을 더 기뻐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그의 구원이 되신다는 것을 더 기뻐했다. 다윗은 요새와 방패와 구원의 뿔과 산성이 주는 효과보다도 하나님이 그의 요새가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신다는 것을 더 기뻐했던 것이다. 다윗이나 진실된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보다 현세의 구원이든 영원한 구원이든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이 되신다는 것을 기뻐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분께 관심을 갖는다. -조셉 캐릴(Joseph Caryl) .
1, 2절. 다윗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자처럼 말했다. 그의 입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가득했다. -에드워드 마베리(Edward Marbury).
2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기어오르기 힘든 바위가 추적자를 피해 숨기에 좋은 피난처가 되듯, 하나님은 고난 중에 구원받기 위해 피하는 자들의 안식처가 되신다. -로버트 코드레이(Robert Cawdray).
2절.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피난처에 몸을 숨긴 자들도 때로는 기근을 이기지 못하여 아래에서 지키고 있는 자들에게 항복을 하곤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안전을 주실 뿐만 아니라 자유도 주신다. 그분은 피난처에서 그들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밖으로 나가도록 도우신다. -야르키(Jarchi).
2절.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이 구절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동물의 뿔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동물의 뿔로 자신을 보호하고 원수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 동물의 뿔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구절이 군인들의 투구를 말한다고 생각했다. 군인들은 투구에 뿔이나, 뿔과 같은 장식품을 달고 다녔다. 따라서 뿔은 곧 투구를 의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원의 투구”는 ‘구원하고 보호하는 투구’와 같은 의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구절이 성전에 있는 제단의 손잡이나 귀퉁이를 말한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을 뿔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높고 험준한 산의 꼭대기를 말한다고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히브리 사람들은 산을 뿔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참고. 사 5:1). 지극히 기름진 산을 기름의 뿔이라고 했다. 우리가 어떤 견해를 따르든지 그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방패”와 연관하여 뿔을 투구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 표현은 다음 구절과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시 140:7). -존 브라운.
2절.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뿔”이란 일반 문학 작품이나 성경에서 힘과 권력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뿔이 달린 짐승에서 가져온 은유로서 이 뿔은 동물이 공격을 하거나 수비를 할 때에 그 힘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브루스(Bruce)는 아비시니아 지방의 총독들이 머리에 썼던 의상에 대해 기록했다. 그들은 머리에 넓은 천으로 된 머리띠를 묶었는데, 이 머리띠의 이마 부분에는 뿔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조각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퍼레이드를 할 때에 이 머리띠를 썼다. 그는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전래된 것으로 보는데, 성경에는 이와 같이 뿔을 사용했던 기록들-“뿔을 들다”, “뿔을 높이다” 등과 같은 표현-이 나타나 있다. -리처드 맨트(Richard Mant).
2절. “나의 산성이시로다.” 사람이 산성으로 피한다고 해도, 그 산성을 지키는 군인이나 군수품이 없어서 취약한 산성이거나, 또는 파괴되고 무너진 산성이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또는 그가 견고한 산성을 택했다고 해도 위험을 당하여 산성으로 도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면, 또는 그곳으로 급히 뛰어가지 않고 걸어간다면, 그가 산성에 피해 안전을 도모하기 전에 원수들이 그를 덮치고 체포하고 놀라게 하고 사지를 결단내고 말 것이다. 그가 안전히 지내고자 한다면 견고한 산성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뛰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뛰어간다고 해도 견고한 산성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다윗이 그의 산성으로 피하자 그곳에서 대포 소리가 들렸다. 다윗은 기도로 대포에 불을 붙인 것이다:”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6절). 다윗이 기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7, 8, 13, 14절을 보라.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7절).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8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13, 14절). 다윗의 시대에는 총도 없었고 대포도 없었다. 그러나 다윗이 이 산성에서 기도하자 세상의 모든 대포를 모아서 원수들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다윗은 천둥 소리가 나는 것과도 같은 대포를 가졌고, 이 무기로 화약과 총이 발명되기도 전에 원수들을 무찔렀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군대에는 크리스천으로 구성된 군단이 있었는데, 그 군단의 무용담은 널리 알려졌다.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원수들은 막강했고 크리스천 군인들은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그들이 기도하여 비가 내렸는데, 이 비로 그들은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대적들이 있는 곳에는 천둥과 우박이 내렸다. 그들은 이것을 “천둥 군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기도로 다윗의 대포를 사용하여 원수들을 무찔렀다. -예레미야 다이크(Jeremiah Dyke, Righteous Man’s Tower, 1639).
2절. “나의 산성.” 새들은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과 덫을 피하려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 무수한 덫과 유혹을 피하려면 하나님께 날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타락과 헛된 영광과 속임수에서 벗어나 위를 향해야 한다. -로버트 코드레이.
3절.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할 때에는 항상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한다. 믿음을 가진 자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고 또 약속하신 선한 것들을 받아야 한다.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3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나아와 기도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올바른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도구이다. -윌리엄 플러머(William S. Plumer).
4절. “사망의 줄.” 오직 천국만이 살아 있는 자들이 사는 곳이다. 이 세상과 세상에서의 삶은 사망의 그림자요, 죽음의 문이요, 사망의 슬픔이요, 죽음의 덫이요, 죽음의 공포요, 죽음의 방이요, 죽음의 선고요, 죽음의 길일 뿐이다. -매튜 그리피스(Matthew Griffith, 1634).
4절.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첫째, 이것은 ‘죽은 자를 묶는 줄’을 의미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망의 줄”은 사람이 죽은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둘째, “사망의 줄”은 난폭하게 죽이기 위해 묶는 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죽음을 당할 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묶는 것이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고대에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을 언급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시골에서 넓은 지역을 튼튼한 줄로 경계를 치고 이 경계를 좁혀 들어가면, 그 안에 있는 사냥감은 그곳에 갇혀서 사냥꾼이 쉽게 잡을 수 있게 된다. 이 줄은 동물의 죽음을 확보하는 사망의 줄이다.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이 구절은 우리 주님께 적용될 수 있다. “불의의 창수”가 그를 두렵게 하고, 사망의 줄로 얽었으므로 두번째 해석이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존 브라운.
4절. “불의의 창수.” 시편에서 예기치 않은 무서운 재난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큰 홍수로 나타낸다. 이런 비유는 히브리 사람들의 습관이나 그 지역의 자연과 기후에 적합하게 표현된 것이다. 매년 여름이 오면 리바누스와 그 주위에 있는 산의 눈이 녹아서 갑자기 급류가 흐르고 그들이 늘 바라보는 요단 강은 홍수로 둑까지 넘쳤다. 또한 일년 내내 흐르는 강은 없었지만, 산악 지방이라서 우기가 되면 계곡을 따라 급류가 흘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며, 그래서 재난에 대해 말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썼다. -로버트 로스(Robert Lowth, 주교, 1710-1787).
5절.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올무”란 새나 야생 동물을 잡기 위해 설치한 덫을 말한다. -존 브라운.
6절. “내가 환난에서.” 다윗이 타는 하프 소리를 당신이 들었다면 마치 장송곡과 같은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에 솔로몬의 기쁨보다는 욥의 고통을 더 많이 기록해 두셨다. 사업의 번성함 중에도 두려움과 혐오가 들어 있고, 곤경 중에도 또한 위로와 소망이 있다. 공교하게 수놓아진 자수를 보라. 슬프고 엄숙한 배경에 활기찬 모습이 들어 있는 작품이, 밝은 배경에 어둡고 우울한 모습이 들어 있는 작품보다 보기가 더 좋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덕스러운 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한다. 부서지고 깨어질 때에 덕은 더욱 향기로워지는 것이다. 번성함은 악을 발견하게 되는 데 불과하지만, 고난 중에는 덕을 발견하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6절.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기도는 유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비로운 귀를 향한 믿음의 부르짖음이다. -한나 무어(Hannah Moore, 1745-1833).
6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로마의 의전관은 불평이나 민원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 두었다. “하나님의 자비의 문은 그분의 신실하신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가 도달하도록 항상 열려 있다.” 페르시아 왕은 신복이라 할지라도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왕의 영광으로 알았다.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부름을 받지 않고 왕에게 나아와 청을 올리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에스더 자신도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천국의 왕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분께 나아올 것을 말씀하신다:”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그리고 그분께 나아오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영혼의 병이 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막의 문은 견고한 문이 아니며,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베일로 되어 있다. 성전 안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전 뜰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이며, 성전과 제단에서 예배를 드린다(계 11:1).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찰스 브래드버리(Charles Bradbury, Cabinet of Jewels, 1785).
6절.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믿음과 기도에 대한 다음의 말은 옳은 말이다:”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믿음은 안전하고, 우리가 안전할 때 믿음은 위험에 처한다. 기도는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에 뜨거워지고, 우리가 즐겁고 번성할 때는 죽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차거워지거나 미지근해진다.” 곤경이 우리로 하여금 땅의 것을 추구하고 진흙탕 속에서 뒹굴지 않게 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고난은 우리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하고, 하늘의 것에 더욱 소망을 품고 사랑하게 한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고난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로버트 레이턴(Robert Leighton, D.D.).
6, 7절. 성도 한 사람의 기도로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영혼들이 모인 천둥 군대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루터가 하려고 하던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대적들은 루터가 드리는 기도의 능력을 느꼈고, 하나님의 교회는 그가 이루어 놓은 일에서 축복을 누리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은 수만의 군대보다도 존 녹스의 기도를 더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들은 대적들에게서 비방과 저주를 받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끊임없이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때가 올 것이다. -존 플라벨.
7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히브리어 “가아쉬”(v[g)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술취한 자가 비틀거리고 땅을 기어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렘 25:16). -존 모리슨(John Morison).
7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겉으로 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을 성취하실 것을 의심하지 말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면 이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약속하신 그분이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모든 일을 준비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 3:5)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골짜기가 너무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고, 산이 너무 높아서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골짜기를 메우고 산을 낮추는 법을 아신다.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사 63:1).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불충함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실 것이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롬 3:3). 그분이 지체하신다고 하여 믿음을 버리지 말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지체되는 듯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기에 그 말씀을 의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는 듯해도, 약속이 폐하여 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시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마음에 품지 말라:”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시 77:8).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히 폐해질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진다면, 그분의 존재도 역시 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기대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당신이 바라는 시간보다 더 좋은 것이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분이 늦게 오신다고 불평하지 말라. 그분은 모든 것이 준비되고 그분이 나타나실 시기가 무르익으면 곧 나타나실 것이다. 그분은 약속을 결코 폐하지 않으시며, 또한 지체하지도 않으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 3:9). 그분이 조금 늦게 행하실지라도 기다리라. 그분이 얼굴을 가리우신다고 해도 그분이 마음을 숨기신 것은 아니다. 기도 응답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티모시 크루소(Timothy Cruso).
7, 8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팔레스타인의 화산 현상은 자료가 빈약하여 과학적 입장에서 토론할 성질이 못된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와 문학 작품을 살펴보면 이런 화산 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요단 계곡은 항상 화산 활동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유대 땅 전역이 화산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지진의 위협은 있었다. 화산 활동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앞으로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화산 활동이 백성들의 정서에 어떤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의 글에는 이런 영향을 받은 것들이 나타나 있다. 유대 땅이 흔들렸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속에도 불 같은 격정이 들어 있다. -아서 펜린 스탠리(Arthur Penrhyn Stanley).
7-9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초자연적인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그분의 영혼이 떠나자마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쪼개지고 무덤들이 열렸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고,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존 브라운.
7-9절. 이두메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야영을 하던 밤에 거대한 태풍과 맹렬한 바람이 일며 비가 무섭게 내리쳤다. 번개가 치고 무섭게 천둥이 울며 땅이 흔들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륙을 당한 것에 자연도 혼란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작은 재앙의 표가 아니었다······오순절 날, 대제사장들이 밤에 그들의 습관을 따라 성전 안에 들어가 종교 의식을 수행하려고 했을 때에 거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곳을 떠나가자”라는 말이 들렸다고 한다······무교절이 지난 며칠 후,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것을 본 사람이 직접 전해 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후에 일어난 비극적인 일이 이 광경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면, 이것을 단순히 우화로 치부해 버렸을 것이다. 해가 지기 전, 구름 가운데서 전차와 무장을 한 부대가 빨리 움직이며 도성을 포위하는 모습이 온 나라의 공중에 나타났던 것이다. -요세푸스(Josephus, 37-103).
8절.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고대 사람들은 코나 콧구멍을 분노의 중심지로 알았다. 화가 날 때면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무엘 챈들러(Samuel Chandler, D.D., 1776).
8-19절. 다윗은 그가 받은 놀라운 구원에 걸맞은 표현으로 묘사하고자 여러 가지 시적 이미지를 동원한다. 그가 받은 구원은 하늘과 땅에 나타나는 증거처럼 명백하고, 자연계에 나타나는 현상이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힘 있고 갑작스런 구원이었다고 묘사하는 것이다. ‘구원’을 주제로 삼았기에 하늘의 평화로운 현상을 비유로 표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보다는 진노를 당할 때, 무지개가 떴을 때보다는 폭풍 가운데 있을 때 천국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임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아름다움과 진실됨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편 18편에 나오는 것처럼 동방에서 일어나는 폭풍의 힘을 이해해야 한다. 8절에 숯불이 나오는데, 이는 번개가 치면서 폭풍이 이는 것을 가리킨다. 9절에서는 구름이 산 정상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폭풍이 일면서 그 빽빽한 구름의 깃을 흔들고, 하나님께서는 구름에 싸여 땅으로 오신다. 우박과 번개가 검은 구름에서 떨어져 내리고(이것은 동양에서 폭풍이 일 때 흔히 있는 현상이다), 번개가 검은 구름 가운데서 빛을 발하며 번쩍인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천둥이 그 목소리가 되고, 그분이 활을 쏘시면 번쩍이는 번개가 그분의 화살이 된다. 그분이 꾸짖고 숨을 몰아 내쉬면 땅이 물러서고, 바다가 거품을 내며 그 바닥을 드러내고, 땅이 터지며 세상의 근원이 드러난다. 그리고, 아! 이때 검은 구름 저편에서 구원의 손이 나온다. 깊은 절망의 구덩이에서 부르짖던 가련한 자를 끌어올리시고, 그 모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내신다. 여호와의 손은 다윗의 생애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만 이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윗처럼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기보다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신 하나님께 그저 냉냉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할 뿐이다. -톨룩(F. Augustus Tholuck, D.D., Ph.D., 1856).
9절.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폭풍우가 일어날 것처럼 구름이 땅으로 가까이 드리우고, 산에서 골짜기로 내려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기 위해 가까이 오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이런 표현을 썼다(참고. 시 144:5; 히 3:6).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여기에는 폭풍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더욱 가까이 임하시는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의 발 아래는 흑암이 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나타나실 때에도 두터운 흑암이 있었다(출 20:21; 신 4:11). 이 흑암 중에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나고,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보게 된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이 흑암은 그분의 진노를 당할 자들에게는 슬픔과 고통을 말한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5, 26). -윌슨(W. Wilson).
9-11절.
그분은 하늘을 드리우시고
그곳에서 아래로 내려오셨네
빽빽한 구름이 어두움 가운데
그분의 발을 가리우네.
그분은 그룹을 타시고
하늘을 날으셨다네
바람 날개를 타시고
높은 곳을 빨리 다니신다네.
그분은 흑암을 비밀한 장소로 삼으시고
장막을 삼아 그곳에 거하시네
높은 창공에
구름으로 거처를 삼으셨다네.
-스코틀랜드 시(1649).
9-11절.
그분이 내려오시면서 하늘과 땅이 만났다네
두터운 어둠이 그분의 발 아래 흐르네
그룹의 금빛 날개를 타시고
폭풍을 타고 다니신다네.
흑암이 그분의 비밀스런 방을 만들고
두터운 안개와 빽빽한 구름이 그분을 둘러싸네
그분의 찬란한 광채가 이것들을 몰아내고
그곳에서 타는 숯불과 우박이 떨어지네.
-조지 샌디스(George Sandys, 1577-1643).
10절.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히브리어로 “케룹”(bwrk, 그룹)과 “레쿱”(bwkr)은 동의어이다. “레쿱”(bwkr, 시 104:3)은 ‘수레’라는 뜻으로 “케룹”(bwrk)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다. 역대상 28:18에 나오는 “그룹들”도 수레를 말한다. 시편 68:17에서는 하나님의 “레켑”(bkr, 천사)을 “병거”로 번역했다. 시편 18:10에서는 이런 뜻으로 쓰인 듯하다. 천사들은 날아다닌다고 했다(단 9:21). 또한 그룹들은 날개가 있었고(출 25:20), “영광의 그룹들”(히 9:5)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시 80:1)로서, 그룹을 타고 날으시는 분이다(시 18:10). 그룹은 단수나 복수로 모두 쓰일 수 있다(시 68:17). -헨리 에인즈워스(Henry Ainsworth).
10절. “그룹.” 그룹은 사람, 사자, 황소,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 지성, 위엄, 힘, 그리고 생명이 혼합된 것으로서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폭풍처럼 자연의 힘이 들어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셨다”고 표현했다. -톨룩.
10절. “그룹.”
그룹 날개를 타신 장엄한 모습이여
수정 같은 하늘에 계시도다.
-존 밀턴(John Milton).
10절.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벌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구하려고 오실 때에 그분은 신속히 움직이며 행동하신다. 이처럼 그분의 원수들과 백성들을 모두 놀라게 하는 것은 없다. 그분은 바람을 타고 나는 것처럼 속히 움직이신다. -윌리엄 플러머.
10절.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심판하기 위해 내려오시는 모습이 장엄하게 표현되었다. 하늘이 드리우고, 빽빽한 구름이 그분의 발 아래서 너울거리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하다. 그룹들까지도 그분의 보좌를 둘러싸고, 그분은 바람 날개를 타고 신속히 움직이신다. 이러한 장엄한 장면에 하나님의 속죄소가 나타난다. 하늘이 드리우고, 구름에 둘러싸인 수레가 하늘 바람을 타고 나는 모습이 장엄하게 묘사되었다. -모리슨.
12절. “숯불.” 이 단어는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을 말한다. 번개가 떨어지는 곳마다 모든 것을 태우고 재로 만들어 버린다. -사무엘 챈들러.
14절.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아, 이것을 생각하라. 이 전투가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대적할 자가 없다. 태양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무를지어다.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보수하시리라. 하늘의 별들아, 그들을 지은 조물주를 대적하는 추악한 죄인들을 대적하라. 거창한 대포를 쏘아라. 큰 우박을 떨어뜨려라. 불화살을 쏘고 천둥을 쳐라. 아! 낙엽처럼 스러지는 죄인들! 여호와의 날은 참혹하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판결의 골짜기에서 죽음을 당하는지! 하나님의 원수들이 수천 명씩 쓰러지는 것을 보라. 피묻은 옷, 놀란 자들이 뛰어 다니는 모습, 산에는 말과 불수레로 덮였도다. 하나님의 군사들은 손에 불 붙은 검을 가졌다. 하나님의 공의, 질투, 능력, 분노로 무장한 군사들! 아, 무서운 살륙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넘어진다. 일어날 수도 없다. 허우적거리는 손, 헐떡이는 모습. 가장 강한 자라도 창백해지고 경련을 일으킨다. 여호와의 활은 강하다. 그 활은 원수들의 살을 꿰뚫고, 그 칼로는 기름을 도려낸다. 용사들도 이 전투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보즈라의 옷을 입고서 에돔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포도주틀을 밟은 자의 의복처럼, 영광스러운 옷을 입은 자가 누구인가? 나는 홀로 포도주틀을 밟았도다. 나의 진노 중에 그들을 밟으리라. 그들을 땅에 내던지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손을 알고, 여호와의 능력과 원수들을 향한 진노를 두려워하리라. 그분이 불과 병거를 타고 회오리바람처럼 오시리니, 진노를 발하시고 불로 책망하시리라. 그분은 불과 칼로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리라. 여호와의 죽음을 당한 자가 많을 것이요, 성도들은 나를 거역하여 죽음을 당한 자들의 시체를 보게 되리라. 그들의 구더기는 죽지도 않고, 그 불은 꺼지지도 않으며 모든 육체가 고통을 당하리라. 그분은 악한 자들에게 덫과 불과 유황과 무서운 폭풍을 내리시리라. 이것이 그들이 받을 잔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싸울 싸움이다! 만군의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제임스 제인웨이(James Janeway).
14절.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많은 번개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 “베라킴 랍”(br !yqrb)은 70인역에서는 “아스트라파스 에플래이수네”(atrapas eplhqune)라고 번역되었으며, 이는 ‘그가 번개를 많게 하였다’라는 뜻이다. 불가타 역본에서도 이와 같이 번역되었다. 여호와께서 번개를 치시고 또 치시며 계속해서 치셨다는 뜻이다.
“파하셨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와예후멤”(!mhyw)이며, 이는 ‘그들을 무찌르셨다’라는 뜻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들, 즉 하늘을 녹였다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사무엘 챈들러.
14절. “파하셨도다.” 성령께서는 그분이 파하는 악한 영들이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고자 하지 않으셨다. -닐(J. M. Neale, 유티미우스 지가베누스
의 말을 인용함). 15절.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심한 지진이 일어나고 그 결과 땅의 기초가 보일 만큼 크고 깊은 균열이 생긴 것을 말한다. 요나는 바다 밑바닥에서 이것을 “산의 뿌리”라고 했다. -사무엘 챈들러.
15절.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여호와께서는 강한 동풍을 불게 하시고 바다의 물로 물러가게 하셔서 깊은 바다로 마른 땅이 되게 하셨다(출 14:21, 22). 이것은 이스라엘을 애굽 왕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고, 애굽인들을 물에 수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헨리 해먼드(Henry Hammond).
16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그분은 천사들이나 또는 다른 돕는 자를 보내셨다. -매튜 풀(Matthew Poole).
16절. “나를 취하심이여.” 하나님께서 취하신 것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손에 있는 택하신 자를 빼앗을 자가 없다. -윌리엄 플러머.
16절.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이 구절은 물에서 건져 내어 구원을 받은 모세에 대한 언급이다(출 2:10). 바로의 딸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기에 “모세”라고 이름을 붙였다. 모세라는 말은 “마샤”(hvm)에서 온 말이며, 이는 ‘건져 내다’라는 뜻이다. 다윗은 이 단어를 바로 이 구절에서 썼다. “많은 물”은 고난을 상징하며, 때로는 군중을 지칭하기도 한다. -에인즈워스.
18절.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그들은 내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났다. 내가 멸망당할 위기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고 붙들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나를 파멸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편 기자에게 “미쉬온”(@[vm)이 되셨는데, “의지”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를 지탱해 주는 ‘지팡이’란 뜻이다. 넘어지려는 자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다윗이 이런 극한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지팡이가 되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다윗을 사울에게서 여러 번 구원해 주셨는데, 그는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참조. 삼상 23:26-28). -사무엘 챈들러.
18절.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헨리 8세가 루터에게 악한 말을 하고 편지를 보냈을 때 루터는 이렇게 답했다:”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교구들에게, 터키 사람들에게, 그리고 마귀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시오. 우리는 천국 백성들이며, 참되신 하나님, 그들이 욕하고 침 뱉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그분을 예배하는 자들이오.” 또한 다른 순교자들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살았다. 바실(Basil)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도 이와 같은 용기와 확신을 갖고서 고난을 받았고, 그들의 영웅적인 열심과 변치 않는 모습을 보고서 많은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증거했다. -찰스 브래드버리.
20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우리는 우리를 향한 모든 잘못된 판단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일이든, 형제들의 명예에 관계된 일이든, 우리들의 일이든 선한 일에 열심을 품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고대에 있었던 거인들처럼(창 6:4) 세상에서 유명해지기를 소원한다거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헛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이름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가 수행해야 할 필요하고도 위대한 일이다. -조셉 캐릴.
21절.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이것은 죄를 지속하겠다는 목표와 결심을 가지고 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실한 사람들이 얻는 소산이다. 사람은 어쩌다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결심으로 죄를 추구하고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 두 마음을 품고서 하나님에게 악하게 대하지 않는다.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보면서, 또한 죄악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지키고 죄도 지속하려 하는데, 이는 세상에서 마음이 거짓 된 자들이 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바라보기도 한다. 헤롯은 요한을 존중하면서도 헤로디아를 더욱 존중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젊은 청년도 그리스도에게 나아왔지만 그의 재물을 더욱 사랑했다. 가룟 유다도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또한 돈궤를 좇은 자였다. 이것은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이다. -윌리엄 스트롱(William Strong, 1650).
21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경건한 자들도 특정한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있지만, 감히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그분을 떠나지는 않는다. 그가 죄를 지어 여기서 더 지속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가 어쩌다가 죄를 범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 가지 죄를 범한다고 해서 언약이 파기되거나, 하나님의 우정과 사랑이 사라진다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송두리째 잃어버린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그가 죄의 심판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죄라도 계속적으로 범하게 되면, 그 자신도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면 그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여호와를 저버리는 것이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가끔 죄를 범하기는 했지만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다윗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4:17).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룩한 언약이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정도까지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22, 23절.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자는 그가 특별히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에 대한 계명에 주의하지 않는다. 그런 계명은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가끔씩 양심이 그것을 생각나게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그러나 신실한 영혼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자주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건강하지 못한 영혼은 자신이 좋아하는 계명, 그 시대에 문제가 되지 않는 계명은 지키지만,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의 타락한 면을 다루는 계명이나, 그가 사는 시대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사람들의 박해를 자초하는 계명은 저 멀리 던져 버린다. 타락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계명을 “작은 계명”이라고 하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반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19).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지킨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시 119:6). -니콜라스 로키어(Nicholas Lockyer, 1649).
23절.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 8).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이 히브리서에 나타나 있다(히 10:7-10). 그분은 또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 40:12)라고 하셨다.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 응하신 말씀이다(요 13:18). 그분은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 41:4)라고 고백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이 난제는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를 생각해 보면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를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하나님은 여호와의 종에게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게 하셨다(사 53:6). 우리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분이 담당해야 했던 죄의 형벌처럼 많은 형벌을 받은 자는 없다. 그분은 많은 무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존 브라운.
23절.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이 구절에서 관찰할 것이 있다. 첫째, 경건한 자는 온전하지 못한 행위 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진실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보신다. 진실함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이다. 셋째, 마음이 진실된 자는 비록 죄를 범하여 실족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욥 4:18, 19). 다윗은 한때 믿음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제사장 아비멜렉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새 언약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들의 모든 죄악이 탕감된 사실을 알고서 어찌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온전히 담대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도 담대함을 누리며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고 고백할 수 있다. -윌리엄 스트롱.
23절.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정직한 크리스천은 그가 알고 있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금지된 열매를 결코 만지려 하지 않는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누구든지 한 가지 죄악을 다른 죄보다 더 쉽게 짓는 경향이 있다. 사람에게는 한 가지 기질이 있고, 벌통에는 여왕벌이 하나가 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사람이 특히 범하기 쉬운 한 가지 죄가 있는 것이다. 이 죄는 그 사람에게 의복처럼 가까이 있고, 오른쪽 눈처럼 소중한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요새와도 같으며, 그의 모든 힘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다른 모든 죄악을 범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탄이 이 요새를 차지하고 있다면 사탄은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마귀는 이 고리 하나만 가지고도 마치 모든 사슬을 다 가진 것처럼 우리를 결박할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하고 의로운 성도들은 이 죄악을 탐닉하지 않는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는 금욕의 칼을 가지고서 그가 가장 아끼는 죄악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헤롯은 많은 일을 했지만 그가 소중히 여기고 버리지 못했던 한 가지 죄가 있었다. 그는 선지자의 머리를 벨지언정 그 죄를 베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근친상간의 죄를 버리지 못했다. 정직한 마음은 죄에 대해 분노하고 미워한다. 이 뱀이 그의 가슴에 기어오르면, 그리고 이 뱀이 더 가까이 올수록 그것을 더욱 미워한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23절.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여호와만이 사람을 지키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사람을 보존하는 분이시다. 사람이 슬픔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죄에서 자신을 지킨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고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리신 능력이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로 그분과 협동하게 하신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돌로서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얻은 자이기 때문이다(벧전 2:5).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그분의 은혜이고, 우리에게 있는 능력도 그분의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이것도 그분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윌리엄 스트롱.
23절.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다윗은 그가 쉽게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했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 자신을 죄에서 지킬 수 있다. 다윗은 어떻게 자신을 죄악에서 지켰는가? 그는 우리에게 본이 된다. 다윗은 지속적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죄악을 향하지 않고 우리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감지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없다. 우리는 선한 생각을 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 성향과 유혹에 빠지는 성향을 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온전함은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32절)······다음으로, 우리는 덫에 걸리고 사로잡힐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번 낚시에 걸리면 우리가 위험을 감지하기도 전에 덫에 사로잡힌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헨리 도브(Henry Dove, 1690).
23절. “나의 죄악.” 사람이 각각 매력을 느끼는 죄악은 그의 상황이 바뀜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 사울과 예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어떤 죄에 대해 약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되고 부유해지자 거기에서 죄를 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죄에 빠지기가 쉽고 나이가 들면서 세속적인 죄에 빠진다. 후에 명예를 얻게 되면 그가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기회를 갖게 되고, 이것이 죄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윌리엄 스트롱.
23절. “나의 죄악.” 사람마다 특히 범하기 쉬운 죄가 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나의 죄악”이라고 강조하여 말했다. 마치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로 이 죄악”이라고 말하는 듯하다······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사람들은 특정한 죄악에 대해 약하다. 법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죄악에 빠지게 하는 유혹과 위험이 무엇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순결하게 살기를 결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죄악의 덫을 피할 수 없다. 군인들은 거짓말과 폭행을 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게을리 하며 불경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부정한 상거래를 하는 경향이 있다. 비밀스런 상거래는 비밀스런 죄악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세상 일에 대해 염려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회의를 품으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 아! 거룩한 일을 하는 자들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바울은 그의 시대에 어떤 이들은 시기와 질투로 그리스도를 전했고, 어떤 이들은 선한 의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더러운 이익을 취하기 위해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빌 1:15). -헨리 도브(1690).
23절. “나의 죄악.” 사람마다 취약성을 보이는 죄악이 있다. 이 죄악은 다른 죄악을 거느리는 총독과도 같다. 사람이 살아온 환경, 습관, 직업, 능력, 대인 관계에 따라 사람마다 취약성을 보이는 죄악이 달라진다. 이것은 또한 성령의 행하심과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신 분은 아니지만, 죄의 유혹을 허용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을 선택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은 세상이 주는 만족을 살펴본 다음에 그의 타락한 성향을 따라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만족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듯이 그가 범하기 쉬운 죄도 다르다. 사람의 몸에는 여러 기관들이 있으며, 각 기관은 그 행하는 기능이 다르다. 어떤 기관은 다른 기관보다 더 활동적이고, 어떤 기관은 더 힘이 있다. 보기를 잘하는 눈이 있고, 듣기를 잘하는 귀도 있으며, 또 영리한 혀도 있고, 기타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기질적으로 잘 범하는 죄악이 있다. 이것은 나이가 든 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죄의 능력이 충만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교묘하고 빈틈없이 죄를 범한다. 사람마다 끌리는 죄악이 다르듯이, 만족하는 것도 다르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이 정욕도 다른 것이다. 이 정욕은 타락한 인간이 죄악된 것을 좋아하는 식욕과도 같다. -윌리엄 스트롱.
23절.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사람들은 자신이 별로 유혹을 느끼지 않는 죄를 극복했다고 자신이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연모하는 죄악을 극복한 것으로 자신을 측정해야 한다. 다윗도 자신의 죄악에서 지킨 것으로 그의 의로움을 측정했다. 의사들은 사람의 노쇠 현상을 얼굴 근육을 보고서 측정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늙어 가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의사들은 손이나 팔이나 허벅지 등의 근육에서 육체의 노쇠 현상을 측정한다. 이것들은 몸에서 단단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을 진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질병의 특유한 증상을 보고서 환자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측정한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측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군대가 몇몇 시골이나 촌락을 불태운 것으로 적군을 이기고 대적의 나라를 정복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강한 요새와 성들을 점령하고 주력 부대를 꺾고 섬멸해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당신의 정욕과 벌이는 전투에서도 이와 같이 싸우라. -토머스 굿윈.
23절.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키시지만 우리 역시 선한 의지를 품고서 죄를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지도 않고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속될 것을 기대하지만 이것은 헛된 일이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지만, 우리의 게으름을 허용하거나 조장하지는 않으신다. 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했다.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야겠다. -헨리 도브.
24-26절. 죄와 그것으로 인한 심판을 보면 둘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죄는 이러한 심판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도,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응답,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 다윗도 이 점에 대해 말했다:”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24절). 이와 같은 원리가 여러 면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당신이 거룩한 기도에 육적인 욕망을 포함시켜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응답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함께 비통함이 섞이고, 무엇인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윗도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26절). 순결한 기도는 순결한 축복을 불러온다. 또한 당신이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고 하나님을 향해 냉랭해지면, 당신의 사업도 뒷걸음질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 17:11).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신 것은 무엇인가? 기도가 승리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대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가 바라는 것에 대해 값을 치르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그가 열심히 기도하면 일이 잘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우리의 기도 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당신은 열심히 기도한 후에도 때로는 죄를 짓고 또 지어 모든 것을 망쳐 버리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도 생활에 대해 점검해 보기를 바라신다. 당신은 기도 응답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받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비례하여 축복과 책망을 내려 주신다. -토머스 굿윈.
24-27절.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25절). 태양은 건강하고 병이 없는 눈에는 매우 쾌적하게 느껴지고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같은 눈이라도 약하고 병이 있을 때에는 태양빛이 성가시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태양은 같은 태양이며, 지금 있는 태양도 예전에 있던 태양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대하신다. 다른 성도들을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자비롭고 풍성하게 대하신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푸신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악해지고 야수와 같은 잔혹성을 보이면,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진노하신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으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로버트 코드레이.
25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히브리어로 “탐”(!t)은 ‘온전함’이란 뜻이며, 종종 ‘완전함’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이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선한 사람을 말한다. 그는 종교적인 체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완전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이다. 노아도 완전한 사람이었다:”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 6:9). 그는 악한 세대에서도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빛나는 횃불과 같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그를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이름을 이렇게 기록했다:”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창 6:8-10). 노아, 노아, 노아, 네 이름이 사랑스럽구나.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당신에게 귀하고 감미로운 것이라면,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한다 해도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께 귀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 ‘종용한’이라고 번역되었다.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창 25:27). ‘종용한 사람’을 히브리어로 “이쉬 탐”(!t vya)이라고 하며, 여기서 “탐”(!t)은 의롭다는 뜻이다.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에서는 교활한 사냥꾼이었지만, 야곱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했지만, 그 외에는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단어는 단순하고, 솔직하고, 꾸밈이 없고, 정확한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히브리어 “게바르”(rbg, 남자)는 강하고 용감한 남자를 나타내는 데 사용했다. 이 단어가 시편 45:3에 나타나는데 “능한 자여”라고 번역되었고, 이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은 가장 강하고 용감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귀의 적의와 사람들의 죄를 대면하시고 마침내 승리하신 분이다. 네덜란드 성경에서는 사무엘하 22:26을 “의롭고 용감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의롭게 대하시고”라고 번역했다. 간단히 말해서, “게바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어떤 면으로 살펴보아도 의로운 사람이다. 모든 면이 평평한 주사위처럼, 그를 어떻게 던져 보아도 그는 항상 네모 반듯한 사람이다. 그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욕정도, 외부에서 다가오는 환난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강직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훌륭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완전한 자에게 어떻게 대하시는가? 그분은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라고 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에서 한 단어로 “티타맘”(!mtt)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당신은 그에게 의롭게 대하신다’라는 뜻이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게 대하면, 하나님도 사람에게 의롭게 대하신다.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데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는 데도 의로우시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여 행하는 대로, 하나님도 사람을 대하신다. 당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뜻이 있으면, 하나님도 당신을 기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실 때 당신이 응답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이 응답하실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하면, 하나님도 사람과 씨름하실 것이다. 당신이 끝없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면, 그분도 당신을 추적하고 끝없이 고통을 가하실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고통을 받는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다······의로운 마음은 ‘나누이지 않은 온전한 마음’이다. 위선자들은 많은 신들과 많은 주인들을 가진 자들이다. 그는 이런 모든 존재들을 위해 마음을 하나씩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자는 한 마음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며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 피조물에게 마음을 두는 자들은 각 피조물을 대하여 마음을 하나씩 준비해야 하며, 이렇게 마음이 나뉜 자는 스스로 자신을 멸망케 하는 것이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호 10:2). 세상의 재물들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그들에게 마음을 주어야 한다. 육적인 쾌락이 나타날 때에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거기 주어야 한다. 죄스러운 승진을 해야 할 때에도 그는 마음을 거기 주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것은 그 수가 적다. 그러나 필요 없는 허영은 그 수가 무한하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한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 -리처드 스틸.
25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주피터 신전 바닥에는 두 개의 선물통이 있다고 했다. 한 통에는 축복을 내리는 좋은 선물이 들어 있고, 다른 통에는 재앙을 내리는 나쁜 선물이 들어 있다. 이 말은 호머가 주피터에 대해 묘사한 것인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참된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분의 손에는 두 개의 컵이 있다. 한 컵은 위로의 컵이고 다른 한 컵은 심판의 컵이다. 그분은 이것을 선인과 악인에게 구분하여 주신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이것은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공의를 창조하시며, 이것은 좋은 일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공의롭게 심판하신다.” -마일즈 스미스(Miles Smith, 주교, 1632).
26절.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여호와께서 만나는 사람이 바뀜에 따라서 색깔을 바꾸시고, 친구가 바뀌면 기질도 바꾸신다는 말씀인가? 아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약점인 것이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의롭고 순수한 사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정하고 위선적인 사람에 대해서도 순수하고 의롭게 대하시고, 또 그렇게 행하신다. 하나님은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인다고 하셨다. 그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 그들의 말을 듣고 용납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큼 순수함과 신실함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받는 위로는 우리의 덕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위로는 우리의 덕의 열매이다. -조셉 캐릴.
26절. “사특한 자.” 첫번째 약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여자의 후손과 뱀이 싸우는 것을 본다. 인자하고 온전하며 순결하신 그분과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파괴하려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 사특한 자의 싸움이다. ‘사특하다’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비뚤어지다’, ‘왜곡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는 ‘사악함’과 ‘교활함’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옛 뱀, 곧 마귀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구절에서는 ‘교활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여 사악하게 대하실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은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폐하시고, 교활한 자의 교활함을 폐하시며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존 브라운.
26절.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히브리어로 “사특한 자”의 원형인 “아카쉬”(vq[)는 레슬링을 하는 자가 그들의 몸을 뒤트는 것처럼 사물이나 어떤 사건을 ‘뒤틀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비유적인 의미로 이 단어는 ‘씨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교활한 자가 레슬링을 하듯이 상대방에게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돌리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활한 사람을 이런 뜻을 가진 단어로 표시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이리저리 몸을 뒤틀면서 거짓말을 해 댄다. 그들이 명백하게 말을 하거나 맹세를 하면서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해도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들의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가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약속하는 것이나
시편 18편 & 성경주석
<시편 18편 서론>
여호와의 종 다윗의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를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시 18편과 같은 시들에 실려 있는 장엄한 감사의 송시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베푼 놀라운 구원과 승리의 이야기를 개요로 제시한다. 이 기념비적인 승리의 노래는 마음의 역사, 곧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지고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하여 항상 흠 없는 신실함을 드러내는 한 사람의 마음의 이야기이다. 삼하 22장의 이야기 속에도 약간 변형된 모습이긴 하지만 이와 동일한 시가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서 이 찬송이 다윗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의 종”(시 36편 표제에도 나옴)이라는 구절은 삼하 22장에는 나오지 않는다.
<시편 18편 개역한글>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8.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18.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32.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33.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37.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38.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39.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40.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41.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42.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43.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46.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찌로다
47.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48.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시편 18편 성경주석>
18:1 힘.
하나님은 시인의 힘의 근원이었다(참조 시 27:1, 28:8).
18:1 내가…사랑하나이다.
깊고 열렬한 애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라함(rah.am).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는 라함이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을 나타내는 데 쓰인 곳이 없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데에만 자주 쓰이고 있다. 이 구절은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 시의 도입부로 잘 어울리는 구절이다. 삼하 22장에서는 이 절을 찾아볼 수 없다. 참조 시 116:4.
18:2 반석.
히브리어 셀라(sela‘), “산악 지대의 울퉁불퉁한 바위”, “절벽.” 다윗은 한때 사울에게 쫓기는 중에 그 같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은 적이 있다(참조 삼상 23:25). 그는 여기서 이 용어를 확실한 피난처 되는 하나님께 적용한다.
18:2 요새.
히브리어 므추다(mes.udah),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 또는 “성채”(참조 삼상 22:4).
18:2 바위.
신 32장(4, 15, 18, 30, 31절)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하나님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추르(s.ur), “큰 바위.”
18:2 방패.
히브리어 마겐(magen). (「제임스왕역」에는 “buckler”[조그마한 원형 방패]로 되어 있음-역자 주). 시 3:3과 이 절과 평행을 이루는 삼하 22:3에는 “방패”(shield)로 번역되었다.
18:2 뿔.
힘의 상징(참조 신 33:17).
18:2 산성.
삼하 22:3은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는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삶의 끊임없는 투쟁들에서 취한 여러 비유를 통해, 다윗은 그의 지상 순례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모두 다 표현하고자 애쓰고 있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와 유사한 여러 비유적 표현에 관해서는 시 31:1~3; 71:1~7을 참조하라.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활력이 넘쳐 흐른다.
18:4 사망의.
다윗은 요나단에게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 20:3)라고 말했다.
18:4 줄.
(「제임스왕역」에는 “sorrow”[슬픔]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하발림(h.abalim), “밧줄”, “끈.” 삼하 22:5에는 “물결”로 되어 있다.
18:4 불의.
히브리어 블리야알(beliya‘al). “가치 없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임에도 자주 “벨리알”(Belial)로 번역되었다. 성경에서 “벨리알의 아들들”은 폭력에 호소하는 비열한 성품의 소유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흔히 쓰인다(참조 삿 19:22; 삼상 2:12 주석).
18:5 음부.
히브리어 셔올(s∨e’ol). 참조 시 16:10; 잠 15:11 주석.
18:5 줄.
(「제임스왕역」에는 “sorrow”[슬픔]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4절에서처럼 히브리어 하발림(h.abalim), “끈.”
18:5 올무.
히브리어 모크쉼(moqs∨im), “새 올가미.”
18:5 이르렀도다.
히브리어 카담(qadam), “~을 대항하다.” (「제임스왕역」에는 “prevent”[예방하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이는 “pre-vent”(라틴어 프래[prae], “앞에”와 라틴어 베니오[venio], “오다”에서 유래됨)라는 영어 단어의 본래 의미이다.
18:6 전.
하늘(참조 시 11:4).
18:6 그 귀에.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18:7 땅이 진동하고.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간여가 천연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대격변으로 묘사되었다. 이 묘사의 세세한 부분들은 시인이 자기 삶의 위험한 시기들에 목격했던 대소동들을 회상하면서 기록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상당 부분이 홍해에서의 구원과 시내산에서의 율법 시여 장면에 근거하는 여러 격렬한 비유적 표현은 문학적으로 가장 장엄한 묘사들 중 하나이다. 참조 출 19:16~18; 시 144:5~7; 합 3:3~6. 하지만 이 중 그 어떤 곳에서도 시 18편에서처럼 그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곳은 없다. 여기의 묘사는 지진으로 시작해서 번개, 구름, 바람, 흑암으로 이어지다가 맹렬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여호와는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그를 신뢰하는 종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영광과 능력으로 그 가운데 나타난다. 하나님은 천연계의 격변들 중에서 그 능력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그의 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전력으로 그 일에 간여했다.
18:7 진노.
참조 시 2:4 주석.
18:8 연기.
연기와 불과 숯은 구름과 번개를 나타낸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가시적(可視的)인 방법으로 나타난 것처럼 이 비유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고자 애써서는 안 된다. 여기서 시인의 목적은 그것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마치 그들이 전능하신 분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심오한 경외감을 생생히 느끼게 해 주는 데 있다(참조 시 74:1; 97:2; 140:10; 합 3:5).
18:9 강림하시니.
하나님이 조사와 심판을 위하여 폭풍 가운데 강림하신 것처럼 표현되었다(참조 창 11:5; 18:21).
18:9 어둑캄캄하도다.
참조 신 4:11; 왕상 8:12.
18:10 그룹.
그룹들은 에덴동산의 입구를 지켰으며(참조 창 3:24 주석) 또한 그 형상들은 속죄소를 가렸다(출 25:18).
18:10 바람 날개.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나타내는 표현.
18:11 물의 흑암.
(「제임스왕역」에는 “dark waters”[어두운 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물의 흑암.” 강우(降雨)의 전조가 되는 검은 구름.
18:11 공중의 빽빽한 구름.
이 구절은 “구름들의 구름들”로 바꿔 쓸 수도 있다. 이는 마치 여러 다른 종류의 구름들이 몰려와 서로 쌓이고 쌓여서 이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처소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18:12 광채로 인하여.
번개가 칠 때 구름은 사라지고 온 하늘이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18:13 하늘에서.
우가릿 문헌(참조 68, 69쪽)에서 입증된 용법에 따르면 “~에서”로 번역된 히브리어 브(be)가 여기서는 “~로부터”로 번역되어야만 한다.
18:13 음성을 내시며.
이 절의 평행구적 구조에 근거해 볼 때 뇌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상징한다(시 29편, 그중에서도 특히 3절을 참조하라. 참조 욥 40:9).
18:13 우박과 숯불.
12절에 나온 구절이 반복되었다. 이는 두려운 느낌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18:14 살.
이 절에 사용된 대구법이 보여 주듯이 여기서는 번개를 상징한다.
18:14 저희를.
시인의 원수들을 일컫는 듯하다. 이는 이 두려운 묘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간적 요소로, 그는 이를 통해서 잠깐 동안 우리에게 이 시의 주제를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8:15 밑.
출 15:8의 묘사와 비교하라.
18: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모든 신적인 간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18:16 많은 물.
여기서 시인은 4절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 그는 자기 자신을 “불의의 창수”로 인해 두려워 떨고 있는 존재로 묘사했었다. 물은 종종 위험의 상징으로 사용된다(참조 시 32:6).
18:16 나를 건져 내셨도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는 모세가 구조된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인 동사이다. 이 동사는 또한 모세라는 이름의 어근이 되는 동사로 여겨지기도 한다(참조 출 2:10 주석). 여기서 다윗은 원수들로부터 구출받은 자신의 경험을 바로의 딸의 손으로 구출받은 모세의 경험에 견주는 듯이 보인다. 그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건져냄을 받듯이 하나님에게 건져냄을 받았다.
18:17 원수.
사울. 시인은 또한 그를 추격하는 일에 가담한 사울의 지지자들도 여기에 포함시킨다.
18:18 이르렀으나.
참조 5절 주석.
18:18 의지.
히브리어 미쉬안(mis∨‘an), “버팀.” 이와 밀접히 연관된 단어인 미쉬네트(mis∨‘net)가 시 23:4에서 “막대기”로 번역되었다.
18:19 넓은 곳.
다윗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참조 시 4:1 주석).
18:19 나를 기뻐하심으로.
시인이 구원받은 이유에 대한 첫 번째 암시. 20~30절에서 이 사상이 더욱 확대된다.
18:20 내 의를 따라.
하나님이 간여하신 것은 다윗이 사울과 다른 원수들에게서 받는 것 같은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율법에 따라 상급과 보상을 주신다. 20~30절은 하나님이 다윗을 구원하시는 이유를 상술(詳述)하고 있다.
18:22 내 앞에.
다윗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으며, 또한 언제나 율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규제하였다고 주장한다(참조 시 119:97; 시 1:2 주석; 신 6:6~9; 11:18~21).
18:23 완전하여.
히브리어 타밈(tamim), “흠 잡을 데 없는”, “완전한.” 동일한 단어가 “정직하게”로 번역된 시 15:2 주석을 참조하라. 욥 1:1에서는 이와 연관된 단어인 탐(tam)이 “순전한”으로 번역되었다. 비록 매우 강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22절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알고 있는 죄는 무엇이든지 다 피하고자 애쓰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다윗 자신에 대한 그의 증언(삼상 26:23, 24)과 하나님의 증언(왕상 14:8)과 역사가의 증언(왕상 15:5)을 숙고해 보라. 자신이 알고 있는 죄는 결코 지은 적이 없다는 다윗의 주장이 진실한 것이라면, 이 시는 그가 밧세바로 더불어 죄를 짓고 또한 우리아를 죽이도록 명령한 범죄를 행하기 전에 쓰인 것임이 분명하다.
18:24 내 의를 따라.
이 절은 거의 20절의 반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8:25 자비한 자에게는.
25, 26절에는 금언(金言)의 특징들이 나타나 있다. 이 절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들의 품성에 따라 대한다는 보편적 원칙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그분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Kirkpatrick). 하나님께는 형벌을 받지 않고 지나가는 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참조 마 18:35).
18:26 사특한 자.
마음이 비뚤어진 자, 사악한 자.
18:27 교만한 눈.
교만은 멸망에 이르는 길을 예비한다(참조 시 101:5; 잠 6:16, 17). 삼하 22:28에 있는 이 부분의 상당 어구는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로 되어 있다.
18:29 적군.
참조 삼하 22:30 주석.
18:29 담을 뛰어넘나이다.
참조 삼하 22:30 주석.
18:30 완전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은 일이다(참조 신 32:4).
18:30 정미하니.
금속처럼 정제된, 검사를 통과한(참조 시 12:6 주석).
18:30 방패.
참조 시 3:3; 18:2 주석.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보호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분께 보호를 요청할 권리가 없다.
18:31 누가 하나님이며.
다윗은 이 절에서부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승리와 성공에 대해 명상한다. 이 논의는 45절까지 계속 이어진다. “누가 하나님이냐?”라는 질문은 불신으로 인한 질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그들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거짓 신들과 비교하여 그분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수사적 질문이다.
18:31 반석.
히브리어 추르(s.ur). 이 단어가 2절에서는 “힘”으로 번역되었다(참조 2절 주석). (「개역한글판」에는 2절에서도 이 단어가 “반석”으로 번역되었지만 「제임스왕역」에는 “strength”[힘]으로 번역되었음-역자 주).
18:33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암사슴은 달리는 속력이 무척 빠르고 또한 잘 넘어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참조 삼하 22:34 주석).
18: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참조 삼하 22:35 주석.
18:34 놋 활.
문자적으로 “놋으로 만든 활”(「제임스왕역」에는 “철로 만든 활”로 되어 있음-역자 주). 욥 20:24에도 이 같은 유형의 활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비상한 힘을 부여하였다.
18:35 방패.
놋 활(34절)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하나님의 방패가 주는 보호이다. 다윗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노력이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 알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물질적인 보호의 수단들로 무장시키고 그가 이 수단들을 이용할 때 그를 도와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만일에 대비하라”는 옛 청교도의 권면을 상기한다. 다윗이 활을 쥘 때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돕기 때문에 그는 패배할 수 없다.
18:35 온유함.
히브리어 아나와(‘anawah), 문자적으로 “겸손.” 이 특성은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빌 2:7, 8). “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인성을 취하셨다”(시대의 소망, 43). 사람은 겸손히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께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가까이 이를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위대함이다.
18: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참조 19절.
18:36 실족지 않게.
참조 시 17:5; 잠 4:12. 원수와 맞붙어 싸울 때에는 단단히 버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8:37 따라 미치리니.
참조 출 15:9. 37절과 38절에 쓰인 동사들은 미완료 시제 동사들인데, 영어에서는 미완료 시제가 현재 시제로 번역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내가 따라 미치다…” 등의 사실적 묘사가 된다. 37~45절에 기록된 연속적인 행위들은 완벽한 승리의 느낌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간여하심으로 원수는 마침내 완전히 패배하고 만다.
18:38 쳐서.
(「제임스왕역」에는 “상처를 입혔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마하츠(mah.as.), 우가릿어(참조 68, 69쪽)에 따르면 이 단어는 “치다”, “분쇄하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18:41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에 도움을 구해 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이 같은 호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실한 호소가 아닌 공포감에서 기인한 호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듣지 않으신다.
18:42 부숴뜨리고.
원수가 완전히 분쇄되어서(참조 왕하 13:7) 쓰레기처럼 버림을 당한다.
18:43 열방의 으뜸.
다윗은 그 지역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발군의 왕으로 인정받았다(삼하 8).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의 탁월한 위치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그 나라를 물려 준 것에 대한 묘사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왕상 4:21, 24).
18:45 쇠미하여.
식물들처럼 시드는 것을 의미함(참조 사 40:7).
18:45 견고한 곳.
요새화된 성읍 또는 성채. 다른 민족들이 떨면서 나와서 다윗에게 자원하여 항복하게 될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 나라는 궁극적인 안정을 확보하고 또한 원수들에게서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마침내 완전한 승리가 성취된다.
18:46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46~50절은 다윗에게 승리를 안겨 준 여호와께 찬송과 감사를 돌리는 엄숙한 송영이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15 716).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바라보고 거기에서 시인은 이방인의 생명 없는 신들과는 전혀 다른 살아 계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확언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의 원천이다.
18:46 반석.
히브리어 추르(s.ur). 참조 2, 31절 주석.
18:46 내 구원의 하나님.
시편에서 애용되는 구절(참조 시 25:5; 27:9; 51:4; 38:22; 88:1).
18:48 강포한 자.
아마도 사울을 의미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윗이 그의 원수들 전체를 가리켜 한 말일 수도 있다.
18:49 열방.
히브리어 고임(goyim), “나라들”(참조 시 2:1; 9:5 주석). 다윗의 승리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앞에서 높임을 받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위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절을 인용한다(롬 15:9). 다윗의 후손들의 실패 때문에 49, 50절의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에서 성취될 수밖에 없다. 이 나라는 결코 그 끝이 이르지 않는 나라이다.
18:50 그 왕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택하신 왕(참조 2:2 주석).
18:50 구원.
히브리어에서는 이 말이 복수로 되어 있다. 이는 시편에 열거되어 있는 수많은 구원의 행위들을 일컫는다.
18:50 그 후손.
이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에 관해서는 삼하 7:12~16 주석을 참조하라.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2018/05/14(월) \”시편 18:1-50\” / 작성: 정재규
본문 시편 18:1-50
찬송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시편 18편의 표제어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사무엘하22장에도 거의 흡사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표제어와 사무엘서의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오늘 본문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이기도 하지만 다윗이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까지 함께 해 오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찬양시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1-3절)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단지 관념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다윗은 모든 단어에 ‘나의’라는 수식을 계속 붙여가며, 자신의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친히 경험한 실제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지형과 같은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주심과 또 전투에서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되어주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고난과 행동(4-6절)
다윗은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원수들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다윗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습니다. 다윗은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4-5절입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다윗의 상황은 구원의 희망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절망과 막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밀려드는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절망과 막막함 또 죽음보다 크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여기는 벽보다도, 또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여기는 그 어떤 대상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높고 크신 분이십니다. 절망과 막막함 속에서 우리는 늘 이런 하나님을 기억해내야 하고,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에 결코 귀를 닫지 않으셨습니다. 6절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하나님의 움직임(7-19절)
다윗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반응하기 시작하셨습니다. 7-19절이 이런 하나님의 움직임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움직이시자 땅이 흔들리고, 산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이뿐 아니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하늘도 진동합니다. 이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을 잘 그려줍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시고 마침내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원수의 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관심하게 우리 인생을 관망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반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인생이 풀어지지 않는다 하여 주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한시적이고도 한계적인 시야를 넘어 궁극적인 선으로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18절의 다윗의 체험적인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의지가 되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삶과 고백(20-31절)
20-31절은 다윗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도를 지켰고, 주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진실하게 고백했습니다. 결코,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한 마음이 삶의 실천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셨고,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순수한 그 마음에 대해 보응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완전하심, 깨끗함을 또 주님의 등불 되심과 방패 되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만큼 우리에게 기쁨, 만족, 평안, 격려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궁극적으로 얻길 원하지만 세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보상입니다.
이런 주님의 보상을 맛본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31절입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어떤 상황 중에라도 우리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고 그 이름의 본분대로 살아가면, 이 다윗의 고백은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32-42절)
다윗은 32-42절을 통해 주님의 도를 지켜 주님을 떠난 적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암사슴의 발처럼 튼튼하고 빠르게 하셨고, 강한 팔을 주셨습니다. 방패를 손에 들려 주셨고,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시니 다윗에게 남은 것은 승리뿐이었습니다.
주님께 가는 그날까지 영적 싸움은 절대 중단되지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승리’라는 결과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늘 인지하면, 설사 절망의 그늘이 드리운다 하여도 절망과 낙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절망 속에서도 궁극적인 승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에 자신과 상황을 내어 맡기게 됩니다.
높여주심과 감사찬양(43-50절)
다윗을 승리로 이끄신 주님은 그의 왕권을 더욱 높여 주셨습니다. 소문만 들어도 굴복할 정도의 승승장구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다윗에게만 주어진 은총이 아니었습니다. 5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결코 망하지 않는 영적 승승장구의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승장구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걷게 하시는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순종함으로 걸을 때, 우리 입으로 또 삶으로 분명히 고백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순종으로을 걸으며, 우리에게 이미 주신 승리를 맛보고 주님만이 우리의 의지할 유일한 분이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보장해 주신 ‘승리’를 늘 인지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이 주는 자만이나 낙심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겸손히 늘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순종함으로 걷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 길을 걷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아름다운 도구로 쓰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2. 절망과 막막함에 놓인 다윗이 선택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낙심의 상황 앞에서 당신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 다윗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4. 다윗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은 살아온 삶에 대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5.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셨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어떤 결단으로 이어지게 합니까?
(작성 : 정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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