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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1차귀환 | 2차귀환 |
---|---|---|
귀환자 수 | 49,897명 (일반백성 42,360명, 남종과 여종 7,337명, 노래하는 자 200명) | 1,754명 (일반 남자 1,496명, 레위인 38명, 성전 일꾼 220명) |
바벨론 포로로 부터의 귀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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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자료 –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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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 귀환 숫자 | 에스라, 느헤미야 한눈에보기! 개요,개관,주제,[고레스왕 칙령, 이스라엘 포로귀환, 성전재건과 개혁] 256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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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로 부터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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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70년 포로귀환과 성전 중건’
[김진규 연재 칼럼] 예레미야서의 포로생활 70년은 정확한 수치인가 어림수인가 상징적인 수인가 (1)키워드에 대한 정보 바벨론 포로 귀환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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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Belief: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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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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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귀환시대 – 성경 역사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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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로 부터의 귀환
바벨론 포로로 부터의 귀환
북왕국 이스라엘이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후 약134년 후인 BC.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였다.
바벨론은 유다패망을 전후로 수차례에 걸쳐 유다 백성을 포로로 삼아 바벨론으로 이주 시켰다. BC.605년에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 및 귀족들이 1차 포로로 잡혀갔고 바벨론 멸망 후 메대-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이 귀환 조서를 내린 BC.538년은 첫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약 70년째 되는 해 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 하신 데로 70년 만에 유다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오늘날에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날마다 거룩한 삶으로 주님 맞을 준비를 하여야겠다.
[포로로 잡혀감]구분 1차포로 2차포로 3차포로 4차포로 연대 BC.605년 BC.597년 BC.586년 BC.581년 여호야김 3년 여호야긴 1년 시드기야11년 느브갓네살19년 포로 다니엘 및 귀족들 왕과 방백,군사 기술자,백성들 왕과 백성들 남은 백성들 관련성결구절 단1:1-6 왕하24:10-16 왕하25:10-6 렘25:9-1 왕하25:8-21
[귀환]
바벨론 포로시대와 귀환( BC586-BC444 경)
바벨론(바빌론)포로시대를 다른 표현으로 ‘바벨론 유수기(幽囚期: 가두는 기간)’라고도 한다.
BC606(또는 BC597)-BC581년 사이에 이스라엘 남 유대(유다)왕국의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주민이 신(新)바빌로니아의 바벨론(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간 사건을 ‘바벨론 유수’라고 말하며, BC538년 귀환까지의 약 반세기 기간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
넓게는 바벨론 지방을 성경에서는 갈대아(칼데아)라고 부르기 때문에 BC734년의 북 이스라엘의 제1갈리리 포로와 BC722년의 제2갈리리 포로도 ‘바벨론 유수’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의 총인구는 25만 정도로 추정되며, 포로 수는 ‘예레미아(야)서’ 52장 30절에 의하면 포로의 수는 전후 3회에 걸쳐 4,600명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이것은 남자만의 수일 것이며, 부녀자를 포함하면 4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귀환할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않고 터키나 동유럽으로 흩어져 살았다.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드리거나 전도를 방해한 사람들 일부는 그 후손들이다.
[법궤에 대한 이야기가 이때부터 없다. 아마 포로 시절 때 잃어버린 같다.]1. 바벨론 포로는 느브갓네살에 의해 4차례가 있었다.
1)BC606 다니엘과 친구와 왕족을 포로로 데려갔다. 현재 이란에 다니엘 유적지로 탑이 남아 있다.
2)BC597 보물과 여호야긴 왕과 10000명의 관리와 왕자가 포로로 데려갔다.
3)BC586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불지르고 832명 포로와 여리고에서 붙잡은 시드기야(시드키아-제데키아)
왕은 눈을 빼서 함께 데려갔다.
4)BC581 포로745명을 데려갔다. 예레미야와 많은 유대인은 그전에 애굽으로 도망갔다.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아, 에스겔, 다니엘이다.
예레미아 ‘옛 계약 대신에 새 계약을 주신다.’고 예언 하였다.
에스겔 ‘하나님의 백성은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라고 바벨론에서 예언하였으며,
애굽은 아주 미약한 나라가 될 것과 (겔29장) 자국 인은 왕이 되지 못할 것을 예언(겔 30:13)하였다.
이 예언대로 알렉산더에 정복당한 후, 톨레마이 왕조의 마지막 왕 크레오파트라를 로마가 정복하였고, 그 후로 터키가 지배하였고, 영국에서 독립 후 대통령제가 되어, 예언은 약 2400년 동안 지켜지고 있다.
이 역사적 증거로 성경의 위대함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바벨론에서 달라진 사상과 예배방식](사상)
1)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지 않고 어디든 계신다.(포로시대는 성전에 갈 수가 없었다.)
2)고난은 조상의 죄가 아니고, 내 죄 때문이다.(포로생활이 조상의 잘못임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겔18:2)
(예배방식)
포로 때의 바빌론에서 종교적 자유는 허용되었으나, 예루살렘 신전에서와 같은 제의(祭儀)는 할 수 없었다.
대신 안식일 예배가 중심이 되어 회당(會堂)에서의 율법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의식이 비롯된 것이 오늘날 교회예배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귀환한 느헤미아, 에스라 등에 의하여 새로운 법전(法典)이 나오고 민족이 재건되어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고레스왕이 귀환정책에 대한 원통형의 기념토판>
2. 바벨론 귀환 및 예루살렘 성전, 성벽건축 (BC536-BC444)
페르시아(바사)의 칼로레스(Cyrus- 키로(루)스 2 세-성경 고레스)의 명령으로 시작되어 3차례가 있다.
1)BC536 스룹바벨과 유대인 42,360명, 말 730마리, 나귀 205마리, 낙타 435마리 등 가지고 돌와 왔다.
스룹바벨이 총독으로 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학개, 스가랴가 도왔다.
2)BC457 에스라와 남자 1,354명 금 100달란트와 은 750달란트 등 가지고 돌와 왔다.
3)BC444 총독 느헤미아는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건된 예루살렘으로 왔다. [ 바사 참조 ]
-. 에스라: 종교개혁으로 새로와 지고, 이방인과 결혼금지, 이미 결혼한 사람은 이혼요구하였다.
첫 ‘대회당’ 회장이며, 회당 예배 창시자이다. [ 대 회당 참조 ]
-. 느헤미아: 아닥사스라1세(술 관원) 왕의 권위로 성벽재건, 십일조, 안식일, 잡혼시정을 하였다.
12년 동안 유다 총독이었다.
-. 에스더: BC478년 구셀구세스(아하수에르)와 결혼하였고, 에스라, 느헤미아를 도왔다.
BC473년 4촌 모르드개의 도움으로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을 구출, *부림절의 기원이 되었다.
-. 요엘: BC400년 제사장, 모든 사람 올바른 생활을 권유했다.
-. 말라기: 에스라의 지나치게 엄함을 보고, 에스라의 이혼요구를 반대하였으며,
‘온 세계인이 주를 섬긴다’라고 믿었다.
*부림절
어원은 부림(purim)인데 ‘purim’은 ‘pur(주사위의 일종)’에서 왔는데 이유는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기 위하여 날을 잡을 때 주사위를 던진 것에서 유래하는데,
그 날이 자기가 죽는 날이었다. 부림절은 유대력12월(아달월) 14,15일 2일간 지킨다.
부림절 의식은 축일 전날은 ‘타아니트 에스델(에스델의 금식)’이라고 하며, 금식으로 시작한다.
부림절 회당 예배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에스델(에스더)’서를 낭독하는 것이다.
에스더의 이름은 바벨론의 달의 여신’이슈타르’에서 왔다.
이 날은 선물을 교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즐긴다.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와 상관없는 관습들이 그 축일에 덧붙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하만타셴'(하만의 귀들)이라고 하는 세모꼴 과자를 굽는 관습이 있다.
지금도 이란의 하마단에 가면 유대인을 구한 베냐민 족속의 에스더와 모르드개(모르데카인)의
무덤의 유적지가 있는 유대인 회당이 있다고 한다. [ 부림절 참조 ] [ 이란에 있는 성경의 유적지 참조 ]
사. 침묵시대(BC444-AD 0)
말라기는 구약성서의 마지막 성서이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동안 신구약 중간에는
하나님이 아무 말씀이 없어 이 시대를 침묵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70인 번역 성경에는 아무기록이 없으나,
천주교인이 사용하는 성경에는 마카비 1,2권이 들어가 있다.
알렉산더 시대를 지나, 셀레우코스왕조(BC358-BC163) 시대 말기 BC167-BC63까지
약100년 간 마카비(하스몬) 왕국이 있었다.[ 하스몬 왕조참조 ]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BC 106-48)가 유대를 침공하여 하스몬왕조를 멸망시키고,
그를 지원한 안티파테르(안티파텔)과 로마와 관계가 시작되었다.
로마는 안티파테르이 BC 47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그의 아들 헤롯 1세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에 예수그리스도 가 탄생하시고 예수님 시대가 열린다.
<부림절을 지키는 랍비와 학생들> 1. 페니키아(성경:베니게) (BC3000- BC900경) [ 페니키아지도 ] [ 메소포타미아 지도 ]
명칭: 시리아,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지명으로 그곳에 사는 주민의 명칭이기도 하다.
지역: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접한 지역,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
주민: 셈족, 헤브라인과 함께 가나안 계, 후에 혼혈
문명: BC 20세기경, 이집트 표음문자인 22자의 알파벳트를 만들었다.
미술, 공예에 뛰어나고, 금, 은, 보석, 상아, 유리로 만든 공예품과 염색제품을 오리엔트와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지게 하였다.
목재, 올리브, 포도, 건어물의 수출, 곡식과 농산물이 풍부하였다.
역사: 정치적으로는 통일 된 적이 없다.
항구도시 중심으로 뭉친 도시연맹의 형태로 해상 무역을 하였다.
BC30 세기경 이집트와 무역통상이 활발하였다.
BC20 경 민족이동으로 혼란이생겼고, 소도시 국가로 분리독립 될 때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지배를
받았으며, 크레타문명의 영향도 받았다.
BC13 세기경 지중해 진출하여, 북아프리카 연안의 카르타고, 스페인의 기데스, 제노바, 시라쿠사,
크레타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BC9 세기경 아시리아(앗수르)의 강대로 도시들이 쇠퇴하였고, 아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두로: 알렉산더 대왕이 7개월의 공격에도 점령하지 못하다가, 점령 후에는 분노하여 주민 3만 명을
모두 노예로 만들어 팔아버리고 도시는 불태우워 파괴하였다.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때에 로마가 재건하였다가 터키지배시절에는 쇠퇴하였다.
현재는 시돈과 함께 레바논 항구로 발전되었다.
베니게(행 11:19)
이들이 레바논 해안지역에 만든 2개의 큰 도시가 두로와 시돈이다.
두로: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지역으로 아셀지파에게 분배한 땅이다.(수19:29)
히람 왕이 다윗궁과 솔로몬 성전 건축 시에 나무와 석재, 그리고 금속기술자를 보내기도 하였다.(삼하5:11)
바울이 7일간 있을 때에 필립 집사 딸 4명이 예루살렘에 가면은 체포된다고 만류하였다.(행21:2-7)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아구스도로부터 헤롯가문이 하사받아 두로와 시돈 및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 시리아를 포함하여 헤롯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곳 수로보니게의 여인 딸이 귀신들린 것을 고쳐주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였다(막7:26).
‘수로보니게’는 베니게(카르타고)와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수리아지방의 베니게라는 뜻이다.
시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 있다.
함의 자손이 이 도시를 건설하였고, 성전 건축 시 벌목 공을 고용 하였다.(왕상5:6)
시돈 왕 히람의 딸 이세벨이 아합왕에게 시집올 때 바알 신을 갖지고와 하나님의 진노가 아합 왕에게
내려지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징벌하였다.(왕상16:31)
예수님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하였다.(막 7:31)
[이후의 역사]로마-비쟌틴 제국-사라센제국-십자군-맘루크-오스만 투르크-영국-프랑스-[ 시리아 ]
<페니키아의 고대도시 두로(튀루스)> 2. 아시리아(성경: 앗수르) (BC3000- BC612) [ 메소포타미아 지도 ]
명칭: 수호신’앗수르(Assur)’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지역: 이락크북부, 티그리스강과 자브강의 합류지점의 삼각지대으로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 이다.
주민: 셈족, 아시리아인
역사: 원주민은 셈족(族)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한다.
아시리아의 용감한 왕들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점령하여 최초의 세계제국 건설하였다.
광대한 영토,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 완비된 역전제도에 의해 통치했다.
그들의 기병, 전차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점령지의 무거운 과세, 잔인한 행동, 약탈 등으로 가장 악질적인
민족으로 점령 지역의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앗수르 정책은 정복한 민족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혼혈시켜, 그들의 민족정신을 파괴하여 복종시키는
것으로, 북 이스라엘이 이 정책으로 끌러가게 된다.
[아시리아 연대기는 다른 곳과 차이가 있어 이곳에서는 할레이저서 ‘성서핸드북’ 것을 사용하였으며,왕의 연대는 재위 기간이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系)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언어와 풍습 그리고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다.
BC25 세기경, 도시국가 성립하였고, 수메르문명의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이 수메르인이 끊임없는 침입과 악조건이 강하고 용감한 아시리아 인이 형성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산출되지 않는 보석, 목재, 석재를 교역하여 군사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BC 1300경에 샬마네세르 1세(Shalmaneser)는 바빌로니아 전 지역을 점령하여 통치하였다.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Tiglath-pileser: 재위BC 1115?-BC 1077?) 전차대(戰車隊)도 창설한
그는 히타이트의 쇠퇴의 틈을 타, 수도 아수르의 전승기념비 기둥에 42개국을 평정하였다고
기록할 만큼 위대한 건설 자이었다.
페르시아만, 지중해연안, 소아시아 지역지배 하는 강대국을 만들었으나 그 다음 또 쇠퇴하였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Assur-nasipal: BC 885-BC 860)는 호전적이고 잔인하였으며,
고대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샬마네세르(샤르마네세르) 3세(BC860-BC 825)는 이스라엘과 처음으로 싸운 아시리아 왕이다.
산시 아닷(BC825-BC808), 아닷 니라리(BC808-BC783), 샬마네세르 4세(BC783-BC771),
앗수르 루시(BC753-BC747) 때에는 쇠퇴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BC 746-BC 727)의 개인적인 이름 즉 별칭은 불(Pul)이다.
그는 바빌로니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팔레스타인의 가자를 점령하여, 아시리아 제국 황금시대의
기초를 다졌다.
샬마네세르(샬마나사르) 5세(BC 727-BC 722)는 사마리아를 포위 중에 사망하여 왕위가
사르곤왕조에게 넘어갔다.
사르곤 2세(BC722-705)는 샬마네세르의 죽음에 편승하여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여 히브리어로
‘정통 왕’이라는 뜻의 ‘사르곤왕조’를 열었으며, 이는 아시리아의 마지막왕조이다.
그는 BC 2350년경 셈계 아카드인 사르곤1세(재위 BC 2350-BC 2294)가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사르곤왕조(또는 아카드왕조)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르곤 2세라하였을 것이다.
정책은 선왕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마리아를 정복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백성을
아시리아로 이주시켰다.
BC 720년에 다마스쿠스를 격파하였으며, 바빌론에서 엘람(Elam)을 분리시켰다.
센나케리브(Sennacherib: BC 705-BC 681)의 별칭은 ‘산헤립’으로 가장 유명한 왕이다.
그는 사르곤의 아들로 왕의 치세에는 끊임없는 반란으로 일생을 반란 진압을 위한 원정으로 일괄하였다.
그는 니네베를 아시리아의 새 수도로 삼아 궁전과 수도(水道)를 만들었다.
<'니느웨'의 궁전과 티그리스 강> 에사르하돈(에살 핫돈 Esar-haddon: BC 680-BC 669)는 센나케리브가 형들의 음모로 암살된 뒤
형제간 왕위 다툼의 내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BC 671년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누비아 국경까지 정복하여 가장 위대한 왕 중에 하나였다.
BC 669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재원정 도중에 죽었다.
아슈르바니팔(앗술 바니팔 Ashur-banipal: BC 668-BC 626) 그가 살던 시대의 아시리아는 그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형과 골육 전쟁을 일으켜 서아시아 전토를 동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어 국력은
현저하게 피폐되었다.
영토를 엘람에서 이집트까지 확장시켰으나, 그의 시대는 몰락기였다.
왕은 잔인하였으나, 예술, 특히 문학을 애호하고, 니네베에 대도서관을 지어 고문서를 수장(收藏)하였다.
이 자리에서 발굴된 2만여 점의 토판은 신화, 문화, 역사, 의학 등에 걸쳐 있으며, 지금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아시리아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BC 612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사르다나팔로스(Sardanapalos) 시대에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이후의 역사]바빌로니아-페르시아-알렉산더 제국-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비잔틴 제국-이스람제국-
아바스왕조- 몽골의 일 한국-오스만투르크-영국-[ 이락크 ]
앗수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였다. 아시리아 연대기에 나오는 히브리 왕은 10명이다.
오므리, 아합, 예후, 므나헴, 베가, 호세아, 웃시아,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이다.
[ 이스라엘과 관계되는 왕들 ]살만에셀 3세(BC860-825)는 샤르마네세르 3세로 그의 검은 비석에 ‘나는 이스라엘 아합 왕의 전차
2.000대와 군인 10.000명을 무찔렸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오무리의 아들(후계자), 예후의 조공인 금, 은,
금주전자, 금잔, 주석, 왕홀(王笏), 창을 나는 받았다’를 기록했다.(성경에 없음)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6-727)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로 별칭이 ‘불’이라고 부르는 왕이며,
북쪽 이스라엘을 포로로 하였다.
BC734년 이스라엘의 베가왕 때로 이것을 제1 갈릴리 포로라 한다.(이사야 7장, 왕하15 :29,)
디글랏 빌레셀 비문에 ‘오므리 땅(이스라엘) 사람들을 재산과 함께 앗수르에 끌고 왔다’라고 기록했으며,
그는 또 ‘그들의 왕 베가는 그들이 전복시켰다. 나는 호세아를 세워주었다. 그는 나에게 금 10달란트와
은 1.000달란트를 바쳤다’라고 기록하였다.
살만에셀 5세(BC 727-722)는 샬마네세르 4세로 사마리아를 포위 만하여 점령하지 못하고 죽었다.
사르곤 2세의 비문에 ‘앗수르왕…사마리아에 가서 3년을 에워쌌더니…드디어 사마리아를 취하고 사람을
잡아 앗수르에 이르러…바벨론으로부터 사람을 보내어 사마리아의 모든 성읍에 두니라’라고 기록했다.
(왕하 17:5-6, 24)
사르곤 2세(BC722-705)는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고, BC721년 이스라엘을 포로로 했다.
이는 이스라엘의왕 호세아 때로 제2 갈릴리 포로라 한다.(왕하17:24)
사르곤 2세의 비문에 ‘나는 첫 해에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포로 27.290명을 잡아왔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을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사마리아는 유대족속에서 멸시 당하고, 성전에 가지도 못하는 이방인 신세가 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요4: 7-29)
이 때에 활동한 선지자는 호세아, 이사야, 미가 이다.
산헤립(BC705-681): 가장 유명한 왕으로 예루살렘에서 천사에게 패하였다.(대하 32장)
에사르하돈(에살 핫돈, BC 681-BC 668) 비문에 ‘나는 서쪽 나라 왕 22명에게 궁전에 사용할 건축자재를
바치게 했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유대 왕 므낫세’의 이름이 있다.
아슈르바니팔(BC 668-626)은 남(유대) 왕 므낫세(BC697-BC642)를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가
BC 665년에 다시 돌려 보냈다.(대하 33 :11)
니느웨(Nineveh:니네베)
요나는 적국(敵國)인 니느웨(니네베)로 가서 그 주민들에게 경고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으로 도피하다가 항해중에 큰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제비뽑기를 제안하였다.
요나가 제비에 뽑혀 바닷속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구약성경의 인물이다.
현 이라크의 쿠윤지크 및 네비 유누스 부근으로 도시 모슬이 있으며, 성경에서는 ‘니느웨’이다.
아시리아의수도, 티그리스와 자브강 만나는 삼각지대에 있고, 넓이가 약100만평이다.
궁전이 발견되었으며, 요나의 언덕은 두 번째로 큰 언덕인데, 이름이 ‘유나’이다.
‘유나’는 ‘요나’의 토착어이다. 이 언덕의 약5만평의 넓이로 높이는 30m이다.
여기에 ‘요나’의 무덤이 있는데 너무 신성시되어 대규모의 발굴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에 의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앗수르 니느웨 성읍의문> 3. 바빌로니아(성경: 바벨론)(BC4000- BC536) [ 메소포타미아 지도 ]
명칭: 바빌론은 ‘신의 문’이 어원이다.
지역: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지명이다.
주민: 원주민은 수메르 인이다. 후에 셈족인 아카드(악키드)인 들어와 통일을 하게된다.[ 노아홍수참조 ]
역사: 역사는 고대 바빌론 시대와 신 바빌론으로 나누어 진다.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 (BC4000- BC1600경)
BC40 세기경 고대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이 통일국가 건설 하였다.
BC 2350년경 셈계 아카드인 사르곤1세(재위 BC 2350-BC 2294)가 눈부신 활동을 시작하면서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아카드왕조(또는 사르곤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아카드 왕국이 수립되면서 바빌로니아(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북반부를 아카드,
남반부를 수메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수도는 아가데였으나, 그 소재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C21 세기경 수메르인 우르나무가 제3왕조 건설하였다.
BC19 세기경 제1왕조 6대왕 함무라비가 제3왕조 평정하고 엘람서 시리아까지 대 제국건설 하였다.
중앙집권제 확립과 바빌론 성벽 쌓았고, 신전을 재 건립하였다.
운하건설하여 무역 융성하게 함으로 국력이 충실하게 되었다.
가장 위대한 함무라비(?-BC1750)왕은 법전을 반포(수사서 발견)하였고 이것을 함무라비법전이라 한다.
함무라비 시대에 대제국의 중심지로 가장 번영하였다.
BC16 세기경 히타이트인에게 멸망하였고, 후에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파괴로 유물이 적다.
마리서 발견된 점토판(토판)이 2만장 이상 발견되어 귀중한 자료이다.
(신 바빌로니아 시대) (BC 625-BC 536)
BC16 세기경 셈계(系)의 유목민으로 바빌로니아 남부에 정주한 칼데아인은 차차 세력을 신장하여
BC 625년 바빌론의 총독으로 있던 나보폴라살(제위 BC 625- BC 604)은 아시리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독립 하였으며, 바빌론을 수도로 정하였고, 그 후 메디아왕국과 연합하여
BC 612년 왕자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버지를 섭정하여, 메대(메디아) 왕 캭사레스(각사레스)와 연합하여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하여 아시리아제국을 붕괴시키고 신바빌로니아(칼데아제국)를 건국하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재위 BC 604- BC 562)을 느부갓네살 2세라고도 한다.
그는 국내 각지의 신전을 부흥시키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력의 충실을 꾀하였다.
또 수도 바빌론을 정비하여 성벽을 쌓고 그 주위에 도랑을 파고 성문을 단단히 구축하였다.
함무라비를 황금시대라고 말하며, 이때를 바빌론의 부흥시대라고 말한다.
고대 세계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한 국가이지만 단명하였다.
에빌·메로닥(BC561-BC560), 네리그릿살(BC559-BC556), 라바스·마르덕(BC556)는 단명하였다.
나보니도스(BC 555- BC 536)의 아들 벨사살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섭정하고 있는 중에
BC 536년(또는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고레스)에 멸망 하였다.
성경에는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로 되어 있으나, 세계사 연대에는 3왕이 단명하여 6년을 넘기지
못하고 독신자(篤信者)인 왕 나보니도스 때에 멸망한다.(단 5장)
신 바빌로나아 제국은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 하였다.(단 5장)
[이후의 역사]페르시아-알렉산더 제국-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비잔틴 제국-이스람제국-아바스왕조-
몽골의 일 한국-오스만투르크-영국-[ 이락크 ]
바빌론 도시
바빌로니아의 수도이고,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이다.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다. 제1왕조의 6대의 함무라비가 수도로 삼을 때에 가장번성 하였다.
아시리아 시대에도 남부 요충 지이다.
신 바빌로니아시대는 세계의 중심지이였다.
페르샤 점령 후 BC 539 년에 키루스(성경: 고레스)2세 때에 시민의 반란으로 크게 파괴 되었다.
BC 4세기 알렉산더 3세 시대에 제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쇠퇴 하였다.
에사길라의 신전애 있는 ‘지구라트’는 구약시대의 바벨탑의 원형으로 인정되고 있다.
다니엘이 살던 궁전을 살펴보면, 성 둘레는 96Km이고, 성벽 높이는 100m이며, 두께는 25m이다.
성벽사이에 400m의 수로가 있고, 250개의 초소와 100개의 놋쇠 문이 있다.
유프라테스강과 연결된 문이 25개이고, 강 밑으로 높이 4m, 폭이 5m, 지하 터널이 있다.
폭이 10m, 길이가 800m의 다리가 있으며, 모르닥(벨)과 아스달(여신: 이슈타르- 아스타르네) 신전에는
금으로 만든 황금 상의 무게는 2.25톤으로, 높이는 6m이고, 느부갓네살이 사는 궁전과 평지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 규모는 대단하여 상상하기가 힘든다.
바빌론에 있었던 *공중정원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이다.
<바벨론 도시의 모형도 피라미드 모형이 공중정원>
*공중정원(세미라미스 공중 정원-空中庭園)
BC6 세기경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만든정원으로 멀리서 보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메디아(메대) 왕국에서 시집온 ‘아미티스’는 삭막한 바벨론을 보면서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여 왕이 왕비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바닥은 가로 400(m) 세로 400(m)에 높이 15m이고 층수가 7층으로 계단식 발코니(테라스)로
정원 밑에는 서늘한 방을 만들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전체 모양은 피라미드 형이다.
층마다 꽃, 덩굴식물, 과일나무를 심어 무척 아름답게 꾸며 놓았고, 물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펌프로
마지 막 층의 옥상 물탱크까지 올려서 쓰고, 따로 필요 한곳은 물뿌리개로 주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동산 같았다고 한다.
다른 한 이야기로 러시아 역사학자가 네부카드네자르에 대한 연구서적을 발간하였다가 학자는
유배당하고 서적은 몰수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러시아에서는 황제를 차르(tzar, czar)라고하는데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czar)는 러시아 말로 ‘황제가 없다’라는 뜻이 되어 반역죄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공중 정원의 폐허에서 기름과 곡식을 정기적으로 분배받은 이름이 나열된 토판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 ‘유대의 왕, 여호야긴’의 이름이 있었다.
바벨론
신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 시대역사는 구약성서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느부갓네살과 고레스이다.
느부갓네살(BC604- BC562): 느부갓네살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로 다니엘서와 예레미아서에서 등장한다.
BC 605년 부왕 나보폴라사르의 생전에 네코(성경: 느고) 2세가 거느린 이집트군을
카르케미시(성경:갈그미스)전투에서 격파하였다.(렘45 :2)
BC605 년 남 유다 왕 여호야김 을 굴복시켰다.
BC597 년 유대 왕 여호야긴 때에 바벨론으로 끌고가 완전정복 되었다.
이 것을 제 1회 ‘바벨론 유수’라고 한다.
이 때에 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같이 끌러갔다.
BC581년 유대 마지막왕 시드기야 때에 다시 바벨론 군대가 들어오고, 포로 745명을 끌고 갔다.(렘 52:30)
이것을 제 2회 ‘바벨론 유수’이라고 한다.
그 전에 예레미야와 많은 유대인은 애굽으로 도망갔다.(렘 43장)
BC606(또는 BC597)-BC581년 사이에 이스라엘 남 유대(유다)왕국의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주민이
신(新)바빌로니아의 바벨론(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간 사건을 ‘바벨론 유수’라고 말하며,
BC538년 귀환까지의 약 반세기 기간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 [ 바벨론 포로시대 와 귀환 참조]
이 때에 끌려간 유대인을 69년 후에 바사의 고레스왕이 귀환 시켰다.
에빌·메로닥(BC561-BC560)은 성경의 에윌므로닥으로 여호야긴을 석방하여 왕과 함께 식사를 하게
하였고, 37년 동안 속국이 된 다른 왕보다 우대하였다.(왕하 25 : 27-30)
※ 구약성서에서 갈대아(칼데아)는 바벨론(바빌로니아)과 같은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4. 메디아 왕국(BC900경- BC331) [ 메소포타미아 지도 ]
이란 북서부의 있는 우르미아 호수 주위에 이란계의 파인 마다 또는 마타이족과 또 다른
지파인 아케메네스파가 있었다. 마타이족이 먼저 이동하여 세운 왕국이 메디아 왕국이다.
명칭: 메디아(성경: 메대)는 노아의 손자 즉 야벳의 셋째 아들 ‘마대’의 자손 땅의 이름에서 유래
하였다.(창10:2) 앗수르의 유대인 포로는 이곳으로 보내졌다.(왕하17:6)
지역: 이란 전 지역 이다.
주민: 이란계의 파인 마다 또는 마타이족(메디아족)이다.
역사: 아시리아 멸망 후 BC 1000년 전반 이란 고원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란계 메디아족이 세운
왕국으로 수도는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이였다.
그 기원과 민족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란민족의 파인 마다 또는 마타이족으로 우르미아 호수
남쪽에서 말을 사육한 유목민이다.
데이오케스 때에 엑바타나를 중심으로 강성해져 왕국으로 건립되었으나 그는 한 지방의 지배자에 불과하였으며 아들 프라오르테스 때는 이란의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프라오르테스 (Phraortes: 재위 BC 675-BC 653?) 참다운 통일자로 여기며, 키악사레스의 아버지이다.
키악사레스(캭사레스, 각사레스)왕(재위 BC 624-585)은 BC 612년 신 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아시리아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는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리디아 왕국과 싸워서 소아시아 동반부를 얻음으로써 서쪽은
카파도키아(성경:갑바도기아)에서 동쪽은 인더스강 근방까지에 걸친 대국을 건설하였다.
아스티아게스(재위 BC 585- 550)는 BC 54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성경:고레스) 2세에
살해됨으로써 메디아왕국은 멸망하였다.
이 종족이 현재의 쿠르드족 이 되었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공중정원과 바벨탑의 상상도>
< 큰 사진 > 5. 페르시아 제국(성경: 바사)(BC700경- BC331) [ 메소포타미아 지도 ]
명칭: ‘파르시’라는 작은 도시가 어원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 이다.
지역: 이란, 메디아(성경: 메대- 앗수르 때의 유대인 포로를 이곳에서 귀환하였다.)
주민: 이란의 한 지파인 아케메네스파 이다.
역사: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가 우르미아호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으며, 메디아왕국 속국으로 남쪽지역에 있었다.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아케메스)가 수장이 되어 왕조의 기초가 되었다.
키루스 2세(대제, 재위 BC 559-529)는 아케메네스의 현손으로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엑바타나,
현재 하마단)을 점령하였고, 소아시아와 그리스계의 도시국가들을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을 시작 하였다.
BC538년 대왕 키루스(영어:카롤레스) 2세는 바빌로니아 수도 바빌론 무혈 점령 하였으며,
유대인 해방시켜 귀국하게 하였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바빌로니아와 반대되는 것으로 주민을 귀향시키고 그들의 관습, 풍습, 종교를
간섭하지 않았고 인간적이었다.
캄(감)비세스 2세 (재위 BC 530-BC 522) 키루스 2세의 아들로 부친이 이룩하지 못한 이집트를
BC 525년 원정하여 점령하였으나 그가 이전에 살해한 아우 바르디아를 가장한 승려(僧侶)인
가우마타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왕위를 빼앗긴 것을 실의한 나머지
시리아에서 자살하였다.
가우마타는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는 7명의 동료와 함께 처형되었다.
다리우스 1세(대제, 재위 BC 522-BC 486)는 페르시아명으로 ‘다리야바우시’이다.
캄비세스 2세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선왕이
죽었으므로 귀국하여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가 이를 평정한 후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BC 518년∼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였고,
BC 492년과 BC 490년(마라톤 전쟁) 두 번의 그리스 원정에 실패 하였다.
그 후 궁전서 살해 되였으며,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숭상심도 깊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대제, 재위 BC 486-BC 465)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다.
선왕 때부터 일어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BC 483년 이후로 그리스원정(제3차 페르시아전쟁) 준비를 하여 BC 480년 봄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하자 급거 귀국하였다.
만년에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신하에게 암살당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65-BC 425)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으로 서서히 쇠퇴하였다.
다리우스 2세(재위 BC 424- BC 405)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시리아, 리디아,
메디아에 내란이 잇달았고, BC 410년 이집트를 잃었으며 치세는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는 다리우스 2세의 장자로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여
유프라테스강 이서의 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국내가 동요하고 궁정 안에서도 암살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으며,
아내와 자식이 잇달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죽었다.
다리우스 3세(재위 BC 336-BC 330)는 최후의 왕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으로 이수스 전투와
BC331년 가우가멜라(알베라) 전투에서 패하여 엑바타나로 도망쳤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추적으로
다시금 박트리아로 쫓겨갔다가 그곳의 총독에게 살해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패권은 아시아에서 서양으로 넘어갔다. 이 때 가져간 보석이 마차 50대의 분량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제국 위에 알렉산더제국이 건설되었음으로 영토는 비슷하다. [ 알렉산더제국 지도 ] [이후의 역사]
알렉산더 제국(헬레니즘 시대)-파르티아 제국-사산 왕조- [ 부이왕조] -셀주크족-일 한국(몽골)-
티무르 왕조-사파위 왕조-잔드 왕조-카자르 왕조-팔라비 왕조- 이슬람 공화국
<다리우스2세와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 *비시툰
‘신들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비시툰의 옛 이름은 베히스툰(Behistun)로 부근에 유명한 고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의 비문이 있다.
즉 다리우스 1세는 고대 메디아왕국의 수도 엑바타나와 바빌론을 연결하는 옛 가도 연변의 바위산에 있는
150m의 절벽면에 비문과 부조(浮彫)를 새기게 했다.
비문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아카드어) 등 3개 국어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리우스의 계도(系圖), 왕위 찬탈자 가우타마의 살해,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났던 반란의 진압,
아후라마즈다 신(神)에 대한 감사 등으로 되어 있다.
1837년 영국의 롤린슨이 발견하여, 고대 페르시아어의 부분을 처음으로 해독했다.
그후 이것을 기초로 해서 다른 2개 국어의 해독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는 설형문자(아카드어)의 해독사상 획기적인 업적을 끼친 사료로 로제타석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BC 1200년 무렵 고대 페르시아 종교가이며, 사상가인 조로아스터가 30세에 ‘아후라 마즈다’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포교하여 생긴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신성시하여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하는데, 사후에 시체를 새가 먹는 조장을 하며,
때로는 들개나 짐승들이 먹는다고 한다.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신으로 믿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가 가고 3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천국, 연옥, 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용해된 금속으로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악은 멸한다고 하며,
이 사상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의 일부 등 그 후 종교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알렉산더의 침입으로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으나 후에 이 종교 제사장인 사산의 손자가
사산왕조 (AD224-651)를 창시하였고, 이 왕조는 신정국가로 배화교 이론을 확립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을 ‘마고스’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점성술(占星術)이나 마술(魔術)에 정통한
사람들로 마태복음2장 원문에 ‘마고이’로 표현한 그들이 ‘마고스’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찾아간
‘동방박사’ 들이라고 한다.
다니엘도 박수장으로 동방박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며, 선배라고 할 수 있다.
‘마고이’는 메디아왕국이 망하였을 때에 엘리트들이 되었다고도 말하는 학자도 있다.
마고스는 고대 페르시아어(語)의 마구시(magush), 중세 페르시아어의 무그(mugh) 또는 마기(magi)로
그리스어의 마고스(magos)에 해당된다.
마술을 영어로 매직(magic)이라하며, 이것은 마술을 ‘마기(magi)’라 일컬었던 이들 사제들이 행하였기
때문에 마술(magic)의 어원이 되었다.
페르세폴리스 [ 메소포타미아 지도 ]
‘페르시아의 도시’가 어원이다.
BC518 다리우스1세가 장대한 도시를 건설을 시작하고 완성은 100년 후에 되었다고 한다.
여름 궁전으로 산을 깍은 후에 석조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궁전, 후궁,
보물창고 등을 만든 장대한 궁전이다.
BC330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정복 당시에 소실 되였다. 당시 오리엔트 건축미술을 집대성하였다.
기록보관소에서 점토판 2만장을 통하여 당시 상황이 밝혀졌다.
파라다이스(Paradise) 이야기
역사학자 아리안의 ‘아나바시스’에 기록된 단어로 키루스(고레스)가 만든 ‘피사가데 성’이 있고
그 주위에 ‘파라데스’가 있다고 하였다.
페르시아어로 ‘파라다이오스’의 원형으로 이 말은 ‘인간이 만든 낙원’이라는 뜻의 메대어
‘파라다이짜’이라고 한다.
그리스의 작가 크세노폰이 페르시아 왕후 귀족의 공원으로 그리스에 처음 소개하였고,
나중에는 사자(死者)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하게 지내는 서해(西海) 끝의 섬을 설명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에덴동산을 파라다이스으로 번역하였고,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가는 곳 또는
지옥에 대비된 천국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페르세폴리스> 수산궁(Shusahan) [ 엘람과 수사 지도 ]
에스더서에 나오는 수산궁은 혹은 수사(Susan)라고도 하며, 현재는 ‘슈슈(Shush)’라 한다.
다리우스 1세가 이 곳에 도읍하여 장대한 궁전을 만들고,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쌓아 크게 번영하였다.
바사의 겨울 궁전으로 아닥사스다 1세의 별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제국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이다.
BC40 세기경 엘람 민족이 거주, 신석기 문화 이 룩 하였다.
BC30 세기경 엘람 문자와 10진법 발명하였고,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BC19 세기경 고대 바벨론 시대으로 함무라비왕과 법전비(法典碑)가 유명하다.
신 바벨론이 시작 되면서
BC521- 485, 다리우스1세가 수도로 정하고 궁전을 건축하였다.
BC478, 에스더가 왕비 되었다.
AD4 세기 국왕 탄압에 대항한 그리스도교도인들은 국왕의 코끼리 군대에 짓밟혔다.
AD13 세기몽고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였다.
바사
이사야의 예언(사 13: 17)이 실현으로 바빌로니아는 망하고, 유대인의 귀환이 이루어진다고 예언되었다.
바벨론은 반(反) 기독교의 대명사로 쓰인다.
[성경과 관계되는 왕들을 살펴보면]성경의 고레스는 키루스 2세이며, 유대인에게 귀한을 명령하여 이로써 이사야 예언이 실현 되었다.
성경의 아닥사스다는 캄비세스 2세이며, 성전 건축을 중단시켰다.(에스겔 4:7,11,23)
성경의 다리오는 다리우스 1세이며, 예루살렘 성 재건의 방해를 금지할 뿐 아니라 많은 원조를 하였다.
(에스겔, 학개, 스가랴)
성경의 아하수에르왕은 크세르크세스(구셀구세스) 1세이며, 왕비는 에스더이다.
왕비가 된지 5년 후에 왕비의 4촌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로 부터 유대인을 구하고 부림절 의 기원이
되었다. 하만의 총리직은 모르드개가 차지 하였다.(에스더)
만약에 여기서 유대인이 모두 죽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시기는 길이 막혔을 것이다.
에스더는 이것을 알지 못하여지만 미리 예비하였다.
사지에서 구해낸 에스더 왕비는 지금도 유대교와 기독교도 모두에게 구원의 여인으로 추앙 받으며,
유대인들은 에스더 왕비의 남편 아하수에르 왕을 유대인들의 보호자로 존경을 한다.
성경의 아닥사스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이며, 유대인에게 매우 관대했다.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재건을 허락하였다.(에스라, 느헤미야)
1.000km 이상 떨어진 조국의 오순절에 참가하여 성령강림을 참관하였다.(행2:9)
키루스는 아시리아의 정책과는 반대로 점령지의 문화는 파괴하지 않았으며,
원하면 그들의 종교도 지킬 수도 있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이 정책에 의하여 유대인도 귀향하였고, 고레스는 귀향하는 그들을 도와주었다.
귀환 도중에 모두가 본국으로 돌아 온 것이 아니고 살기 좋은 곳에 정착하였는데,
그들이 터키나 동 유럽에 퍼진 유대인이라고 한다. [ 바벨론 포로시대와 귀환 참조 ]
<현재 이란의 수사(슈슈)에 있는 수산궁> [이란에 있는 성경의 유적지] [ 메소포타미아 지도 ]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 묘소와 바벨론 포로의 후손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묘소와 하박국 선지자 묘소가
있으며, 예수님과 관련된 것도 있다.
(다니엘 묘소)
수사는 바사(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건설한 겨울 궁전으로 하마단에서 남쪽으로 600㎞ 떨어진 곳으로
현재는 ‘슈슈(Shush)’라고 하는 곳에 있다.
이 곳을 다니엘 무덤이라고 확정한 사람은 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사위라고 한다.
3000㎡에 이르는 넓은 묘역은 AD900년께 이슬람 술탄 시절 조성되었으며,
수사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니엘(Daniel) 은 BC 597년 유대인의 귀족으로 소년 시절 니느웨 성읍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학문을 배우며, 토판을 정리하였다고 한다.(단1,2장)
그는 느부갓네살과 친구로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으나,
고관들의 질시로 두 친구와 함께 풀무불 속에 던져졌으나 무사하자,
다시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도 여호와의 가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흔히 ‘믿음의 용사’또는 ‘신의 절대적인 가호’의 상징으로 믿는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박수장(마고스의 장)이 되었다고 하며, 수사궁까지 60여년간 박수장으로 활약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니엘서 8장 2절에 보면 엘람도(道)의 수산궁이 있는 을래 강변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메시아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
참고로 엘람은 노아의 손장이며, 셈의 아들이다.(창세기 10:22, 역대상 1:17, 에스라 2:31)
가브리엘은 눅 1장 19절에 제사장 사가랴에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준 그 천사로 다니엘 이 후
처음으로 사가랴에 나타났다.
다니엘서 9장 1절에는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와 아들 다리오가 이름도 보여 기록은 다니엘이
기록하지 않고 후세에 쓰였진 것으로 보인다.
(에스더와 모르드개 묘소)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풀려나 페르시아왕국으로 넘어온 유대인 가운데 아하수헤르 왕의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 왕비와 4촌 모르드개를 기리는 묘소이다.
그의 묘소는 테헤란 동쪽 350㎞ 떨어진 고대 메대(메디아)와 바사의 수도이며, 여름궁전이 있는
엑바타나로 현재는 이란의 남부 하마단이라는 도심에 있다.
묘소는 유대교 회당 형식으로 지어진 전실과 묘실로 나뉘어져 있으며, 현재도 유대교 랍비가 관리한다.
돔 지하실에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시신이 담겨 있다는 돌 관이 보존돼 있다.
묘소에 얹혀진 돔은 7백년전 몽골 지배 때 올려졌다고 하며,
묘실로 들어가는 400㎏ 돌문은 지금도 2400년 전 모습이라 한다.
에스더를 기리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가장 많이 찾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묘소에서 20㎞ 떨어진 알반드산 계곡에는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르 왕과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 대왕을 칭송하는 글을 거대한 암벽에 새긴 베히스톤이 남아있다.
(하박국 선지자의 묘소)
묘소는 하마단 남쪽 100㎞의 투이사르칸에 있으며, 성소로 잘 가꾸어져 있다고 한다.
( 동방박사 4인 기념관)
테헤란에서 하마단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카츠빈은 800년만에 페르시아 민족이 이민족을 몰아내고
사파비왕조를 건설한 곳이다.
왕궁 유적 뒤쪽 10분 거리엔 동방박사 4인을 기리는 기념관과 모스크가 있다.
카츠빈 땅에서 별을 따라 서쪽으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했던 3인과, 출발은 같이 했으나 불행한
이웃을 돌보다 끝내 경배하지 못하고 돌아온 나머지 1명을 추모하는 기념관이다.
카츠빈은 무슬림의 주요한 기도장소이다.
여기서 역시 10분쯤 거리엔 예수가 직접 찾아와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다는,
900년 전 지어진 대형 모스크가 있다.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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