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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벧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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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 (벧전 1장)
베드로 전서 1장 주석 – 공동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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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베드로전서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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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강해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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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전서 1 장 강해 | [하루 한 장] 베드로전서1장_예수의 사도 베드로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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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베드로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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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학 – 베드로전서1장주석. 베드로전서1:1-7 산 소망과 믿음의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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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믿음의 시련(벧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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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베드로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믿음의 시련(벧전 1:1-25)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베데스다는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치료받았던 장소입니다. 치료의 기적이 나타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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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련(벧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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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강해
베드로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5월 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믿음의 시련 2장: 성도의 시련 3장: 선행에 힘쓰라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서론 베드로전서의 저자 는 사도 베드로이다(1:1). 그는 본 서신의 내용을 실루아노에게 불러주어 대서(代書)케, 아마, 번역케 하였다(5:12). 베드로후서 3:1은 베드로전서를 가장 먼저 인용한 구절이다. 폴리갑,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본 서신을 인용하였고, 이레니우스는 본 서신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전서라고 언급하였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되는데, 그들은 주로 소아시아 지방에 살았던 이방인 신자들이었다. 베드로전서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4:3, “[너희가]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본서의 저작 연대 는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보다 후이며 사도 베드로의 순교 전인 대략 주후 65년 내지 66년일 것이다. 본 서신의 특징적 주제 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다. 본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서신이다 (1:6-7; 2:18-21; 3:14, 16-17; 4:12-19; 5:8-10). 베드로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1장, 믿음의 시련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3장, 아내들과 남편들에 대한 교훈, 선행에 힘쓸 것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불 시험을 이기라 5장, 장로들과 청년들에게 주는 교훈
1장: 믿음의 시련 1-7절, 산 소망과 믿음의 시련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함과 그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주께서 친히 택하여 세우신 자들로 열두 제자들과 바울을 가리킨다(눅 6:13; 롬 1:1).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나가 전도하며 권능을 받아 병자들을 고쳤던 자들이었다(마 10:1; 막 3:14-15).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나그네들에게 편지했다. 위의 땅들은 오늘날 터어키 지역이다. 그는 2:11에서도 성도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역대상에 보면,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29:15). 베드로는 성도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말하였다. 첫째,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그런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엡 1:4-5).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다. 둘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피 뿌림을 얻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른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이다(눅 9:23; 14:26, 33).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들이다(롬 1:5).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다(롬 3:24). 셋째, 성도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것이 죄사함의 구원이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의 일차적 사역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이다. 죄인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을 밝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 이 구원을 통해 성도는 죄악된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그들에게 은혜와 평안이 더욱 많기를 기원한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평안은 죄사함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이며, 그것은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사회적 평안을 포함한다. [3-4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서로 구별되시지만,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시다. 이것이 성경이 밝히 계시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들의 거듭남(중생, 重生)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로 된 것이다. 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의 근거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즉 대리적 형벌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씻음 받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영원한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심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였다. 하나님의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도, 성령의 중생케 하심도 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의 결과이었다. 성도는 거듭남으로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멸망이었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절망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죄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산 소망인 것이다. 세상의 것들은 다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진다. 그래서 시편 102:26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말하였다. 또 이사야 40:6-7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 즉 천국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거룩하고 선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나라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롬 8:17). [5-7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앞절에 말한 천국을 가리킨다. ‘말세에 나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활하고 변화되어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다. 또 성도들은 이 놀라운 구원 곧 영광의 천국을 얻기 위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요한복음 10: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디모데후서 1:12에서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이를[이 복음을]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과 영생]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하였다(딤후 1:12). 하나님의 구원과 그 능력의 보호하심이 이와 같이 확실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며 잠깐 근심하게도 되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금의 제련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 없어질 순금도 용광로 속에서 제련함으로써 나온다. 성도들은 환난과 시험을 통하여 인격의 단련을 받아 거룩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는 인격자가 되며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행들을 많이 함으로써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을 듣고 천국과 영생의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로마서 5:3-4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영생의 백성으로 미리 아시고 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거룩케 하셨고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예수님만 믿고 성경 교훈만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는 천국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 구원의 목표는 천국과 영생이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상은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해지는 허무한 세상이며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이 세상이 그러한 까닭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다. 죄가 있는 세상에는 썩어짐과 더러움과 낡고 쇠하여짐이 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세계이다. 그 곳에는 슬픔과 눈물과 아픔과 병과 죽음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계 21:4). 모든 성도들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나타날 영원한 저 천국에 있다. 셋째로, 성도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한다. 세상은 악하고 마귀와 악령들의 시험이 많고 우리 속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늘 필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기도하며 공급받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이 많고 우리는 때때로 얼마동안 근심하기도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 또 믿음의 시련을 통해 우리의 인격은 정금보다 더 귀하게 단련을 받는다. 그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이다. 금이 용광로에서 단련되어 순금이 되듯이, 성도는 세상에서의 시련을 통해 장차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자라간다. 8-12절,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 [8-9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너희](원문)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사도 베드로가 편지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그를 사랑했으며 지금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것은 주 예수님의 증인들인 사도들의 증언들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였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6-27). 2천년 신약교회의 역사나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믿고 사랑하는 것도 사도들의 증언의 책인 신약성경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였다. 우리는 상대방의 가치를 알 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알 때, 그를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의 사랑은 교제와 대화로 표현된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때 그와 교제하고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또 사랑은 봉사와 수고로 표현된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일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헌금할 것이다. 사랑은 특히 기쁨으로 표현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주를 기뻐하였다. 찬송가 85장의 저자는 이런 찬송 가사를 썼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해 죽었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그래야 구원을 얻고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것이다. [10-11절]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은혜요 그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였던 바이었다. 또 그들 속에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가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했으므로 선지자들은 그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연구했다. 베드로가 구약 선지자들 속에 역사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므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즉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 속에 역사하실 수 있었고 또 역사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가 받으실 고난과 그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다는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53장과 시편 16편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또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때와 시기를 연구했다는 것은 다니엘 9:24-26을 예로 들 수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70×7)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異像)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重建)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7)와 육십이 이레(62×7)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성 밖에 둘러 판 못]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62×7)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0이레의 기한에 관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7)와 육십이 이레(62×7)가 지날 것이요”라는 말씀은 음력으로 69이레 즉 483년을 양력으로 환산하여(469년),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허락받았던(느 2:5-6) 느헤미야의 때 즉 바사 왕 아닥사스다 20년(느 1:1)인 주전 445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이 된다고 본다.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신약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타나셨다. 또 이 사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파한 바이었다. 또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을 보기를 원한 바이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뜻인 죄인들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을 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 특히 신적 구주이신 그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제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다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의 모든 예언을 이루셨다. 둘째로, 처음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어도 믿었고 그를 사랑했고 그를 기뻐했다. 그것은 사도들의 증거와 신약성경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기뻐한다. 셋째로,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해 죽었었고 지옥 형벌을 받을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장차 영광의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최종 목표다. 13-25절, 거룩과 사랑을 권면함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한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말은 나태하고 해이하거나 정신 없이 살지 말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바르게 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는 앞에서 말한 하늘에 간직된 기업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된 구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천국과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생을 가리킨다. 온전히 바란다는 말은 우리의 가치와 소망을 전적으로 거기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참으로 그것만 바라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6:11-12도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천국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14-16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는 또한 이전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때 좇았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더럽고 불결한 삶을 살았었으나 이제는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레 11:45). 거룩은 죄를 버리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산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며 우리는 그 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순종과 불결의 죄들만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하여 더러운 죄들을 버리고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모든 성도가 기본적으로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救贖)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은과 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 그것은 몇 억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님, 즉 의로우신 하나님 아들의 보배로운 핏값으로만 가능했다. 구원받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 [20-21절]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예정된](NASB)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정된 분이시다. 그는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바 되셨다. ‘이 말세’는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 4천년의 역사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救贖)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중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22절] 너희가 [성령으로](전통사본)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깨끗한](전통사본) 1)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되었고,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케 되었고 우리의 마음도 깨끗케 되어 거짓이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성도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된 새 계명을 주셨다. 이미 실천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23-25절] [이는](NASB, NIV)(의미상 보충)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하였음이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얻은 거듭남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되었다. 그 구원의 생명은 실제로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계속 나타난다. 모든 육체는 풀같이 쇠하고 그 모든 영광은 꽃같이 다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삶이다. 이것이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세상에 나서 일생을 사는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죄인들의 공통적인 삶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의 결과로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하는 허무한 삶인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전도서가 강조하여 교훈한 바이며 모든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 즈음에 절감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또한 그의 말씀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새 생명도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는 깨끗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인이었던 우리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 이 말씀이 곧 우리가 받았고 믿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 때 받을 은혜 곧 영광스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온전히, 간절히 소망하면서 늘 깨어 있는 생활을 하자. 셋째로, 우리는 순종하는 자식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행실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음 받았으며,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의 깨끗함을 얻었으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자.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1-3절, 순수한 말씀을 사모하라 [1-3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2)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키며,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마음 속에는 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깎아 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게,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이런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인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이러한 죄성들이 남아 있고 그들도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들은 배가 고플 때 엄마의 젖을 먹고싶어 운다. 아기는 몸이 안 좋으면 젖을 안 먹으려 하지만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는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원어( 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 )는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그것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말한 것은 이단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흥미 위주의 말들과 구별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하며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하였다(엡 4:13-16). 히브리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했다(히 5:13-14). 우리는 주 안에서 순수한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자라야 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딤후 3:16-17).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있으나 전통사본들에는 없다.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은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에는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 거듭남)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칭의는 법적인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성화(聖化)는 구원의 현재적 단계이다. 이것은 성도가 이미 얻은 의(義)를 실제로 그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12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재의 삶에서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을 실천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이것은 우리가 순수한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인격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영화(榮化)는 구원의 미래적 단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벧전 1:5).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는 확실한 미래를 가리킨다. 예정하신 자들은 다 중생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 법적인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다 영화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한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자비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옛사람에 속한 모든 종류의 악독과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 등 악들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하자. 우리는 헛된 세상 이야기들을 버리고 성화의 힘이 되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하고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자라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이루어진다. 4-10절,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4-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배척과 버림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인류의 구속자(救贖者)로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구주이심을 뜻한다고 본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신약성도들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 )은 성도들이 모여 건립되는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는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된다. ‘신령한’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지 물질적 건물이나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그들의 연합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교회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하여 벽돌 한 장이 쌓여 가는 이 건축은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 배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유여하지 못해도,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와 성화의 일을 크게 여기고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신약교회라는 이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 히에라튜마 )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영적인 제사란 우리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한다. [6-8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이 세상에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은 없고 더 귀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셨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은 영생에 이르게,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 받을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10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의 큰 은혜요 사랑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참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 바실레이오스 )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특권이 있다(히 10:19).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들은 죄와 불의와 불법이 가득하며 우상숭배적이요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경건과 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안의 나라이다. 성도들이 그 나라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보배들이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은 아무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한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귀한 특권을 가지는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행복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허무와 불행과 영원한 죽음 아래 살았던 우리가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이한 은혜와 사랑,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을 마땅히 찬송하며 말과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으나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말과 행위로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우신 산 돌이시다. 그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돌이시다. 그것은 다니엘이 본 바 세상 나라들을 부서뜨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돌이다(단 2:34-35, 44). 예수께서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1:42-44). 오늘날도 주께서는 영생의 구원의 일을 하신다. 둘째로,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권 있는 백성이 되었다.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큰 은혜를 감사하며 이 특권을 누리며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며(롬 12:1)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야 하고, 또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한다. 11-25절, 선한 사람이 되자 [11-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욕망들]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이다. 모든 영혼은 죽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판단을 받아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장차 부활할 몸이 들어가는 천국과 지옥과는 구별된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내세를 준비한다. 구원은 꼭 받아야 하며 성화도 중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혼의 거룩한 성향을 거스르는 몸의 욕망들을 제어해야 한다. 그들은 교만과 미움과 음란과 거짓 등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몸과 영 혹은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영과 영혼은 한 실체에 대한 다른 두 용어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과 전통적 개혁신학에 맞지 않는다. 성경에서 영 혹은 혼이라는 말은 분명히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된다. 몸은 물질적 실체이며 거기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없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영의 활동이다. 중생한 영 혹은 영혼은 범죄하는가? 중생한 영이 몸과 분리된 상태 즉 죽을 때에는 즉시 천국에 올라가며 그렇다면 그 영은 죄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는 살아 있는 동안 범죄한다. 그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죄이며 그것은 다 영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비록 그 자체로는 죄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몸과 결합되어 있는 동안 한 인격체로 죄를 짓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죄성은 사람의 영과 몸 중 어디에 자리를 하는가? 죄성은 사람의 몸에 자리를 하며 그러므로 성도가 죽으면 그 영은 즉시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몸에 죄성이 있다고 해서 몸을 죄악시하거나 천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화의 이치는 무엇인가? 성화는 중생한 영이 몸의 죄성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개혁신학은 중생 즉 거듭남을,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서 그 ‘지배적 성향’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범죄할 수 없는 성향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몸에 남은 죄성을 이기기 어렵다. 여기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속에 몸의 남은 죄성과의 싸움이 있지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를 이룬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몸의 죄성]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도들은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삶으로써 그들에게 바르고 선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물론,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부당하게 비방하는 일이 적지 않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려 할 때,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느 6:6).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거짓으로 교묘히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그러나 느헤미야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충성된 종들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이 되어 선을 행함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의 날에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할 것이다. [13-15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디아 톤 퀴리온 )[주님 때문에]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이는 너희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는 것이라[것이 하나님의 뜻임이니라](원문, KJV, NASB, NIV).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데서, 예컨대, 옛날에는 왕과 방백들에게, 오늘날에는 나라의 통치자들과 나라의 법에 순종하는 데서 나타난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는 주의 이름 때문에 또 세속 사회 즉 국가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고 말했다(1-2, 4, 6절).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들은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거짓말로도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지만, 성도들은 범사에 선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비난할 아무런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범사에 선해야 하고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 [16-17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존중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의 진리이며 갈라디아서의 중심 진리이기도 하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5: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다. 성도의 선한 삶은 모든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특히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위정자를 공경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이웃의 노인들과 교회의 노인들, 학교의 선생님들, 직장의 상사들, 나라의 대통령을 존경해야 함을 포함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8-20절] 사환들( 오이케타이 )[집안의 종들]아, 범사에[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친절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이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원문, KJV, NASB)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을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는 교훈이다. 또 종들은 선하고 친절한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종이 어떤 잘못을 행하여 주인에게 지적을 받고 책망을 듣고 심지어 매를 맞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므로 그때 참는 것은 칭찬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그가 선하게 행하는 데도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그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라는 말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한 양심 때문에’라는 뜻이라고 본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억하실 것이다. [21-25절] [이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우리를] 3)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전통사본) 4)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는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각오해야 할 삶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죄라는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과 같았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와 간섭, 그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11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 육신적 욕망들을 제어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구원받은 자인 우리의 말과 행동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경건하고 선한 말과 행동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님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 사회, 즉 우리나라의 통치자들과 관리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선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런 고난을 당하셨고 길 잃은 양 같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까다로운 윗사람에게도 순복해야 한다. 3장: 선행에 힘쓰라 1-7절, 아내들과 남편들에 대한 교훈 [1-2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순복하다’는 원어( 휘포탓소 )는 ‘순종하다, 복종하다’는 의미이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하였고(엡 5:22-23), 또 골로새서에서도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했다(골 3:18). 아내들이 자기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그것은 아내들의 의무이다. 거기에는 이의(異意)가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이 교훈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목적은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 즉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에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전도해서 안 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한다.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말한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자기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 하그노스 )는 ‘순결한, 거룩한’이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단정하고 순결하며 거룩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 [3-6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아내들의 선한 인격은 그들의 단장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머리를 꾸미고 금은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 엠플로케스 트리콘 )는 ‘땋은 머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머리 단장이 죄악이므로 머리 단장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머리털은 헝클어져 있는 것보다 씻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또 금은보석의 장신구들과 아름다운 옷들도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단지, 성도들은 외적 단장에 시간과 돈을 많이 쓰며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외적 단장은 가치가 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아내들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인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 헤쉬키오스 )는 ‘조용한’이라는 뜻이다. 여성도들은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해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유행하는 이 세상 풍조에 따라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거룩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런 내면적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8:12에 보면, 그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여성도들은 사라처럼 남편에게 복종하며 선하게 살아야 한다. [7절]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아내들의 의무를 교훈한 후 남편들의 의무도 교훈한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결혼은 남녀가 연합하여 한 인격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결혼의 세 가지 목적은 첫째, 남녀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며(창 2:18), 둘째, 자녀 출산을 위함이며(창 1:27-28), 셋째, 음행 방지를 위함이다(고전 7:2). 결혼에 있어서 남편의 의무는 사랑이다. 바울은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엡 5:2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이었다. 우리 속에는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선한 것이 없었다. 남편들은 그런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으로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남편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얼굴 표정과 행위는 단조로운 집안 일로 피곤한 아내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것이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더럽고 죄악된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창 2:25). 그것은 부부의 사랑을 증진시킨다.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도록 명령되었고, 그렇지 못한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 첫째,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며, 둘째,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을 들었다.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다면 옛날부터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했을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외롭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고 보호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이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부부의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선한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그리고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그들은 믿지 않는 남편도 그들의 정결하고 두려워하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게 해야 한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럴 때 믿지 않는 남편도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아내들의 선행은 특히 외적 단장이 아닌 내면적 단장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도들은 지나치게 머리를 꾸미거나 금은패물로 치장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 사치하지 말아야 하고 온유하고 조용한 내면적 덕을 소유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은 썩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일시적이고 허무한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썩지 않을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행복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남편들은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아내들과 동거하며 아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과 의무를 잘 이해해야 하며 아내들이 남편들의 갈빗대이며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하여 여겨야 한다. 또 그럴 때 남편들은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좋은 부부 관계는 신앙생활에 유익하지만, 자주 다투면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없고 해가 된다. 8-12절, 선한 마음을 가지라 [8-9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친절하며](전통사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몇 마디 권면하고 마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권면과 교훈을 좀더 계속되게 하셨다. 첫째로, 그는 우리에게 다 마음을 같이하라고 권면하였다. ‘마음을 같이하라’는 원어( 호모프론 )는 ‘생각을 같이하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교제는 생각의 일치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생각]을 같이하며.”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마음[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립보서 2:2, “마음[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생각]을 품어.” 생각이 서로 같아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있다. 생각이 서로 다르면 다투고 분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로, 그는 우리에게 서로 체휼하라고 권면하였다. ‘체휼하다’는 원어( 쉼파테스 )는 ‘같은 감정을 가지다,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다’는 뜻이다. 사람은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 감정도 중요하다. 감정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서로 사랑으로 단합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같은 감정을 가지고 다른 일에 대해 싫어하는 같은 감정을 가질 때 일치 단합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 셋째로, 그는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그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했다(고전 13:4-7). 넷째로, 그는 우리에게 남을 불쌍히 여기라고 권면하였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 유스플랑크노스 )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다’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을 볼 때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자비로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했다(엡 4:32). 다섯째로, 그는 우리에게 친절하라고 권면하였다. ‘겸손하며’라는 헬라어 본문( 타페이노프론 ) 5) 은 전통사본 (Byz) 에는 ‘친절하며’( 필로프론 )라고 되어 있다. 겸손함과 친절함은 거리가 멀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겸손하고 친절해야 한다. 여섯째로, 그는 우리에게 남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권면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주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마 5:39)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셨다(마 5:44 전통사본; 눅 6:27-28). 사도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교훈했다(롬 12:17).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 평안의 복, 또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으로 축복해야 한다. 사람이 이 구원과 영생의 복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이 복을 빌어야 한다. [10-12절]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천국의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한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을 확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한다. ‘악한 말’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들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음란하고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런 악하고 더러운 말을 그쳐야 한다. 또 우리는 입술로 궤휼 즉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셨고(21:8), 주 예수께서도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22:15).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에 화목을 구해야 한다.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목을 구해야 한다. 말에 있어서 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눈은 의인들, 곧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실제로 의롭게 살고자 애쓰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들이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그들이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하나님의 귀는 의인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의인들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게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자. 이것은 성도들이 서로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상대가 당하는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하나된 교회의 모습이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운 마음과 친절한 생각을 가지자.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상대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한다. 우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친절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고 악한 말과 거짓말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목을 구하자. 우리가 정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교훈이며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의 본분이다. 13-17절,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14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너희가 선을 본받는 자라면](전통사본) 6)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예수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가 있다.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0). 그때 우리는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그것을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하나님을](전통본문) 7)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셔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님, 즉 절대주권적 작정자와 섭리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임의로 다스리시되 사람들을 공의로 통치하시고 악인들에게 보응하시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소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확증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천국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주신 내세의 소망에 대해 간증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았을 것이며 또 지금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르게 살고 새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17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너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일 때문에](전통본문) 8)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마 12:35). 우리가 악한 것과 거짓과 음란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말과 행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으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그들의 악한 비난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3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복 있는 자이며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첫째로,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하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 핍박자들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우리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예비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은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때문이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선한 양심을 품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18-22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고난을 받으사] 9)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원어( 하팍스 a{pax )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히 7:27; 9:12, 26, 28; 10:10, 12, 14).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고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18절은 난해구절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 (RSV, NASB) 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영은 죽임을 당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 사르크스 )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영육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KJV, NIV) . 즉 본절은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성령으로](KJV, NIV)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었느니라](원문).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절의 말씀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도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타난 진리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고 심판을 120년간 유보하셨었다고 보고(창 6:3), 그 동안 노아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비교적 적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적은 수에 들기를 원하며 감히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물로 받는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바이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사도행전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히브리서 1:3, “[그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8:1,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브리서 10:12,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2:2,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한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그는 왕들 중의 왕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옛날의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오늘날 세상에서 세상의 불경건하고 음란한 풍조를 멀리하며 배격하고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복음을 위해, 그의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1-6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전통사본) 10)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무장하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성도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3:18) 우리도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무장해야 한다. 즉 우리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 로마서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죄를 만드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갈라디아서 5:16-17,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죄악된 생활을 한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삶에 이끌리고 거기에 빠져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지난날의 죄악된 삶으로 족하다. 그 죄악된 삶도 부끄러운 것뿐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의 낙을 누리며 살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죄악된 일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경고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였다(롬 8:13). 성도에게도 죄의 충동은 있으나 성도는 더 이상 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죄악된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4-5절]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성도가 세상 친구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친구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주께서는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시다. 디모데후서 4:1-2,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의인들과 악인들은 마지막 날에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마지막 날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들의 죄들을 다 직접 고백하게 될 것이다.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사람들을 따라,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현재 죽은 자들에게도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복음이 전파되었다.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 영이 영생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육체로는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죄에 대해 죽은 줄 알고 죄를 멀리하며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이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고 우리의 남은 날들을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두려워해야 한다.
7-11절, 근신, 사랑, 대접, 봉사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세상의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때가 그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가 그 끝이다. 구약성경의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지 4천년이 지난 때에 예수께서 오셨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도들은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했다.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신약시대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시대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본문은 그런 삶을 서너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일과 쾌락에 빠져 있거나 술 취하고 방탕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일들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며 우리의 부족과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이해하고 그 뜻을 행할 힘을 간구하여 얻는다. [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잠 10:12). 주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서로 용서하는 본을 보여주셨다. 사도 바울도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했다(고전 13:4, 7).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서하며 사는 것이다. [9-10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셋째로, 우리는 서로 원망하지 말고 대접해야 한다. 대접하는 것은 서로를 마음으로나 말로 너그럽게 대하며 상대가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방문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다.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것은 받을 것을 예상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냥 베푸는 것이다. 계산적이지 않게 대접하는 자는 상대가 자신을 위하지 않을 때라도 마음이 상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재능과 건강과 재물을 주셨다. 우리가 처한 가정 환경이나 사회 환경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인 양 우리 마음대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것들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유익과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드리는 심정으로 서로 봉사해야 할 것이다.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신 말씀으로 말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신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범사에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영광과 권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영원히 하나님께만 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마지막에도 “[대개=이는=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있사옴이니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힘써야 할 일에 대해 몇 가지 교훈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들과 육신의 쾌락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물과 같이 흐르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선용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을 힘쓰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고 그 뜻을 힘써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께서는 친히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또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며 우리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상대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원망하지 말고 상대를 대접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말로 서로를 향해 너그럽게 대하기를 힘쓰며 시간과 물질로 서로 섬기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과 지식, 건강과 시간, 물질을 가지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먼저 믿는 형제들을 또 힘있는 대로 모두를 섬김으로써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12-19절, 성도의 고난 [12-13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고난들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금광석을 제련하는 용광로의 불같은 고통스런 것도 있다. 용광로에 넣어진 금광석에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마침내 순금이 나오듯이, 성도들이 당하는 불시험도 성도의 죄악성과 연약성을 제거하고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며 선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불시험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성도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든지, 순수한 시련의 고난이든지 간에, 고난은 성도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은 2천년 전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들은 성도에게 남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고 의로우셨으나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는 의롭고 선하게 살지라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 마태복음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러므로 성도는 의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 줄 알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참 성도로서 그를 영접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16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으나 너희에게는 영광을 받으셨느니라](전통사본). 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이 일로](전통사본) 1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들이다. 베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위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임이 확인된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핍박하고 욕할 때 그들 위에 계신 성령도 비난하고 욕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주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그에게 영광 돌렸다. 성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다. 성도는 자기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해서는 안 된다. 즉 그는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남의 일의 참견하다가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당할 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7-18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안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 안에 섞여 있는 가라지와 염소 같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것이다. 성도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징계나 단련이 있을 뿐이다(히 12:8). 그러나 현재 성도에게 엄한 징계나 단련이 있다면,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에게 마지막 날에 내려질 심판은 얼마나 더 엄중하겠는가? 또 의인이 고난 중에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경건치 않은 죄인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1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란 앞에서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12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13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14절),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16절) 등으로 표현되었다. 성도의 고난은 아무리 불같은 시험일지라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다. 고난 중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태도는, 끝까지 선을 행하는 자로서 처신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있다. 그것은 원광을 용광로에서 제련하듯이 그들을 시련하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 속에 남아 있는 찌끼 같은 죄악된 성질들과 연약성을 제거하여 좋은 인격을 만드는 단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일 때문에 선하게 살면서도 당하는 고난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셋째로,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우선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 순금과 같이 신앙 인격의 단련을 받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그들은 고난 중에도 끝까지 선하게 살면서 자기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1-6절, 장로들과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 [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장로들’은 일반 성도들 가운데서 감독자로 선택되어 세움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증거한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었고 그의 부활의 증인이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2:32,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15,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그들은 또 주의 재림 때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었다. 모든 참된 성도들은 주의 재림 때에 그 영광에 참여할 자들이다. [2-3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13)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준비된 마음으로, 열심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본문의 장로는 목사와 장로를 다 포함한다. 신약성경에서 장로는, 장로교 헌법에 표현한 대로, 설교와 치리의 일을 맡은 목사와 치리의 일만을 맡은 장로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말했다(딤전 5:17).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다. 요한복음 21:15, “내 어린양을 먹이라.” 21:16-17,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장로의 직무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일이다. 양무리를 치는 일 즉 목양(牧羊) 혹은 목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담임목사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장로들에게도 맡겨진 일이다. 그들은 다 목양의 직무를 맡았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하게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때 다음 세 가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로, 그들은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부득이함으로’라는 원어( 아낭카스토스 )는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선한 일이라도 우리가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인 이 목양의 일을 우리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장로들은 이 직무를 억지로, 단지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수행해야 한다. 둘째는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한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봉사는 항상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과 장로들은 가능하면 교회 재정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만일 재정에 관계할 때에는 돈 계산에 있어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한다. ‘즐거운 뜻으로’라는 원어( 프로뒤모스 )는 ‘준비된 마음으로, 열심으로’라는 뜻이다. 장로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동기와 준비된 마음과 열심이 필요하다. 셋째는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교인들의 대표자가 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을 때 다른 이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가지고 권위 의식을 가지고 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덕이다. 주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교훈하셨다(마 20:25-27). 장로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목자장은 예수님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날에 그는 충성된 종들에게 영광의 상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주 예수께서 마지막 날 복음의 일꾼들과 교회 장로들에게 주실 영광은 시들지 않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현재 목사들과 장로들은 주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점들이 많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목자장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고 또 우리는 부족투성이이지만 감히 그의 상 주심을 기대하며 충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5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서로에게 순복하고](전통사본) 14)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엥콤보사스데 )[옷을 입으라](원문, KJV, NASB, NIV).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다.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하였다. 첫째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특히 젊은이들은 대체로 아직 인생의 고난들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하기 쉬운 때에 있다. 고난의 환경은 대체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양약(良藥)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움으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둘째로,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순복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21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또 빌립보서 2:3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일치단합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셋째로, 젊은이들은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은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라고 교훈하였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는 자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장로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순복할 수 있다.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그가 세우시면 세워질 것이고 그가 파하시면 파해질 것이다. 그가 높이시면 높아질 것이고 그가 낮추시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사무엘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이다. 본문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관해 교훈한다. 첫째로, 목사와 장로는 좋은 목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과 열심으로 하고,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이 교훈을 명심하고 그 교훈대로 힘써 실천하면 좋은 상을 받을 것이다. 좋은 목사들과 장로들을 둔 교회들과 양들은 참으로 복되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교인들은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좋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는 자이다.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려면 양들은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본문은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또 서로에게도 순복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모든 교인들의 의무이다. 모든 교인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순종하며 또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교만은 불순종과 거역을 만들고 멸망에 이르게 하지만, 온유와 겸손은 순종을 가져오고 영생에 이르게 한다. 양들은 목자들의 바른 교훈에 즐거이 순종하고 따르며 행해야 할 것이다.
7-14절, 하나님만 의지하라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염려거리가 항상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며 특히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날마다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모든 염려를 그에게 다 맡겨야 한다.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마귀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자이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성도들을 삼키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한다. 어떤 때는 질병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으로, 또 다른 때는 가정적, 사회적 환난으로 성도들을 시험한다.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던 시대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거나 욕심을 품거나 세상이나 돈을 사랑함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도리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검이다. 주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성경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다(마 4:4, 7, 10). [10-11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 15)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권세와 영광] 16) 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들은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부르셨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천국이며 또 거기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잠깐 고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100년의 일생 중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천국과 영생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그러므로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4:17-18).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남김 없이, 실패 없이 다 이루신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어 일하게 하셨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든든한 보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힘써 순종하자. [12절]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이것이 너희가 그 안에 굳게 선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라]. 17)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실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행 15:22; 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벧전 1:1)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다. 실루아노가 실라라면, 그는 바울의 협력자인 동시에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인물이 된 셈이다. 베드로는 또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했다. 헬라어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구절이 ‘너희가 그 안에 굳게 선’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수식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13-14절]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예수] 18)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19 )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문자 그대로 바벨론[앗수르-바벨론 지역]에 있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복음이 널리 바벨론에까지 퍼져 교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 마가에 대한 언급도 앞절에 실로아노에 대한 언급과 같이 초대교회의 같은 신앙과 같은 사랑의 교제를 나타낸다. 마가는 사도 바울에게 협력자이었고 사도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고 본절에서 ‘나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일치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다. 또 그는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맡겨야 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염려하기보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과 온 교회의 대적자이며 우는 사자같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셋째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 계획은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의 복잡한 현실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미주
1) Byz p 72 א * C vg mss syr p cop sa bo (arm) 등에 있음. 2) Byz에는 없으나, p 72 א A B C latt syr cop Clement 등에는 있음. 3) Byz vg cl syr p cop sa-ms bo Tertullian 등이 그러함. 4) Byz p 72 C geo 등이 그러함. 5) p 72 א A B C vg syr p cop sa bo (arm) Clement 등이 그러함. 6) Byz vg ms 등이 그러함. 7) Byz는 그러함. 그러나 p 72 א A B C vg syr p cop sa bo arm (geo) Clement 등은 한글개역 본문과 같음. 8) Byz א A C it vg mss syr p cop bo 등이 그러함. 9) Byz B 등에 있음. 그러나 p 72 א A C vg cl syr p cop sa bo arm Clement Cyprian 등에는 ‘죽으사’로 되어 있음. 10) Byz A (cop bo ) arm 등에 있음. 11) Byz vg ww cop sa (bo-ms) Cyprian 등에 있음. 12) Byz. 그러나 p 72 א A B latt syr cop 등은 ‘그 이름으로.’ 13) p 72 א A vg (syr p ) cop sa bo arm 등에 있으나, Byz B 등에는 없음. 14) Byz에 있으나, א A B lat syr p cop 등에는 없음. 15) Byz p 72 A vg syr (p) cop sa-ms bo arm 등에 있음. 16) Byz א vg cl cop sa bo arm 등이 그러함. 17) Byz vg cl 등이 그러함. 18) Byz א vg cl cop bo-mss arm 등에 있음. 19) Byz א vg syr p cop bo-mss arm 등에 있음.
[베드로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벧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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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베드로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늘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거듭난 사람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땅으로부터 나왔다면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는 속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겉 사람은 매일같이 후패하지만 속 사람은 매일같이 새롭게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제목: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 (벧전 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벧전 1:1~25
요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
주제: 새해에는 산 소망 가운데서 말씀으로 거듭나서 거룩한 자가 되자
올해는 성전이 정결함을 받게 되며 한반도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전망도 나오며, 77억 세계 인구가 저출산 고령화로 산업인구의 감소, 4차 산업의 발달로 로봇 개발, 인공지능, 융합 기술이 한층 속도를 내며, 경제는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으며, 군사적 도발이나 전쟁도 국지전이 에상되며, 지진이나 화산 폭발의 조짐도 어느 해 보다 많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도 날로 심각할 것이라고 합니다. 올해도 각종 질병, 환경병, 신종 불치병으로 늘 건강에 신경 쓰며 예방해야 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즉 만반의 준비를 하면 환난을 면한다는 정신으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31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wait upon)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not be weary)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not faint)” 말씀대로 하나님을 부지런히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선교지에 가보면 선교사님들이 표어로 삼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The Lord shall fight for you, and ye shall hold your peace.” (출 14:14)입니다. 모세가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따라오는 가운데 60만 대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열어주시고, 이집트 군대를 구름기둥으로 막아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라진 홍해 바다 사이로 걸어서 출애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한 해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고 우리를 대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며 승리합시다. 목회도 선교도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내가 하는 일은 기도하며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소망을 가지면 됩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물려받은 여호수아 장군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then thou shalt have good success.)” (수 1:7-8)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성공(good success)의 비결은 오직 말씀대로만 순종하고 나가면 됩니다. 새해에 우리 교회와 신학교 표어는 “산 소망이신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Let us look upon Jesus only, our lively hope!” (벧전 1:3-4)입니다. 일 년 강해설교의 표제를 올해는 “산 소망 a lively hope”으로 정합니다. 소망의 인내로 무장하여 구원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공동서신인 베드로전서 1장을 통해 산 소망이신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형제, 자매들에게 산 소망이신 예수님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심한 박해와 핍박 상황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But he that shall endure unto the end, the same shall be saved.”(마 24:13)
1. 산 소망과 믿음의 시련 (벧전 1:1~7)
1) 발신자와 수신자, 안부인사(벧전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함과 그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수제자로 봉사하였고 주님께서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막 5:37; 9:2; 14:33). 바울이 이방인들 전도와 선교를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베드로는 잃어버린 유대인들을 위해 전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디아스포라 Diaspora=“scattered”) 유대인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위의 지역들은 오늘날 터키 지역에 해당하며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대상 29:15에 보면,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조상과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증거합니다(엡 1:4-5, 11).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둘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분의 피 뿌림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따랐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미워하며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린 자들입니다(눅 9:23; 14:26, 33). 그들은 오직 주님만 따르며 그분의 말씀만 따르는 자들입니다.
셋째, 성도들은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고전 6:11, “여러분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분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과 사역은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이로써 성도는 죄악 된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심(벧전 1:3~4)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많으신 사랑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들의 거듭남(중생, 重生)은 하나님의 전적인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새 생명을 확증하고 보증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성령의 중생케 하심도 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성도는 거듭난 즉 산 소망(a lively hope)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멸망이었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절망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산 소망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집니다. 그래서 시 102:26에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인 것입니다(롬 8:17).
2016년에 개봉한 《판도라》 영화를 최근에 보게 되었습니다. 제목에 흥미가 가서 보게 되었는데, 내용은 원전 사고에 대한 것으로 흥미진진한 것으로 감동이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발전소 근로자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와 형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어가는 걸 본 후 발전소라면 치가 떨리는 주인공(강재혁)이 엄마와 형수, 어린조카와 소꿉친구 연주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 시내에 나가 장사를 시작하지만 실패하고 취업 이민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발전소에서 일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노후된 발전소에 균열이 생겨 냉각수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는데 간부들은 서둘러 근로자들을 투입시켜 냉각수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수소까지 튀어나와 폭발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부지런히 부상자들을 구출하는 중 본인도 원폭 피해자가 되어 중상을 입게 됩니다. 이미 판도라 상자는 열렸습니다. 한 가지 희망은 방사능을 막기 위해 복구 작업을 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남아 밀폐된 한 방을 폭파해야 하는데 주인공이 나서서 이 일을 맡게 됩니다. 판도라 상자에 남은 희망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도 함께 죽고 문제도 해결해서 위기를 넘긴다는 내용입니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가족들(엄마, 형수, 여자 친구)과 영상 통화한 내용이 전국에 방영되어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들에게 짙은 감동을 줍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많은 눈물이 나와 계속 손수건을 적셔야 했습니다. “겁나 슬픔… 내가 왜 죽어야 돼… 내가 뭘 잘못했어.. 흑흑..” 그리고 주인공은 폭발물의 단추를 누르고 죽음으로 원전사고가 근본 해결되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모습이 온 국민을 감동하게 한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온 인류에게 남은 희망이 되심을 연상케 한 장면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主神)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여자 인간인 판도라(Pandora)를 출생하게 했답니다. 제우스는 판도라의 출생을 축하하며 상자를 선물로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습니다. 판도라는 신 프로메테우스의 동생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상자를 열고 맙니다. 그 상자 안에는 온갖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금세 험악해지고 말았습니다. 판도라는 깜짝 놀라 급하게 상자를 닫았으나 상자 안의 나쁜 것들은 이미 전부 빠져나온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었던 희망은 빠져나가지 않아서, 사람들은 상자에서 빠져나온 악들이 자신을 괴롭혀도 희망만은 절대 잃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악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모두 정죄를 받고 둘째 사망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도라 상자 안에 있는 희망이 곧 재림하실 예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올해에는 매 순간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산 소망”이신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3) 예비하신 구원을 소망의 믿음으로 얻음(벧전 1:5~7)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5절의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 앞 절에 말한 천국을 가리킵니다. ‘말세에 나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천국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또 성도들은 이 놀라운 구원 곧 천국을 얻기 위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그 능력의 보호하심이 이와 같이 확실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며 잠깐 근심하게도 되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없어질 순금도 용광로 속에서 제련함으로써 나옵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금의 제련보다 더 귀합니다. 성도들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인격의 단련을 받아 거룩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행들을 많이 함으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잘했다’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합니다(롬 5:3-4).
2.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벧전 1:8-12)
1) 믿음의 마지막은 혼의 구원임(벧전 1:8-9)
8 예수님을 여러분들이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여러분들의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베드로가 편지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오늘날 터키)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분을 사랑하였으며, 지금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분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로 가능하였습니다(요 15:26-27).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가치를 알 때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돈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돈의 헛됨을 안다면 돈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혼의 가치를 알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알 때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교제와 대화로 표현됩니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때 그와 교제하고 대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사랑은 특히 기쁨으로 표현됩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얼굴이 예뻐진답니다. 왜냐하면 기쁨이 생겨서 그런 것입니다. 기쁨이 있는 얼굴은 예뻐 보이지만,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면 미워 보이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주님을 기뻐하였습니다. 찬송가 85장(통합도 85장)의 중세시대 경건 인물인 크레보의 버나드(1091-1153)는: “1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믿음의 목표는 혼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혼은 지정의의 영역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주셨습니다.
2) 구약의 대언자들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벧전 1:10~11)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여러분들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대언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그분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분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살피느니라.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에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분께서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으므로, 대언자들은 그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연구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대언자들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의 고난에 대해서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또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때와 시기를 연구했다는 것은 단 9:24-26에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7×70)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7×7)와 육십이 이레(62×7)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성 밖에 둘러 판 못이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62×7)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파괴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몰사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0 이레의 기한에 관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7×7)와 육십이 이레(62×7)가 지날 것이요”라는 말씀은 음력으로 69 이레 즉 483년을 양력으로 환산하여(470년),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허락받았던(느 2:5-6)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 20년(느 1:1)인 BC 502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이 된다고 봅니다.
3)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함(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여러분을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른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 대언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신약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타나신 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님을 힘입어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파한 것입니다. 또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3. 거룩과 사랑을 권면함 (벧전 1:13-25)
13절에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합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말은 나태하고 해이하거나 정신없이 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태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곧 하늘에 간직된 기업이며(4절)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가리킵니다(5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할 천국과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거기에 두어야 합니다.
14-16절에 “여러분들이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여러분의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여러분을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때 좇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본 삼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불순종적이고 불결한 삶을 살았었으나, 이제는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레 11:45).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여러분이 아버지라 부른즉 여러분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는 사람들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나그네와 같은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18-19절에 “여러분들이 알거니와 여러분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속죄 신앙 없으면 구원받는 참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본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은혜를 입은 우리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0-21절에 “그분은 창세 전부터 예정된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여러분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여러분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중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주셔서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만 한다.
22절에 “여러분들은 성령님으로 진리를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성도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다운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1장의 결론 말씀처럼 23-25절에 “여러분들이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얻은 거듭남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생명은 실제로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계속 나타납니다. 모든 육체는 풀같이 쇠하고 그 모든 영광은 꽃같이 다 떨어질 것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사 40:6~7)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 즉 천국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기도]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산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새해를 살기 원합니다. 매일 매순간 주님만을 기쁨과 소망으로 삼게 하시며 예수님 이름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대한민국을 주님의 말씀 위에 새롭게 서게 하시며,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외식하는 자여 비판하지 말라(마태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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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전서 1장 주석
베드로전서 제 1장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는 베드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 호칭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 그
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사도로서의 베드로 자신의
권위와 존엄을 나타낸다(마 16:18,19; 막 3:16; 요 1:42; 21:15-19, Blum, Stibbs).
한편 ‘베드로’는 아람어에서 ‘바위’를 의미하는 ‘케파'(* )를 헬라어로 명명한
별명이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은 ‘시므온’이었을 것이며 헬라어로는 ‘시몬’이었다
(행 15:14; 벧후 1:1).
본도, 같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본문에 언급
된 다섯 지역은 모두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터어키 타우루스 산맥
(Taurus Mountains)의 북쪽에 해당하는 로마 지역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보다 많은
지역에 그리스도인이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행 16:6-8) 본서에서 다섯 지역만 언급
되었으며 ‘본도’와 ‘비두니아’가 동일 지역에 대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두번 언급된
것에 대해 혹자는 이 편지를 소지한 실루아노(5:12)가 심방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Hort, Robertson). 즉 이 견해에 따르면 실루아노가 배를 타고 흑해를 지나 본도에
입성하여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를 거쳐 비두니아를 통과해 로마로 항해해 갔
기 때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지명이 각기 따로 언급되었으며 본서 수신자들이 사
는 지역도 이 다섯 곳만 언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추정
에 불과하며 본문에 특별히 다른 언급이 없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Michaels). 한편
‘흩어진 나그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
)에는 관사가 없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
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
들’을 의미하며 ‘파레피데모이’는 ‘어떤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의미하였기 때문
에 당시 네로 황제(A.D.54-68)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인식하였을 것이다(Stibbs). 또한 ‘나그네’라는 표현은 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니는 입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식처가 이 세상
이 아니라 하늘 나라임을 인식하고 순례하는 자임을 암시한다(Blum).
=====1:2
본절에서 베드로는 앞절에 ‘흩어진 나그네’로 지칭된 수신자들을 삼위 일체적인
신앙과 사역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 – ‘택하심을 입은 자
들'(* , 에클레크토이스)은 개역성경에는 본절에 나타나나 헬라어
본문에는 1절에서 나타난다. ‘에클레크토이스’는 1절의 ‘파레피데모이스'(*
, ‘나그네들’)와 대비된다.’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을 묘사하는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며, ‘에클레크
토이스’가 하나님 앞에서 특권을 소유한 그룹인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에서 불
이익을 당하는 그룹을 나타낸다(Michaels). 이러한 ‘에클레크토이스’는 구약성경에서
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대상 16:13; 시 105:6; 사 65:9,15)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집합적인 칭호이다(2:9; 5:13). 한편 ‘하나님 아
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
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1:20; 암 3:2; 행 2:23; 롬 8:29,30; 11:2, Cranfield, Stibbs). 이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Blum).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 ‘거룩하게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
)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된 것으로(살전4:7) 한편으로는 부르심
그 자체와 동일한 실제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여 구별됨을 시사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즉 인간의 책임을 의미한다(롬 6:19,22; 살전
4:3,4; 딤전 2:15, Michaels).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
하심에 의해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살게된다(Cranfield).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 에이
스 휘파코엔 카이 란티스몬 하이마토스 예수 크리스투). ‘휘파코엔'(*
, ‘순종함’)과 ‘란티스몬'(* , ‘피뿌림’)이 비록한 전치사
‘에이스'(* , ‘위하여’)와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예수 크리스투'(*
, ‘예수 그리스도의’)는 ‘란티스몬’에만 연결된다(Michaels).
본절에서 ‘휘파코엔’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인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하며(Blum, Cranfield, Stibbs) 혹자는 믿음의 순종(롬 1:5; 16:26) 즉 복음을 받
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Michaels, 22절).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
닌다. 복음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순종이 뒤따
라야하며 그것을 통해 성장해 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은 구약 시대의
제사 의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매개체로서(출 24:3-8; 히 9:18-21) 이 피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속함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 목회
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똑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과 베드
로 서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 문법상 바울의 인사는 ‘소원에 따른 간구’
형식으로 표현된 반면(롬 1:7; 고전 1:3; 고후 1:2) 베드로의 인사는 ‘부정과거 수동
태 회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벧후 1:2). (2) 내용상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해
목자적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간구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각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도록 간구하고 잇다(Michaels).
=====1:3
찬송하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 )는 동사
‘율로게오'(* )에서 변화된 형용사이다. 문법적으로 본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술어 동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토'(* , ‘하게 하다’)나 ‘에스
틴'(* , ‘…이다’) 혹은 ‘에이에'(* , ‘…지어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대인의 송영에서는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술어 동
사를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였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표현한 듯하다
(Robertso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
몬 예수 크리스투'(*
)에서
‘퀴리우’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다. ‘주’는 승귀된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칭호로서 초대 고회의 신앙 고백이었다(롬 10:19; 고전 12:3; 고
후 4:5; 빌 2:11, Cranfield). 성부 하나님은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시는
대상이며,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Michaels). 한편 ‘그 많으신 긍휼대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아
버지가 되시는 근원을 시사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긍휼’은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은혜'(*
, 카리스)와 등일한 의미로 사용되나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반
면에 ‘긍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동기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의…부활하심으로’의 헬라어 ‘디 아나스타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에서 ‘예수 크리스투’
의 속격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주격 소유격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를
의미한다. (2)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가 하나님이 주체로 언급되기
때문이다(Michaels). ‘아나스타세오스’는 ‘산 소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
나게 하사’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거듭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겐네사스’
(* )는 동사 ‘아나겐나오'(* )의 부정과
거 능동태 분사로 거듭남의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구체적
인 사실로 중명됨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
해 일반적으로 ‘팔링게네시아'(* )를 사용한다. 그런데 본
절에서 ‘팔링게네시아’가 아니라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
는 베드로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교의 영향을 받아 이 단어를 사용했
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당시 신비주의나 스토아 학파에서는 ‘깨달아 거듭난
삶’을 아는자를 ‘아나겐네사스’란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같
은 이유로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했다기보다는 본서에 강하게 비쳐지는 예수의 가르침
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ichaels).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거
듭나다’를 ‘겐네데 아노덴'(* )으로 표현하셨으며(요
3:3) 이것은 ‘아나겐나오’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겐네데 아노덴’에서 ‘아
노덴’이 ‘다시'(again)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의미로 사
용되든 모두 ‘아나겐나오’와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예수께서
이미 사용하신 단어를 다시 사용하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베드로
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자 했던 거듭남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
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요 3:3-8).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
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Stibbs).
산 소망이 있게하시며 – ‘산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결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새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4절의 ‘기업’이나 5절의 ‘구원’을
가리킨다(Michaels). 이 ‘산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미 마련한 것이
다(Blum).
=====1:4
석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사나니 – ‘기업’에 해당하
는 헬라어 ‘클레로노미안'(* )에 대해 혹자는 구약성경에서
는 ‘거룩하게 구별된 소유물’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현재에 이미 누리는 소유
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rt). 그러나 ‘클레로노미안’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
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 나라(마 25:34; 엡 5:5).
(2) 영생(마 19:29; 막 10:17; 눅 10:25). (3) 구원(히 1:14). (4) 약속(히 6:12).
(5) 축복(3:9). 이러한 기업은 ‘산 소망’과 연결된 것으로(3절)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
는 선물이다(Michaels, Blum). 따라서 본절의 ‘기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현재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롬 8:18; 갈 4:7) 미래에 주어질 것을 가리키
며 이때 성령은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롬
8:11,18-23; 엡 1:14, Michaels).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기업의 온전함에 대해 부정
접두어 ‘아'(* )로 시작하는 세 단어, 즉 ‘아프다르톤'(* , ‘썩지
않고’), ‘아미안톤'(* , ‘더럽지 않고’), ‘아마란톤'(*
, ‘쇠하지 아니하는’)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하게 될 ‘기업’이 지상의 것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시사한
다(Lenski, Robertson).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하늘에’는 복음서에서 ‘하늘 나라’
와 연관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특정한 말씀, 즉 마 5:12; 6:19,20; 눅 12:33과 연결된
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기업이 영원할 뿐만 아니라 전혀 손상되지 않으
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함을 시사한다(Lenski,Robertson). 한편 ‘간직하신 것이라’
의 헬라어 ‘테테레메넨'(* )은 완료시상으로 이미 하나님께
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업을 마련해 두셨음을 시사한다(Blum).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 ‘말세에’는 그리스도인
의 구원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곧 파루시아를 가리킨다(롬
8:18-25; 빌 3:20,21; 골 3:4; 요일 3:2). 파루시아 때 성취되는 ‘구원’은 앞서 언급
된 ‘산 소망'(3절), ‘기업'(4절)과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어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실현 혹은 종말론적 차원의 완성을 의미한다(Stibbs, Blum)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보호하심을 입었나
니’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 )는 ‘프루레오'(*
)의 수동태 분사 현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서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
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낸다(Stibbs,
Leighton). 종말에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
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할지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
나님의 보호하심과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누릴수 있게 된다(Michaels, Stibbs).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
라스모이스'(* )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시험으로 상위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시련(test)을 의미한다(약 1:2, Bigg, Michaels). 그런데
베드로가 언급한 ‘여러 가지 시험’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가에 대하여
혹자는 ‘포이킬로이스'(* , ‘여러 가지’)가 고전 헬라어에는 나타
나지 않고 마카비 시대와 신약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마카비 시대에 일어났
던 고난이나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멸망(A.D.70)을 예고한 듯하다고 주장한다(Selwyn,
Hor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 정확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Michaels).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개역성경에는
‘엔 호'( , ‘이 가운데’)가 생략되어 있다. ‘앤 호’는 ‘말세’를 가리키는 것으
로(5절, Michaels, Blum)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암시한다. 비록 현재에 고난을 당하
여 근심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것이며 그 후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파루시아 때에는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
업이 기다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1:7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 본절은 약 1:3과 유사
하여 혹자는 베드로가 야고보서를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obertson). 그러나
야고보와 베드로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기에 참조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1)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언
급되는 반면 본문에서는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2)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온전한 신앙에서 요구되는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본문에
서 믿음의 시련은 신앙의 최고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차이점과 같은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히나'(* )로 인도되는 목적절로
믿음의 시련을 수식하고 있다(Michaels). 베드로가 시련을 통한 믿음과 금을 비교하여
강조하는 바는 (1) 참된 믿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2) 금이 불로 연
단받듯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연단받는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강조점을 통해
고난당하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Bigg, Leighton, Michaels).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이 참된 신앙이 온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
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된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
는 종말론적 보상 혹은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다리는 온전한 ‘구원’의 모
든 것을 나타낸다(롬 2:7,10; 빌 1:11; 히 2:7,9, Michaels).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수 없
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네 – ‘보지 못하였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이돈
테스'(* )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돈테스’는 ‘호
라오'(* , ‘보다’)의 제2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분사의 부정으로는 ‘메’
(* )를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우크’가 쓰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양보적’인 의미보다 ‘사실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Robertson). 즉 본문은 ‘비록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가
아니라 ‘너희 가운데 아무도 예수를 보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사실성’을 강조한다.
(2) 혹자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친히 목격했음을 수신자들과 비교해 강조했다고 주
장한다(Selwyn). (3) 혹자는 베드로를 포함해 수신자 전체가 현재 계시하시는 예수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즉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는 수신자들을 칭찬하려고 했다.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수진자들이 비록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종말론적 보상으로 주어질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현재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받음이라’의 헬라어 ‘코미조메노이'(*
)는 ‘코미조'(*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구원이
지금도 실현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참된 믿음의 결과인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 보
상은 영원하며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에 현재 믿음을 소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어질 상급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온전히 완성되는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다(Stibbs, Blum).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에 대해 ‘영혼
의 구원'(* , 소테리안 프쉬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베드로가 ‘영’과 ‘육’을 구별하는 헬라어 이분법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쉬우나(Dihle)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콘’은 히
브리적 이해 속에서 ‘자아’나 ‘인격’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2:25; 4:19,
Dautzenberg, Selwyn). 비록 베드로가 ‘프쉬콘’을 신체적 생명으로 생각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다(Michaels).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
히 살펴서 – 본절에서 불특징인으로 나타나는 ‘선지자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베드로 당시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Selwyn). 이 견해는 본
서를 읽는 수신자들이 선지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베드로가 불특정으로 썼다
고 추측한다. (2) 혹자는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Michaels, Blum, Cranfield).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는 본절과 12절 이하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므로 유익함을 얻은 자들은 선지자들
자신이 아니라 수신자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으며 신약 시대의
선지자를 포함할 경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았기에 그것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메시야의
때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였다(눅 10:24).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상고하니라 –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선재
(先在)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Lenski). (2) 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의 영’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혹은 ‘성령’과 상
호 교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행 1:16; 2:33; 벧후 1:21)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12절; 요 15:26, Stibbs). 성령께서 예언자들로 하여금 메
시야의 때와 그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다(삼하 23:2; 눅 24:26).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하며 열심히 상고하고 예언한 것은 예언의 내용 곧 메
시야의 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언자 자신과 당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
라기보다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롬 4:23,24; 15:4; 고전
9:9,10;10:11, Blum, Stibbs, Michaels).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
한 것이요 – ‘보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탈렌티'(* )
는 수동태 분사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요 14:16,26; 갈 4:6)라고 나타내기도 하며 ‘예수 그리스
도'(요 15:26; 16:7; 행 2:33)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특정한 자로 정하기는 어렵다(Michaels). 한편 앞서 언급된 예언자들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여 전한 것을(11절) 본절에서는 ‘복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말씀을 상고하여 메시야의 고
난과 영광을 예언하였던 바와 같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성령을 힘입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즉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였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살펴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
사이'(* )는 ‘자세히 주의하여 보다’라는 의미로 잘 보기 위해 노
력하고 애쓰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하는 존재이기에
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구원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하여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계
획이 공개되고 선포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은 예수의 초기 지상 생활을 지켜
보았으며(딤전 3:16) 구속이 완성될 때에는 찬양으로 기뻐할 것이다(계 5:11-14,
Blum). 한편 베드로는 10-12절의 논의를 통해 복음의 전달 과정을 세 단계로 기술하고
있다. (1) 선지자(10절). (2) 복음전파자(12절). (3) 천사들(12절). 이러한 전달과정
을 거쳐 실현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 계획은 신실하게 성취되어 왔다(Lenski,
Cranfield).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
)는 ‘급한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
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Lenski). 예
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
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
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Michaels).
근신하여…온전히 바랄지어다(*
, 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헬라어 문법에서 부사가 ‘오스'(* )로 끝나면 앞에 있는 날말을 수식한
다는 점에 근거하여 ‘텔레이오스’가 앞에 있는 ‘네폰테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
여 ‘온전히 근신하여’로 해석한다(Michaels, Bigg). 이 경우 ‘온전히 근신하여’는 ‘인
내’를 강조한다. (2) 혹자는 일반적인 헬라어 문법으로 따질 때 동사 앞에 있는 부사
가 동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번역하며 ‘소망’을 강
조하는 것으로 본다(Selwyn, Lenski).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한다
(Blum, Stibbs).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
)는 전형적인 셈어적 표현이다(막 2:19; 눅 10:6).
특별히 셈족 언어에서 ‘자녀’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상속자’라는 뜻
으로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지닌다. (2) ‘부모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
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일 경우 누구의 자녀이냐에 따라 자녀의 인격이 결정
된다(Selwyn). 이러한 언어적 배경 속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향해 ‘불순종의 자녀’
(엡 2:2)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
서(롬 1:5; 16:26) 복음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을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
이며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그 성품을 배워가기 때문이다(Michaels).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알지 못할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아그노이아(* )에서 ‘아그노이아’는 ‘하나님
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ranfield,
Selwyn). 왜냐하면 헬라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도 하나
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이다(행 17:30; 엡 4:18).
(2)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igg).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그노이아’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행 3:14-17).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즉, 이는 이방인이었든 유대인이었
든간에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
다(Stibbs). 이러한 자는 사욕 즉 자연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Michaels, Stibbs) 충동
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 즉 욕
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려야만 한다.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거룩
한 자’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칭호로서 ‘거룩한 자’ 혹은 ‘이스
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난다(LXX 시 70:22; 77:41; 88:19; 사 1:4; 5:16; 12:6;
17:7; 29:23; 30:12,15; 31:1; 41:20; 45:11; 55:5).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
적인 완전함을 시사한다(Blum). 이러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
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2:9;
5:10).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 )는 ‘기노마이'(*
, ‘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 ‘기노마
이’의 수동태 명령형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
라는 의미이다(2: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한편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트로페'(*
)는 본서에서 ‘선한 행실'(2:12), ‘선한 양심'(3:16), ‘정결한 행위'(3:2)
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거룩’이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하나 일상적인 삶
의 행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
는 것이다(Blum, Michaels).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여기서 ‘기록하였
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 )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
(레 11:44; 19:2; 20: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
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
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
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
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 ‘아프로소폴렘프토스'(*
)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
)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
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
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마 6:9; 눅
11:2).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 6:32) ‘재판장으로 심
판하시는 분’이라고(눅 18:1-7)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
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
을 하고 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
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
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1:18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 )는 기
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롬 6:9; 고후 5:6).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
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고전 15:58; 엡 6:8,9). 이 두 가지 중 본
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
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
Blum).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망령된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
스'(* )는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가
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Blum). 더욱이 ‘망령된’의 헬라어 ‘마타
이아스'(* )는 이방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
되어 사용된다(렘 2:5; 8:19; 행 14:15; 엡 4:17). 한편 ‘구속된 것’의 헬라어 ‘엘뤼
트로데테'(* )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여기
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
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막 10:45; Lenski).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
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52
:3)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
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2)
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
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
린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 )는 세례 요한이 예수
를 가리릴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53장
에서 비롯 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
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
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
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
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
고전 5:7, Blum).
=====1:20
그는 창세 전부터가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 본절은 전형적인 비교 구문인 ‘멘…데'(* … ,’한편…또
다른 한편’)로서 베드로는 이 구문을 통해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 네 가지 사
실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게 진행되었다(Michaels). (2)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의 헬라어
‘프로에그노스메누'(* )는 완료 수동 분사로 하나님께
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했음을 시사하며, ‘나타내신 바’의 헬
라어 ‘파네로덴토스'(* )는 부정 과거 수동 분사로 그리스
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일회적으로 완전했음을 시사한다(Lenski). (3) 내용상
‘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준
다(Stibbs). (4) ‘프로에그노스메누’와 ‘파네로텐토스’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 인간
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계획을
파기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Michaels).
=====1:21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 ‘하나님을’의 헬라어 ‘에이
스 데온'(* )은 문자적으로 ‘하나님 안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
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요 1:18) 자신의 대
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켰기 때문이
다(고후 5:19, Blum, Kelly).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를 이룬 하나
님에 대해 두가지로 진술한다.
(1)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
신 분이시다. 곧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Stibbs,
Blum).
(2) 영광을 주신 –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주신것은 예
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롬 8:
17-30; 히 2:10, Stibbs).
너희 믿음과 소망이 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 호스테 텐 피스틴 휘몬
카이 엘피다 에이나이 에이스 데온) – 본문을 헬라어 구문상으로 해석할 때 두가지 견
해가 있다. (1) 혹자는 본문을 ‘의도문’으로 본다(Robertson). (2) 이유는 본절이 직
설법로 쓰였기 때문이다. 비록 ‘호스테’ 다음에 부정사가 따르면 결과로 해석하는 것
이 마땅하다할지라도 문장 전체가 명령법이 아니고 직설법일 때는 ‘의도’로 해석한다
는 주장이다. (2) 혹자는 본문을 ‘결과문’으로 본다(Robertson). 그 이유는 코이네 헬
라어에서 ‘호스테’ 다음의 부정사가 따르면 일반적으로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비록 서술적 용법일 때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문법적 규칙
이 아니기에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맥상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를 살리신 이유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로 그리스도인들을 안위하기 위함이며 그 결
과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되었기 때문에(Michael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믿음과 소망’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
다.(1) 혹자는 ‘믿음’에 ‘소망’이 종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믿음’에는 정관사가 있지만 ‘소망’에는 정관사가 없기 때
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 믿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게 한다'(Kuhl)라
고 해석해야 한다. (2) 혹자는 ‘믿음과 소망’은 병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Big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두 가지 의미를 반복적으로 기술하여 강조적 효과를 나타내며 믿음과 소망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서 배경적 설명을(3-9절) 해왔기 때문이다(Michaels, Selwyn).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
기에 이르렀으니 – ‘깨끗하게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그니코테스'(*
)는 완료 시상으로 회개로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
인에게 성취된 이러한 정결(淨潔)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 ‘진리’는 두가
지를 의미한다(Selwyn). (1) 거짓과 구별된 참됨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의 화육,
대속, 부활, 승천을 뜻한다. 본절의 ‘진리’는 후자의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며 순종함으로 깨끗하여진다. 이렇게 진리를 통해 죄로 부터 온전히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형제애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한편 ‘깨끗하게 하여’와 관련된 의
식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구약 시대의 정결 의
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igg) (2)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세례를 암시한다
고 주장한다(Blum).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비록 ‘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깨끗하게 하여’와 다음 절의 ‘거듭난’이 모두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사랑하라’의 헬라어 ‘아가페사테'(*
)는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부정 과거 시상은 과거의 행위와 뚜렷한 차이
를 나타냄과 동시에 행위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서로 반
목(反目) 상태였을지라도 회개하여 온전히 깨꿋하여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와는 달리 하
나님의 속성을 닮아 새로운 품성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
이면 행했어야 할 덕목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피차가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구
체적인 행위를 통해 서로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요일 3:14-18).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거듭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게겐네메노이(*
)는 완료 분사로 앞절의 ‘깨끗하게 하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도인의 회심된 상태를 시사한다. 한편 ‘씨’의 헬라어 ‘스포라스'(* )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주
장한다(Michaels, selwyn). (2) 혹자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lum,
Cranfield, stibbs).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 다른 곳
에서도 ‘씨’는 ‘말씀’에 비유되고 있으며(막 4;14; 눅 8:11) 문맥상 이어지는 설명에
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진술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하
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시 33:9; 사
55:10,11; 히 4:12, Stibbs).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본절은 포로로 끌려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인
사 40: 6-8의 인용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 본문을 인용하여 당시 핍박받고 흩어져
방랑하는 수신자들에게(1절) 위로될 뿐만 아니라(Blum) 모든 육체의 영광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질지라도 말씀은 영원하며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리스도
인의 구원도 영원함을 강조하고 있다(Selwyn, Stibbs, Blum).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
니라 – 본절은 사 40:8(LXX)의 인용이다. 여기서 ‘주의 말씀’의 헬라어는 ‘토 레마 퀴
리우'(* )이나 70인역에는 ‘토 레마 투 데우'(*
, ‘하나님의 말씀’)로 되어있다. 인용 과정에서 일어난 변
화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베드로 자신의 의도적인 해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Kelly). (2) 혹자는 사본상의 변화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Hort). (3) 혹자는 베드로가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용했기 때문이
라고 주장한다(Michael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토레마 퀴리우’에 나타난 속격은 이사야의 말씀처럼 ‘주격적인 속격’으로 예수의 말
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막 13:31; 눅 21:33, Michaels). 여하튼 베드로는 이러한 구
약성경의 인용을 통해서 주께서 전한 말씀인 복음이 영원토록 변치않는 말씀으로 그리
스도인들의 소망이 됨을 진술하고있다(Selw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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